박원순 유서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달라
모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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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보특보
서울시장 공보특보 이민주입니다. 아마 출입기자분들께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글일 듯 싶습니다. 경황없는 와중에 호소문을 드리는 이유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고인의 외롭고 고통스런 선택과 창졸지간에 남편과 아버지, 형제를 잃은 유가족의 비통함을 헤아려주셨으면 하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보다 강인했고 열정적으로 일해 왔던 고인이었기에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고인이 별 말씀을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묻고 생을 마감한 이상, 그에 대한 보도는 온전히 추측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인과 유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추측성 보도는 자제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고인은 평생의 삶을 사리사욕 없이 공공에 대한 헌신으로 일관해 왔지만, 정치인-행정가로의 길로 접어든 이후 줄곧 탄압과 음해에 시달려 왔습니다. 사모님과 자녀들도 공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견디기 힘든 고통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고인이 사회적 약자가 진정으로 보호받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필생의 꿈을 미완으로 남겨둔 채 떠난 상황에서, 이제 편히 보내드리면 좋겠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과 슬픔에 잠긴 유가족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지 않도록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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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근
< 고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의 장례를 마치고 >
너무나 황망한 장례의 집행위원장직을 어제 마쳤습니다. 지난 닷새가 차라리 긴 악몽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헤어나지 못할 끔찍한 가위눌림이어도 좋으니 제발 꿈속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엄존하는 현실은 급소를 찌른 비수처럼 아프게 제 마음을 파고듭니다. 그제 입관실에서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뵙고 어제 수골실에서 몇 웅큼의 재로 맞으면서, 이 비극을 담담히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고향땅 부모님 산소 곁에 만든 아주 조그맣고 야트막한 봉분이 이제 고인의 육신을 품었습니다. 고인이 걸어온 남다른 삶과 담대히 펼쳐온 큰 뜻마저 모두 그곳에 묻은 것은 아닙니다.
고인이 남긴 그대로, 고인에게 배운 그대로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입니다. 그의 공적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적 한계와 과오까지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성찰할 일입니다.
고인은 한국사회에서 변화와 정의의 선구자였고 저와 같은 후배에겐 든든한 나침반이었습니다. 또한 고인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왔고 함께 지켜야 할 공동자산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고인의 선택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으며 여전히 납득하기가 어렵고 참담하기만 합니다.
고인이 스스로를 내려놓은 이유를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정치인 중에 가깝다는 제게도 자신의 고뇌에 대해 일언반구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고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기에 스스로 목숨을 던진 것은 아닐까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고인이 홀연히 떠나면서 남긴 어려운 숙제가 많습니다. 특히 고인으로 인해 고통과 피해를 입었다는 고소인의 상처를 제대로 헤아리는 일은 급선무입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그 어떤 언급을 하는 것조차 고소인에게 또다른 상처가 되거나 유족이나 고인에게 누가 될까봐서 조심스럽습니다.
당사자인 고인으로부터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생전에 가까이 소통했던 저로서는, 고소인께서 받으신 상처에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미 제가 언급했듯이 고소인께 그 어떤 2차 피해도 없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고인을 추모하는 분이라면 이에 공감하고 협조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이제 저는 고인이 없는 세상을 마주해야 합니다. 고인의 공은 공대로 고인의 과는 과대로 껴안고 가겠습니다. 당장은 갈 길이 뚝 끊기고 가진 꿈도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고인과 큰 뜻으로 동행했던 전국의 수많은 분들이 겪는 상심은 짐작조차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은, 고인만큼이나 저도 유일하고 절실한 삶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애도와 조의로 이번 장례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고인의 죽음으로 상심과 고통을 겪은 분들께는 진심으로 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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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태영 7월 11일 오전 10:31 ·
"고 박원순 서울시장님!" 그 분과의 인연은 제가 27년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수원에서 시민운동에 나선 때로부터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장직은 제가 2010년 7월 1일 부터였고, 그 분은 2011년 10월 27일 시작했으니 제가 1년 4개월 먼저 시장을 시작한 선배(?)입니다. 그 1년 4개월간 그 분은 백팩 하나 메고, 각종 정책들을 협의하느라 제 방을 가장 자주 찾은, 가장 익숙한 손님이셨습니다. 우리시로서는 아주 고마운 일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수도 서울이라는 격을 따져, 같은 반열에서의 협약 등을 거북하게 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런 관료의 벽을 깨는 일에 항상 앞장서셨습니다. 우리시와의 문화 관광교류사업 협약,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실시, 자신의 평생 도서와 자료를 우리시 평생학습관에 기증 전시, 순천만 국정공원 동반 참여, 수원포럼 강사, 그리고 저와 함께하는 국제기구 (ICLEI)에 의장으로 참여하여 국제사회에 한국 지방정부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500인 원탁토론, 목민관 클럽, 마을재생, 생태교통, 청년정책관, 인생 이모작, 옛것 뉴트로 사업, 메르스와 코로나19 등 감염병 과잉대응 정책, 그리고 가장 최근의 '탄소중립 실천연대' 지방정부 참여 공동주관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는 닮은 정책의 경쟁자이자, 별도 설명이 필요없는 가장 훌륭한 파트너였습니다. 그 분이 없는 한국의 대표 지방정부, 서울은 연상이 잘 안됩니다. 그 분이 없는 수원의 정책이 앞으로 참 많이 외롭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됩니다. 오늘 아침엔 지난 10여년간 우리시와 함께한 그 분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았습니다. 저의 정책 선도자이자 진정한 파트너이셨던, 고 박원순 서울시장님! 벌써부터 참 많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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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 7월 10일 오전 9:13 ·
■ '책벌레' 박원순을 추억하며ㅡ
박원순 서울시장을 떠올리면 그와 함께 했던 그 많은 책들이 떠오른다. 근 20년 전, 참여정부 시절, 무슨 일로 동지 몇이랑 그의 강남 자택을 찾았다. 그것도 밤 12시가 지난 늦은 시각이었다. 지방에서 볼일을 보고 늦게 귀가한 그를 따라 아파트로 들어서면서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구에서부터 온 집안이 책으로 가득했다. 현관에서 마루로 조금 이동을 할라치면 마치 미로를 따라 이동을 하는 것 같았다. 책 많은 사람 집에 더러 가봤지만 그처럼 책이 빽빽하게 많은 집은 여태 보지 못했다.
그 뒤 안국동 인근에 있던 희망제작소 소장을 맡고 계실 때 사무실로 찾아가 뵌 적이 있다. 여기서도 사무실을 가득 채운 책에 놀랐다. 자택의 책이 주로 단행본이라면 이곳의 책은 파일박스에 담긴 서류나 보고서가 위주였다. 당시 시민운동가(당시 그는 자신을 '소셜디자이너'라고 부름)로 활동하던 시절이어서 각국의 다양한 자료를 수집해 분석, 활용하던 시절이었다. 방대한 자료를 보고 놀라워하는 내게 박스 몇 개의 자료를 꺼내 설명해주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책벌레 본성이 어디 가겠는가. 서울시장이 되어서도 매 한가지였다. 서울시장 취임 후 몇몇 지인들을 초청해 당시 덕수궁 앞 서울시청 별관에 있던 시장실 구경을 시켜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예상했던대로였다. 시장실이 아니라 무슨 대학 총장실 같았다. (박 시장과 오랜 벗이요, 동지인 정대화 상지대 총장실이 이와 비슷했다) 시장실은 앞서 두 곳과는 양상이 좀 달랐다. 단행본은 거의 없었고, 보고서보다는 계획서가 대다수였던 걸로 기억된다. 벽의 보드판에는 각종 메모쪽지와 격려글이 붙은 것도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책벌레는 좋은 책을 쓰기 십상이다. 문필가. 저술가이기도 했던 그는 역사.법률.인권.시민운동 관련 2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 중에서 두 권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국가보안법 연구>(전 3권)와 <야만시대의 기록>(전 3권)를 꼽고 싶다. (이 두 권의 책은 그가 사비를 털어 세운 역사문제연구소 산하 역사비평사에서 출간됐다) 두번 째로 꼽은 책 <야만시대의 기록>은 고문의 역사에 관한 것으로 인권변호사 시절의 경험과 풍부한 자료를 토대로 쓴 역작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 체코에 출장을 갔다가 프라하의 까를교 인근에 있던 고문박물관을 구경한 적이 있다. 언젠가 그 얘기를 들려줬더니 매우 흥미로와했던 기억이 난다.
박 시장의 비보를 접한 후 나는 그와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책들이 떠올랐다. 그 책들은 어찌 되었는지, 또 어찌 될 건지.. 인권변호사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그는 열성적인 시민운동가, 탁월한 저술가, 실천적 행정가로 한 시대를 살았다. 그도 인간일진대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어찌 한 점의 허물조차 없었을까마는 그가 평생을 바쳐서 일구고 닦고 키워낸 업적은 가감없이 그대로 평가돼야 한다. 격의없고 겸손했던 그의 인간미가 새삼 그립다.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 빗소리에 늦은 잠이 깼다. 차마 믿어지지 않고 믿고 싶지도 않다. 어찌 그런 황망한 일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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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미 7월 10일 오후 11:53 ·
서울시민이라서 좋았다.
타요버스 타는 재미도 솔솔했고 안심귀가길로도, 약자들을 돌보는 시정으로도 도시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돌봄을 느꼈다.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란 책이 나오고 실제로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될 무렵 50플러스캠퍼스가 곳곳에 생기는 걸 보며 각박한 대도시에서 나이 드는 일이 마냥 불안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이 들고 약해져도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진작에 시작된 레임덕에 서울시 공무원들은 갈수록 경직되어 갔고 완장 찬 공무원 같은 혁신센터 사람들이 더 이상 혁신 없는 혁신파크를 만들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지만, 서울시에서 ‘개발’을 걷어내고 ‘혁신’을 심어준 유일한 사람은 바로 박원순 시장이었다. 촛불정국에 광화문을 수호해준 시장,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서울시민인 것이 우쭐댈 만큼 자랑스러웠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게 붕 뜬 상태로 애도할 겨를 없는 하루를 보냈고. 퇴근길 현관을 나서자마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왈콱 쏟아졌다. 박원순 시장님이 하자센터를 방문했을 때의 생생한 기억과 소셜디자이너라며 자신을 소개했던 그 옛날 희망제작소에서의 강연에서도. 그 넘치는 자신감과 긍정의 힘을 마냥 따르고 싶었다.
가끔 전화통화로, 메시지로 일일이 안부를 챙기던 시장님 연락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나 싶어 놀랐었다. 실종 소식을 듣고 문득 내 폰에 저장되어 있는 시장님 번호를 떨리는 마음으로 눌러봤지만 전화기는 이미 꺼진 상태였고. 무엇이라도 추억하고 싶어 사진첩을 뒤적였다. 내 폰에 저장되어 있는 시장님의 사진들과 흔적들을 보니 일개 사회적 기업을 했던 내가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격이 없이 시장을 만날 수 있었구나 싶어...갈수록 몹시 그가 그립다. 이런 시장 또 있을까. 얼마나 그 직무의 무게가 무겁게 내리눌렀을까. 날카로운 비수와 정치적 공격들을 다 받아내기에 긍정의 힘으로는 모자란 날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 외로운 길의 출구를 왜곡되고 기울어진 선택이 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 모조리 당사자의 몫인 건가. 갑갑함과 미안함뿐이다. 원순씨가 없는 서울시에서, 원순씨의 철학과 함께한 6층 사람들이 모두 떠난 서울시에서 이제 어떻게 서울시민으로 살 수 있을까.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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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 7월 13일
하루 연가를 내고 그의 귀향길을 내내 함께 했다. 마음이 아프다. 허물은 허물대로 공은 공대로 평가받을 것이겠다만, 누구도 걷지 않았던 험한 길을 쉼없이 달려온 그였기에 이렇게 보내는 마음이 애통하다. 서울시장이 되기 전부터 또 서울시장이 되어 지금까지 함께 해온 일들도 많았고 뜨겁게 응원하며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처음 서울시장이 되었을 때 그가 내어놓은 메시지 <시민이 시장입니다>로 그를 기억하겠다. 좋은 시장 훌륭한 시장을 모시게 되길 학수고대 하는 대신 시민인 내가 시장이 되고 시민인 우리가 시장이 되어 우리 도시를 지키고 돌보는 게 더 빠른 길일지 모른다. 그를 보내고 마음 아파하지만 말고 그가 꿈꾼 세상을 우리 손으로 만들자. 시민이 시장이 되어. 경남 창녕군 장마면 장가2구 마을 뒷산 부모님 곁에 그를 묻고 오는 길. 원순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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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시장을 보내며/ 조희연/서울시교육감
오랜 벗 박원순이 허망하게 삶의 끈을 놓았다. 지켜온 신념의 무게에 짓눌려 고통스럽고 두려웠을 마음의 한 자락도 나누지 못하고 우리에게 회한만 남긴 채 떠나버렸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그의 쓸쓸한 마지막 뒷모습을 찍은 시시티브이(CCTV) 사진 보도를 보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 모두는 지난 30여년 동안 그가 만들어가는 길의 추종자이자 동반자였다. 그가 개척한 길에 영감을 받으며 그를 따르고 존경하고 함께하고자 했다. 이런 그가 문제적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 앞에 각자의 서사와 정치·사회적 맥락에 따라 온갖 논쟁과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이 논쟁 가운데 나는 그와 40여년을 함께하며 만들어왔고, 함께 만들고자 했던 이야기로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그는 언제나 나를 부끄럽게 하는 인물이었다. 때로 나는 “박원순의 신들메(짚신 동여매던 끈)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우리의 존경에 숨은 자학적 좌절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2000년대, 일본·미국·독일 등 유수한 나라에 3개월간 시민단체 탐방을 다녀오고 나서 각 나라의 시민단체 활동을 소개하고 벤치마킹한 사업을 소개하는 책을 3권이나 낸 그는, 교환교수로 1년을 지내고도 자료 복사만 해 오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민주주의에 관해 적잖은 책을 냈던 나이지만, 그가 어느 날 분단 체제와 반민주적 체제의 근간인 <국가보안법 연구>(이후 ‘야만시대의 기록’으로 바뀜) 책을 냈을 땐 학자로서 좌절에 가까운 부끄러움이 일었다. 6년 동안 서울시 본회의장에 나란히 앉아 바라본 그의 의회 대처 모습에서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재건축과 고층 제한 규제를 풀어달라는 한 의원의 16번에 걸친 질문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의 일관된 신념과 가치를 지키는 모습에서 말이다. 환경적 가치와 투기 반대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잠실, 강서, 서울의 곳곳에서 또 최근 그린벨트 해제 요구까지 온갖 외부의 비판에 직면하여 뚝심과 의지로 맞섰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매번 잠실을 지나며 고층 제한 해제와 재건축 허가를 요구하는—내가 본 세상에서 가장 큰—비판 현수막에 표기된 친구 이름은 늘 생경하고 마음 아팠으며 부끄러웠다.
1980년대 학술운동 초기부터 그와 함께했다. 그때 많은 학술단체들은 안정된 사무공간이 없어 전세를 전전했지만 오직 한 단체, 역사문제연구소는 지금도 번듯한 건물에서 안정적으로 작업하고 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위안부 문제, 일제 강제동원 문제, 분단사학, 식민지사학을 극복해가는 가장 선도적이고 초기적인 연구자들의 단체였다. 그때 자신의 집을 역사문제연구소에 기증함으로써 기껏 회비 내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했다. 그가 지금 무주택인 이유도 어려운 단체 후원이 먼저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리라.
참여연대 시절 그는 매일 아침 신문을 보고 10~20가지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 발상을 시민운동의 감시와 정책 속에서 실현하려고 고군분투했다. 우리는 다종다양한 그의 아이디어를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고 그럴 때면 그는 사무처장을 그만둔다며 출근 중지의 강수를 두기도 했다. 그때 간사들과 함께 박원순의 집을 찾아가 그와 다시 결의를 모아 활동을 재개했던 기억도 있다.
그가 2011년 서울시장이 된 이후 ‘10년 혁명’을 통해 이미 서울은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우리는 이미 그가 9년 동안 고투하며 만들어온 변화한 서울에서 살고 있다. 토건과 전시행정으로 점철된 시정을 시민의 삶을 위한 생활행정으로 전환시켜 시행된 각종 복지정책이 우리 삶을 보듬고 있다. 세월호와 촛불항쟁의 광장이 시민에 의해 열리며 대한민국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 그가 시민운동가로서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 진보를 아래로부터 추동했다면, 시장으로서 그것을 지원하고 정책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광야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함께 행정가의 길을 걸으며 우리가 꾸었던 꿈을 서울에서 실현해보자며 참 많은 일을 함께 하였고 앞으로도 ‘시장 박원순’과 할 일이 수없이 남아 있다. 학교와 마을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지속가능한 도시로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정책을 만들었다. 마을혁신·교육혁신의 길을 이어가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모든 약속을 뒤로하고 그는 홀연히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인권, 환경, 역사정의, 투명성, 시민사회의 가치는 여전히 지켜져야 한다. 소셜디자이너이자 서울시장이었던 박원순의 이상은 시민사회로부터 출발하여 서울이라는 대한민국 행정의 중심에까지 확산되었다. 그의 진보적 가치와 정책을, 대한민국 중앙정부의 가치와 정책으로까지 비상시키는 그의 비전은 중단되었지만, 이 역시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이고, 좌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로운 기대로 전진해야 한다. 나는 오랜 벗이자, 40년을 같이해온 동지로서, 형언할 수 없는 마음으로 모든 정념을 다해 내 친구를 애도한다. 부디 이 절절한 애도가 피해 호소인에 대한 비난이나 2차 가해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고인은 과거 각종 인권 사건을 변론하면서 “늘 피해자의 편에 서고 그 어려움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해왔다. 이런 그를 이해한다면 더 이상 피해 호소인의 신상 털기와 비난을 멈춰주길 바란다.
나 또한 충격 속에서 그가 남긴 또 다른 숙제를 생각하며 끙끙대고 있다. 1995년 서울대 신교수 사건,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집요하게 변론하며 전환적 판결을 이끌어냈던 인권변호사로서의 모습과 그와 상반되는 또 다른 모습이 한 인간에 공존한다는 모순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나는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각종 사회진보운동에 그래도 가까이 있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보면서 내가 늘 ‘죽일 놈과 좋은 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인식틀에서 세상과 사람을 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반문을 했다. ‘인간의 허물의 무게와 죽음의 무게를 비교하고 분리해서 저울질할 수 있는 능력’을 신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탓하면서도 그의 죽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난제이다.
너무도 비통하지만 이제 그는 없다. 그의 부재로 갈등이 더욱 불거졌지만 생전 그의 바람대로 피해자에게 비난이 더 이상 향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만 서로의 위치에서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를 소망한다. 나는 박원순의 허물에 대한 새로운 각성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이 그에게 빚진 그동안의 헌신과 희생을 떠올리며 절절히 마음 깊이 애도한다. 그리고 박원순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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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경 7월 10일 오후 2:03 ·
[ 원순씨의 하얀 런닝셔츠 ]
몇년전 우리아파트는 입주자대표회의 임원들이 주민들의 동의를 허위로 받아 구청에서 공사허가를 받은후, 공사시공업체와 커미션을 주고 받고, 전체 공사비중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수억원을 공사시공업체에 주었다. 또 부실공사가 예견되는등등 우리아파트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때 입주민들은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 시의원,구의원 그리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단톡방에 초대하였다. (국회의원은 초대 거절했고 그 인간 이번에 낙선!)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단톡방은 열기를 띠었고 그때 박원순 시장님이 들어왔다. 우린 진짜 박시장님이 맞냐? 어떻게 믿냐? 맞는지 인증샷을 보내라고 했다. 그러자 박시장은 불평한마디 없이 곧바로 사진 한장을 찍어 보냈다. 햐얀런닝셔츠에 피곤이 뚝뚝 묻어 있는 얼굴에 머리숱이 없는 박원순시장이 맞았다. (그 사진을 보고 어찌나 미안했는지... ) 그리고나서 박시장은 바로 우리 입주민들과 톡을 함께 했고 그후 서울시와 우리구청 해당부서에 서울시 아파트조례에 따라 원칙대로 일을 진행하도록 지시를 내려주셨다. 물론 우리아파트 일은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안면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를 단톡방에 초대해놓고 초대받은 자신을 믿지 못해 인증샷 보내라는 예의없는 요구를 했음에도 선뜻 인증샷을 보낸 친절한 원순씨, 시민들의 민원을 들어주고 해결해 준 서울시장 박원순은 더 이상 이세상에 없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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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7월 11일 오후 7:40 ·
옛 말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지하철을 타니, 벽에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서울형주택바우처를 알려주고 있다. 박원순은 모든 정책의 최우선을 못가진자, 무주택자, 저소득층, 청년, 약자 지원에 맞췄다. 지금도 다른 시장 때 같으면 당연히 거대한 주상복합이 들어설만한 주요 역세권에(강남, 용산 등의 요지들에까지) 초대형 청년주택이 지어지고 있다. 그런 지원은 받은 사람들만이 알고, 다수는 모를 수 있지만, 그게 바로 이 사회, 서울의 누수와 침수를 막는 최후의 보루였음을. 자식 과 형제도 모르쇠 하는 걸 박원순은 거울에 얼어 죽지 않는지, 굶어죽지는 않는지, 한몸 누일 곳도 없는지, 집세는 있는지 부모처럼 오누이 이상 살폈다. 참 촘촘하게도 챙겼다. 시장의 눈이 저소득층, 소외된 자들, 희망 잃은 청년들에 가있으니, 옛날 같으면 부자, 권력자, 지역 유지의 입맛에 맞췄을 간부들, 공무원들도 모두 거기에 주파수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가 떠나간 뒤에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아. 박원순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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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식 7월 10일 오후 12:18 ·
<정치인과 예배>
2017년 11월 19일, 추수감사주일에 박원순 시장이 우리교회(당시 높은뜻 정의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이미 며칠 전 비서진으로부터 예배참석에 대한 문의가 있었다. 시장께서 예배에 참석하려 하는데 두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교인들에게 절대 인사시키지 말아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지 마시라는 것이었다. 그냥 교인들이 모르게 조용히 예배에 참석했다가 돌아가겠다는...목회를 하는 동안 여러 정치인들이 교회를 방문했었지만 이런 요청은 처음이었다. 대개는 인사할 시간을 달라든지 인사를 시켜 달라 해서 정치하는 분들이 예배에 오는 것이 달갑지는 않은데, 그날은 기분 좋게 승낙을 하면서 오히려 내가 조건을 하나 달았다. 그것은 인사는 절대 안 시켜줄 테니 예배가 끝나고 잠시 담임목사 방에서 차는 한 잔 하고 가시라는.... 그래도 손님인데 식사는 못해도 차는 한 잔 대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날 추수감사주일에 나는 <계급자살>에 대한 설교를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신 것이 "계급자살"인데, 우리가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우리도 할 수 있는 대로 힘껏 내려놓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설교했다. 워낙에 강한 내용이어서 지금도 또렷이 기억을 한다. 예배 후 박원순 시장님과의 대화는 자연히 설교 내용이 되었고 시장님께서는 자신은 내려놓을 것이 "자리"밖에 없는데, 목사님이 오늘 자신을 힘들게 했다며 낮아지기 위해 애쓰며 살겠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차 한 잔의 시간은 다음 예배시간까지 길어졌다. 그 날 박원순 시장님의 말은 그냥 립써비스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와 사진도 잘 찍지 않는다. 그 대상이 힘 있는 사람이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 날 비서관이 찍어 후에 내게 보내준 이 사진도 누구에게 보여준 적도 없이 내 핸드폰 안에서 3년 가까이 묵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사진을 세상으로 좀 꺼내고 싶어졌다. 아니,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꺼내지 못할 것 같다. 교회 예배에 참석하면서 교인들 모르게 조용히 다녀가겠다는 시장, 교인들에게 절대 인사시키지 말아달라고 오히려 요청을 한 거물 정치인이 아직도 내 마음에는 신선하게 남아있다. 오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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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7월 10일 오후 1:56 ·
박원순 시장은 서울시민대학(현 서울자유시민대학) 설립자이기도 하다. 나 또한 그의 뜻에 공감하여 여러 해 동안 운영위원으로 활동해 왔다.
박원순 시장이 시민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했던 까닭은, 깨어있는 시민이라야 바람직한 공동체를 가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물질적 삶을 개선하는 데 골몰했지만 그는 당장의 요구에 영합하기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배부른 자가 던져주는 빵이 아니라 영혼을 일깨우는 정신의 양식을 원했던 것이다.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신부는 장발장에게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했지만 그것이 장발장을 일깨우지는 못했다. 장발장이 깨우친 것은 미리엘 신부가 경찰에 붙잡힌 자신의 죄를 용서했을 때이다. 결국 장발장이 받은 것은 빵이 아니라 영혼의 일깨움이었던 것이다.
나는 박원순 시장 또한 그런 영혼을 가졌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자신에게 영혼이 없는 자는 다른 이의 영혼을 보지도 듣지도 일깨우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과오로 인해 더렵혀졌을지라도 그 영혼 자체는 언제나 밝게 빛났을 것이다. 슬프게도 그 영혼이 그를 죽음 앞으로 나아가게 한 듯하다.
나는 그가 남긴 유서를 글자 그대로 믿는다. 그는 모두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왜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가 떠나고 없는 지금, 나는 그게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이 밝혀지면 나는 그를 가해자로 기억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지난 삶을 지우거나 영혼까지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슬픔이 너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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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석 7월 11일 오후 7:14 ·
[박원순에 대하여]
나의 존경하는 친구 박원순은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강렬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그냥 내 얘기를 써보겠습니다.
1.
어제 오늘 키보드를 두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멍하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2015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이렇진 않았습니다. 밖에 나가 걷다가 집안에선 서성거릴 뿐,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박원순에 대한 뉴스를 검색하다가 아연실색했습니다. 어떤 것도 사실로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박원순의 전 비서가 성추행과 관련한 고소장을 제출했고 경찰은 고소인 조사를 했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몰상식한 사람들이 고소사건이 죽음의 인과관계인양 몰아가고 있습니다. 한 인간의 죽음은 그와 관련된 세계의 모든 것을 무화(無化)시킵니다. 그와 연계고리를 갖지 않은 사람들은 침묵해야 합니다. 오로지 애도(哀悼)의 마음을 가질 뿐입니다. 출생신고서의 잉크도 마르지 않은 정의당 애들이 가해자니, 피해자니, 2차 피해니, 3차 가해니, 조문을 하니 마니, 어쩌구저쩌구 떠드는 것을 보면서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낍니다. 누가 가해자이며 누가 피해자인지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항상 뒤바뀔 수 있습니다.(왜 그런지는 다음 기회에 설명할 예정임) 일베수준의 애들이 정의당이라는 이상한 정당을 통해 국회로 진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얘네들 진짜 조심해야 합니다. 왼쪽 깜박이 키고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자동차보다 더 위험한 얘들입니다. 노회찬 이후 정의당은 사라졌습니다. 박원순이 나에게 끼친 강렬한 영향 때문에 허전한 마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미치광이 같은 정의당 애들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2.
기업에서 실무를 하던 2004년 가을쯤이었을 겁니다. 느닷없이 <아름다운 가게>의 박원순이 나를 찾아 왔다고 비서가 메모지를 들여보냈습니다. 마침 몇몇 임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잠시 중단하고 접견실로 모시도록 했습니다. 박원순은, 당시 내 옆방에서 일하던 황 부사장(지금은 중견기업의 부회장 겸 대표)을 찾아와서 시민운동을 조금 도우라는 얘기를 한 모양입니다. 두 사람은 경기고 동기동창이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를 소개해 주었다는 겁니다. 내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시민운동을 도울 수 있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고 나를 꼭 보고 가라고 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쑥 들렀다는 겁니다. 박원순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점심시간까지 오줌 누러갈 시간도 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내 직무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찾아온 사람을 문전박대할 수는 없어 명함을 주고받은 후, 내가 지금은 곤란하니 시간과 장소를 잡자고 했습니다. 프라자호텔에서 조찬하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당분간은 내가 회사일을 조금 더 해야 하기 때문에 시민운동을 할 수는 없고, 내 처지에서 도울 수 있는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 후 5년이 지났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그러니까 2009년 6월에 쓴 블로그의 글("나의 삶을 부끄럽게 만든 남자_박원순 변호사")에서 세번째 문단 "오래 전 실무에 있을 때 <아름다운가게>에 끌려 나갔습니다."라는 말은 바로 이때를 말하는 겁니다.
3.
박원순이 <희망제작소>를 할 때도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그는 정말 열정적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시민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강렬한 삶의 모습에서 감동했습니다. 나는 기업을 떠나 2009년 가을학기부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박원순은 어느날 갑자기 서울시장이 되더니 시민사회가 기대했던 대로 서울을 인간중심적인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아이디어뱅크였습니다. 시민참여옴부즈만 제도를 만들어 서울시의 모든 계약업무에 시민옴부즈만이 입회와 감시업무를 하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나에게 전화하더니, 느닷없이 봉사를 좀 했으면 좋겠다고해서 몇년간 시민옴부즈만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열정에 벽돌 한 장이라도 놓아줘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4.
박원순은 언제나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원하는 성과와 성취를 향하여 주변을 휘몰아치는 방식으로 열정을 불사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최근에는 대선을 준비하면서 나에게 전화하더니,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박원순은 이미 조직을 만들어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젊은 학자들이 대거 참여해서 연구보고서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작년 11월에는 원로그룹을 시장공관에 초대해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고 자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평소 박원순의 행정과 정치에 대해 솔직하게 평가했습니다. 쓴소리를 좀 했다는 말입니다. 박원순이라는 브랜드는 행정의 달인처럼 각인되는 점이 있지만, 정치력은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어서 지지도를 높이지 못하고 있다. 정치력은 시민적 의제를 선점(agenda setting)하는 게 핵심인데, 그걸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차기 대선에는 기본소득(basic income)이 핵심이슈가 될 것이니 잘 생각해보라고 했지만, 참모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기본소득'보다는 '전국민고용보험' 이슈로 정한 것 같았습니다. 그후 몇 차례 통화를 했는데도, 별반 나아지는 것은 없어보였습니다. 시민들이 원하는 올바른 의제를 선점하는 것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으로 자문하고 싶었지만, 젊은 보좌관들과 교수들, 그리고 자문역들이 수두룩 한데 뭐 하러 나까지 나서겠나 싶어서 그만두었습니다.
5.
나는 언제나 내 한 몸 추스리기에도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국가가 책임져 주지 않는 내 가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일에 바빴습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습니다. 은퇴 후에는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세상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내 성향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박원순은 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사회발전을 위해 바쳤습니다. 가족을 포기하다시피 했습니다. 지금 박원순의 장례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박원순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박원순은 자신의 흠결과 단점을 충분히 성찰했기에 우리 사회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점 또한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미련없이 죽음을 택했을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특징입니다. 나는 소심했고, 그는 위대했습니다. 노무현도, 노회찬도 그랬습니다. 위대한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해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침묵하는 것이 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6.
박원순이 없었다면, 그가 서울시장이 아니었다면, 이명박과 박근혜의 광란을 우리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래서 박원순의 죽음은 애도만으로 끝나서는 안 될 역사적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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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권 7월 13일
아, 박원순!
가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유튜브를 보며 추도사를 올립니다. 사건 다음날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가볼 수도 있었는데 탈핵시위에 온 동료들과 같은 차를 타고 함께 내려가야 했기에 멀어져가는 차속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오늘 영결식에서 홍남순 시민께서 당신과의 추억을 더듬으며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 “당신은 이미 충분했습니다!” 였습니다. 듣고 나서 생각하니 이보다 더 당신의 운명을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싶네요. 박원순, 당신은 서울시장을 하기 위해 이 땅에 나셨고, 그 일을 충분히 하시고 떠났습니다. 이럴 때 영어로 하는 말이 있지요. “That’s it.” 그뿐입니다. 더 이상의 사족도 장황한 조사도 필요 없습니다.
정치인으로서 당신이 대권을 꿈꿔 온 것을 압니다. 잘 나가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꿈을 꾸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서울시장을 잘, 그것도 충분히 해내신 것으로 만족하신 것 같습니다. 당신의 갑작스런 죽음이 말해줍니다. 적어도 거대도시의 시장에 관한 한 당신은 역대 ‘넘버 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천만 이상의 도시를 이렇게 바꾸어놓을 만한 사람이 지구상에 박원순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내가 1998년 광복절 특사로 무기수의 멍에를 벗고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만난 사회 유명인사였습니다.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해 인권변호사인 당신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였지요. 그 뒤로 이런저런 사회운동의 동선에서 간헐적으로 만나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3년전 영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 잊히지 않네요. 무슨 ‘청춘콘서트’인가 행사를 마치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였습니다. 앞자리에 앉은 내게 근황을 묻기에 영광 산속에 한국형 슈마허 대학(Schumacher College)을 만들 거라고 얘기했지요. 그러자 바로 휴대폰을 꺼내더니 뭐라 뭐라 적더군요. 나는 기억하기 위해 메모하는 줄 알았는데 당신이 속한 카톡방에 “황대권씨가 영광에 슈마허 대학을 만든다고 합니다”라고 써서는 자랑하듯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놀랐습니다. 역시 첨단거대도시를 호령하는 정치인이라 순발력이 장난 아니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박 시장의 광고 때문에라도 꼼짝없이 그 일을 해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박 시장님, 당신은 내게 빚진 것을 기억하고 있나요? ‘서울에너지공사’ 창립기념식장에 원전 5개 지역 주민대표를 초청하여 간담회를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울시의 원전 하나 줄이기 운동은 지역에서 열심히 탈핵운동을 해준 여러분의 공이 크다. 그래서 여러분께 보답하기 위해 상생자금 100억을 모아 여러분이 지역을 위해 좋은 일을 할 때 지원해주겠다.”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열심히 준비했는데....
박원순, 나는 일과 관련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 직접 소통하면서 긍정적 에너지를 발산한 인간을 알지 못합니다. 정치인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 악수를 나눌 수는 있겠지만 만남이 곧 일이 되는 관계를 만든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는 전라도 산골에 살면서 “아, 저 양반이 시골이나 지방도시에 자리 잡고 일을 해야 나라 균형이 제대로 잡힐 텐데, 서울에서 무슨 마을공동체란 말인가?” 하며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박원순 시장님, 당신은 타고난 능력과 열정을 거대도시 서울에 남김없이 쏟고 갔습니다. 서울시민들은 두고두고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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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 7월 12일 오전 8:07 ·
배반
1.
막연하게 알고 지내던 사이를 넘어 그와 함께 구체적인 일을 하기로 한 것은 2006년 이른 봄이었다. 인사동의 한 찻집 앞에 잔설이 희끗 희끗 했다. 행담도 재판 1심의 무죄를 받고 나서야 나는 세상에 나가기로 했다. 모든 게 힘들고 어색했다. 당시 박시장은 참여연대 일을 그만 두고 새로운 시민사회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희망제작소” 여는 일을 같이 하기로 했다. 기사연 때부터 잘 알던 윤석인 소장 옆에 책상도 생겼다.
“아마 가시면 두 분 사이는 아주 심각해질 거에요”. 내가 “박시장과 일을 하면 어떨까?”라고 몇 명에게 자문을 구했을 때 참여연대 처장 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거의 정반대의 스타일이다. 한 사람은 심각하게 부지런하고 한 사람은 한 없이 게으르다. 한 사람은 지나치게 세심하고 한 사람은 둔감하기 이를 데 없다. 한 사람은 외국 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새로 얻은 영감을 책 한권으로 만들 정도지만, 다른 한 사람은 관련 논문 하나도 채 읽지 못한다. 어쩌면 보완이 될지도 모르고, 범생이인 나는 그의 속도에 맞추려고 했을 것이었다. 정신없이 바쁘다 보면 여전했던 우울증을 고칠 수 있을 지도...
하지만 난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부터(월급을 받은 기억이 없다) 희망제작소에 가지 않았다. 정식으로 퇴사한 것도 아닌 채로... 20년 지기 친구가 “약속을 절대로 지켜야 한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는데 난 아무 말도 없이 배반을 했다. 실은 신경도 쓰지 못했다.
"한미 FTA"가 터진 것이다. 한 신생 매체와 가볍게 한 인터뷰가 조선일보 등에 대서특필 됐고, 두달이 지나지 않아 난 한미 FTA 투쟁 맨 앞에 서 있었다. 또 다시 쏟아지는 비난, 그리고 우울증도 함께였다(그 이후 전국을 쏘다니면서 우울증은 없어졌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의 병사는 우울할 틈이 없다는 걸 그 때 깨달았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배반이 두드러졌지만, 그 이면에 또 하나의 배반이 있었다. 세월이 지나 사회적경제를 위해서, 또 사적으로도 같이 만나고 일했지만 아마 그는 나를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주지하다시피 한미 FTA 비준은 2015년에 이뤄졌으니 참으로 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싸움의 절정은 2007년이었고, 체결 뒤에 비준까지 8년이 흐른 것이다. 싸움을 위해 조직이 필요했던 난 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그리고 대선에 패배했다.
“협동의 경제학”(2013)을 쓴 직접적 계기는 최정규교수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2009)이었다. 막연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회적경제(당시 내 머리 속은 “시장과 국가를 어떻게 동시에 넘어설까”, 특히 FTA의 경제만능주의, 나아가서 경제학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시끄러웠다)의 이론적 기초를 찾았고, 2013년에 이수연의 도움으로(정확히 말하면 그가 없었으면 이 책의 내용은 내 머리 어딘가에 쳐박혀 있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책을 펴냈다.
박시장의 당선은 추상적인 이론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만들어내는 계기가 됐다. 서울시 사회적경제센터에서 새사연에 의뢰한 “서울시 사회적경제 5개년 계획”이 그것이다. 박시장이 직접 참고하지는 않았겠지만 사경센터와 서울시 사회적경제과를 통해 사회적경제의 원리와 발전 방향, 4개의 인프라 등은 정책에 반영됐다. 그로부터 6년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23개에(강남의 두 구에도 그 동안 생겨났을지 모른다) 사회적경제 네트워크가 생겼고, 여전히 시재정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지만 아래서부터의 힘이 이렇게 조직된 것은 전 세계 사회적경제의 역사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박시장의 여러 업적 중 서울시의 사회적경제는 꽤 빛나는 부분일 것이다.
사족 1. 2016년 몬트리올 GSEF 자리에서 그는 “스티글리츠 연구소”를 만들자고 했다. 시장이 거시 정책에 관심을 가지는 건 대통령이 되겠다는 얘기였다.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의 창립을 처음부터 지켜 본 그에게, 시장이 전면에 나서서 또 하나의 연구소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연구원에 맡긴 이 일은 유야무야되었다(연구원 내에 센터로 만드는 구상으로 축소됐는데, 그 이후 어찌 됐는지,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사족 2. 서울시 사회적경제 관련자들이 따로 추모식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이와는 별도로 차여사도 마스크에 선글라스 끼고 살짝 갔다 오라고 권했다. 하지만 몸이 거부한다. 추모식 참석 대신에 이른 아침 이 글을 쓴다.
사족3. 공통점도 있긴 하다. 책상 위가 정말 어지럽다는 것이다. 그래도 차이가 난다. 난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이거 다 찾을 수 있으세요?", "그럼요. 나름 질서가 있는 거에요"
아이패드를 쓴 이후 내 책상 위에는 종이가 없어졌다.
(아.. 딱히 박시장에 대해서만 그런 건 아니다. 노대통령 때는 바로 다음 날 외국으로 떠나야 했고, 노회찬의원 때는 한 시간 남짓, 김종철 선생 때는 정말 1분만 식장에 머물렀다. 이번엔 못 가겠다는 차이 정도만... 한 심리학자 말대로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일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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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gan Kim 7월 11일 오전 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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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살아남은 자들의 무지함과 오만함이 또다시 만연하고 있습니다. '잘못이 없다면 왜 자살을 했겠느냐' '살아서 해명하지 않고 죽음으로 답을 해서는 안 되었다' '속죄의 의미로 어쩔 수 없는 선택 같아 마음 아프다' '(마지막 남긴 말에)꼭 필요한 말이 없다, 애도를 접는다' 도무지 살면서 한 번도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되는 다행스런 삶을 살아오신 분들인 듯합니다. 그러나 개개인마다 다르긴 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는 보통의 삶과는 다르기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고 몇몇이 혼재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거기서 빠져나올 희망이 잘 보이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군에서 가끔씩 겪게 되는 자살사건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제가 신병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됐을 때, 살아 있었으면 제 사수가 되었을 바로 위 고참의 관물대를 물려받았습니다.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했으며 사회 있을 때 나이트클럽을 꽤나 다닌 제비 같은 친구였다고 회상하던데 졸병생활의 암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보초를 서다 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 전 해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 전전해에도 있었습니다. 저도 한 1년간은 그 지독한 막막함에 가끔씩 죽어버릴까 생각했었습니다. 지독한 고문을 받다 보면 차라리 죽여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합니다. 경험자로부터 들은 얘기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다 보면 삶에 대한 애착이 어느 순간 끊어지고 스스로 죽을 수만 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봅니다. 살아오면서 본인이 성취하고자 했던 남다른 목표가 있었는데 그것이 좌절됨을 확인했을 때의 허망함도 죽음을 택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와 원치 않는 싸움을 크게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가족과 지인들, 당사자에게 상처를 계속해서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고 판단되면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믿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 생각하면 그 황망스러움에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게 없고 앞으로 해줄 수도 없구나 생각이 들면 미안한 생각이 들면서도 무력감에 부끄럽게도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돌아가신 저의 아버님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고, 저도 유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본인이 너무나 억울한 상황에 처했으나, 주장은 할 수 있어도 쉽게 밝힐 수가 없다고 판단되고 이로 인해 엄청나 조리돌림을 당할 생각이 들면 죽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소인과 고인 사이에 실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본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신 게 아니라면 상상하지 않는 게 진정 두 분을 모두 생각하는 길입니다. 어느 한쪽을 두둔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한쪽을 원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고인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을 두고 위와 같이 판단하는 것은 고소인을 무작정 무고로 몰고 가는 것과 똑같이 위험한 발상입니다. 고인이 그간 이뤄놓은 공이 과를 넘는다거나, 공과 과를 구분해 인식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고인의 공과 과는 한 사람이라는 특정인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측면에서 고인을 위선자라 말씀하시는 분들의 청렴함과 도덕성이 지극히 의심됩니다. 고소인이 형사고소를 하였다는 것은 피고소인이 법적으로 심판받게 하고 더불어 재발방지를 위한 조직과 사회 환경의 개선을 이루고자 함이었을 겁니다. 이중 법적 심판은 최고형인 사형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미투 관련 피해자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합니다. 다만, 서지현 검사와 같은 케이스도 있고 박진성 시인과 같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위협한 케이스입니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피해자에 대한 미안하다는 표현이 없어 또다른 가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과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결단을 하는 순간에도 고소인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피해자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고인의 잘못을 전제한 판단은 이렇게 상반될 수 있습니다. 고인과 직접 대화를 해본 경험과 매체를 통해 본 인상으로 미루어 그분은 심성이 그렇게 강인해 보이진 않았습니다. 작금의 언론, 검찰, 정적들의 행태를 감안할 때 이런 종류의 피소가 고인에게 상상 이상의 두려움을 초래했을 수 있습니다. 대권을 통해 보다 나은 사회를 이뤄 보려는 큰 꿈이 허망해진 것에 대해 모든 것이 부질없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그러한 상상 자체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본인이 직접 살인이나 폭력, 강간을 하지 않았고, 사기, 횡령을 하지 않았으면 스스로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얼마든지 악마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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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2020.07.11.
다녀왔습니다. 빈소의 영정사진으로 그를 마주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새벽, 그의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저절로 통곡이 쏟아지는데 머리가 깨지고 심장이 피를 쏟는 줄 알았습니다. 무수한 이들과 함께 애도하면서 이제 조금이나마 진정이 됩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들여다 봅니다. 박원순, 그의 빈 자리가 이리도 큽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 지난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곳곳에 일상으로 담겨졌는지 돌아볼수록 놀라울 따름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에게 조언합니다. 큰 거 하나 해, 그래야 정치적으로 딱 각인이 되지. 그런데 그는 소소한 일상의 풍경을 바꾸는 일에 진력합니다. 버스와 전철의 손잡이가 키에 따라 높낮이가 다른 것이나 비오는 날 우산 빗물 털개가 설치되는 것이나 공공자전거 서비스 서울 자전거 따릉이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나 모두, 일상을 사랑하는 그의 철학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어디 그뿐이었습니까?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운동의 거점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적폐정권 하에서 경찰들의 물대포 작업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촛불시민혁명의 현장 광화문, 그곳을 그는 지켜주었습니다. 그는 청년의 때에 살았던 모습을 시장이 된 뒤로도 그대로 실현해나갔습니다. 아니 더욱 구체적이고 정밀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또한 적지 않습니다. 시민들의 시민의식, 그 권리를 위해 <서울자유시민대학>을 출발시킨 것은 박원순 시장의 모든 업적 가운데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정신의 힘을 기르는 긴 안목의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운영위원장을 맡아 그와 함께 시민대학의 고비 고비를 넘어온 과정이 참으로 감사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시장의 뜻을 받들어 정성을 다한 서울시 공무원들과 운영위원을 맡아 시민대학의 뼈대를 세워온 교수진들 모두 이 일이 얼마나 귀중한지 절감해왔습니다. 평생교육의 거점을 세워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기쁘게 새로운 평생학습권을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서울 도서관> 설립은 책 읽는 도시 서울을 위한 박원순의 기여입니다. 서울 시내 여러 유형의 도서관 정책, 그 골간을 짜는 본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한국도서관협회 사무총장을 지내고 있는 당시 이용훈 서울도서관 관장과 함께 서울 도서관의 정책기능을 설계했던 날들은 두고두고 자랑스러운 추억입니다. 현재는 이정수 서울도서관 관장이 더욱 담대한 계획을 맡아 현실에 옮기고 있는 중입니다. 많이 힘들겠지만 잘 해나가리라 믿고 성원을 보냅니다. 서울의 브랜드 “I-Seoul-U”, 누구나 다 압니다. 젊은 세대의 작품이었습니다. 시청의 김동경 도시브랜드 책임자와 이 브랜드에 도달하기까지의 논의, 행사, 홍보정책 등에 대한 일을 했던 것도 언제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여러 개의 후보 가운데 시장의 선호도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선택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브랜드의 출현에 사방에서 비판이 일었습니다. 자신도 그 후보작에 표를 던지지 않았던 그는 시민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일관해서 자신의 입장을 지켰습니다. 현장 투표에서 시장의 표도 당연히 한표였을 따름이었습니다. 이 도시 브랜드는 이제 세계적으로도 명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시대의 내면을 본능으로 읽고 있는 세대의 힘을 아꼈던 것입니다. 그와 함께 손을 잡고 일한 것 가운데 중랑구 망우동의 일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서울의 변두리, 낙후한 지역에서 마을 운동을 일으켜 혁신교육과 공동체 성장에 힘을 쏟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는 주민들에게 그는 뜨거운 사랑을 쏟고 지원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시장실에 초대하여 소탈한 할아버지가 되어주었습니다. 현장에 직접 찾아와 숲이 있는 마을로 가꾸어 나가고 녹색벨트와 사회적 경제, 그리고 인문학적 사유가 하나가 된 서울의 새로운 거점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도시 재생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헌신을 다하는 마을 운동가를 끊임없이 격려하면서 난제를 푸는 일에 조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그 마을 활동가는 지금 국회로 가서 새로운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 숱한 일을 매일 감당하는 그가 그 작고 이름없는 마을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보인 애정은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 이인지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실종소식을 듣고 마을 아이들이 우리도 찾아나서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는 그런 따뜻한 추억을 아이들에게 남기고 떠났습니다. 서울시장, 하면 박원순. 이제 다른 이름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 명명한 “영원한 서울시장”, 이라는 직함이 그의 일생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2011년 서울시장 선거가 치열하게 펼쳐졌던 때, TV 방송 토론의 마무리에서 진행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서울시장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어떤 후보여야 하는가를 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질문은 토론자들에게 서울시장으로 적합한 인격과 능력을 압축해달라는 요지였습니다. 저는 또박 또박, 세 개의 발음을 답으로 대신했습니다. “박. 원. 순.” 그를 둘러싼 설왕설래가 있지만 지금은 온전히 추모의 예를 다해야 할 때라고 여깁니다. 도리라는 것은 그토록 중요합니다. 박원순,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에 대한 기억이 우리 역사의 힘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박원순. 이 한도 많고 말도 많은 사바세계의 짐을 모두 내려놓으시고 다시 초연히 산행(山行)을 떠나소서. 때로 별이 바람에 스치는 날이 있거든, 우리에게도 기별 전해주소서. 사랑하는 벗이여! 정다운 임이시여! 보내는 일이 이리도 힘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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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훈 7월 12일 오후 4:30 ·
[추모] 박원순 시장님
서울시청 분향소, 끝없이 이어진 추모 행렬에 줄을 서고 분향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참여연대 사무처장이던 2003년,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단장으로 제주4•3민중항쟁의 진상규명을 위해 초석을 놓아 주려 애쓰신 것과, 제주4•3민중항쟁이 제주변방의 역사에서 한국의 역사로 조명되도록 2018년 70주년 행사를 치루기 위한 서울 광화문광장의 공간을 기꺼이 배려해주신 것을 특별히 기억하며 묵념을 올렸습니다.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셨던 박 시장님, 부디 모진 世事 잊으시고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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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경 7월 10일 오후 12:55 ·
박원순 서울시장이 명을 달리했다. 죽음 앞에서, 정치인으로서 한국 동물운동사의 지렛대 역할을 한 그를 추모하며 동물운동가로서 ’서울시장이었던 그‘를 생각해본다. 그가 1997년 동물권 논문을 쓴 (아마도) 국내에서 첫 주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참으로 도식적인 행위 같아 그 평은 하지 않겠다. 내가 고 박원순 시장을 처음 본 것은 2002년경이었던 것 같다. 대학로에서 개식용 반대집회를 하는 데 강은엽 교수님의 안내로 현장에 방문했다. 그는 인사를 나누며 동물단체들이 보다 공격적으로 운동을 전개해나가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고 갔다. 이후 2006년에 고 박원순 시장이 희망제작소를 출범하며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희망씨~’ 365인 사진전에 내가 추천되며 작은 인연이 또 닿았다. 당시 365인 사진전에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복실이도 함께 찍어서 365인 사진전에 유일하게 포함된 동물이 우리 복실이였다. 지금은 내 곁을 떠난 복실이의 그 사진은 내 방에 걸려있다. 이런 인연들은 그가 갑자기 떠난 것에 대한 개인적 회고일 뿐, 고 박원순 시장의 동물권 기여 동물복지 향상에 대한 공적은 할 말이 많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2년에 서울시에 국내 최초로 ‘동물보호과’를 신설한다. 그가 2011년 10월에 취임했으니 취임하자마자 곧바로 신설한 바와 다름없다. 이후 많은 지자체들이 미약하게 혹은 좀 더 공격적으로 전담조직을 만들어나가게 되는 계기이다. 정부조직에 동물전담 조직이 생긴다는 것은 ‘동물’이 법과 제도에 의해 당당하게 보장받을 길을 여는 토대가 되는 것이며 예산의 적극적 편성 요구가 가능해진다. 사회적 대우의 시발점이다. 이후 정치인, 지자체장으로서의 그는 계속 선제적인 행보를 보인다. 2012년 3월 7일 동물, 환경단체들은 서울시청 앞에서 불법포획된 남방큰돌고래 방류을 요구하는 집회를 한다. 다음 날 8일, 나는 생물다양성포럼에 온 박시장에게 당시 포럼 주제와는 동떨어진 질문을 공개적으로 했다. ‘서울시에서 제돌이를 방생할 뜻이 있습니까?’ 박 시장은 대답했다. ‘전향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그리고 3월 12일 그는 서울대공원 동물원 수족관 앞에서 제돌이 방류 선언을 했다. 박시장은 그로 인해 보수언론으로부터 엄청난 시달림을 당한다. 이후 재선 선거운동 중에도 상대측으로부터 시달렸다. 사람이 먼저지 동물이 먼저냐며. 그런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박 시장은 엄청나게 쏟아지는 화살을 묵묵히 맞고만 있었다. 정치적 빅마우스가 못되는 우리로서는 바라만 보게 됐다. 제돌이는 단지 돌고래 한 마리를 바다에 보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퍼시픽랜드의 4마리 돌고래 몰수 판결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후 박 시장의 결단으로 6마리의 남방큰돌고래가 수족관을 벗어났다. 무엇보다도 더 큰 의미는 우리나라는 더 이상 돌고래 수입이 불가능해진 형국으로 된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시민 여론에 박원순 시장이 엄청난 지렛대를 놓아준 결과이며 한국 동물운동사에 손꼽히게 남을 사건이다. 2013년 어린이대공원에 반려견과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장을 정식으로 첫 개설한 것과 더불어 원주 드림랜드에서 되돌아온 호랑이 크레인, 사자 3마리 생추어리 이송 등은 박원순 시장이 재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행적엔 길고양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주도한 공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길고양이 급식소 설치를 비롯해, 시민들이 사업시행 자격만 갖추면 공격적으로 요청할 수 있는 TNR 예산 편성이 대표적이다. 동물자유연대는 정부지원금을 받지 않아 내가 보조금 심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은 동물진영 시민단체가 활용을 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이다., 물론 예산이 충분하다는 의미로 말할 수는 없고, 정부 예산을 사용할 수 있는 준비된 단체들이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현재 시점에서이다. 24시간 구조동물응급진료체계가 매우 절실한 상황인데 그 토대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서울시가 진행 중인데 앞으로 잘 해나갈 수 있을지 또한 걱정이다. 내가 박원순 시장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작년 2019년 10월 26일 ‘서울시 개 도축 제로(Zero)도시 선포‘ 행사인 것 같다. 개식용 금지 캠페인 행사에서 처음 만난 그를 개도살 종식 행사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라니... 고 박원순 서울시장, 그가 남긴 동물권, 동물복지에 대한 족적은 훗날 그가 정치인으로서 한국동물운동에 강한 지렛대 역할을 한, 한국동물운동사에 남을 인물로 평가될 것이라는 데에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니 그래야 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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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종 7월 13일
조국과 박원순을 바라보는 우리 안의 분단선, 그리고 그물눈 사랑.
1. 두 화가가 같은 달걀을 각기 자기 스타일에 따라 그린다. 내/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란 내/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강의 중에 종종 인용하는 그림이다. 21세기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두 눈은 자본주의(신자유주의)와 과학기술이라는 시선을 갖고 우리의 세상을 만들어 낸다. 그 관점/기준으로 세상의 질서를 정돈하고 평가한다, 인류세라 불리면서 지구 환경 위기를 볼러온 현실의 근간인 근대적 두 관점이 빚어내는 세상은 끊임없이 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내재화를 통해 마치 영구불변하는 진리처럼 집단무의식으로 작동한다,
2, 이런 사회나 집단 이야기를 개인에 적용시킨다면, 각 개인은 자신만의 세계 속에 살아간다 – 각자가 겪어 온 삶의 경험에 근거한 ‘해석’이 그/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낸다. 진보, 보수가 있고, 같은 집단 내에서도 특정 대상/상황에 대한 관점은 각 개인마다 다르다. 동시대, 같은 장소에 있어서도 사람 수 만큼의 세상이 존재한다. 다양한 각 개인의 세계는 전 우주를 통해 유일무이한 것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이기에 각 개인은 존중되어야 마땅하고 나이, 성별, 인종, 이념 내지 종교의 차이마저 넘어선다.
3. 각 개인의 해석과 선택이 존중되어야 한다면 각종 범죄와 해악을 끼치는 이들의 세계관과 행동도 존중되어야 하는가는 자연스레 수반되는 질문이지만, 이 논의는 개인의 사적 층위를 넘어 개인이 속해 있는 주변과의 관계성이라는 공적 층위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즉, 타자 내지 대상과의 관계성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하기에, 동 시대의 다수가 합의한 지금 이 자리에서의 공적 가치에 따르게 된다. 특히 이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화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신학이나 종교 종파 역시 특정 경전에 대한 다양한 인간들의 해석에 불과하다, 어떻게 바라보는가일 뿐이다. 비록 주체와 대상은 서로 상호 작용하며 그 구분이란 지극히 모호한 것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의 해석에 기반한다.
4. 개인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창발적 '관계의 누적이자 덩어리'다. 자신만의 고유성을 지닌 개인이지만 철저하게 타자성을 담고 있다, 환경/타자와의 상호침투적인 이 과정을 우리는 종의, 개인의 진화라고 부른다. 진화를 멈춘 종이나 생명체는 멸종하거나 죽음이란 형태로 마무리 되어 사라지듯이 존재는 사적/공적 층위에 상관없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 이뤄지되 이를 통해 개인만의 고유체계도 형성한다, 그 어느 누구도 동일한 경험을 하면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의 삶도 사적인, 공적인 중층 구조와 관계성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삶이 존재 자체이자, 존재는 삶의 행적(관계성)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5. 각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인간이자 자연스럽다. 공과 사를 생각함에 있어서 스위스 언어학자인 소쉬르가 100년도 전에 각 개인의 언어가 담고 있는 랑그(langue)와 빠롤(parole)을 정리했다. 이를 통해 언어가 지닌 공적 의미와 개인 나름의 사적 의미를 구분했고, 이런 ‘관점’은 훗설의 현전(Gegenwärtigung) 및 자크 데리다의 흔적(trace) 해석으로 전개되는 심화 과정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타자 내지 대상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 관계맺음에는 누구의 판단도 관여할 수 없는 각 개체의 영역이 작동된다.
6. 조국 사태와 박원순 시장의 조문에 있어서 다양한 사회적 입장/해석이 있다. 그런 다양한 해석은 그 어떤 입장이더라도 사회 구성원 각 개인 삶의 경험이 반영된 소중한 것이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지점이기에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한 존재와 사안에 담겨 있는 중층 구조에 대한 층위의 혼재와 흑백의 이분법적 사고, 바라보는 이들 내부의 감정 혼재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작동하고 있다는 것. 서로 존중한다는 것은 무조건 그대로 방치하는 것과는 다르기에 존중하기에 서로 치열한 논쟁이 있어야 한다. 허나 아쉽게도 그 논쟁 방식이나 행동이 서투르다보니 삶의 회색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오직 흑백만으로 비난과 혐오 형태로 전개되는 우리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7. 인간은 중층적인 구조 속에서 현존하는 이대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온전’하고 삶의 현장도 그러함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 개인이나 상황에 있어서 완벽하게 옳은, 혹은 완벽하게 잘못된 악인이란 허구다. 공과 사의 다양한 층위에서의 한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 요구되며, 개인/사안에 있어서 공과 과에 대하여 나누어 바라보고, 각각에 합당한 '책임'을 나누어 묻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중층적인 개인이나 상황의 A측면을 긍정하는 것이 반드시 동일인과 사안이 담고 있는 B측면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A를 주로 말할 때가 있고, B를 주로 말할 때가 있어야 하는 경우가 타당하건만 어느 한쪽 만을 강요하는 사회다.
8. 학자 혹은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처럼 멍청한 이들도 없다. 생각해 보면 간단히 말할 내용을 매우 현학적으로 어렵게 말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멍청하게 긴 글로 꼰대로서 중언부언 동어반복 하며 말하고자 했다. 간단히 정리하면, 어느 시인이 내가 너를 꽃이라 불러 꽃이 되었다고 한 존재의 관계성과 더불어 꽃은 누가 불러주거나 꽃이라 이름 짓지 않아도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자체로 이미 빛나는 중층 구조가 있다. 각자의 경험 속에서 세상을 보게 되는 한계 속에 특정인을 타자의 판단과 평가라는 공적 층위로만 바라보는 것은 지지나 비난 어느 쪽이건 해당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살시키는 획일적이고 이분법적 관점일 수 있다. 거꾸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채 사적 층위를 공적인 층위로 덮어 포장하거나, 혹은 반대로 공적 층위인 사회생활 관계에서 사적인 권력/갑질 행사로 이어지는 것은 폭력이다.
9. 중요한 것은 너와 나라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지금 이대로 온전한, 중층적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자, 관심과 배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그물 줄로 매듭 지워진 ‘그물코’가 아니라, 네 개의 그물 줄로 이뤄진 텅빈 공간인 ‘그물눈’으로 이뤄져야 그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단단한 그물코 사랑이 아닌, 그 크기도 유연하고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그물눈 사랑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이 보인다. 가해와 피해의 굴레 속에 있는 고통이 보인다. 우리는 흑백을 넘어선 찬란한 삶의 회색 속에서 영욕이 함께 하는 이 길을 누구나 걸어야 한다. 생로병사의 마지막 종착점을 향해서.
10. <사족> 살아가면서 몸을 방치하면 건강을 해쳐 성인병이 생기듯이, 마음이나 감정 역시 살아가면서 방치하면 마음의 성인병이 생긴다.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공과를 나눠 바라보지 못하고 감정적 혼란을 겪는 것 역시 그 증상의 하나다. 몸도 살피고 늘 운동해야 하듯이 마음의 성인병 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지금 이 자리 특정 상황이나 대상에 대하여 반응하는 ‘자신에게 되묻기’다. 예를 들어 나는 왜 이것을 선택하는가? 지금 왜 혼란스런 감정이 일어나는가? 왜 이것을 원하는가? 왜 연민/분노의 마음이 일어나는가? 혹은 실생활에서도 아파트를 못사면 왜 걱정이 되는가? 왜 저 사람에게 마음이 그리 끌리는가? 간단한 이 훈련을 체화시킬 때, 어느 덧 남이 뭐라 하건 자유롭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게 되고, 보다 제대로 상황/타인을 대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모두는 어떤 모습일지라도 늘 소중한 존재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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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경 7월 12일 오후 11:35 ·
<슬픈 일요일의 오후, 몰약처럼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영혼을 씻어주는 비.
박원순.
그를 처음 만난 건 90년인가? 남편이 출판한 책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을 때. 당시 박원순은 남편의 변호사였다. 그때는 그냥 매우 바쁜 인권변호사로 스쳐지나갔다.
그랬던 그가 1994년 참여연대를 만들었을 때, 참 반가웠다. 당시 참여연대와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조희연 등 다른 지인의 권유로 참여연대에 회원가입도 하고 곧이어 교육위원회 활동도 하였다. 나는 그와 함께 일을 하진 않았다. 오히려 내 아버지가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여, 우리 집안 모임에서는 박원순과 관련한 기분 좋은 일화가 많았다.
그러다 내가 성공회대 사회교육원 기획실장 5년을 마치고 방송작가일로 집중할 때, 그에게 1대 1 미팅을 신청해 만난 적이 있다. 자료와 책들로 어지러운 그의 작은 방에서. 당시 그는 희망제작소 소장이었고 스스로를 ‘소셜 디자이너’라는 칭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소셜 디자이너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날 시민교육의 중요함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그는 독일 시민운동단체 탐방경험과 뮌헨 시민대학 이야기를 하며 “뮌헨 시민은 공부중”이라는 카피 멋지지 않냐고 했다. 나는 외국 시민교육 현장을 다루는 다큐도 만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나에겐 직함이 있든 없든 ‘교육디자이너’라는 정체성이 있어요. 내가 ‘교육 디자이너’라는 말을 사용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상대로였다. “너무 좋죠. 사실 지금 시대는 자신의 직업을 스스로 창조해내야 합니다. 청년들도 그래야 해요.”
그 만남 후에 나는 자신있게 내 명함을 만들었다. “교육디자이너 주은경”. 물론 그 명함은 별로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2008년 나는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부원장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는 2011년 서울 시장이 되었다. 내 아버지는 그가 보궐선거로 당선되던 날 저녁, 너무 기뻐 그 선거운동 사무실로 달려가셨다. 그날 지지자들과 함께 하는 그의 옆자리에 내 아버지가 활짝 웃으며 함께 했던 사진이 내 기억속에 선명하다.
그후에는 서울시 민주시민교육위원회 등 공적인 자리에서 몇 번 그를 스치듯 만났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그때 이미 서울시장으로 너무도 바쁜 공인이었다. 눈인사 정도를 나누었을 뿐이다.
그와의 인연은 깊지 않다. 그런 내가 지금 그의 죽음 앞에 이렇게 슬프다. 그의 가족은 물론 사회변화를 위해 함께 했던 친구와 활동가들은 어떠할까.
슬프다. 언덕을 걸어오르다, 밥을 먹다가 눈물이 터진다. 왜?
사람이란 얼마나 세상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고, 또 그 욕망 앞에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가. 그걸 다시 확인하기에.
박원순이라는 사람. 참으로 빛나는 활동가였다. 내가 여기 쓰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대단한 아이디어의 소유자이며, 개인 욕심을 내려놓는 사람인가의 이야기는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욕망앞에 그렇게 무너져 버렸다. 외롭게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사람이란 얼마나 자기의 관점에 서 있는 존재인가. 박원순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입장과 태도들 속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목욜 밤부터 오늘까지 나는 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안하던 페이스북에서 허우적거렸다. 글과 말과 생각들 틈을 헤엄쳤다. 같이 슬퍼하고, 놀라고 상처받는다. 그리고 치유받는다.
우리는 참 취약한 인간존재들이다. 어느 인디언의 이야기처럼,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먹이를 주느냐에 따라 참다운 영혼으로 살 수도, 무서운 영혼으로 살 수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된 존재는 없다. 순간순간 내 안의 그늘과 빛을 무섭도록 투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하는 존재다. 그만큼 타인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사랑과 집착, 빛과 그림자. 이 사이가 너무 멀기도 하지만, 종이 한 장만큼 가깝다는 걸 살면서 배웠다.
순수주의가 얼마나 폭력인가에 대한 강남순 선생님의 페이스북 글이 깊은 위로가 되었다.
시민운동가, 진보적 정치가와 지식인이 따로 저 높은 세상에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와 사람들이 좀더 밝은 빛으로 가길 원하며 힘겹게 돌 하나를 놓으며 나아갈 뿐이다. 그들도 다 취약한 인간이다. 그들이 저지른 잘못이 있으면 책임을 묻고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딱 그만큼만 하면 좋겠다. 일생 모두를 부정하고 모욕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들이 벌을 받고 반성하고, 다시 돌아와 제 몫의 인생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1주일 후는 노회찬 2주기. 내일은 박원순 영결식. 우리 시대 훌륭한 사람과 함께 했던 한 시대가 가고 있다. 더없이 슬픈 죽음과 함께.
온 마음 다해 기도한다. 박원순과 그 피해자의 영혼을 위해, 상처받은 우리 모두의 취약함을 위로하며 기도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인간의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위해 돌 하나 놓는 수많은 손길 하나하나를 위해. 그 지혜의 손길들이 모여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나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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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원 7월 13일
착하고 순박한 동시에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이 넘치지만 정작 타인의 욕구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걸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좋은 것을 그들에게 준다.
보좌관이 원하는 건 새벽조깅이 아니라 몇시간 더 자는 것이지만 ‘건강에 좋으니’ 같이 뛰게 한다. 퇴근 후 가족식사 자리에 따라가면서 그 가족들이 느낄 불편함을 생각하기보단 ‘이런 자리에도 함께하는 소박하고 격의없는 나’가 만족스럽다. 뒷굽 뜯어진 구두, 책상 위 산더미같은 서류들, 한여름 옥탑방 체험 등이 모두 그렇게 탄생한다.
끝없이 칭찬받고 싶고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은 욕망은 그러나 실제 나와 보여지는 나 사이의 괴리만큼 내면의 고독감으로 축적된다. 그 고독감은 시민운동의 대부-사랑받는 시장-유력한 차기대권주자가 아닌 아내와 별거중인 한 초라한 중년 사내의 몫이다. 일생을 벼렸을 자기절제와 판단력이 그 외로움 속에 용해된다.
타인의 내면에 무관심한 이 선량한 에고이스트에겐 스스로의 양심에 자신의 권위나 업무상 지위를 이용해 사적욕망을 채우려는 동기가 없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상대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여비서가 자신의 성적 접근에 단호한 거부의사를 표하지 않는 것이나 때때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응하기도 하는 걸 일종의 ‘그린라이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동등한 인간으로서 건넨 일종의 구애행위로 생각했던 것들이 새로운 시대의 문법 속에서 폭력과 가해의 물증으로 나열될 것임을 깨달은 순간 그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였을 것이다.
박원순을 무수한 ‘페미니스트인 척 하더니 성범죄자였던 그놈’ 중 하나로 치부하기엔 그가 여성인권을 위해 바친 세월이 너무 길다. 사람이 죽어나자빠져도 왜 우리가 직접 단죄할 기회를 빼앗아갔냐고 어떻게 부관참시라도 좀 할 수 없겠냐며 발을 동동 구르는 저 금수들의 진정한 ‘남자사람친구’였던 박원순은 그렇게 자신이 만든 세상의 길로틴에 목이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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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홍) “[그분들이 서있는 땅]
안희정 지사사건이 터지고.. 그 다음은 이재명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었다. 안희정 사건이 터진 직후, 실검에 뜬금없이 이재명이 올랐던 걸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 사회분위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재명은 견뎌냈다. 이번 박원순 시장의 사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이재명과는 케이스가 다르지만 갖다붙인 거란 걸 이해해주시길.) " 가 있으니 죽은 거 아냐?" "죄가 없으면 재판을 받고 사실을 밝혔어야지! 무책임해!". 맞다. 일반적인 세상이라면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재명의 2년의 싸움을 지켜본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그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는 제발 아셨으면 좋겠다. 김부선이 이재명과의 불륜을 주장했다.(처음에는 미투라 그랬다.) 일반적인 상식이라면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입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사실'이 아닌 '경기도지사 후보', '유력정치인'을 둘러싼 논란을 어떻게 극대화시키고 가쉽거리를 만들어 씹을 까라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김부선이 증거랍시고 페이스북에 하나를 툭 던진다. 그러면 언론들은 사실관계 확인을 하지 않고 그걸 그대로 받아다가 기사를 수십 개씩 쏟아낸다. 심지어 JTBC와 뉴스쇼에서도 알 권리 운운하며 김부선 페이스북을 그대로 옮겨 방송했다. 그렇게 그냥 일단 두드려 맞는 거다. 이재명, 이재명 김부선, 이재명 불륜등의 검색어가 순위권에 올라가고 하루 종일 국민들에게 노출된다. 이재명 측에서 그 증거는 틀렸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이재명 측의 주장을 보도하지 않는다. 툭 던진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서 이재명 측은 구구절절 설명을 해야 한다. 여기서 언론이 사실관계를 확인해주고 김부선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김부선이 또 다른 증거랍시고 제시하면 언론은 그 또 다른 증거로 보도를 쏟아내고 또 이재명은 실검에 올라 하루 종일 씹히고 위축되어진다. 분명히 이재명은 김부선이 제시한 증거에 대해 완벽한 반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 광풍이 불 때는 그런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많이 지켜보셨으니 아실 거라 믿는다. 선거 직전 KBS에서는 김부선을 불러 일방적인 인터뷰를 그대로 내보냈다.
이재명의 주장은 제대로 반영되어 방송되어지지 않았고 오로지 김부선의 주장만...또 김부선이 원하지 않았지만 다급했던 공지영은 김부선에게 또 다른 증거를 강요한 것 같고 증거가 없던 김부선이 거기에 걸려들어 스모킹건이랍시고 거짓말을 한 이재명의 인권을 짓밟는 (신체적 특징) 내용을 녹음했고 이것이 공개되었다. 나였으면 이때 견디지 못 했을 거다. 일반 사람이라면 내 성적인권이 짓밟히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을 거다. 온 국민이 날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보기도 어려웠을 것 같다. 도저히 가족들을 볼 낯도 없었을 것 같다. 그것이 사실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확신을 하니까. 이 녹취록이 공개된 날도 실검을 장식했고 언론에서도 한사람의 인권을 무너뜨리는 녹취내용을 그대로 보도했다. 내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 이재명 측 대변인이 뉴스쇼에 나왔는데 이 민망한 녹취내용을 물어보며 '국민의 알 권리'를 운운했다는 것이다. 김현정이 그랬다. 그 당시의 사회분위기는 이재명을 죽이기 위해 모두 혈안이 돼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결국 이재명은 이것이 아니라 는걸 증명하기 위해 기자들을 대동하고 병원에 가서 확인을 해야 했다. 그 과정을 당신은 과연 견디라고 강요할 수 있나? 나라면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을 거다. 이런 것의 반복 또 반복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이재명의 인권과 자존감은 무너졌을 거다. 이재명 가족이 겪었을 그 고통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이재명의 당선소감을 묻는 그 순간에도 아내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모든 언론사가 김부선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왔다. 마치 이재명이 죽을죄를 지은 죄인인 것처럼. 그렇게 폭력적이고 광기어린 공격이 본인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이재명도 인간이라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조금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이 사회는 언론이 아니라 이재명에게 분노조절장애 운운하며 이재명을 공격했다. 결론은? 김부선 사건은 기소조차 되지 않고 무혐의 처분 났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가? 이미 이재명은 더럽혀졌다. 지금도 뭔가가 있었으니 그랬겠지 씨부리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사실에 관심있는 게 아니다.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됐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이재명은 7건?을 고발당했다. 조폭연루설, 일베설, 강제입 등등등..2년이라는 시간동안 이재명은 끊임없이 피의사실공표를 당했고 검찰의 압수수색에 시달렸으며 검찰의 공소장변경, 증거은닉 등을 당하면서 인권이 무너져 내렸다. 본인이 기자들 앞에서 말했던 것 같다. "내가 진짜 죽일 놈인가? 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온 세상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느낌도 들었다고 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이재명은 시달리고 있다. 고발된 7건중 6건이 무혐의 또는 무죄가 나왔음에도 그것에 대한 보상은 아무것도 없고 사과하는 자는 아무도 없으며 아직도 당한 상처가 회복되지 못했다. 박원순 시장 같은 경우에는 기소가 된다는 가정 하에 2~3년을 재판에 시달려야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박시장이 이 길을 택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이었을 거라고 나도 생각하지만 이미 그분은 다른 선택을 하셨다. 이재명은 일을 열심히 하며 견뎌냈다. 견디고 또 견뎠다. 이런 싸움의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다. 이 폭력적인 길에 사람을 집어넣고 견뎌! 너 무책임해! 라고 나는 말 할 자격이 없다. 나는 견뎌낼 자신이 없으니까... 우리가 꿈꾸는 당당히 사실을 밝히고 당당히 재판받고 억울함을 증명하거나 대가를 치르는 아름다운 장면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 긴 시간동안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은 재판보다 더 무서운 '마녀사냥'을 견뎌야 한다... 물론 이재명과 박원순의 케이스는 다르고, 아직 무슨 일인지 조차 파악이 안 된다. 다만 '미투'라는 것, 또 그리고 저분들에게 재판이라는 게 그렇게 툭 치면 툭 나오는 그런 간단한 싸움이 아니라는 걸 한번쯤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신중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사실관계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거나 수사또는 재판중인 사람을 범죄자취급하고 확신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PS. 다시 봐도 이 모든 과정을 견뎌내고 있는 이재명은 정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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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7월 11일 오전 7:18 ·
<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열광적 '순결주의'의 테러리즘>
1. '박원순'이라는 고유명사를 지닌 한 사람이, 7월 10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매듭지었다. 그에게 공적으로 붙여진 이름은 '서울시장'이다. 그러나 그는 한 '인간'이다.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가. 그에게 붙여졌던 ‘진보적인 인권 변호사,’ 또는 서울을 ‘세계적 도시’로 만든 시장 등 다양한 표지들은, 그가 무수한 결을 지닌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두 포괄할 수 없다. 한 인간으로서 지닌 다양한 외적, 내적 결들의 한 부분들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의 잠적, 그리고 이어서 죽음이 알려진 후, 지난 이틀 동안 나는 한국과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텍사스에서 착잡한 마음을 깊숙하게 품고 지내야만 했다. 우울한 착잡함의 시간을 지내면서, 내가 느끼고 있는 아픔, 우울함, 절망감 등 추상화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은 단지 고유명사를 지닌 어느 특정한 한 개인의 죽음 자체 때문만이 아님을 보게 된다. 마치 손에 쥐고 있던 ‘생명선’을 순간에 놓기만 하면, 인간의 생명이란 얼마나 한순간에 무화될 수 있는가라는,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나의 온 존재 속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 모두가 이러한 ‘한계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는 칼 야스퍼스의 말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어 신문과 SNS에 쏟아지는 그의 죽음에 대한 ‘코멘트’들은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아프게 마주하게 했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언어적 테러리즘(verbal terrorism)”이 난무하는 글들을 읽으며 나는 ‘인간임’에 대하여 절망감까지 들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끔찍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나의 이러한 추상화 같은 내적 세계를 담아내고자 할 때, 산문적 글과 말이란 얼마나 무력한가.
2. 한국, 독일, 영국, 미국 등 네 나라에서 살아보면서 내가 경험한 것은 어느 사회마다 각기 다른 ‘질병’과 ‘장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한국사회가 지닌 가장 심각한 ‘악 (vice)’은 “흑백논리적인 이분법적 사유방식”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유방식이 개별인들의 사유구조나 관계 맺는 방식은 물론,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진보-보수’라는 이분법은 물론이고, 한 인물에 대하여 극도의 ‘이상화-악마화’가 끊이지 않고 진행되는 ‘악’이, 한국사회가 지닌 가장 심각한 질병중 하나라고 나는 본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비판적 토론이 아닌 ‘내 편-저 편’이라는 편가르기가 먼저 작동하고, 그 중심적 주제에 대한 포괄적인 토론은 불가능하게 된다. 멀리 뒤로 갈 필요도 없다. 지금도 진행 중인 소위 ‘조국 사태,’ 정신대/위안부 문제, 그리고 서울 시장의 죽음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한 흑백 논리적인 이분법적 접근방식에 의해서만 등장할 뿐이다. ‘인간이 누구인가’ 에 대한 복합적 시선이 결여된 채, ‘순수주의(purism)’를 내세우며 단순한 ‘이상화(idealization)’나 ‘악마화(demonization)’ 이외에는 논의거리가 되지 못한다.
3. ‘순수에의 열망(desire for purity)’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순수주의(purism)’으로 고착되면, 인류 역사에서 무수한 테러리즘과 폭력이 일어났다.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보존해야한다는 ‘순수성에의 열망’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외국인 박해, 동성애자 학살, 장애인 학살을 정당화했다. 미국에서 백인의 ‘순수성에의 열망’에 따른 ‘한 방울 규정(One-Drop Rule)’은 1967년까지 백인 아닌 인종과의 결혼을 범죄화했다. 조상 중에 흑인의 피가 ‘한 방울’만 섞여 있어도 ‘백인’이 될 수 없고 ‘흑인’으로 범주화되는 법이다. 다양한 인종간의 결혼이 지금은 합법화되었지만, 여전히 이 ‘한 방울 규정’이 백인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오바마 대통령에게서 백인과 흑인의 피가 각기 50%이지만, 그가 백인이 아닌 ‘흑인’으로 규정되는 배경이다. 이러한 ‘인종적/종족적 순수주의’만큼 폭력적인 것이 바로 ‘도덕적 순수주의’에 대한 열광이다.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복합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으며, 여전히 ‘이상화-악마화’라는 지극히 단순한 흑백논리의 범주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4. 나는 페미니즘이나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책을 쓰는 작업을 하면서 깊은 딜레마와 씨름했어야 했다. 내 속에 보이지 않는 ‘순수주의에의 열망’이 있었는가보다.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완전한’ 이론가/사상가가 있는가. 없다. 중요한 통찰을 준 특정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에 대하여 다양한 자료들을 읽다보면, 그들의 사적 삶에 이런 저런 ‘오염’을 지니고 있는 경우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깊은 실망을 했었다. 어떤 페미니스트는 인종적 또는 지적 우월주의 또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오판과 오역을 생산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칸트와 같이 코즈모폴리터니즘의 부활을 가져온 사상가는 어떤가. 그는 여성은 합리성을 지니지 못한 존재이며, 열대지방에 사는 인종은 지적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한편으로는 지구 위에 거하는 ‘모든’ 인간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지켜야 하는 코즈모폴리턴 권리를 주장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혐오’와 ‘인종주의자(racialist)’인 칸트를 내가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이러한 예는 마틴 루터 킹, 폴 틸리히, 마틴 하이데거 등 다양한 이유들에 의해서 '오염'된 무수한 사상가/운동가들 속에서 볼 수 있다. 그 어느 한 사람도 소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존재’란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순수주의에의 열망’은 또 다른 폭력과 테러로 사용된다는 것을 인류의 역사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 자신 속에서 이러한 딜레마와 씨름하면서 내가 내리게 된 결론은 ‘순수주의의 열망’이 지닌 위험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5. “칸트와 함께 칸트를 넘어서 생각하기(thinking with Kant against/beyond Kant)” 라는 사유방식은 나 자신의 ‘순수주의에의 열망’을 넘어서서 인간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를 하기 시작하면서 만든 나의 학문하기 방식이 되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인종차별적인 페미니스트나 코즈모폴리턴 사상가, 성차별주의자 또는 성소수자 차별하는 인권운동가 등의 이론을 내가 ‘분석적 도구’로 차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라는 것은 한 인간은 무수한 결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우리의 인식구조 속에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인간이해를 수용할 때, 한 인물에 대한 ‘이상화’ 또는 ‘악마화’라는 흑백논리적 접근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위험한가를 보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이란 단순한 한두 가지 표지로 드러낼 수 없다. 그러한 ‘표지들(markers)’은 지극히 일부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뿐, 한 사람의 복합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 붙여지는 표지들이 고정적인 것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하여, 내가 개인적으로는 거부하는 이유들이다.
6. 인간이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은, 동일한 정황에서 누구나가 다 동일한 해석, 결정,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다르듯, 우리 각자는 다른 해석과 결정을 내린다. 그렇기에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등의 표현으로 한 고유한 존재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매듭짓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이 쉽사리 ‘용기’라거나 ‘비겁’이라는 단순한 표지로 치부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죽음에 대한 한 사람의 결단은 우리의 '이해-너머 (beyond comprehension)'의 문제이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자의적 판단/심판을 중지하는 것--인간됨의 실천이다. 그가 스스로 이 삶을 마감하겠다는 결정이 '용기 있는 사죄의 몸짓'인지, 아니면 다른 몸짓인지 '그'만이 알 수 있다.
7. “매 죽음마다 세계의 종국이다.” 데리다의 말이다. 자신의 ‘생명선을 놓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에 대하여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애도이다. ‘애도한다’는 것이 그를 전적으로 ‘이상화’하라는 것도 아니다. ‘더불 제스츄어(double gesture)'를 가지고 ‘박원순과 함께 박원순을 넘어서 생각하기’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는 데리다의 말이 담고 있는 바, 한 죽음 앞에서 우리 각자의 ‘인간됨’을 실천하는 애도라고 나는 본다. 한편으로는, 한 공인으로서 그가 한국사회에서 이루어 왔던 소중한 일들을 지켜내고, 아직 이루지 못한 남아있는 일들을 남아있는 사람들이 이어서 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 순수주의’의 열망으로 그를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 오류와 한계를 지닌 인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지극히 남성중심주의적인 한국사회에서, 그가 공직을 수행하면서 한 개인에게 어떤 종류의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그 역시 한국의 가부장제적 '사회적 산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나만 택해야 하는 흑백논리를 넘어서서, 한 인간이 지닌 복합적인 면들을 ‘한꺼번에’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8. 그의 죽음의 현장에서 ‘파안대소’하는 몇 얼굴을 담은 사진을 보았다. 그 파안대소하는 얼굴 중에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K' 라는 사람의 모습을 보니, ‘인간이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침묵 속에서 애도하려고 했던 내가, 이렇게 미완의 단상이라도 쓰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 사진이다. 얼마 전 독일을 여행하면서 가보았던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본 사진이 떠오른다. 수용되었던 유대인들이 해방되자, 그 ‘피해자’들이 ‘가해자’인 독일 군인들을 발가벗기고 죽여서 그 주검을 수용소 철조망에 걸어놓고 조롱하는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면서 소위 ‘피해자’들 역시 이러한 끔찍한 ‘가해자’의 모습을 품고 있는 ‘인간’임을 충격적으로 확인했었다. 인간 속에는 ‘피해자-가해자’의 가능성이 언제나 복합적으로 도사리고 있다. 그 어떤 표지가 붙었든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애도’하는 것—인간으로서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방식이다. 그 누구의 죽음이라도 ‘조롱받을 죽음’이란 이 세계에 없다. 죽음을 선택한 그와 ‘함께,’ 그리고 그를 ‘넘어서’ 보다 인간의 권리가 확장되는 서울, 한국을 만들어가기 위한 과제를 우리 각자의 어깨위에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의 정치사에서 여러 가지 소중한 업적을 남긴 한 사람의 죽음 앞에 나는 애도한다. 그가 아무런 흠 없는 ‘순수’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닌 여러 가지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 죽음마다 세계의 종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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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7월 13일 오전 7:12 ·
< '진정한 애도'와 '위험한 애도' 사이에서>
1. 우리의 말과 글에는 무수한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소통과 이해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동일한 개념을 쓴다고 그 개념에 대한 이해도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간혹 들리는 큰 매장의 한인 슈퍼마켓에 가면 입구에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물으면서 나에게 ‘전도’하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이럴 경우 나의 답은 짦은 "예'이다. 서로 시간낭비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질문을 하는 사람과 내가 진지하게 소통하고자 한다면, 답하기 전에 나는 그 질문자에게 먼저 두 가지를 물어야 한다. 첫째, 당신이 생각하는 ‘예수’는 누구인가; 둘째, 당신이 생각하는 ‘믿는다’는 무엇인가. 많은 이들에게 ‘예수’는 축복(특히 물질적 축복)을 주고 사후에 천당 가게 하는 존재이다. 또한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등록하여 ‘정식 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모두 동의할 수 없는 이해이다. 따라서 ‘예수 믿는가’라는 질문에 ‘예/아니오’라고 단순하게 답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종종 위험하기까지 하다. 가장 기본적인 개념의 이해에서 상이한 이해를 하기에, 누군가와 글/말을 통한 소통을 진정으로 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쓰는 중요한 개념이 상대방과 유사한 것인지 아닌지를 살피고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질문에 다시 질문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2. 사람이 자신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때 진정한 소통에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은, 바로 동일한 개념에 대하여 상이한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그 의미의 상이성은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말/글이 나오게 된 구체적인 정황이나 개념이해와는 상관없이 ‘탈정황화’되어서 정작 그 말/글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과는 상관없이 자의적 해석과 단순한 왜곡으로 ‘소비’시켜버린다. 동일한 글에 대하여 완전히 상충적인 해석이 등장하고, 상이한 기능을 하게 되는 이유이다. 특정 개념을 사용할 때 이미 그 사람의 가치관, 세계관 등에 따라서 그 개념에 대한 이해가 자동적으로 구성된다. 한 사람의 읽기, 쓰기, 해석하기가 언제나 이미 ‘자서전적’인 이유이다. 쓰여진 글에는 저자의 직접적 현존이 부재하기에 오역에 노출된다고 본 소크라테스는 ‘글쓰기(writing)’에 대하여 회의적이었기에, 자신 스스로는 쓰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말하기’ 역시 글쓰기와 동일한 방식으로 청자의 왜곡된 해석과 오독에 이미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소크라테스는 보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3. 자크 데리다는 이 세계에는 두 개의 개념이 존재한다고 한다. 하나는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 또 다른 하나는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상속받는다는 것(to exist is to inherit)" 이라고 하면서, 상속(inheritance)은 '주어진 것(given)'이 아닌 '과제(task)'라고 말한다.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을 상속받은 사람의 과제란, 그 개념에서 소중한 것은 물론 그 개념이 사용되어오면서 놓치고 있는 것을 찾아내어 그 개념의 의미를 심오화하는 인용부호 속의 개념’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다. 데리다는 우리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개념/실천을 마주하면서 그 상속받은 개념들 속에서 긍정해야 하는 것, 문제제기해야 하는 것, 그리고 새롭게 부각시키고 확장해야 하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상속자’로서의 우리의 과제라고 보는 것이다. 데리다가 치열하게 상속자로서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의 자취는 그가 개입하는 무수한 개념들 속에서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고 자명하게 안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 새로운 세계를 품고 있는 개념으로 재탄생한다. 그 예(example)의 리스트는 애도-“애도,” 환대-“환대,” 용서-“용서,” 선물-“선물,” 우정-“우정,” 미소-“미소,” 동물-“동물” 등 한도 없이 길어진다.
4.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사유 주체(the thinking subject)’의 부각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이 ‘함께 존재’라는 차원을 결여한다. 이 데카르트적 인간이해의 한계를 넘어서서, “나는 애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애도 주체(mourning subject)”로서의 데리다의 선언은 내게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 ‘사유 주체’만이 아니라 ‘상호연결성의 주체 (the subject of co-existence)’라는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의 차원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데리다의 인간이해는 나의 사유와 실천세계에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되어왔다. 내가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알리즘 등과 같은 현대 담론/운동에 개입하는 것은 인간의 ‘상호존재성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확인해주는 이론이며 실천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 이론들이 나와 다른 입장을 정죄하고 파괴하는 ‘무기’가 아니라, 인간됨을 상실하지 않는 평등과 정의 확장의 ‘도구(tool)’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내가 언제나 강조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이 어떠한 주제든 나의 글/말/운동의 출발점을 구성한다.
5.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애도와 “애도”라는 두 개념의 차이를 스스로 속에 구성하고 있는가.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을 우리 각자는 자신의 정황에서 씨름해야 한다. 나는 오직 고유명사로서의 나, '강남순'이 생각하는 “애도”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진정한 애도’와 ‘위험한 애도’가 있다고 본다. 세월호 사건이든 최근 죽음을 택한 한 공인에 대하여서든 ‘애도’한다고 했을 때, 그 ‘애도’라는 개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이해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보는 ‘위험한 애도’가 지닌 세 가지 특성은 첫째, 애도 대상에 대한 ‘이상화(idealization),’ 둘째, 낭만화(romanticization); 셋째, 내면화 (internalization)이다.
1) ‘이상화’란 그 인물이 한 공인으로 이루어 온 업적이나 한 인간으로 걸어 온 자취를 모두 가장 최고의 것으로 올려놓고서, 누구도 접근 할 수 없는 존재로 승격시키는 것이다.
2) ‘낭만화’란 ‘밝고 좋은 것(bright side)’만을 부각시킬 뿐, 인간에게 모두 있을 수 있는 ‘어둡고 문제적인 것(dark side)’은 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3) ‘내면화’란 그 죽음이 살아남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보지 않고, 그 죽음 자체를 하나의 ‘실존적 늪’으로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기력감, 낭패감, 냉소성으로 둘러싸인 그 ‘실존적 늪’에 침잠하는 방식의 애도는 ‘위험한 애도’이다.
최근 ‘박원순 서울 시장’의 죽음과 관련한 나의 애도에 관한 글에서 내가 생각하는 ‘애도’의 의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내가 거부하는 이러한 ‘위험한 애도’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는 것을 본다. 소크라테스의 망령(specter)이 나의 곁에 서서, '그래서 내가 쓰기를 거부한 것이오' 하며 미소 짓고 있는 것 같다.
6.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애도’는 무엇인가. 우선 ‘위험한 애도’의 세 요소를 넘어서는 과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첫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대체불가능한 생명의 상실에 대한 아픔으로부터 진정한 애도는 시작된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그 ‘애도하기’가 그 인물에 대한 ‘이상화,’ ‘낭만화’를 하면서 그 죽음을 ‘냉소성, 낭패감, 무기력감의 늪’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한 인간으로서 그가 해 온 일들의 의미를 되짚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공인으로 또는 한 개별인간으로서 다층적 한계와 잘못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보면서, 그 한계와 과실을 책임적으로 비판적 조명을 하는 것이다. 셋째, 그가 공인으로서 가졌던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가치들’이 있다면, 그 가치들은 무엇이었으며, 그 가치들의 구체적 실천에 대하여 남아있는 ‘내가’' 나의 삶의 정황에서 할 수 있는 또는 해야 하는 과제는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용부호 속의 “애도,” ‘진정한 애도’이다. 그렇기에 애도하는 대상과 ‘함께(with)’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비판적으로 ‘넘어서고 문제제기하는(beyond/against)’의 접근이 요청되는 것이다.
7. 데리다는 2004년 10월 9일 죽었다. 데리다가 죽은 후 신문들에 쏟아진 ‘부고’는 참으로 상충적이었다. 그 당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실은 데리다를 ‘우리 시대의 지성 세계에서 주요인물 중의 한 명’이라고 표현하였다. 영국 <가디언 (Guardian)>신문이나 미국의 <고등교육저널(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은 데리다에 대한 심오하고 포괄적인 매우 긍정적 서술을 한 부고를 내었다. 반면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은 10월 10일, 작가인 조나단 캔델 (Jonathan Kandell)이 쓴 “자크 데리다, 난해한 이론가, 74세에 파리에서 죽다 (Jacques Derrida, Abstruse Theorist, Dies in Paris at 74)”라는 제목의 매우 부정적인 부고를 냈다. 캔델은 이 부고에서 데리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부고는 ‘해체(deconstruction)’개념을 ‘진리와 의미에 대한 공격’이라고 규정하면서 폄하했다. 이 노골적인 부정적 부고 기사에 많은 학자, 건축가, 예술가, 음악가, 작가 등 300여 명이 서명을 하여 뉴욕타임즈에 문제제기하는 글을 보냈다. 데리다를 그렇게 무책임하게 ‘비난’하는 것은 마치 “아인슈타인,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중요한 사상가들을 부적격한 학자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문제제기의 글을, 뉴욕타임즈 지는 2004년 10월 12일에 실었다. 이 반박문에는 부정적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애초에 데리다의 글들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거나, 읽었다 해도 이미 자신 속에 고착된 해석적 렌즈를 가지고 의도적 폄하를 하는 것이 문제라고 강조한다. 즉 한 인물에 대한 ‘상이한 해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의도적 왜곡, 자의적인 무책임한 해석, 정치화된 폄하가 문제라는 것이다.
8. 내가 감동 깊게 마주한 어떤 사람의 ‘애도하기’ 방식이 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애도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철학자로부터 확인하게 되었다. 데리다는 2004년 10월 9일 죽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란 무엇인가. 자명한 것 같은 ‘애도하기’가 사실상 전혀 자명하지 않다. 션 가스톤(Sean Gaston)은 데리다의 죽음 후 데리다의 ‘애도하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했다. 후에 책으로 출판된 그의 ‘애도하기’ 방식은 2004년 10월 12일부터 12월 17일까지 2달에 걸쳐서 데리다의 작업, 사상, 삶의 자취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52편의 글이 되었다. 책의 제목은 <자크 데리다에 대한 불가능한 애도(The Impossible Mourning of Jacques Derrida>이다(이 책의 목차를 아래에 사진으로 나눈다). 가스톤의 ‘애도하기’ 방식에서 나타난 그의 글들은 참으로 다양하게, 심오하게, 복합적인 모습으로 ‘애도하기’가 ‘가능/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게 감동적으로 일깨워주었다.
9. 이렇듯 한 죽음에 관한 ‘애도하기’란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그렇기에 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의 애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도하기’ 역시 ‘자서전적’이기 때문이다. 살아감이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죽음들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 각자는 예외 없이 ‘죽음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나’는 < 애도-“애도” >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기만의 방식을 타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애도하기를 품고서, 각자가 지속적으로 씨름해야 할 개인적/ 사회정치적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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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 7월 13일
[그와 함께, 그를 넘어서 생각하기]
주말 내내 우울한 마음으로, 신학자 강남순 교수께서 제시하신 이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그가 명백하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아무리 사랑하고 존경했던 그였을지라도 냉정하게 비판하면서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이번에 그의 죽음에 대해 명백하게 인식의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양측 모두 무시해 버려도 될 극단적인 말과 글에 대해, 서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어요.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마치 전부를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 겉잡을 수없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업적을 기리면서 애도하는 것이 피해자에게 2차가해가 되고, 피해자를 옹호하는 것이 그에 대한 애도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결국 서로 씻기 힘든 대립으로 귀결되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그와 함께, 그를 넘어서 생각하기’는 사실상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아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그것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침묵할 자유마저 나무라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겠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옹호하고 있는 주체가 더욱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날선 두 입장이, 소통을 통해 연대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계속해서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공감과 연민으로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마지막으로 무척 공감이 가는, 가까운 사람이 쓴 글의 일부를 소개할게요. 며칠 동안 힘들어 했을 모든 분들과 서로 위로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참 취약한 인간존재들이다. 어느 인디언의 이야기처럼,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먹이를 주느냐에 따라 참다운 영혼으로 살 수도, 무서운 영혼으로 살 수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된 존재는 없다. 순간순간 내 안의 그늘과 빛을 무섭도록 투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하는 존재다. 그만큼 타인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사랑과 집착, 빛과 그림자. 이 사이가 너무 멀기도 하지만, 종이 한 장만큼 가깝다는 걸 살면서 배웠다.
시민운동가, 진보적 정치가와 지식인이 따로 저 높은 세상에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와 사람들이 좀더 밝은 빛으로 가길 원하며 힘겹게 돌 하나를 놓으며 나아갈 뿐이다. 그들도 다 취약한 인간이다.
그들이 저지른 잘못이 있으면 책임을 묻고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딱 그만큼만 하면 좋겠다. 일생 모두를 부정하고 모욕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들이 벌을 받고 반성하고, 다시 돌아와 제 몫의 인생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온 마음 다해 기도한다. 박원순과 그 피해자의 영혼을 위해, 상처받은 우리 모두의 취약함을 위로하며 기도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인간의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위해 돌 하나 놓는 수많은 손길 하나하나를 위해. 그 지혜의 손길들이 모여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나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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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7월 13일
유언
ㅡ 아들, 딸에게
절대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 되지 말아라.
희생하는 사람 되지 말아라.
깨끗한 사람 되지 말아라.
마음이 따뜻해서 남보다 추워도 된다는 생각하지 말아라.
앞서 나가서 매맞지 말아라.
높은 데 우뚝 서서 조롱 당하지 말아라.
남이 욕하면 같이 욕하고
남이 때리면 같이 때려라.
더 욕하고 더 때려라.
남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 웃어주지 말아라.
실패하면 슬퍼하고 패배하면 분노해라.
빼앗기지 말아라.
빼앗기면 천배 백배로 복수하고 더 빼앗아라.
비겁해서 행복질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비겁해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하느님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큰 교회 다녀라.
세상에 나쁜 짓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부끄러운 짓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양심과 선의는 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라.
네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 나설 것이라고 생각해라.
너보다 못나고 덜 가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말아라.
패배자들을 경멸하고 혐오해라.
너에게 기회와 이득이 되는 사람에게 잘 보여라.
항상 그들과 동행해라.
들키지 말아라.
앞에서 못 이기면 뒤에서 찔러라.
지지 말아라.
이기고 짓밟고 넘어서고 보아라.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확실하게 줄을 서라.
중도는 죽는다.
약자를 이용해라.
어디서든 페미니스트를 자처해라.
기회주의자들에게 잘 배워라.
위선자들을 조심하되 위선엔 능해야 한다.
너의 유식과 성찰이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게 해라.
무슨 수를 써서든 비싼 밥 먹고 비씬 잠 자라.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라.
벗은 거지는 굶고 입은 거지는 먹는다는 말 명심해라.
그러나 겉으로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처세에 도움이 된다.
너보다 힘 센 자들에게 인사 잘 하고 다녀라.
세상이 바뀔 거라는 생각 하지 말아라.
더 좋아질 거라는 생각 하지 말아라.
너 하나만 잘 살면 된다.
오직 너 하나만 잘 살면 된다.
세상의 정의를 믿지 말고 네 안락의 나침반을 믿어라.
세상에 정의란 없다.
오래 살아라. 명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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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응용언어학자)
<때늦은 소회,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
1. 그가 세상을 떠난 순간 그의 삶은 멈추었지만 피해여성의 슬픔과 아픔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한 사람의 고뇌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은 끝없이 이어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한 죽음이 하나의 세계를 닫아버리고 또 다른 세계를 열어젖힌 것입니다. 이와 함께 그들과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도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사건은 시간의 갈래와 흐름을 바꿉니다. 어떤 사건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삶의 변곡점들은 축적되어 이 사회에, 그리고 우리 몸에 쌓입니다. 그렇기에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을 산다고 해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시간이 모두의 시간이라고 믿지 않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지금 감정이 모두의 감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말았으면 합니다. 모두에게 같은 시간을 살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모두 같은 마음으로 애도해야 한다고 단정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이들이 단일한 시간의 점유하는 일, 보편적 인식과 경험에 다다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논쟁이든 대화든 그러한 일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의 자리에서 애도하고 분노합니다. 서로 다른 측면을 바라보고, 서로 다른 사건에 주목하며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것은 타인의 용인이나 재가가 필요없는, 각자의 몸뚱아리를 갖고 태어난 생의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렇기에 '박쥐같은' 저는 가족과 친구를 잃은 분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합니다. '잠시 기다려달라'는 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서울특별시장을 당장 중지해 달라', '이같은 일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고통받고 있고 싸우고 있다'는 외침에 더 간절한 마음을 보탭니다.
3. 애도와 분노는 서로 다른 시간의 스케일timescale 위에서 작동합니다. 누군가는 생을 가까이에서 나누어 온 가족으로 남편의, 아버지의 죽음을 맞았고, 누군가는 오랜 시간 운동과 정치를 함께해 온 동료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누군가는 애증을 품었던 조직의 수장을 잃었을 것이고, 심드렁하지만 뽑을 사람이 없어서 표를 던진 정치인의 마지막을 본 사람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인간적인 면에 천착하기 보다는 정치적 반대파로서 그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피해여성의 동료로서 그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피해여성이 겪은 수모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여성으로서 이 죽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사회의 모순을 부끄러워하며 그의 삶과 죽음을 복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피해여성 당사자가 있습니다.
그 모든 자리는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며, 그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시대와 공간, 직간접적인 경험이 만들어 낸 관계의 풍경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금 이 아프고 잔혹한 풍경에 가장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그가 걸어온 길에서 이루었던 일들이 아니라 권력이 위계로,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작동해온 역사입니다. 그가 거둔 생의 자취를 모두 지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의 죽음을 초래했으리라 여겨지는 사건이 너무나 중대하고 충격적이기에 도저히 못본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한 개인의 죽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큰 공적 사건이자 상징입니다. 거기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고, 밝혀야 할 것이 있고, 반드시 바꿔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4. 따로 또 같이 경험하는 이 거대한 슬픔이 우리사회의 커다란 모순과 어떻게 만나는지 살피는 시간이길 빕니다. '조문 기간만이라도 침묵하라'는 말은 자신의 시간만이 옳은 시간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책을 묻는 기자에게 욕설로 답하는 것은 '예의'의 문제로 시대의 모순을 덮고 변화를 바라는 열망에 재갈을 물리는 일입니다. 죽음을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얼굴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시민들은 묻고 있습니다. 사람과 진실보다 관습과 권력이 중한 시대가 이 비극을 만든 것 아니냐고.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런 세상을 용인하고 강화시켜 온 당신들 아니냐고.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고인을 욕보이는 것이 아니라 고인이 비틀어버린 길을 다시 바르게 펼치는 일입니다. 더 넓게 애도하고, 더 깊게 분노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풀어야 할 매듭입니다. 이를 회피한다면 고인이 꿈꾸던 평등한 세상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5. 많은 시민들이 서울특별시장을 반대하는 것은 애도를 막는다기보다는 애도의 형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최소한의 양심과 양식을 가진 사람 누구도 그의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실종 후 수 시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의 시민들은 가슴을 졸였습니다.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정황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그의 사죄와 법의 심판을 바랐습니다. 진실과 정의를 원했습니다.
허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는 영영 세상을 등졌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가능성의 세계를 일시에 닫아버린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고인을 모독하며 인륜을 저버린 이들은 한줌도 되지 않습니다. 조문에 동참하지 않는다 하여 인간에 대한 예를 저버렸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들 또한 가슴 졸이며 힘겨워한 시민들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분노가 치민다고 하여 허수아비를 때릴 필요는 없습니다. 되도 않는 멸칭과 메타포로 수많은 시민들을 모욕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거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시대가 있습니다. 말 한두 마디로 인간의 전존재를 삭제하는 야만이 계속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6. 그는 자신이 추구해 온 핵심가치 중 하나를 저버리고 떠났습니다. '가치를 저버렸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어떤 면에서 모두를 철저히 속였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도하지 않겠다는 이들은 여기에 주목합니다. '배신감을 느낀다', '무책임하다', '도리가 아니다'라는 말은 여기에 터합니다. 정치적 지지에 관계없이, 많은 면에서 그를 신뢰했던 이들에게 그러한 반응은 인지상정입니다. 누군가의 귀에는 그다지 달콤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지금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가 저버린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은 그의 전 인생을 지우고 모욕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참혹하게 실패한 지점을 기억하고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려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열망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 성찰과 기억, 변화의 몸부림을 함부로 재단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다는 말입니까?
7. 누군가의 죽음은 그의 육체가 더 이상 우리 곁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가 추구해 온 가치와 태도, 이상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가 걸어온 길이 더 이상 뻗어나갈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길을 기억하며 새로운 길을 만들고자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인이 생전에 추구했던 가치를 기억한다면 쏟아지는 실망과 분노의 목소리를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8. 애도의 윤리는 모두 한 목소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더 많은 시민들이 더 큰 세계로 이끄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9. 그의 마지막을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인들은 그와의 연을 회고합니다. 언론은 그의 업적을 나열합니다. 어떻게든 그는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깊어 보이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성서의 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지금 누가 울고 있습니까? 고인을 먼저 보낸 이들이 울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오랜 시간 '울게' 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힘든 기억을 안고 가야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피해여성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피해여성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편에 서는 것이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는 가장 간절한 연대 아닐까 합니다.
10. 며칠 간 띄엄띄엄 글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참 많이 아팠습니다. 세계를 파괴하는 말글이 너무나 많이 떠다녔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새삼스레 뭘 그런 걸 가지고'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화목했던 적은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어떤 시간은 잔혹한 말글로 인해 더욱더 철저히 파괴됩니다. '따스하게 단호한 말'은 그저 모순형용일까요? 타인을 지우지 않고 자신을 세우는 일이 그토록 어려울까요? 자신의 인식을 유일한 세계로 상정하지 않는 것은 진정 불가능할까요?
11. 어떤 이들은 이해하려고 한다기보다는 계산하려고 듭니다. 그들의 계산은 0(네 편)과 1(내 편) 이진법으로 구성됩니다. 맞고 틀리고는 내 편 네 편의 다른 다른 이름입니다. 내 편이면 옳은 것이고 네 편이면 그른 것이죠.
때로는 모든 말의 맥락이 자기 자신인 사람을 봅니다. 어떤 말을 해도 그 말이 놓인 사회문화적, 정치적, 제도적 맥락을 이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그들의 얼굴과 상처를 살피지 않습니다. 어떤 말에건 자신의 견해와 태도를 대입하여 '진리'를 휘두르는 것이지요. 세상 모든 이들의 견해와 말에 '일체유심조'의 원칙을 적용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밖에 있는 모든 것들은 틀린 것이고, 심지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2. 맥락을 꿰어 세상을 이해하려는 정성은 동이 나고, 말 몇 마디로 상대의 인생을 재단하는 '관심법'은 창궐하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문해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대하는 정성,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오로지 자신으로 향하는 말을 지어내는 이들은 다양성에 대한 논의를 환영하는 척 하면서도 관점의 다양함은 배척합니다. 여기에서 물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비판의 다양함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찬양은 도대체 어떤 쓸모가 있습니까?
13. 피해자를 기억하고 연대하는 일이 처절한 저항이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서로를 환대하고 돌보면서 지긋지긋한 세계를 손톱만큼이라도 변화시키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세상입니다. 그 가운데서 소심한 저는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이에 비할 수 없이 무거운 분노와 아픔의 짐을 지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이들은 이 세계가 얼마나 무섭고 짜증나고 잔혹할까요. 저는 상상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픔과 분노가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부끄럽고 슬픕니다. 진실로 슬픕니다.
14. 슬픔을 당한 이들에게 위로가 있기를 빕니다. 우리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를 빕니다. 비아냥과 저주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더 나은 사회로 가는 길을 계속 걸어가길 빕니다. 하지만 저는 모든 슬픔이, 분노가, 아쉬움이 똑같은 무게를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진실과 정의를 부르짖다가도 '통념'과 '의례', '예의' 앞에서 여지없이 권력의 편에 서는 이들의 편에 서지 않기를 원합니다. 위력에 의해 그 어떤 폭력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 '위력'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지는 세계를 위해 싸우는 이들을 응원합니다.
15. 애도할 사람은 애도하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목소리를 높힙니다. 애도와 분노의 감정을 동시에 분출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의 입도, 누구의 마음도 틀어막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건이 닥치고, 생각이 휘몰아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이 세계에 '어쩔 수 없이' 함께 남겨집니다.
그렇기에 모두의 아픔과 슬픔을 안아줄 수 있는 사회였으면 합니다. 또한 분명히 기억하고 행동하는 사회이길 빕니다. 어떤 슬픔에는 처절한 반성과 진상규명이 필요하고, 어떤 슬픔에는 단호하고도 끈질긴 연대가 필요합니다.
16. 슬픔과 아쉬움으로, 분노와 상처로, 헛헛함과 쓸쓸함으로, 원망과 절망으로 고 박원순 시장을 보냅니다. 며칠 순간순간 울컥했던 걸 보니 고인의 삶이 제 안에 조금은 녹아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또 순간순간 화가 나는 걸 보니 고인에게 여전히 기대한 것이 있었나 봅니다.
안녕히 가세요. 한때 탁월했던 길잡이를 잃은 시대, 시민들은 길을 잃지 않고 현명하게 새로운 길을 낼 것입니다. 그들 자신이 길이 되어 더 나은 세계를 지어갈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계실 피해 당사자께 연대의 마음을 보냅니다. 당신의 잘못은 없으며,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멀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처절한 아픔의 시대를 지나는 우리 모두에게 사랑과 애통의 마음을 더합니다. 힘겨운 나날이지만 일상을 지키고 서로를 돌보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빕니다.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내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안이 도무지 가당치 않은 시대,
감히 모두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고요하고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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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미 7월 13일
그의 실종 소식을 들었을 때, 무엇이 그를 그렇게 서두르게 했는지 혼란스러웠다. 남편과 건평바닷가를 거닐며 이런저런 추측을 했지만 '미투'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죽음이 '미투'와 관련된 것을 알았을 때 배신감에 가까운 감정이 들었고 절망했다. 그를 제대로 애도하고 슬퍼할 기회마저 주지 않고 간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는 길을 찾지 못했구나. 같은 잘못을 저질렀던 수많은 남성들처럼 그 역시 길을 찾지 못한 채 거기서 멈춰섰구나. 수치스러움에 죽음 이외에는 떠올리지 못했을 그의 앞에 놓였던 또 다른 길은, 몹시 고통스럽고 험란한 길로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 길은 피해자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하고, 그에 합당한 법적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그는 상처를 입고, 모욕과 수치를 견뎌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욕과 수치, 고통과 두려움은 이미 수 년 동안 피해자의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특히 그를 아끼고 존경했던 이들이 혼란스러운 닷새를 보냈을 것이다. 그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나 역시 그랬다. 박원순이라는 이름을 알고부터 지금까지 개인적인 인연이라고는 그가 아름다운재단에 있을 때 인터뷰를 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의 진지함과 치열한 고민,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의지를 읽었고 존경했다. 그가 시장이 된 뒤, 하나씩 이루어냈던 수많은 업적들을 나는 참여연대 시절부터 활동가들과 함께 고민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만나 귀 기울였던 노동자, 여성, 장애인, 청년들의 삶이 그를 안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믿음이 갔다. 2014년 세월호 천막에서부터 2016년 가을과 겨울의 광화문에서 나는 그가 서울시장이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가진 권력 덕분에 우리가 꿈꾸던 일들이 하나씩 이루어질 수 있어서 뿌듯했다. 권력은 이렇게 활용하는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의 삶을 존경했고, 그의 실천에 박수를 보냈다. 그를 시장으로 뽑은 서울시민들의 선택이 미더웠다. 2주 전, 시사IN에 실린 전국민 고용보험에 관한 인터뷰를 읽으며 이런 시장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시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많은 고민과 토론을 했겠다 싶었다.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절망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분노하게 할지. 첫 이틀은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어쩌지 못했다. 절망이 너무 커 길이 안 보였다. 그러나 이제 조금씩 보인다. 죽음으로 멈춘 그 길을 다시 낼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의 죽음을 두고 광적인 두둔, 혹은 정치적인 비난을 쏟아내는 이들이 진보, 보수로 나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날비린내 나는 언사들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과 죽음을 공고한 가부장제의 폐해로 연결하는 것을 부정한다. 우리가 성범죄에 대해 제대로 처벌하는 역사를 가졌더라면, 남성연대의 거대한 카르텔을 진작에 깰 수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성범죄를 단지 개인의 일탈이라고 치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범죄가 개인의 일탈 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의 업적, 개인의 인성, 개인의 재능, 개인의 가능성으로 그 잘못이 가려지고 뭉개진다.
박원순, 그의 잘못을 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동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분명히 해야만 계속 은폐되고, 계속 이어지는 이 성범죄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을 가진 남성들에 의한 성범죄는 단지 우리나라만의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이어진 가부장제가 무너지고, 계급화된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극복되어야만 남성도, 여성도 비로소 이 성범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N번방 사건, 권력형 성범죄, 그루밍성폭력, 일상적인 성추행과 성희롱들이 가능한 것은 그 걸 가능케 했던 지난 시간들 때문이다. 아프고 고통스럽게 이제 그 시간을 바꿀 때가 왔다. 그들의 저항이 아무리 커도 더는 지난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동안 피해자를 보호하는 주체가 여성단체 일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피해자를 돕는 이들이 박원순 시장에게 애도할 시간을, 그를 애도하는 이들을 존중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발표된 피해자의 글을 보며 닷새만에 처음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련했습니다.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맞습니다. 처음 그때 저는 소리 질렀어야 하고 울부짖었어야 하고 신고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랬다면 지금의 제가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수없이 후회했습니다. 긴 침묵의 시간, 홀로 많이 힘들고 아팠습니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습니다. 안전한 법정에서 그분을 향해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습니다.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습니다.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법의 심판을 받고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고소장을 접수하고 밤새 조사를 받은 날, 저의 존엄성을 해쳤던 분께서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내려놓았습니다. 죽음, 두 글자는 제가 그토록 괴로웠던 시간에도 입에 담지 못한 단어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실망스럽습니다. 아직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많은 분들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50만명이 넘는 국민들의 호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은, 제가 그때 느꼈던 위력의 크기를 다시 한번 느끼고 숨이 막히도록 합니다 진실의 왜곡과 추측이 난무한 세상을 향해 두렵고 무거운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지만 저는 사람입니다. 저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저와 제 가족의 고통의 일상과 안전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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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 한국성폭력상담소장]
본 사건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위력에 의한 비서 성추행 사건입니다. 이는 4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피해자는 오랜 고민 끝에 지난 7월 8일 서울지방경찰청에 고소했습니다. 한국여성회 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피해자가 고소를 한 직후에 피해자와 변호인을 만나서 면담했습니다. 우리가 접한 피해 사실은 비서가 시장에 대해 절대적으로 거부나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업무시간뿐만 아니라 퇴근 후에도 사생활을 언급하고 신체를 접촉하고 사진을 전송하는 등 전형적인 권력과 위력에 의한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곧바로 고소하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피해자는 서울시 내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시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시장의 단순한 실수로 받아들이라고 하거나 비서의 업무는 시장의 심기를 보좌하는 역할이자 노동으로 일컬었거나 피해를 사소화하는 등의 반응이 이어져서 더 이상 피해가 있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피해자는 부서 변경을 요청했으나 시장이 이를 승인하지 않는 한 불가능했습니다. 본인의 속옷 차림 사진 전송, 늦은 밤 비밀 텔방 대화 요구, 음란한 문자 발송 등 점점 가해 수위는 심각해졌고 심지어 부서 변동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개인적 연락이 지속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인구 1000만 명의 대도시인 서울시장이 갖는 엄청난 위력 속에서 어떠한 거부나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전형적인 위력 성폭력의 특성을 그대로 보였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를 법적, 의료적, 심리적으로 지원하고 우리 사회의 성문화를 바꿔가며 여성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활동하는 우리 두 단체에서는 이 사건을 접하고 피해자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이 사건이 형사, 사법절차상 수사 재판을 제대로 거쳐서 가해자는 응당한 처벌을 받고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고소 당일 피고소인에게 모종의 경로로 수사 상황이 전달되었고 피고소인의 극단적 선택으로 피해자는 지금 온·오프라인에서 2차 피해를 겪는 등 더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이 사건의 의미를 짚어보겠습니다. 이 사건은 전형적 직장 내 성추행 사건임에도 피고소인이 고인이 되어서 공소권 없음으로 형사고소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코 진상규명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박원순 전 시장은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역할을 해 온 사회적 리더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또한 직장 내 여성 노동자에 대한 성적 대상화, 성희롱, 성추행을 가했습니다. 서울대 교수 성희롱 사건 이후 성희롱 예방이 법제화되었고 그 또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직장 내 성폭력 예방교육을 성실히 이수해 온 듯했지만, 본인 스스로 가해행위를 성찰하지도 멈추지도 않았습니다. 더욱이 미투운동,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사건에 대해서 가장 가까이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안이 누구보다 자신에게 해당한다는 점을 깨닫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멈추는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사건은 성폭력의 행위자가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심각한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만약에 죽음을 선택한 것이 피해자에 대한 사죄의 뜻이기도 했다면 어떠한 형태로라도 피해자에게 성폭력에 대해서 사과와 책임을 진다는 뜻을 전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김으로써 피해자는 이미 사과받은 것이며 책임은 종결된 것이 아니냐는 일방적인 해석이 피해자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으로 가해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고소와 동시에 피고소인에게 수사 상황이 전달되었습니다. 서울시장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증거인멸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을 우리는 목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국가 시스템을 믿고 위력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투명하고 끈질긴 남성 중심 성문화의 실체와 구조가 무엇인지 통탄하고 비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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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엔딩 /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2020-07-13
글이 실리는 지금쯤 그의 장례도 끝났을 것이다. 어떤 일들에 분명한 기, 승, 전, 결을 예상하거나 분명한 주장을 가지고 있던 나는, 엔딩조차 없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들을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있다. “박원순 시장이 실종되었다”는 짧은 메시지를 에스엔에스(SNS)에서 보았을 때 ‘서울시의 어떤 정책이 실종되었나 보구나’라는 상념을 가졌지, 실재하는 사람의 실종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 같은 그의 부재는 현실이었고 삽시간에 알게 된 부재의 이유는 더한 충격이었다. “박원순 시장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현실이 아니기를, 넘쳐나는 가짜 뉴스들처럼 그런저런 해프닝이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그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스스로 사건의 실체를 알 수 없게 만들고 떠났다.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지만, 끝내 격렬한 말들의 소요가 시작되었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호소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라는 ‘자격’조차 얻지 못하고 2차 가해로 난도질당하고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일을 이렇게 만들고 떠난 그가 원망스럽다. 우리가 알던 박원순이기에 더 절망스럽다.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은 소용없고 힘도 없다. 그럴 사람이 아니기에 분노스럽고, 마지막 선택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용서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그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커, 당황스럽다. ‘하루에 딱 두시간만 더 생기면 좋겠다’는 심정일 만큼 바쁜 요즘인데,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며칠을 보냈다. 공적인 인연 몇개를 제외하면 개인적 사연도 없는 사이인데, 슬픔이 지나치게 크다.
서울특별시의 5일장이 발표되었다. 특별한 장례에 대한 각계의 입장이 주장되기 시작했다. 누구의 시점에서 장례를 바라보는지에 따라 입장은 갈렸다. “차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애도할 수 없다”는, “전례 없이 행해져야 하는 것은 서울특별시장이 아니라 고위공직자들이 저지르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에 대한 철저한 진상파악이고 재발방지 대책”이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위계에 의해 피해를 입은 수많은 여성들의 경험과 현재를 위해서, 삶의 길이나 무게 모두 고인보다 짧고 가볍지만 피해자가 살아내야 할 시간을 위해서라도 이 주장은 아주 귀하게 들어야 할 목소리였다. 길고 긴 침묵의 선택을 통해 고인이 한 무거운 고백을, 무엇보다 고인이 살아왔던 삶의 여정을 돌아보더라도 목소리의 울림은 커져야 한다. 추모를 막는 것도 아니며 단지 특별하고 공적으로 치러지는 장례에 대한 이의 제기는 정당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시민장례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슬픔의 무게 추에 마음을 실어주었다. 내 마음을 이해해주고 싶었다. 떠나고 나면 다시는 연결될 수 없는 고인에게 빚을 갚고 싶었다. 그가 늘 옳았던 것도 아니고, 좋았던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때에 했던 결단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삶이 나아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피해자들 곁에 서 있을 때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속절없이 슬펐으며 무기력했다. 이제 더는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아껴야 할 시간 앞에, 그저 마지막 위로라도 남기고 싶었다.
2020년 초여름은 부고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김종철 선생님이 떠났고, 엔니오 모리코네도 떠났다. 인간끼리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위험해지는 단절의 시대에 당도한 애도는 상실과 더불어 외로움으로도 기억되겠지. 모리코네는 스스로 쓴 부고에 가족과 지인들에게 따뜻한 감사 인사를 남겼다. 영화 <미션>의 ‘가브리엘의 오보에’나 <시네마 천국>의 ‘사랑의 테마’ 같은 엔딩이었다. 가슴 빈구석을 훑고 지나는 쓸쓸한 엔딩이나, 박원순은 그런 엔딩도 없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딩 뒤에는 시작이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모리코네의 음악을 듣고 자란 누군가들은 새로운 음악을 만들 것이다. 박원순의 삶과 죽음으로 인해, 격렬했던 우리는 공과 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모두를 슬프고 분노하게 한 죽음이 다시는 없도록 노력할 것이다. 엇갈리는 길고 긴 논쟁의 끝이 피해자의 살을 도려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건 피해자 곁에서 빛났던 박원순의 길이 분명히 아니다.
다시금 고인이 영면에 드시기를, 유족들의 마음에 위로가 있기를 기도드린다. 피해자의 안전과 평화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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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 Tui Beyon 7월 13일
1.
중앙일보를 필두로 해서, 조국 광란극이 다시 한 번 반복될 모양새..... 퍼오는 기사들 다들 가려 읽으시길. 정확히 1년 전, 조국 교수와 그 가족은 강남좌파의 위선을 넘어 파렴치범이요 대한민국 교육을 망친 악질 귀족 취급을 받았었다. 자신들의 '체험담'이 쏟아지고, 변호사와 회계사 등 '전문성'을 내건 비난이 조중동에 팔렸다. 대중 과학 아티클이 실리는 사이트에는 지방 고등학교 과학 교사라면서 조국을 파렴치범으로 모는 '체험 수기'도 실렸었다.
2.
그래서 결과적으로 뭐가 남았는가? 우린 자신을 조롱하고, 희롱하고, 심지어 딸의 집에 찾아가서 위협했던 기자들마저 별 일 없이 넘어가준 조국 교수의 가족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번엔 다르다? 윤미향 의원 때도 세부 조건은 달랐지만 똑같은 행태를 반복했다. 정의연이 속속 언론 중재 위원회에서 승소를 거뒀지만, 대체 누가 거기에 관심이나 두고 있는가? 그 뜨겁던 정의감과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연대의 감정'은 대체 어디에 쳐박혀버렸던가?
3.
이번엔 정말 다르다? 고소 당한 직후에 자살했으니까 다르다? 정말로 그럴 것 같은가? 기레기 욕하지 말자. 기레기 키워주는 건 함부로 퍼나르는 우리들이다.
이게 '가해자 박원순'에 대한 변호나 변명으로 읽힌다면 나로서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고소인에 대한 보호는 결국 진실을 정확히, 포르노적 소비 없이 규명할 때 가능해진다. 정치적 광란극으로 가열되기 시작하면 결국 그 모든 피해는, 고소인의 말이 맞건 틀리건 상관없이 모두 고소인이 뒤집어 쓰게 된다. [이걸 신종 '협박'으로도 읽지 않으셨으면..]
4.
제발 쓸 데 없는 음모론, 추측, 심리 분석들 그만했으면 좋겠다. 내가 이 얘긴 정말 안하고 싶었는데.... 성추행 혐의를 뒤집어썼던 정봉주 전 의원 그렇게 난도질하고도 사과 했는가? 김어준에 대한 그 증오에 대해 사과한 사람 있는가?
정봉주 전 의원은 자기 스스로 영수증에 허점이 있다는 걸 밝혔지만 실컷 욕을 쳐먹었고, 아직도 그 대중적 평판을 회복하지 못했다.
5.
진실 규명은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어떤 언론사도 보도를 하지 않고 초당파적 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증거를 심사하고 조사가 이뤄졌으면 좋겠다. 언론사는 완전히 빠지고 말이다. 이게 될지 안될지 모르겠지만, 결국 기자들이 끼어들어서 정의연 사태 때 엉뚱한 사람이 또 자살을 했던 거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싶다.
6.
제발 '포르노성 광란극'을 만들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특히 대학교 교수님들은 더욱 주의해주셨으면 한다. 당시 같은 교수인 조국을 난도질했던 분들 중에 나중에 겸연쩍게라도 사과 비슷한 걸 하신 분이 난 기억나지 않는다.
7.
조국 가족이 재판에 이겨서 뭐가 남겠나? 365일 내내 쥐어짜였던 그들의 트라우마에 대한 이 지독하고 악랄한 침묵의 스크럼을 짜던 작자들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멈추라고 도덕적으로 일갈하는 게 나는 정말로 공포스럽다.
8.
진실은 규명돼야 한다. 그리고 나는 '기자들'이 옆으로 빠지고 배제될 때 규명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마구잡이로 기사 퍼오는 악습도 배제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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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민주주의’의 이동
간밤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정말 세상 보는 눈이 사람마다 다 다르고, 사실보다는 자신의 마음이 가 닿는 곳, 자신의 신념이나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곳을 진실이라 여긴다는 해묵은 인식론이 맞구나 싶다.
나 역시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 마음이 좀더 가 닿는 곳을 더 세밀히 인식하고, 느낄 수밖에 없어 그 부분을 부각해서 쓴 글에 이런 내 생각도 편향적일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건만,
지금은 판단보다는 애도를 하는 것이 인간적인 예의라느니, 법적으로 고인은 피고소인일 뿐이지 아직 가해자로 판명난 것도 아닌데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자, 그간 언론의 공작으로 무고하게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처럼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답글들이 달린다.
그간 무고하게 당한 사람들로치면 고소하고서도 응당한 구명을 받지 못한 성범죄 피해자들의 수도 상당할 것인데, 나는 여성으로서, 그간의 사법적 판단에 있어 소홀히 취급되어온 역사가 깊은 성범죄 인정이나 형량의 불합리함에 더한 억울함을 느껴, 이번 사안에서도 혹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안을 드라이하게 보고, 고소내용의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자고 하는 것일 뿐. 나의 경우, 관련해서 고인에게 혐의 없음이 명백하다면 그때서야 진정으로 애도의 마음이 생길 것 같다는 이야기를 솔직히 써본 것이다.
불확실하니 분석은 접어두고 일단 애도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나처럼 혐의내용의 사실여부에 따라 애도의 마음을 보류하고, 법적으로는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다고 하나 고소된 내용이 진실인지 가려보는 절차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지닌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나는 그간 불합리한 인식과 판결에 억울함을 눌러왔어야만 했던 성범죄피해자들의 처지에 마음이 더 가고, 혐의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나는 차라리 이들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 싶은 것이다.
물론 고소내용이 거짓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고한 이를 성급하게 죄인취급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번 사안에 대한 내 판단력이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일 뿐.
그런 상황을 우려해서 한쪽에만 차려야 한다는 예의에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말을 꾹꾹 눌러담고 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각기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침묵하는 것이 덕인가? 그 생각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도 물론 있지만. 그렇다면 그 자신은 왜 내 의견에 느낀 부당함을 고인에 대한 예의라는 말로 포장하면서 그렇게도 당당히 밝히고, 침묵하지 않는 것인데?
그들은 그들 자신이 편향적인 인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언론의 술수에 놀아나고 있다고 믿는다. 술수에 놀아날 만큼 영향력 있는 사실을 내보내는 기사도 별로 없는 것 같더만. 이들은 자신들, 자기들이 지키고 싶어하는 신념과 같은 무리에 속해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의혹을 제기하는 것을 마치 인권과 민주정신을 탄압하는 것처럼 느끼는 듯 하다.
이는 사실 자기 자신의 자존심과 확신을 지키려는 태도이기에 이해는 간다. 나역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가치를 두고, 그에따라 세상을 보니까.
애도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가 가해자라고 특정해서 말한 것도 아니고, 정말 법대로 성추행 고소사건의 피고소인 신분으로 사망했으니, 해당 고소사건에 대해서만큼은 그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졌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다른사람들의 애도를 막고, 재판도 받지 않은 사람을 죄인이라 단정하는 것으로 읽혀지는가보다. 고인을 피고소인(잠재적 가해자)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고인의 유죄를 단정하거나, 그에 대한 애도 일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는 추론 과정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렇게 하지 말고, 조용히 침묵하며 애도하라 한다.
그들 자신도 조용히 침묵하며 애도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무엇이든, 합리화 하고 미화하려하고, 그 죽음을 인권과 민주적 가치의 가장 좋은 것으로 치장하려 하면서. 이 의혹 짙은 죽음은 최소한 그 고소내용이 확실히 밝혀지기 전까지는 인권이나 민주적 가치의 이름을 전용해서 쓸 수 없다고 보는 입장도 수용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또 민주주의, 인권, 이를 탄압하는 언론의 농락을 ‘주장’한다.
지금 민주주의나 인권의 모양새가 이를 주장해온 이들 자신들에 의해서 완전히 다른 국면에 그 가치를 옮아갔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진실한 민주적 가치나 인권감수성이 그들 자신에게만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그것들이 본인들에게만 존재한다고 믿고, 이를 부여잡고 있는 이들이 많이 보인다.
당신들이 그렇게 원하던 민주화를 통해서, 나이 어린 여성 의원들도 국회에서 나름 발언권을 얻었고, 그들도 자기 입장에서 할 말들이 있을 것인데, ‘어린, 여성’의원이라는 프레임을 또 덧씌우고 지금껏 듣지 못했던, 그러나 감추어져왔던 생소한 목소리들에 적응하지도 못하면서 오랜 기간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왔다는 이들을 보면 대체 그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인지,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지 궁금하다.
정의당이 노동자 보호 프레임에서 여성권익을 이야기하는 프레임으로 옮아갔다는 분석을 봤는데,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시대적으로, 필요적으로 아주 당연한 흐름이다. 이런 흐름을 ‘페미’라는 파벌적 용어로 오해하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오늘날 민주주의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당신들의 민주주의, 그때는 맞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흐름에 잘 적응못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야말로 그 모든 의혹이 사실이 아니어서, 고인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싶다. 그럼에도 이제 새로 터나가야 하는 민주적 가치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목소리들에 침묵하며, 앞선 민주적 가치의 화석에 예의를 차리기만 해야 한다는 의견들, ‘호통들’이 최소한 얼마나 비민주적인지는 짚고 싶다.
그러고보니, 나역시 내 의견에 비판적인 답글들을 비판하며 비판적인 답글을 사전 차단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나의 편향성을 먼저 반성하고 싶은데 참 그게 쉽지 않다. 각자의 의견을 어느 정도까지 존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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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7월 14일
<망자 인격 부관참시>
산 자에 대한 공격보다 망자에 대한 공격이 더 심한 경우는 처음 봤다. "실체적 진실의 추구"라는 이름 아래, 그리고 이른바 '피해자'의 권리라는 이름 아래 마음껏 망자의 인격을 실체적으로 도륙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수백만이 다른 수백만의 마음과 망자의 영혼을 엮어서 고문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반인륜 범죄의 경우에나 실행할 만한 일을 성희롱 문제에 그대로 대입해서 행하고 있다. 수백만 명이 집단 부관참시에 동참하고 있다. 조국 장관에게 온갖 '혐의'를 덮어씌우고 국사범 다루듯이 장관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인권을 파괴했을 때보다 더 심각하다. 그때는 국가 권력기관이 자행한 일이지만, 지금은 민간이 그 일을 실행하고 있다. 망자 인격 부관참시.
내가 정의당원이라면, 정의를 공부한 법대 출신이라면, 민주주의를 위해 젊은 날을 바쳤었다면, 절대 이 점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꼈던 후배, 그러나 눈이 먼 후배를 페삭한다. 그와 그의 '똑똑한' 정의당 동지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발언들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망자 부관 참시임을 결코 모를 것 같다.
끝까지 따져보고 싶은 원한을 가진 상대가 세상을 버렸는데도 그 원한을 장례식 날 다시 따지기 시작하는 개인은 "정의의 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사는 개인간의 정의 구현 관계, 또는 권리-의무 관계, 또는 죄와 벌의 관계에서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대응을 권한 바 없다. 인류 공멸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협량지국이고 파례지국이 되었다. 지독하게 잔인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것도 정의의 이름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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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주 7월 14일
우리는 한 사람을 평가할 때 하나의 실수로 인생 전체를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지속적으로 어떤 가치를 갖고 살았는지를 바라봐야 한다. 이 잣대는 법적으로 시비를 따지기 전에 사람 사는 상식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박원순 시장님의 삶의 궤적을 아는 사람들은 연일 보도되고 있는 기사의 제목을 봤을 때 경악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러실 분이 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싶어지고 만약 사실이라면 "어떤 실수가 있었겠지" 정도로 치부하고 싶어 한다. 이런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살아낸 이력 때문이다.
반면 이 건을 들고 나온 변호사의 이력은 변호사가 정치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추측 가능하게 한다. 처음에 변호사가 강용석이라는 말이 돌았다. 나도 강용석이 변호사인 줄 알았다. 가세연이 연일 숟가락을 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재련 변호사란다. 강용석이 떨어진 고기를 줍는 변호사라면 김재련 변호사는 사냥을 하는 쪽이다.
김재련 변호사의 이력을 보면 대략 소신이 아니라 자신의 출세와 이익을 좇았음이 보인다. 진보의 가치로 포장했으나 진보의 가치는 갑을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 호시절이었고 이후 타깃은 민주 정부를 향해 있다.
난 박원순 시장을 100% 믿지 않는다. 그런 짓?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순수 페미니즘을 가장한 정치 놀음은 이 사회의 문제 두 가지를 근본적으로 병들게 한다. 그 하나는 여성의 가치를 높이려는 미투 운동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짙어졌다는 것이다. 미투가 정작으로 필요한 여성들에게는 여전히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작동하지 않고 어느 한 편의 여성들은 자의든 타의든 미투로 상대 남자를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게 할 수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제대로 교육받고 하물며 정치판에서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던 여자가 몇 년을 당했다? 난 같은 여자로서 의심의 눈을 거두지 못하겠다. 그렇게 자기주장과 표현 능력과 지혜 미숙한 사람이 정치적 권력 구조에서 우두머리의 비서라는 게 말이 되나? 그것을 감수하고라도 그 자리에서 지켜야 할 생존의 이유가 도대체 뭔가?
내가 20대였던 1980년에는 무조건 당하고 찍소리 못하던 시대였다. 보호 장치가 없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있는 성추행은 다반사였고 직장 내 상사의 성추행은 거의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당한 여성들은 힘이 없거나 생존의 문제 또는 기타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 배경으로 깔렸다. 1980년대조차 그 외의 많은 지혜로운 여성들은 피할 수 있는 지혜를 꾀했다. 도무지 피할 수 없었던 이유가 뭔가? 다른데 취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력이 있는 여성들 아니었나. 4년을 왜 참나. 여기에서 "왜?" 이 물음은 굉장히 큰 비중을 갖는다.
그 부분에서 정치에서 닳고 닳는 것은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여자라고 무조건 피해자의 자리에 있지 않다. 이 땅의 모든 이슈는 정치적인 색깔을 띠고 있지만 정치가 다 더럽지만은 않다. 소신을 갖고 있는 정치인도 수두룩하다. 정의, 양심 등을 울리는 뇌가 전혀 다른 집단과 공생해야 하는 이유로 여당과 야당이 갈렸다. 이데올로기로도 갈라치기 되었다. 이 둘의 관계는 추가 달린 시계와 같다. 시계추가 저쪽으로 많이 가면 이쪽으로도 많이 올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다. 그만큼 더 단단히 무언가 준비를 한다는 거다. 문재인 정부 이후 한국의 적체된 문제가 다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 문제를 갖고 있는 기득권 세력들이 연합했다. 하나하나 제거하기 시작한 징후들이 여실히 보이지 않나?
청렴결백!! 도덕성 100%!! 이게 현 여당의 자격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속성은 다 거기서 거기다. 단지 그 속성과 어떻게 싸우면서 가느냐에 그 사람의 인격 수준이 있는 것이다. 싸우는 자와 싸우지도 않고 사는 자들에게 법과 언론은 참으로 요상한 저울을 가졌다. 법과 언론은 싸우던 자들에게 더 가혹하다. 여기에서 싸우지도 않고 잘못을 행하는 저들에게는 왜 미투가 일어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많은 이들이 기획되었다고 의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 궁금하다. 정말 그런지.
요즘은 웃기게도 지금껏 여당의 자리에 있었을 때 진보들이 내걸은 기치를 뿌리째 뽑으려던 자들이 야당이 되자 진보의 옷을 입었다. 그러니 진보로 자칭하던 지지부진한 당도 그들과 별다를 바 없어졌다. 현 여당이 진정한 보수당이 되어야 한다고 난 늘 목소리를 높였고 그에 따른 진보당이 나와야 한다고 했지만 현 여당이 보수의 옷을 제대로 입기도 전에 극우가 진보의 옷을 날름날름 입고 처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또 저들의 기획인가? 하는 의심이 또 드는 것이다.
이 즈음에서 여성들이여 정치에 이용당하고 또 자신들도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오해가 억울하다면 앞으로 단 한 번에 확실한 거절을 해라. 자신의 가치를 지켜라.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차곡차곡 남성의 잘못을 쌓아두지 않기를 바란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자신은 이중으로 이용의 대상이 되고 상대는 정치적 생명과 함께 생물학적인 생명까지도 잃는다. 미투의 순수함도 사라질 수 있고, 페미니스트들에겐 휴머니즘이 없는 것으로 인식될 위험에 처한다. 접근 방법을 제발 천박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투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여자들의 신문고다. 똑똑한 여성들이여 그 북은 그들에게 주고 그네들은 당당하게 처신해서 미투를 할 필요도 없는 삶을 살아라. 그럴 수 있었던 여성들의 미투!!!엔 늘 왜?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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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il Kim 7월 11일 오후 10:14
7/11 생각: 정의당의 미래
1.
2015년 상하이에서 노회찬 의원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뒷풀이 자리에서 술도 한 잔 하면서 진보정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와 노동에 대한 정책공약집은 새누리당, 민주당, 정의당의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대단히 유머러스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 부분이 정의당이 가지고 있는 큰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정당과 정책적으로 차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힘든 진보 정당은 지지세를 넓혀가기 힘든 현실적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2.
우리나라의 진보정당은 재벌위주의 경제성장 정책에서 소외 받아온 노동자를 위해서 탄생되었다.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정의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의 계보에서 당의 정체성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고 때문에 당의 주요한 간부들도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심이었다.
물론 80년대 운동권을 대표하는 NL계열이 진보정당에서 가장 많은 대의원들과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들도 학생운동시절과 달리 정당에 들어와서는 노조와 노동정책에 가장 많은 관심을 두고 활동했다.
게다가 통합진보당이 강제 해산된 후 그들은 뿔뿔이 갈라져서 각각의 정치적 행보를 펼치고 있다. 즉 과거와 같은 결속력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3.
통합진보당 시절까지의 진보정당은 노동운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정의당도 처음 창당이 되었을 때는 동일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2013년 7월 21일 진보정의당의 전당대회때 노회찬이 공동대표수락 연설에서 보여준 ‘6411번 버스’ 이야기를 보면 정확하게 정의당이 추구하는 목표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보여준다.
새벽부터 6411번 버스를 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인데 정말 명연설이다. 한번 보시라. (댓글 링크 참조)
4
정의당이 지금처럼 세력을 갖춘 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나름의 운도 따랐다. 통합진보당이 해체가 됨으로써 진보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대표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과 유시민과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국민참여당의 당원들이 함께 정의당으로 입당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국민참여당 계열의 당원들은 정의당에서 가장 많은 숫자와 가장 많은 당비를 냈지만 당내에 어떠한 지분도 없는 호구노릇을 했다. 운동권이나 활동가 출신이 아닌 일반 국민들 중심이라 '참여계는 창녀'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사실은 유시민이 당에 몸을 담았지만 당직을 맡지 않았기에 지지자들도 유시민과 똑같이 행동한 것이다.
5.
민주노동당 시절과 통합진보당 시절 대의원 숫자와 조직력에 밀렸던 PD운동권 출신의 심상정은 정의당 창당 이후 당권과 지분확보에 집착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정의당은 정체성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2015년 상반기 정의당은 노동당과 통합을 했다. (정확하게는 노동당에 통합을 원하는 진보결집파가 나가서 정의당에 합류를 했고 그들은 정의당에 주요한 간부가 되었다)
노동당은 심상정, 노회찬이 통진당에서 나와 만들었던 진보신당에서 또 탈당해서 정의당을 창당할 무렵 남아있던 진보신당의 잔류파와 사회당이 합쳐져서 만든 정당인데 홍세화, 박노자 등 좌파 지식인들이 몸담고 있었고 사회주의 강령이 있지만 사실은 여성주의와 소수자운동에 관심이 많은 활동가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는 정당이었다.
6.
나는 정의당과 노동당이 통합한 2015년 하반기 부터 노동당의 주요 강령에 해당하는 여성주의와 소수자운동이 정의당의 주요한 노선으로 자리잡았다고 생각한다.
2016년 5월에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여성계와 정의당 등에서는 ‘여성 혐오 살인사건’으로 규정한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젠더갈등이 본격화 되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를 거치면서 여성주의가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특히 래디컬(radical) 페미니스트들이 정의당에 많이 합류했다고 보고 있다.
7.
2017년 리얼뉴스라는 매체에 의해 정의당내 주요 모임인 ‘저스트 페미니스트’의 단톡방이 보도된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꽤 충격적이었다.
동성애 합법화를 반대하는 문재인에 대한 인신공격과 욕설, 정의당 당원게시판 폐쇄 모의, 노회찬에 대한 공격 모의, 자신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당원을 제재하는 모의 등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워마드가 사용하는 유행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한 것이다.
가령 ‘한남충 재기해’라는 말은 ‘한국 남자는 죽어버려라’는 지독한 욕설인데 그들은 그런 말들을 너무 일상용어처럼 사용했다.
8.
이 단톡방은 당내 포럼(혹은 모임)이지만 사실상 여성주의자들로 이뤄진 특정 계파라고 해도 무방하고 주요 당직자와 여성운동 활동가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정의당과 노동당이 통합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당에 합류했으며 젊고, 급진적이다.
즉 심상정은 과거에 NL계열의 대의원들의 조직력에서 밀린 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치적 우군으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대거 합류시켰고 그 결과가 이번 21대 총선의 비례순위로 나타난 것이다.
대부분의 정의당원들이나 시민투표단은 류호정, 장혜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여성과 청년의 선택지에서 직관적으로 투표했는데 그래서 1.76%와 1.62% 밖에 받지 못했지만 1, 2번을 받아 이번에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그 절차와 과정은 전혀 민주적이지도 않다.
9.
지난 7월 8일 국회에서 ‘문화콘텐츠포럼’이라는 것이 만들어졌고 나도 구경을 갔는데 그날 류호정 의원을 처음으로 보았다. 문화체육부 장관과 19명의 국회의원 그리고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는데 류호정은 그 속에서 외로워 보였고 또 불안해 보였다.
정청래, 조승래, 설훈, 도종환, 홍준표 같은 다선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초선이라도 이수진, 김용민, 김남국에게는 사람들이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려고 줄을 서 있었지만 류호정에게는 거의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는 기본 행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가장 먼저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10.
그런데 박원순 시장 조문 관련해서 이번에 올린 글을 보면 확실히 류호정은 요즘 세대답게 온라인에서의 맨탈은 강해 보인다. 어쩌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대중들 앞에 서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온라인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에는 익숙한 것일 수도 있겠다.
누가 조문을 가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굳이 조문을 안 가면 그만일 것을 굳이 그런 글을 올려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도 여성주의자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인 셈이다. 그것은 류호정에 이어 동일한 글을 올린 장혜영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류호정과 장혜영의 이런 모습이 정의당의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자를 위한 정당에서 여성주의를 위한 정당으로의 탈바꿈 말이다.
11.
나는 정의당이 더 이상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정당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정의당의 정책과 노선은 여성주의와 소수자운동 중심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정부여당이 정의당에서 정책적 차별을 두기 힘든 수준의 친 노동자 중심의 정책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과 심상정 개인의 정치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나는 여성주의와 소수자운동을 주도하는 정당이 있는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충분히 필요한 담론이니까 말이다. 다만 지금과 같은 수준의 국회의원 배출과 정치적 영향력은 앞으로 어려울 것 같다.
12.
일베가 지지하는 미래통합당은 극우포지션
워마드가 지지하는 정의당은 극좌포지션
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은 중도와 진보의 포지션에서 합리적인 정책과 선명한 노선의 경쟁을 해 나가면 좋겠다. 머지 않아 그렇게 될 것 같다.
다만 유시민, 노회찬, 심상정이 함께 의기투합해서 만든 노동자를 위한 정당이 이렇게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 보아야 하는 것은 대단히 안타깝다.
+++내용 추가+++
13.
일베 극우, 메갈 극좌라는 제 용어적 해석에 반론을 하시는 분들이 많아 이미지를 하나 추가합니다. 극과 극은 만난다는 정도로 이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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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진실/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2020.07.14 03:00
어떤 죽음은 진실을 드러내지만 어떤 죽음은 진실을 은폐한다. 한 사회가 죽음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과정은 곧 사회의 윤리를 재생산하는 담론투쟁과 사회적 교육의 장이 된다. 장례의식은 죽음에 대한 공론장을 만들고, 공공의례는 그 죽음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며 헛되지 않았음을 함께 기억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다. 지금 우리가 함께 목도하고 있는 한 죽음과 논란 역시 그런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공적 대의를 위한 죽음은 어리석고 무모한 것으로 해석되기 시작했고, 반면 특권층의 죽음은 오직 사적인 것이라도 권력의 과시와 자본의 사회적 분배 과정으로 동원되어 과잉 해석되고 있다. 누군가가 죽음에 이른 자리에서 우리들의 더 큰 삶이 열린다는 공동의 의미는 사라지고, 죽음을 점점 개인적 차원의 소멸, 종결, 그리고 절대적인 무(無)로만 인식하게 된 것은 ‘개인의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 되는 각자도생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의 일이다. ‘죽음을 넘어서’를 생각할 수 없다면, 내가 죽은 다음에 올 다른 세계를 꿈꿀 힘도 사라진다. 죽음이 끝이라는 교훈을 남기는 사회는 위험하고 불행하다.
‘죽으면 끝’이라는 사유는 죽음이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도 쉽게 귀결된다. 죽음과 죽임에서 은폐의 논리는 동일하다. 죽음을 종결의 암막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피억압자들은 늘 이 암막에 맞서 죽음을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만들기 위한 싸움을 잉태해왔다. 광주의 죽음은 해방의 꿈을 낳았고, 전태일의 죽음에서 수많은 전태일이, 김용균의 죽음에서 수많은 김용균들이 태어났다. 지금 성폭력 사건에서 진실을 ‘말하는 여자들’은 말할 수 없었던 수많은 여자들의 죽음으로부터 태어난 존재들이다.
‘사람이 죽었다’는 외침은 늘 죽임당하는 이들의 말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외쳤다. 사람이 죽었다고. 여기 사람이 있다고. 그때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죽었다’와, 지금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을 향한 ‘사람이 죽었다, 예의를 갖춰라’가 똑같은 말일 수 없다. 스스로 사회의 어른을 자처하는 이들이 ‘어린 것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이 죽었다’는 준엄한 호통과, 질문하는 이들에게 ‘침묵하고 애도하라’ 가르치는 사람됨의 윤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그 예의와 도리는 억압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남성 엘리트 집단에서 장례의식은 형제적 결속감을 확인하고 유사 가족적 친분관계를 사회적으로 재생산하며 특권적 카르텔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것은 슬픔과 고통을 나누는 가난한 사람들의 상부상조와는 다르고, 모든 살았던 존재의 죽음 앞에서 숙연한 마음을 갖는 생명에 대한 예의와도 다른 것이다. 애도의 공표는 고인이 가졌던 권력과 상징과 관계에 대한 자기 지분을 표명하는 공공연한 수단이고, 사적 회고는 그런 사람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자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준다. 시민사회 카르텔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의 애도는 어떠한가. 자신이 당한 폭력과 진실을 드러내어 말하고자 했던 당사자가 여전히 고통과 두려움 속에 남아 있다. 공적을 칭송하는 소리가 높고 추모 의례가 과시될수록, 그의 고통과 두려움도 더 커질 것이다. 아무리 큰 슬픔이라도 크게 울어선 안 될 때가 있다고 배웠다. 피해생존자 앞에서 삼가야 할 언행은 지금은 예외일까.
과오는 떠난 이에게 모두 넘기고, 공적만 남은 이의 유산으로 가질 수는 없다. 지적 유산이든, 명예의 유산이든, 관계의 유산이든, 모든 유산에는 빚도 포함된다. 정말로 존경하고 좋아했다 말한다면, 그의 빚을 대신 갚고 다하지 못한 책임을 대신 떠맡는 것이 우정의 이름으로 해야 할 도리다. 죽음이 진실을 덮지 않도록 하는 것도 그 도리에 포함된다. 그것이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게 인간에 대한 예의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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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won Jin 7월 13일
[권력형 성범죄]
자수합니다. 몇 년 전(그 때 권력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종로에 있는 갤러리에 갔다가 평소 존경하던 분을 발견했습니다. 한 분도 아니고 두 분이나! 냅다 달려가서 덥석 팔짱을 끼는 방법으로 성인 남성 두 분을 동시에 추행했습니다. 증거도 제출합니다. 페미니스트인 제가 추행했다고 말했으니 추행입니다. 권력형 다중 성범죄입니다.
질문 : 팔짱 끼는 것도 추행이에요?
답변 : 여자가 추행이라고 주장하면 추행이라니까!
질문 : 님 여자에요?
답변 : 머시라? 젠더 감수성 침해! 빼애애애애~~~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 판결로 확정된 진정한 피해자가 일반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그에 대한 직업인으로서의 격려 방법 및 업무처리 패턴은 다음 다음 포스팅으로 게시하겠습니다. 현 상태에서 본인이 주장하는 내용 관련 실체진실을 확인받는 방법은 여론 재판이 아니라, 유족을 상대로 민사소송(손해배상채무는 상속됩니다.)을 해서 판결문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민사 재판도 기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진행하면 2차 가해니 3차 가해니 하는 것 없습니다. 민사재판에서도 증거능력과 신빙성을 다투게 됩니다. 그리고, 주장 자체로 그러한 행위(예컨대 팔짱을 끼면서 사진을 촬영한 본좌와 같은 행위)가 손해배상 책임을 발생시키는 불법행위인지도 법관이 판단하게 됩니다. 본인의 주장과 진술 및 증거가 진실한지에 대해 피고측 법률가들이 다투고, 결론은 제3자인 법관이 판단해서 내린다는 점에서도 형사재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편집된 증거나, 원문을 확인할 수 없는 자료의 경우 신빙성이 부인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유사합니다. 큰 차이는, 형사는 자기 비용 안 들여도 국가가 다 알아서 진행하지만, 민사는 소 제기 단계와 사실조회신청 단계에서 필요한 비용을 본인이 지불해야 하고, 패소할 때에는 상대방의 소송비용까지 자기가 부담한다는 것, 그리고 원칙적으로 비공개로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론재판'은 '고소장만 내 주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해요' 집단이 두루 연맹을 맺고 있어 자기 비용이 전혀 안 들고, 진실일 필요도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고소장 접수 사실을 언론에 알리고, 고인의 발인일에 기자회견을 하고, 선정적 증거가 있다고 암시하면서 2차 회견을 또 열겠다고 예고하는 등 넷플릭스 드라마같은 시리즈물로 만들어 '흥행몰이'와 '여론재판'으로 진행하면서도 그에 따른 책임은 부담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인다면, 해당 분야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는 회의와 의심을 가지게 만드는 패턴으로 판단될 여지가 높습니다. 진실을 확인받는 것이 중요한지, 존경받는 공직자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여론재판이 중요한지 본인의 선택은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고, 시민들은 그것을 비언어적 신호로 삼아 스스로 진실을 판단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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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희 7월 13일
성범죄 피해를 호소한 여성의 글을 듣고 읽었다. 가장 답답하고 한심하고 화가 났던 것은, 직장 안에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원순 시장을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르지만, 만약 주위에서 단 한 명이라도 충심을 다해서 언질이나 조언을 했다면 분명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행동을 멈추었을 사람일 것이라는 믿음 정도는 있다.
수년 동안 지속적이었다는 것은 범죄의 적극적 공모자는 아니더라도 방조자 내지 외면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의미이리라. 그것도 권력이라고, 귀 막고 입 닫은 부나방들의 몰골이 궁금하다.
며칠 동안 이런저런 표현과 견해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렇게 판단할 수 있지’ 하는 부분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읽기만 했다. 하지만 꽤나 많이 접했던 ‘무죄 추정’이라는 단어는 갈수록 누추하게 느껴졌다. 특히 오늘은.
내가 정말 그럴 권한이 있다면, 여전히 무죄 추정을 강변하는 자들의 딸자식을 바로 오늘의 서울시 공무원으로 취직시켜 주고 싶다.
그 딸이 고통을 호소하는 비극을 겪어도 부모인 그대는 무죄 추정의 법조문을 펼쳐 주기 바란다. 아들은 안 된다. 잠재적 범죄자는 하나라도 줄여야 하니까.
내가 [뉴스앤조이]를 하면서 기자들에게 지긋지긋 반복한 얘기가 있다. “남들이 다 ‘의혹’을 제기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조급해 하지 말고 시간이 걸리는 한이 있어도 제기된 의혹이 사실인지 아닌지 진실을 규명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건 공인이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고, 지금은 그런 거에서 자유로우니까 ‘무죄 추정’ 이따위 방패는 내팽개치고 편하게 생각하고 표현하려 한다. 나에게는 딸이 둘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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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7월 10일 오전 9:08 ·
아, 아프다
30년 전처럼 (역사문제연구소 사람들과) 남양주 수동계곡에서 개울물 발담그고 막걸리 마시며 취해서 떠들며 세상 욕하다가 잠오면 계곡 옆 들마루에 낮잠 늘어지게 자는 필부로 살았더라면...
기왕 사학도로 전향했으니 동교동 집에 쌓아놓았던 수만원의 현대사 책들과 씨름하는 국가보안법, 형법, 행형, 고문역사, 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살았더라면....,
의욕와 열망이 크니 무슨 일이든 했겠지만 ( 1993.1.1 이이화 선생 세배다녀오는 길, 기존 사회운동이 대안이 될 수 없으니 새로운 시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의기 투합하여), 노동현장에서 막 나온 청년들을 만나, 시민운동(참여연대)의 길로 들어선 과정에 있었던 내 죄도 크다. 그냥 시민운동을 계속 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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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7월 14일
박원순 시장을 보내고 나서,
며칠 동안의 극심한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나는 박원순 같은 사람은 당장 100조원이 있어도 복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시장의 죽음이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 제고와 권력에 의한 성폭력을 근절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만, 이 사람이 죽음으로써 우리 국가와 사회가 입은 피해, 사회적 약자들이 앞으로 입을 피해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는 역사이기 때문에 역사는 하루아침에 쉽게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권력자가 된 이후의 그에 대해서 나는 잘 모릅니다만, 옛 기억으로는 술도 못 마시고, 범생에 법률가 특유의 소심함도 있을 뿐더러, 성적인 농담도 할 줄 모르던 그가 성폭력 가해자가 된 사실을 아직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가해와 피해의 논쟁은 이제 멈추고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립니다. 서울시에서 박시장 가까이 계셨던 분들은 박시장이 계획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 지금 추진 중인 일 중에 중단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없는 한국이 어떻게 그의 뜻을 이어나갈지 모두가 고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국토부는 서울 그린벨트 풀어 2만호 짓겠다는 계획 당장 그만 두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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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7월 14일
말할 수 없는 착잡함 속에서 3일을 보냈다.
박원순 전시장의 ‘극단적 선택’의 소식 앞에서 나는 그의 생애에 걸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과 헌신, 그리고 그 업적과 의의를 생각했다. 그리고 부천서 성고문사건과 서울대 신교수 성폭력사건의 피해자 변호인이었던 그가 왜, 어쩌다가 스스로 ‘위력에 의한 성추행’의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모순이고 이율배반이다. 어쩌면 내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모순과 이율배반을 궁금해 하듯, 그 역시 그 모순과 이율배반에 괴로워했고, 대답을 찾지 못한 그는 모든 걸 한 순간에 끝내는 방식으로 그 모순과 이율배반의 사슬을 끊은 것인지도 모른다.
자살은 고독한 것이다. 아니 자살보다 한 사람이 자살로 자신의 삶을 한 순간 무화시키기로 결심하는 그 과정이 고독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고독의 무게는 다른 사람은 측량할 길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살은 생전의 그의 고통은 물론 모든 잘못과 책임으로부터도 그를 놓여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삶에 대한 애착을 이기지 못하는 나는 자살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개인적 고통 때문이건 정치적 사회적 명분과 사명의 실현을 위해서건 나는 절대로 자살하지 못한다. 누가 나를 죽여 불가피하게 삶을 끝내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욕된 연명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열사이건 필부이건 노인이건 청소년이건 나는 스스로 죽음을 결행한 이들에게, 그들의 절대고독의 위력 앞에 말할 수 없는 경외감과 더불어 어쩔 수 없는 열패감을 느낀다. 박원순 전시장의 ‘자결’이 내게 준 것은 그 생애의 말할 수 없는 낙차가 준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이런 경외감과 열패감의 복합감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살에 이르는 절대고독의 무게가 아무리 큰 것이라 해도 그 무게가 곧 모든 자살을 불가침의 성역 속에 두고 보호해 주지는 않는다. 노무현 전대통령 때도, 노회찬 전의원 때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박 전시장의 극단적 선택의 개인적 불가피성을 이해하면서도 나로서는 자살이 곧 그 개인적 곤혹감과 자기 분열감, 그리고 사회정치적 평판과 책임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나라면 우선 삶에 대한 구차한 애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말로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준 피해에 대해 반성하고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느낀다면, 그리고 정말로 내 내면의 깊은 안쪽에 자리 잡은 빛과 그림자의 모순과 이율배반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다면 절대로 자살은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속죄하며 그에 합당한 형벌과 사회적 지탄과 온갖 모욕을 달게 받으며 차라리 이 모든 것을 다 감내하는 일개인으로서 스스로 묻고 대답하면서 질긴 고독과 싸우는 기나긴 길을 선택할 것이다. 그는 왜 마지막 남긴 유서에서조차 피해를 입은 ‘그 사람’에게 사죄를 구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 사람’은 또 얼마나 힘들고 고독했을까. 남성인 나는 살아오면서 도대체 어떤 종류이건 성폭력이라곤 당해 본 적이 없으니 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다만 고문을 당했던 경험으로부터 내 신체가 한갓 사물로 취급되고 내 정신이 타자에 의해 마음대로 능멸당할 때의 느낌이 어떤 것인가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 폭행이든 추행이든 희롱이든 여성들이 힘 있는 남성(들)로부터 신체적, 정신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하여 한갓 성적 대상으로 추락했을 때의 그 느낌은 내가 고문을 당하면서 느낀 그 치욕스런 기분과 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가 어쩌면 자기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존재이고 동시에 어쩌면 평소 존경했던 사람이라면 무력감과 수치심에 더하여 그 사람은 인간에 대한 배신감 또한 절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사람은 이를 자기 잘못으로 돌리고 한없는 자책 속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몇 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법에 대한 호소를 선택했을 리가 없다. 그 사람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피해자임에도 평생을 마치 죄인처럼 트라우마의 늪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처럼 오랜 고통 끝에 자신이 피해자임을, 자신에겐 잘못이 없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는데 어떤 책임도 묻지 못하고, 어떤 사죄도 받지 못한 채 가해자가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로써 그 사람은 영원히 사죄받지도, 용서하지도 못하는 피해자가 되었다. 마치 영화 <밀양>에서 자신의 아들을 유괴해 죽인 범인이 하나님에게 잘못을 빌어 속죄를 받았다고 하는 상황에 직면한 엄마의 처지와도 같다. 오히려 그 사람은 가해자를 자살로 몰고 간 또 다른 의미의 가해자로 비난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박원순 전시장의 자살은 그 사람에게는 어떤 위로도, 어떤 속죄의 행위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가해-피해의 비대칭 관계로부터 가해자인 박시장만 홀로 빠져나감으로써 그 사람만 영원히 비대칭적 관계의 멍에를 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그 사람에게는 박시장을 성대하게 추모하는 일이나 자신을 거꾸로 가해자라고 비난하는 일만이 아니라, 박시장의 자살 자체가 가장 치명적인 폭력으로 느껴질 것이다. 박 전시장의 자살은 그 사람에게는 가해자 측의 증거인멸 행위이며, 동시에 2차 가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한 순간에 버린 박 전시장의 선택은 그의 마지막 ‘실존의 기투’로서 섣부른 포폄에 맡길 일은 아니다. ‘그 사람’의 결단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 두 사람이 겪은 고독과 고통은 자기 한계 내에서 각자에게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두 사람 자신이 아닌 제3자들에게로 향하게 된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은 애도되고 추모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박 전시장에 대한 애도와 추모는 그 사람의 사죄 받을 수도, 용서해 줄 수도 없게 된 고통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이 문제 앞에서 타자인 우리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평생을 반독재운동과 민주적 시민운동에 몸바쳐왔고, 근 10년 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수장으로서 발군의 리더십을 보여 온 박원순 시장에 대한 애도와 추모를 가로막거나 억압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애도와 추모는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인 한,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이든 방해받거나 비난받을 수 없다. 그리고 박원순 전시장의 생애의 대부분이 ‘공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애도와 추모가 공적 내용과 형식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 역시 어느 정도는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박 전시장에게는 삶의 어두운 그늘 한켠에서 일어난 한갓 ‘추문’이겠지만 ‘그 사람’에게는 생애 전체에 걸친 ‘피해’이고 ‘고통’이 된 그 사건 역시,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박 전시장의 죽음 역시 개인 간의 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특수한 권력관계 속에서 일어난 공적인 사건이라는 사실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안타깝게 스스로 목숨을 버렸지만 여전히 박원순 전시장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사회적 강자이고 그 사람은 이름 없는 약자이다. 우리는 약자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아이러니칼하지만 박 전시장의 일관된 신념이기도 했다.
따라서 박 전시장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쩔 수 없이 공적으로는 적절한 제한과 삼감을 통과한 애도와 추모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가 박 전시장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는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 사람의 치유에 참여함으로써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박 전시장의 장례가 서울시라는 공식 기관의 ‘기관장’으로 치러지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에게 공감한다.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졌다면 더 좋았을 것이며, 설사 공적 형식을 갖추더라도 다른 제3의 방법은 없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우리 사회가 고인이 된 박 전시장을 대신해서 할 수 있는 최초의 예의가 될 것이고, 어느 경우라 해도 박 전시장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념을 표현한다는 핵심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감성으로는 애통하고 참담한 기분을 좀처럼 누르지 못하겠다. 하지만 박 전시장에 대한 이런 나의 애도는 어쩔 수 없이 ‘낡았다’는 것 또한 느낀다. 확실히 한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이젠 우리 사회도 어느 샌가 커다란 사회적 위업을 쌓은 저명인사의 명예와 이름 없는 한 여성의 명예에 어떤 차별도 우선순위도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세대나 그 윗세대에게는 매우 소중했던 구국의 위업, 경제기적의 위업, 민주화의 위업 등 이른바 대의에 대한 투신과 희생과 헌신으로 이룬 수많은 ‘대문자의 위업’들이 지닌 가치는, 그 ‘위업’의 뒤안에 존재했던 이름없는 ‘작은 존재들’의 눈물과 아픔의 가치와 엄밀히 대조되고 비정될 때에만 그 의의가 인정될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이상 살아남기에 급급한 세상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물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화급한 과제’를 앞세운 가부장적 위세와 그것을 보장하는 모든 시스템들은 이제 전면적으로 성찰되고 폐기되는 수순이 밟아져야 하며, 그것은 어쩌면 이러한 ‘살아남기’ 식의 모든 가부장적 위계체제의 모태인 근대적 국민국가체제와 무엇보다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대한 근원적 문제제기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피해자 ‘그 사람’의 입장을 앞세워 박 전시장을 한갓 성범죄자로 평가절하하는 일부의 흐름이 야속한 것이고 이를 기화로 박 전시장을 모멸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또 다른 일부의 흐름이 야비한 것이라면, 박 전시장의 생애의 위업을 앞세워 피해자 ‘그 사람’을 모멸하고 재가해하는 흐름은 범죄적인 것이다. 그리고 박 전시장에 대한 애도와 추모는 투사세대들의 후일담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삶에 어룽졌던 빛과 그림자, 그 모순과 이율배반을 성찰하며 다시는 그러한 분열이 용납되지 않는, 아니 그러한 분열이 발생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다짐으로서 행해질 때만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박 전시장의 모순된 삶에 의해, 앞 세대의 가부장들이 누렸던 부당한 권력에 의해 전존재가 형언할 수 없는 위기에 빠져버린 바로 ‘그 사람’의 평범한 삶을 되돌려놓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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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il Kim 7/13
박원순 고소인 기자회견을 본 소감
1.
조국 일가의 각종 수사와 기소 관련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는 생략한다. 대부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책으로 남겼다. 한 권으로 부족해서 추가로 썼고 곧 나온다. (우선 책 광고부터 한번 했다. 미안하다) 조국 일가의 재판 과정과 조범동 1심 판결을 통해 당시 언론과 대중들의 광기가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누구도 그때의 광기에 동참했던 이들 중에 사과 혹은 사소한 오류의 인정이라도 하는 이가 있었나? 없다. 그냥 뒷짐지고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도 “그런 의혹이 생기도록 한 조국이 잘못”이라는 마지막 궁시렁을 멈추지 않으면서 말이다.
2.
윤미향과 정의연 관련해서 얼마나 언론과 온라인에서 뜨거웠는지 기억난다. 오래된 일 같지만 아직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검찰이 정의연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것은 지난 5월 20일 하필 수요집회가 열리던 날 전격적으로 진행했는데 이 또한 의도적이었다고 판단한다. 수요집회의 의미를 퇴색시키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에는 윤미향만 피고발인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후 안성쉼터를 포함해 온갖 내용들이 언론에 보도가 되고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윤미향은 조국 이후 최대의 파렴치한으로 등극했다.
3.
그 압수수색을 하고 약 1개월이 지난 6월 22일 당정청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윤미향이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시절 여성가족부 지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정청의 발표이니 언론과 윤미향을 비난하던 이들은 셀프조사라고 비아냥 거렸다. 그로부터 또 20여 일이 지난 현재까지 정의연과 윤미향 관련해서 여전히 나온 것은 없다.
4
검찰 수사 중이니까 언론이 수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일까? 그럴 리 없다. 기자들이 어떤 족속들인데. 조금이라도 수상한 것이 있다면 내부빨대 통해 듣고 이미 도배를 할 텐데 나오는 것이 없으니 침묵하는 것이다. 온갖 비리의 소굴이라면서 정의연과 윤미향을 비토한 언론과 반대편 진영의 사람들은 지금 먼 산 바라보고 있다. 검찰 수사의 결과가 원하는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또 모른 척 할 것이다.
5.
박원순 시장의 죽음과 그 고소인에 대해 나는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 않다. 현재까지는 중립이라는 뜻이다. 다만 언론(과 정의당)에서는 처음에 ‘피해자’라고 했다가 그게 법리적으로 틀린 말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피해호소인’이라는 이상한 말을 쓰기 시작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피해호소인’이라는 말은 법률사전에도 없고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한 마디로 고소인이라는 단어로는 전하려는 메시지의 임팩트가 약하니까 ‘피해호소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서 쓴 것이다. 당연히 박원순 시장을 파렴치한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용어까지 만들어서 쓴 것이다. 이 피해호소인이라는 말을 민주당과 청와대에서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에 쿠데타나 살인보다 성 관련 사건이 더 민감하고 그래서 조심스러워 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것도 정상적인 것 같지는 않다.
6.
그 고소인의 기자회견이 오늘 있었다. 원래 미투란 서지현 검사, 김지은 씨처럼 실명을 밝히고 하는 것이지만 사안의 특수성으로 인해 익명으로 그리고 변호인이 대신 기자회견을 하는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또한 고소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단 고소인을 보호하기 위해 고인을 추모해서 안 된다는 논리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어째든 고소인의 법률 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는 오늘 기자회견은 했고 박원순 시장은 4년 동안 고소인에게 지속적인 성추행을 했으며 이는 언론에서 기정사실화 했다. 물론 사실이라면 박 시장이 잘못한 것이고 지금 법적으로 단죄할 수 없으니 그의 명예가 완벽하게 실추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7.
그런데 난 오늘 기자회견을 보고 도리어 이상했다. 기자회견을 하는데 증거를 하나도 내 놓지 않은 것이다. 변호인단이 증거라고 제출한 것은 그들이 직접 포렌식한 휴대폰의 일부 내용물이 전부이다. 휴대폰을 통째로 제출한 것도 아니고 자체적으로 포렌식해서 보여주고 싶은 것만 경찰에 제출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을 강제 초대해서 성추행했다는 증거로 제출한 텔레그램 이미지는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 괜한 오해를 받기 싫어 부언하자면 고소인이나 변호인이 이미지를 조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추행의 증거로 텔레그램 이미지를 선별적으로 포렌식해서 내는 것은 증거능력으로 대단히 미약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나 시장님이 텔레그램으로 초대해서 비밀대화 했다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얼마든지 대화명도 변경할 수 있는 것이 텔레그램의 기능이다.
8.
당사자도 없으니 증인도 없는 것이고, 증거물이라고 보기에 너무 미약한 것을 내 놓고 고인의 발인이 있는 날 기자회견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나로서는 정치적인 목적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증거 공개를 일주일 미루는 티징기법까지 선보이는 것은 최대한 여론과 대중의 관심을 끌고 가려는 의도이다. 박원순 시장은 이 사건에 대해 해명도 할 수 없고 오늘 발인까지 했으므로 부관참시 하겠다는 의도라 생각한다. 모르겠다. 다음 주에 새로운 증거로 직접적인 문자 메시지나 확실한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것 같다. 하지만 박원순 시장은 그 사이에 이미 여론재판이 끝날 것 같다.
9.
이 과정에서 언론의 행태를 또 보자. SBS는 피해자가 ‘고소인 말고도 여러 명 있다’고 피해자가 직접 밝혔다고 보도했다. 가짜뉴스다. 고소인은 한 명이고 다른 피해자는 없다고 변호인이 밝혔다. 중앙일보는 박원순이 피소인이 된 것을 청와대에서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역시 가짜뉴스다. 청와대에서는 피소사실을 통보한 적이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런 것이 바로 언론의 광기이다.
10.
끝으로 고소인의 변호사는 김재련인데 그녀는 화해치유재단의 이사였다. 화해치유재단은 박근혜가 아베와 졸속으로 합의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만든 재단이다. 김재련의 남편은 모 언론의 간부였는데 그렇다면 오늘의 기자회견이나 금요일 이상한 기사들이 미리 보도가 되었던 이유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 역시 실체적 진실이 밝혀졌으면 좋겠다. 고소인이 정말 성추행 피해자로 고통 받고 있었다면 고인의 명예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할 내용은 없다. 하지만 상기 언급한 내용처럼 현재까지는 개운치 않은 정황들이 너무 많다. 증거를 공개할 거면 빨리 공개하고 아니면 조용히 경찰 혹은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맞는데 언론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현 시국에서 가장 분노를 유발하는 것은 쓰레기 언론들이다. 이 건은 나는 좀 더 상황을 지켜보면서 관련한 의견을 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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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석 7월 13일 오전 8:48 ·
[박원순의 영결식을 생각하면서...]
나는 1980년대 후반을 독일 중부지방 헤센(Hessen)주의 기센(Gießen)이라는 도시에서 보냈다. 헤센주의 대표적인 도시가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사무소에 가야 할 일이 생겨서, A5 고속도로를 타고 천천히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라디오를 켰다. 헤센주의 어느 유명하지 않은 정치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하는데, 마침 장례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헤센방송국(hr, Der Hessische Rundfunk)은 브람스의 독일레퀴엠을 내보내고 있었다. 비오는 아침에 일어나 박원순을 생각하니 옛날 일이 떠오른다. 유튜브를 찾아 독일진혼곡을 다시 듣고 있다. 박원순은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 되었다. 그를 더 많이 돕지 못한 것이 한이 되는구나. 박원순은 서울시민들의 친구이자 스승이자 머슴으로 일했다. 아니 박원순은 온 국민의 친구이자 스승이자 유능한 머슴이었다. 머슴을 자처했던 박원순은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것이 분명하다. 특히 시민운동과 서울행정의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너무나 강렬한 삶을 사느라 지쳤는지도 모른다. 65년의 삶은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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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근 7월 14일
[나는 박원순의 장조카다.]
누가 그러더라. 장례식장을 가면 고인이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고. 박원순 시장의 장조카인 나는 상주인 고인의 아들 주신이가 오기 전까지 상주역할을 해야 했다. 상주석에 서서 조문 오는 많은 분들을 맞았고 감사 인사들 드렸다. 빈소가 차려지기 무섭게 대통령의 조화부터 3부요인의 조화가 속속 도착했다. 이외에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조화가 도착했고 부득이 하게 대부분의 조화는 리본만 떼어 걸어둘 정도였다. 나 자신이 삼성출신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조화가 복도 출입구 맨끝 문찌방에 놓일 수밖에 없는 광경이 생경스러울 정도였다. 3부 요인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민주당 의원들과 정치인들, 고위 관료들, 시민단체, 문화 예술계, 종교계 등 각계 인사들이 조문을 오셨다. 주한 미대사를 비롯해 각국 대사들도 조문했음은 물론이다. 여기까지는 소위 힘 있는 여느 정치인의 상가 모습이다.
휠체어를 타고 오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턱을 맞추는 경사계단도 준비할 정도 였고, 민노총 관계자들도 흐느끼며 조문하고, 멀리 농촌에서 열일 제끼고 한걸음에 달려오신 농부들, 젊은 신혼부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실 정도로 연로하신 노인 분들 등등 각자가 박원순과 맺은 사연을 품고 오셔서 흐느끼거나 기절할 정도로 오열을 하셨다. 눈물을 참기 어려울 정도의 사연들이고 인연들이다.
한번은... 남루한 옷차림의 외국인들이 들어서면서 흐느끼기 시작한다. 헌화를 하고도 한참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는 상주를 향해 돌아서서 일행 중 우리말을 가장 능숙하게 하는 아주머니가(구 소련연방 계열로 보인다) 말씀을 하신다. '오래 전부터 시장님께서 저희 외노자들을 많이 도와주시고 보살펴 주셨는데... 은혜도 못 갚았는데...'라며 흐느낀다. 억지로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터졌다. 옆에 상주석에 같이 서계시던 의원님들도 마찬가지...
나도 꽤나 코고 다양한 상가를 많이 다녔지만 어느 장례식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박원순이라는 사람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조카들에게는 맛있고 따뜻한 밥 한번 안사준 삼촌이고 외삼촌인데... 본인 제삿밥만 먹이고 뭐가 그리 급하신지... 그렇게 황망히 떠나셨다. 그 많은 사연과 인연들을 떨치고 어찌 그리 쉽게... 몰랐다. 그렇게 큰 언덕인지를... 떠나시고 나니 너무 큰 언덕이었다. 폭우가 내릴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다행히 약한 부슬비만 조금 내릴 정도였다. 어쩌면 어제 하루 내린 비 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장례식장과 화장장, 운구행렬을 바라보는 연도에서 그리고 고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내린 비가... 떠나는 외삼촌의 마지막 눈물이 아니었는지... 이미자의 노랫말처럼... 눈물이 진주라면 눈물이 마르기 전에 진주방석 엮어 드릴 텐데... 외삼촌... 잘가세요... 안녕~
백낙청 7월 14일
어제 박원순 시장 영결식에서 공동장례위원장의 한사람으로서 조사(弔辭)를 읽었습니다. 유튜브로 보신 분들도 많겠지만 전문을 여기 공유할까 합니다. 애도와 성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고, 저와 생각이 다르신 분들로부터 비판을 받더라도 제가 말한 정확한 내용을 두고 비판받았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창작가는 아지지만 저 또한 문학 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제 글이 상투적인 언어에서 벗어나고자 항상 마음을 씁니다. 결과는 장담할 수 없으나 이번 조사에서도 그 점을 유념하였습니다.
발언의 초점은 애도였고 성찰을 수반하는 애도이고자 했습니다만 본격적인 성찰 이전의 시간에 나온 발언입니다. 새로운 발언을 한다면 더 많이 생각해서 상투성을 더욱 철저히 벗어던진 언어가 되어야겠지요.
조사에서 "이미 당신의 죽음 자체가 많은 성찰을 낳고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다행히 틀에 박힌 공방을 넘어선 발언들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들을 비롯한 여러 분으로부터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박시장에 대한 한결 객관적인 평가를 포함해서요. 이는 박시장도 반겼을 일이 아닐까요.
끝으로 조사 전문을 아래 옮겨오면서, 피해호소 여성분에 대한 악의적인 신상털기나 억울한 비방이 없어야 되겠다고 다짐하며, 박시장에 대한 애도 역시 영결식을 끝으로 시한이 다하지 않았음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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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사
박시장, 이렇게 갑작스레 떠나시니 비통함을 넘어 솔직히 어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럴진대 유족들의 마음이야 어떻겠습니까. 사는 동안 나도 뜻밖의 일을 많이 겪었지만 내가 박원순 당신의 장례위원장 노릇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아니, 거의 20년 터울의 늙은 선배가 이런 자리에 서는 것이 예법에 맞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우리 사회를 크게 바꿔놓은 시민운동가였고 시장으로서도 줄곧 시민들과 가까운 곳에 머물던 당신을 떠나보내는 마당에, 시민사회의 애도를 전하는 몫이 내게 주어졌을 때 사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애도의 시간입니다. 애도가 성찰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만 성찰은 무엇보다 자기성찰로 시작됩니다. 박원순이라는 타인에 대한 종합적 탐구나 공인으로서의 그 행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애도가 끝난 뒤에나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며 마땅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지금은 애도와 추모의 시간입니다.
한 인간의 죽음은 아무리 평범하고 비천한 사람의 죽음이라도 애도 받을 일이지만, 오늘 수많은 서울시민들과 이 땅의 국민과 주민들, 그리고 해외의 다수 인사까지 당신의 죽음에 충격과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었고 특별한 공덕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은 삼십년이 넘도록 이런저런 활동을 당신과 더불어 벌여왔어도 정작 어깨를 맞대고 일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당신이 “일은 저희가 다 할 테니 선배님은 이름이나 걸고 뒷배가 되어주십시오”라고 해서 따라 하였고, 더러는 내가 주도하는 사업에 당신을 끌어들이면서 “당신 일만도 바쁜 걸 알지만 이름이라도 걸어놓고 이따금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지요. 어느 경우든 내가 항상 놀라고 탄복한 것은, 끊일 줄 모르고 샘솟는 당신의 창의적 발상들과 발상이 발상에 머물지 않고 현실이 되게 만드는 당신의 실천력과 헌신성이었습니다. 참여연대가 그렇게 태어나서 오늘까지도 시민의 힘으로 유지되는 시민단체의 모범이 되었고, 당신은 그 사업이 자리를 잡자마자 후진들에게 넘겨주며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등 전혀 다른 운동을 개척했습니다. 드디어는 서울시장이라는 공직에 진출하여 우리의 시민운동과 서울시의 행정에 새로운 기원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당신이 펼친 시정의 상세한 내용을 알아서가 아닙니다. 시장이 된 뒤로 나는 주로 먼빛으로 지켜보며 응원하는 축이었지요. 그러나 당신의 서울시장 당선이 ‘시민후보’의 자격으로 이루어진 것 자체가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세월호 유족들에게 기억과 진상규명운동의 공간을 열어준 것도 당신이었으며, 무엇보다 이 나라의 역사를 근본부터 바꾼 2016년~17년의 촛불항쟁은 서울시장이 그 ‘인프라’를 마련하고 지켜주었기에 세계사에 드문 평화혁명으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로도 시민사회에 대한 당신의 알뜰한 보살핌과 뜨거운 북돋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제 당신 없이 우리가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이어갈지 막막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은 우리에게 새로운 일감과 공부거리를 주고 떠나셨습니다. 이미 당신의 죽음 자체가 많은 성찰을 낳고 있습니다. 당신의 엄청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치권과 언론계뿐 아니라 시민사회도 부족한 점이 아직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애도에 수반되는 이런 성찰과 자기비판이, 당신이 사는 동안 일어났고 당신이 빛나게 기여한 우리 사회의 엄청난 변화와 전진, 세계적으로 특히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에서 건강한 시민운동이 쇠퇴하는 판국에 더욱 돋보이는 우리 시민사회의 활력을 망각하게 만든다면 이는 당신을 애도하는 바른 길이 아니며 당신도 섭섭해하실 일일 것입니다.
그리운 원순씨 박원순 시장! 우리의 애도를 받으며 평안히 떠나십시오. 이제는 그런 평안만이 유족들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을 것입니다.
2020년 7월 13일 백낙청 삼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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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7월 15일
요즘 글도 못쓰겠고 잠도 제대로 못잔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파트 창문으로 내다보다 깜깜한 하늘 어디쯤 가고있을까, 박원순을 생각해본다.
꼭 45년전 지금쯤 동아일보에서 내쫒겨서 중앙정보부에서 시달리다 국가보안법, 반공법, 국가모독죄,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고 영등포구치소의 소년수 사동의 독방에 갇혀 있었다.
당시 그곳에는 월남 패망 직후인데도 유신을 반대하는 5.22데모를 일으켰다고 서울대생들 수십명이 구속되어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만 스무살이 채 안된 소년수 2명이 있었다. 사회계열 법학과 1년생 박원순, 인문계열 불문과 2년생 정병문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면회를 나갔다 들어오면서, 또는 운동을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내가 갇혀있던, 사동 입구에 있는 독방을 들여다 보며 "선배님 안녕하세요" 라고 외치곤 자기네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박원순은 입학한 지 두 달만에 뭐가 뭔지도 모르는채 학우들과 함께 선배들 뒤를 따라 "유신반대"를 외쳤다가 제적당해서 그곳에 갇혀있었다. 그를 면회다니던 큰 누님과 내 아내는 그런 인연으로 자주 면회실에서 만나 아는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 박원순이 서울대 복학이 안되자 단국대로 편입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전두환 시대에 검사로 1년을 근무하다가 못버티고 사표를 냈고 인권변호사로, 시민운동가로 성장하여 우리 모두 아는 나라의 큰 기둥이 됐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시민사회운동으로 전환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지방자치분권운동에도 큰 몫을 감당했다.
박원순이 떠났다. 나의 머리 속에는 아직 스무살도 채 안된 앳된 소년으로 남아있는 그가 나를 잠 못들게 한다. 그리고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아깝고 아까워서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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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탓이 아니다
서복경 ㅣ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지난 9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전날 성추행 혐의로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어떤 관점에 서든 모두가 ‘박원순’과 ‘성추행’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이때, 나까지 나서 굳이 한마디를 더 보태야 할까 싶어 오래 망설였다. 그래도 ‘당신 탓이 아니’라는,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좀 길게 건네보려 한다. 당신은 신상을 털고 의도를 의심하고 터무니없는 소설을 써대는 누군가의 말 때문에도 상처를 받겠지만, 당신이 지고 있는 가장 큰 짐은 ‘고소장을 접수한 다음날 그가 죽었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라 짐작한다. 그래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는 그의 선택을 한 것이고 당신 탓이 아니다. 그의 죽음에 당신의 책임은 없으며 그것은 온전히 그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는 ‘박원순’이었다. 1993년부터 서울대 조교 성추행 사건을 변론했고 승소하여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 범죄일 수 있음을 최초로 알렸고, 서울시에 광역시도 중 가장 선진적이라는 직장 내 성폭력 사건 대응 제도와 매뉴얼을 만들었던 그 ‘박원순’이었다. 그가 죽고 많은 이들이 ‘박원순마저…’라는 탄식을 내놓았던 것은 지난 시간 당신이 처했을 고뇌와 어려움을 반증한다. 많은 이들이 적어도 젠더 감수성에 관한 한 가장 앞섰던 현직 정치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의 의사에 반하는 그의 행위가 반복되었어도 이를 공론화하기 더 어려웠을 것이라 짐작한다.
혹자는 ‘몇년을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야?’라고 묻기도 하지만, 그가 ‘박원순’이라는 사실이 당신에게는 더 큰 장벽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더 긴 시간의 고뇌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더하여 그는 당신이 속한 조직의 수장이었고 얼마 전까지 소속 부서 직속상관이었다. 아마 고인도 똑같은 이유로 자신이 행한 일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까.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박원순’이었기에 스스로 한 일이 더 용납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가고 없는 지금 누구도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그건 그의 선택이었다. 당신 탓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박 시장의 선택을 접하며 노회찬 의원을 떠올렸고 나 또한 그랬다. 그리고 그 시대를 그들의 방식으로 살아낸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정서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이 20살이었을 때 대한민국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서슬 퍼런 억압이 판치고 있었고, 그들이 30살 때는 전두환 신군부가 유신체제를 연장시키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면 개인의 인생만이 아니라 뜻을 함께했던 동지들과 가족의 인생까지도 송두리째 파헤쳐질 각오를 해야 했다. 그들은 그렇게 개인의 권리 이전에 집단의 이해를 먼저 생각하도록 훈련받으며 그 세월을 살아냈던 것 같다. 대한민국이 민주화된 이후에도 그들은 변함없이 그런 인생을 살았다. 무슨 일을 하든 인생을 걸었고 항상 어떤 조직의 수장을 자임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과 가족의 삶을 돌보고 살피는 데는 둔감했고 때로 무능했다. 그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그렇게 마감한 것은 그런 그들의 개인적 서사에서 보면 일관성이 있다. 자신의 과오를 정면으로 마주하기에 스스로 설정한 뜻은 너무 높았고 살아서 책임을 감당하기에는 가족과 동지들에게 끼칠 누가 앞서 떠올랐을지 모른다. 그들은 그렇게 지나온 어느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 시대의 한계에 갇힌 사람들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박 시장의 선택은 온전히 그의 것이며 당신 탓이 아니다.
아마 당신은 앞으로 몇 달 혹은 그 이상을 매우 번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의 한가운데 놓여 있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순간순간 그의 죽음이 원망스러울 것이고 미안할 것이며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선택과 그의 선택은 별개다. 당신이 부디 이 커다란 짐을 덜어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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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이후, 5가지 책임적 과제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쳔 대학교·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고 박원순 시장으로부터 4년여 동안 성추행을 당했다는 A씨의 절규다. 이것은 A씨만이 아니라 곳곳에 있는 피해자들의 절규이며, 우리를 향한 엄중한 질문이다.
2019년 5월 30일, 영국 잡지 〈스탠드포인트〉에 마틴 루터 킹에 관한 충격적인 글이 실렸다. 저자 데이비드 개로우 (D. Garrow)는 킹의 전기를 써서 1987년 폴리쳐 상을 받은 역사학자다. 인권 운동가·목사였던 마틴 루터 킹이 호텔 방에서 동료인 침례교 목사가 교인을 강간하는 것을 다른 남성들과 보며 웃고 즐겼다는 것, 그리고 3명과의 지속적인 혼외관계를 포함해서 수십 명의 여성과 성적 관계를 가졌다는 내용이다.
FBI는 1963년 11월부터 킹을 계속 감시하고 도청하면서 그 행적을 기록한 문서와 도청 테이프를 보관했다. FBI 자료들은 국가 기록보관소에 있고, 2027년 1월 31일까지 공개되지 않는다. 개로우의 글은 특정한 경로로 유출된 FBI문서의 일부에 근거해 있다. 이 글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미투 운동의 씨앗을 뿌린 타나라 버크(T. Burke)는 2020년 1월 강연에서 자신이 전개한 운동의 모델은 바로 ‘킹 박사’라는 입장을 강조한다. 킹의 이러한 행적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현재 알 수 없지만, 개로우의 글은 ‘박원순-사건’과 함께 한 인간이 지닌 복합적 결들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한다.
‘박원순 이후’ 지지자든 반대자든 해서는 안 되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A씨를 ‘정치적 도구화’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박원순’이라는 한 개인의 전적 ‘이상화’ 또는 ‘악마화’하는 양극적 프레임 속으로 ‘박원순 이후’를 고착시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일은 A씨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를 마주하며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사회로 나가기 위한 구체적인 과제들을 모색하는 일이다.
첫째, 성추행 사건에 대하여 진상규명과 문제 제기가 있어야 한다. 무엇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포괄적인 조명이 필요하다. 서울시청만이 아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양한 단체와 집단에서 벌어지는 성비위 사실들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공적으로 나와야 한다.
둘째, 이 사건을 ‘모두의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권력의 위계 구조에 의한 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적인 것으로만 치부되곤 한다. 그러나 개인에게 일어난 일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과 연관되는 복합적인 사회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스트 운동의 모토가 중요한 이유이다.
셋째, 성폭력은 물론 다층적 혐오에 저항하는 운동에 연대해야 한다. 미투 운동을 시작한 버크에 따르면, 미투 운동이 지닌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우선은 피해자가 ‘피해자’ 위치성으로부터 벗어나, ‘변화의 주체자’로 전이하기 위한 두 가지 선언, 즉,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다’이다. 그 다음에는 ‘당신과 함께 한다(with-you)’는 타자들의 연대다. 또한 연대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넷째, 각자의 ‘인식론적 사각지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한 곳에서의 불의는 모든 곳에서의 정의를 위협한다”며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계를 지향하는 “나는 꿈이 있다”의 ‘킹 박사’, 그 역시 인식의 사각지대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대상화하는 여성 혐오적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의 사각지대를 지닌 이들은 도처에 있다. 여비서, 여학생, 여신도, 여직원, 여종업원, 여목사, 여선생, 여기자, 여검사, 여교수, 여류작가 등 ‘여(女)’라는 생물학적 표지를 지닌 사람들이 지금도 권력 구조의 상하를 막론하여 도처에서 다양한 얼굴을 한 성폭력에 노출되는 이유이다.
다섯째, 지속적인 성평등 교육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개인의 생물학적 성에 상관없이, 무엇이 차별과 폭력인가를 자동적으로 알 수는 없다. 모든 기관들에서 성평등·성적 권력남용 등 전반적인 성인지 교육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미투 운동의 씨앗을 뿌린 버크는 2018년 듀크 대학교에서의 강연에서, 미투 운동이 여성-남성간의 대립구도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진정한 미투 운동은 사회의 전체적 변화를 도모하는 ‘모두의 운동’이기에 여성과 남성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미투 운동의 토대는 인간이 변화할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 인간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미투 운동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 근거해 있을 때만, “우리는 이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결국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A씨는 절규한다. 자신도 강간의 피해자였던 버크가 이 물음을 듣는다면, 그가 한 강연에서 말한 것처럼 다음과 같이 응답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 것도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 ‘피해자(victim)’로부터, ‘생존자(survivor)’로, 그리고 ‘성공자(thriver)’로 당신의 삶을 당당하게 꽃피우며 살아가십시오. 한국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가 사라지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책임적 과제를 따로 그리고 함께 수행해야 할 것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825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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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Lee
7월 15일
모금활동 중단합니다!
유족들, 시민들 마음만으로 충분히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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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유족 관계자로부터 문의에 대한 답을 받았습니다. 시민들의 따뜻한 마음으로 충분하시다며, 일체의 모금은 중단해 달라십니다. 여러 상황을 감안하고, 특히 고인의 뜻과 맞지 않는 모금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십니다. 부디 고인의 뜻을 살펴주시고, 그 어떤 형태의 모금 행위도 없도록 신신당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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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뜻을 받들어 모금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시민들의 선하고 따뜻한 마음이 고인께도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을 때, 시민들이 다시 함께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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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정치적 상황에 대해 걱정하시는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이런 행위마저도 고소인에게는 더 큰 피해로 작용할 수 있음도 걱정하십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소인과 시민들을 염려하시는 뜻에 시민들도 마음을 모으는 것이 도리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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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해 주신 모든 시민들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만약 누군가 고인의 이름으로 모금을 진행하고 있다면 부디 중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모금 행위도 유족과 상관없음을 다시 밝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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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5일
Edward Lee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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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성명] 당신의 존엄한 삶을 위해, 연대하겠습니다
– 이 사회는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하 박 전 시장)은 자신의 성폭력에 대한 고소 소식 직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이 사회의 힘을 가진 목소리들은 그의 생전 업적을 기리며 그를 애도했습니다. 피해자의 호소는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들이 피해자를 외면하고 추모에 열중한 동안 피해자에게는 모욕과 비난이 쏟아졌고 피해자는 보호받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훼손된 존엄을 되찾기 위한 피해자의 호소를 외면하는 사회를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피해자는 추측과 왜곡이 난무하는 세상을 향해 두렵고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보다 더 큰 용기를 낸 이 목소리를 경청해야 합니다.
– 서울시와 수사기관에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합니다.
박 전 시장의 죽음이 사건의 진실을 덮는 것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박 전 시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직후 경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기대하며 용기 냈던 피해자의 호소가 수사절차와 규정 앞에 멈춰 서서는 안 됩니다. 진실과 정의를 바라는 피해자가 가장 먼저 접하는 공적 지원체계가 수사기관입니다. 하지만 수사기관에서 피고소인에게 고소사실을 전달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황입니다. 각종 의혹을 포함하여 경찰과 검찰이 철저히 진상규명을 다할 것을 촉구합니다.
또한 15일, 서울시는 민관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진상을 조사하고, 2차 가해 차단을 최우선에 두어 피해자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서울시는 이번 사건을 박 전 시장과 피해자간에 발생한 ‘개인의’ 문제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은 공무원 사회라는 공고한 위계적 조직구조에서 발생한 ‘공적’ 문제입니다. 서울시는 박 전 시장 뿐 아니라, 왜 지난 시간 피해자의 호소를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는지, 어떻게 피해자가 처한 현실이 4년간 지속되었는지 공무원 사회 전반을 돌아봐야 합니다. 서울시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진상조사 및 피해자 지원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를 멈춰야 합니다.
권력과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 어렵게 용기 낸 피해자에게 많은 지지와 연대를 보내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반면 피해자를 겨냥한 2차 가해와 무분별한 신상털기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우리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2차 가해가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에 대해 언제든 말할 수 있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도 역시 사실관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거나, 왜 이제 와서 폭로하느냐는 수준을 넘어 박 전 시장 사망의 책임을 되레 피해자에게 돌리는 등 2차 가해로 피해자를 궁지로 몰고 있습니다. 박 전 시장에 대한 대대적이고 공식적인 추모는 그동안 피해자를 짓누른 위력을 다시 확인하게 합니다. 진실과 정의를 바라는 피해자가 이 위력 앞에서 얼마나 두렵고 절망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아가 피해자를 모욕하고 비난하는 모든 행위 역시 즉각 중단되어야 합니다.
– 인권운동은 피해자 옆에 서겠습니다.
피해자가 호소하는 고통은 그가 홀로 짊어져야 할 몫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누군가의 존엄이 멈춰진다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존엄이 멈춰섰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연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덮은 채 우리는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피해자가 고발한 권력과 위력에 의한 성폭력 문제가 제대로 수사되고, 명백히 밝혀져야 합니다. 피해자가 고통을 호소하는 자리, 그 곁에 인권운동도 함께 하겠습니다. 보통의 일상과 안전한 삶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당신의 옆에 서겠습니다.
2020년 7월 16일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광주인권지기 활짝, 국제민주연대, 노동인권실현을위한노무사모임, 다산인권센터, 다움:다양성을향한지속가능한움직임, 대구퀴어문화축제, 대학·청년성소수자모임연대 QUV,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무지개예수, 무지개인권연대, 문화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사)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빈곤과차별에저항하는인권운동연대, 빈곤사회연대, 사회변혁노동자당 사회운동위원회,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서울인권영화제,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성공회 용산나눔의집(사회적소수자 생활인권센터), 성별이분법에저항하는사람들의모임 ‘여행자’,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손잡고, 언니네트워크, 울산인권운동연대, 움직이는청소년센터EXIT, 원불교인권위원회, 이화 성소수자인권운동모임 변태소녀하늘을날다,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교육 온다, 인권운동공간 활,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중심사람, 인천인권영화제, 장애여성공감,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제주평화인권연구소 왓, 진보네트워크, 천주교인권위원회,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준),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 트랜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 트랜스해방전선,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평등과 연대로! 인권운동더하기,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 알,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형명재단, 홈리스행동,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전국 60개 인권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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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7월 17일 오후 10:31 ·
과거 간첩조작사건이 발생하면 언급자체가 어려웠다. 사건에 연루된 사람을 옹호하거나 공안당국을 비판하는 순간 빨갱이나 빨갱이 조력자로 몰려 곤욕을 치르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1950년대 초 매카시 열풍이 미국 전역을 휩쓸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사회가 빨갱이의 "빨"자만 나와도 몸과 사고가 경직되고 입을 다물게 되는 레드컴플렉스에서 해방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젠 레드컴플렉스가 젠더컴플렉스로 옮겨온 것 같다. 조국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박원순 시장 미투의혹제기와 관련해서도 시민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서 전투중이다. 진보적인 가치를 공유하던 사람들이 고소인과 박원순 중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고 미투 의혹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이면 바로 후진적인 성인지감수성이라 비난받는 동시에 2차 가해로 지목되니 문제제기를 하려면 젠더 커밍아웃을 각오해야 한다. 다소 거칠긴 하지만 입을 다물게 하는 방식이 생각을 검열하려 했던 과거 레드컴플렉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매번 똑같은 패턴일까. 위력에 의한 성추행의 경우 특성상 피해자의 의견이 우선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은 고소인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변호사인 김재련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특정인만 하는 게 아닌 것 같고 그런 2차 가해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이 침묵하는 것도 2차 가해다.” 라며 여가부가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호통친다.
고소인 (변호인 측과 여가부에서는 ‘피해자’라고 명명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짧은 법률지식이지만 무죄추정의 원칙에 입각하여 고소인이라 칭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도 2차 가해라 하니 ‘2차 가해’라는 낱말에 대해 심포지엄이라고 열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헌법에서 보장받고 있으니 난 판단을 달리할 새로운 근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나의 생각을 고수할 생각이다)에게 꽃뱀이니 꼬리쳤니 하는 원색적인 혐오에서부터 나름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의심 하거나 문제제기하는 것까지, 그리고 그것에 침묵하는 것까지 2차 가해라며 국민을 두동강이내고 적으로 몰아부칠 태세다. 무섭다.
진보적인 가치를 공유하던 시민사회는 조국 때도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조국의 무고함을 대변하면 불공정과 반칙을 옹호하는 것으로 매도되었었다. 정경심, 조국, 조범동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은 어떠한가. 수천 건에 달하는 확인되지 않은 가십성 보도 대부분이 거짓으로 드러났지만 정정보도는 기대하기 어렵다.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사실들을 언론에서는 제대로 보도해주지 않는데다 동량으로 정정보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된 1차 정보는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는 한 각자의 인식체계에서 정정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세상은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조국 일가족의 감당하기 어려울만큼의 고통과 억울함은 누가 보상할 수 있나.
1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다. 혹자들은 살아서 벌을 받지 왜 비겁하게 죽냐고 묻는다. 조국과 그의 가족은 죽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집요하게 치졸하고도 비열한 조리돌림을 당했다. 존경받던 삶 전체를 모욕하며 인격은 살해되었고 부부의 내밀한 대화까지 만천하에 까발리며 가족은 파탄지경이 되었다.
그때 난 솔직히 그들이 무서운 생각을 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범죄가 밝혀지면 죄의 경중에 따라 합당한 처벌을 받고 도덕적 비난을 받으면 된다. 누구에게도 행위 이외의 것까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격살해 수준으로 난도질할 권리는 없다. 조국이든 박원순이든 박근혜든 다 마찬가지다. 과거 우리가 남영동을 두려워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처벌받기까지의 과정이 아니었던가. 처벌하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침소봉대하거나 하지도 않은 일을 창조해 국가를 전복하고자 했다며 악마화하고 인격살인이 밥먹듯 이루어진 곳,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욕조에 쳐박고 공포로 침 질질 흘리는 짐승으로 만들어버린 곳,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남영동이 지금의 언론이 아니던가.
그런데 요 며칠 우리의 언론을 보니 우리 사회가 여성인권과 성인지감수성이 이렇게 높았나 어리둥절해진다. 수구언론들이 여성주의 대변자가 된 것 같고 화해치유재단 이사로서 미래를 위해 양보하고 화해하자며 위안부 할머님들에게 2차 3차 가해를 서슴지 않던 김재련이 2차 가해 운운하는 것이 왜 블랙코미디로 느껴지는 걸까.
미투를 제기하는 피해자 대부분은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원한다고 한다. 미투의 목적이 상대방의 사회적 파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이 고소인 여성과 연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당사자인 고소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인지감수성에 경종을 울려 성차별 없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최소한 기자회견에서 명백한 성범죄라고 보기에 애매한 몇몇 건을 찌라시처럼 흘리며 망자가 된 피고소인을 악마화하고 고소인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마저 등돌리게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의견을 달리 하거나 조심스럽게 문제제기하는 사람들과 판단중지를 선택하며 지켜보고 있는 다수의 대중을 2차 가해라며 무조건 박원순을 애도하는 이들을 비판하고 고소인을 옹호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성인지감수성이고,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인가. 당신들의 그런 태도는 합당한 것인가. 그의 이름 석자를 빼고는 한국의 시민사회를 논하기 어려울 만큼이었기에 아직도 애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시민들과 자신의 성인지감수성을 돌아보려고 노력해온 선량한 남성 일반을 적으로 몰아 건강한 시민사회를 분열하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이건 정상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한남들이 하던 극단주의를 답습하는 것이며 당신들의 분노에서 파시즘이나 메카시즘의 광기마저 느껴진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첫째, 박원순 시장이 실종이 보도된 지 두 시간도 채 안 되어 월간조선과 청년의사 등에서 박원순 시장의 사망을 보도했다. 와룡공원 어드메라고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장소도 특정하였고 서울대 병원에 운구가 도착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왜 이런 일이 그냥 넘어가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실종보도와 거의 동시에 미투고소, 사망이라는 마치 계획되어 있었던 것 같은 언론의 보도가 시민들로 하여금 미투를 정치적으로 악용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시발점이 되었다. 따라서 시민들의 입에만 재갈을 물릴 게 아니라 기사를 쓴 1차 언론과 확인도 않고 받아쓴 2차 언론을 수사해야 한다. 이젠 사망도 거짓으로 보도하는 인간말종같은 망나니짓을 하는 언론을 더이상은 두고 볼수가 없는데 어디에서도 이것을 문제삼지 않는다. 참 신기하다.
둘째, 고소인의 요구가 진정어린 사과였다면 피고소인의 장례절차를 끝내기도 전에 무리하게 기자회견을 강행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막장드라마 보여주듯 예고편을 날리며 진행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속옷, 입술, 침실, 기쁨조 같은 선정적이고 야릇한 상상을 하게 하는 일방적인 주장이 확인되지 않은 채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미투가 정쟁수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결정적인 성추행 증거를 하루빨리 제시하여 고소인 여성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게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려면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이 성희롱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고도 위력을 행사하였는지 조사해야 할것이니 상호 주고받은 문자에 고소인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도 밝혀야 할 것이다.
고소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부관참시를 해서라도 분노를 투사하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선배여성으로서 고소인이 하루빨리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피해자 우선원칙을 중시하고 있으니 진혜원 검사의 말처럼 민사소송을 통해 법적 판단을 받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미투에 대해, 미투를 제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대해 여성단체가 어떤 매뉴얼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론을 타블로이드화 하게 만드는 기자회견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소인 편에 서지 않을 거라면 무조건 입 닥치라 하고, 피고소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아파하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동의하는 시민들, 너무 고통스러워 잠시 침묵하는 모두를 악마화하는 건 여성단체가 그동안 약자의 편에 서서 가시밭길을 걸어오며 보여준 모습과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다. 온갖 비난과 모욕 속에서도 여성운동이 지금까지 견지해온 여성주의 가치는 사람을 살리는 데 있다.
우리는 이미 소중한 사회적 자산을 잃고 이유야 무엇이든 저마다의 이유로 아파하고 있다. 그것이 고소인에 대한 적대행위가 아닐진대 그렇게 몰아가서야 되겠는가. 그동안 여성인권을 위해 최전선에서 일해온 여성의 전화와 성폭력상담소는 김재련의 일련의 발언에 동의하는지도 입장을 밝혀야 한다. 미투의혹의 진상을 밝히는 게 목적인데 어떤 이유로 서울시 특별조사단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1차 진상조사를 마치면 경찰조사로 넘기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여성단체는 남녀 모두가 성차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미투 메뉴얼을 가동하고 2차가해를 유도하는 김재련을 견제해주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후 여성단체의 정체성과 정당성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며 피해는 어디선가 위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성추행을 당할지도 모르는 진짜 피해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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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선
7월 19일
날마다 혁신의 길을 만들어온 박원순 변호사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황망하기 이를 때 없는 시간입니다.
故 박원순 변호사를 20여 년 전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를 만들기 위한 회의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이런저런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박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운동을 혁신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전문직 변호사가 시민단체의 상근자가 되고, 다른 상근자와 똑같은 보수를 받고 일했습니다. 적지 않은 재산과 상금은 다른 이들에게 기부하고 집 한 채 없이 빚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박변은 독립적인 권력 감시 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여론형성형 시민운동이라는 사회운동 모델의 가치를 구현했습니다. 기존 언론과 주류 사회의 쟁점이 아닌 사회적 약자의 문제, 관심받지 못하는 문제를 발굴했습니다. 제도에는 있지만, 사장된 절차를 찾아내 국민의 권리를 주장했고, 새로운 쟁점과 여론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반부패특별법, 소액주주운동 등이 가능했습니다.
박변은 시민의 참여와 의견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일했습니다. 총선시민연대 낙천낙선운동 대상자 선정 당시 각계각층 100인의 시민이 최종 심사하도록 했습니다. 시민이 발견한 작은 문제와 아이디어를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키우는 작은 권리찾기 운동, 시민 창안 사업 등이 이뤄졌습니다.
이어 사회운동의 연대 관행도 바꿨습니다. 공동 행동이 없는 이름뿐인 연대가 아니라 실질적인 협력이 가능한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수평적 연대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미 알려진 단체가 앞자리에 서고 함께 하는 작은 단체들이 ‘~ 등의 단체’로 취급되는 언론의 관행에 반대했습니다. 사업과정에서 단체 대표나 사무처장 같은 직책을 가진 사람만이 아니라 실무를 맡은 간사와 임원이 사회적 발언을 할 수 있도록 원칙을 정했습니다.
단체 운영에서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재정적 어려움을 그대로 공개하고 시민에게 당당하게 손을 벌렸습니다. 보조금을 받지 않는 단체이기 때문에 후원해야 한다는 역발상을 통해 공감을 얻기도 하고, 세제 혜택을 받는 지정기부금 단체의 지정이 자의적이고 폐쇄적이라고 지적하며 참여연대에게는 주겠다는 혜택도 거절하면서 제도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사회운동의 내부 과정이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만들어왔습니다. 사회운동에 맞는 원칙과 규칙을 만들고, 합리성을 정착시켰습니다.
돌이켜 보면 박변이 마지막으로 기획한 시민사회조직은 민간독립연구소인 희망제작소입니다. 기업의 이익이나 정부의 시각을 대변하는 연구소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시민 중심으로 대안을 만드는 ‘희망제작소’ 창립에 함께 하자는 제안해주셨습니다. 이후 희망제작소는 현장 활동가, 퇴직 공직자, 독립연구자들이 모여 여러 문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발굴했습니다. 시민은 일상과 직결된 대안을 제시하며 우리 사회의 빈틈을 채우는 정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박변이 없는 세상을 마주합니다. 고통스러운 논란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의 힘을 믿습니다. 더이상 고소인에게 2차 가해가 이뤄지지 않고,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믿습니다. 박변에 대한 음해와 폄하 없이 공은 공대로 허물은 허물대로 받아들이고 가야겠습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든 쉽게 감동하고 공감해주던 박변이 곁에 없다는 게 마음이 아픕니다. 희망제작소는 사회혁신과 시민참여를 통해 다양한 대안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희망을 퍼뜨리는 몫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이 이루고자 했던 ‘평등과 우애가 넘치는 세상’이라는 꿈을 함께 만들어가겠다고 다짐합니다. 모든 시민이 연구자인 시대를 향한 노력을 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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