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출간된 <네 번째 원고>라는 책을 읽었다. 존 맥피라는 논픽션 작가의 글쓰기에 관한 책이다. 몇 년 후 은퇴하면 글을 쓰며 여생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는 중이라 예사롭지 않게 읽었다. 미국의 논픽션 책을 즐겨 읽던 때가 있었다. 높은 평가를 받고 번역된 책들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광범위한 사실조사, 문장력 그리고 이야기 솜씨에 자주 감탄했다. 넓은 시장이 주는 충분한 보상과 뛰어난 편집자가 그런 완성도의 토대라고 짐작했다. <네 번째 원고>를 읽다보니, 맥피 같은 대가가 기여한 방법론과 전통도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맥피는 자신이 활동하는 잡지 ‘뉴요커’에 게재할 글의 소재를 정하면, 몇 달 더러는 몇 년 동안 취재를 한다. 취재원과 함께 오지로 떠나는 스릴 넘치는 여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허구가 아닌 논픽션을 쓰면서도 어떤 구조로 이야기를 전개할지 세심하게 연구한다. 개성이 강한 전설적 편집자들과 협업하고 반목하는 아슬아슬한 일화도 흥미롭다. 잡지사의 팩트체크 전담부서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일하는 모습도 미소를 머금게 한다.
변호사 업무를 수행하며 늘 글을 쓰게 되는데, 흔히 말하는 글쓰기와 다르다. 정해진 틀에 맞추어 보고서를 쓰는 것에 가깝다. 오래할수록 숙달되지만, 폭넓은 글쓰기 능력은 퇴화한다. 어쩌다보니 10년 넘게 소소한 칼럼이나 에세이를 써왔는데, 뒤늦게 뜻을 세우고 초심으로 돌아가 공부하고 있다.
몇 달 전에는 고명한 편집자로부터 ‘과거 시제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시제를 넘나들라’는 조언을 받았다. 무슨 말인지 알 듯 말 듯했다. 고심하다가 집에 있는 여러 소설을 죄다 꺼내서 어떻게 시제가 사용되는지 살폈다. 대부분 일관되게 과거 시제를 쓰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바다. 한 소설은 드물게 거의 현재 시제를 쓰고 있었다. 마침 읽고 있던 저명한 일본 작가의 작품도 일별했다. 뜻밖에 한 문단 안에서도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를 섞어 썼다. 그런데도 아무 혼란 없이 이해할 수 있었고, 오히려 생동감이 있었다. 체계적으로 공부한 이에게는 당연할지 모르나, 뒤늦게 익히는 나로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무심히 사용하던 ‘주어’의 사용법도 새로 배운다. 정확성이 생명인 법률문서에서 주어를 생략하는 것은 금기다. 영어처럼 거의 언제나 주어를 동반한다. 2년 전 첫 소설을 쓸 때, 굳이 안 써도 되는 수백개의 주어를 초고에서 지웠다. 맥락에 따라 주어를 밝히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는 한국어의 리듬감을 새삼스럽게 발견했다. 요사이는 ‘인물만이 아니라, 동물도, 식물도, 심지어 정황도 주어가 될 수 있다’는 편집자의 말을 되새기고 있다.
표준어 문제도 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서울 말씨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이제는 방언이나 개인의 독특한 어투도 눈여겨보려 한다. 여러 언어를 배우고 싶어 하면서 정작 이 땅의 다른 말에는 왜 그토록 무심했을까. 표준말을 쓰는 것에 알량한 자부심을 가졌던 걸까.
무엇보다도 글쓰기는 그저 글쓰기만은 아니다. 글쓰기가 자기를 닦는 과정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무서운 생각이 든다. 적힌 바와 별개로 글쓴이가 무엇을 열망하고, 무엇에 사로잡혀 있으며,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드러난다. 말을 돌리고 감춘다고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너무 단정하면 강박증이 느껴진다. 글로써 좁은 자신을 벗어나고, 다시 글로써 본연의 자신에 도달하는 경지를 누구나 염원하나 쉬이 이루지 못한다.
‘후문학파(後文學派)’라는 표현을 들은 적이 있다. ‘선인생 후문학(先人生 後文學)’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생업에서 은퇴한 후 문학에 뜻을 두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한다. 아직 한창 일하는 내게 맞는 말은 아닐뿐더러, 나는 ‘문학’이라는 말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다. 다만, 짧지 않은 세상살이에서 본 것을 증언하려 한다. 그러다보면, 생활인으로 살아온 경험이 뒤늦은 글쓰기에 묘미를 더해줄지도 모른다.
잡지에 싣는 한 편의 글을 완성하려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한 맥피를 보며, ‘글을 쓴다는 게 무얼까’ 다시 생각한다. 나는 글쓰기가 세상은커녕 단 한 사람이라도 변화시킬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글쓰기가 나 자신은 구제할지도 모른다고 예감할 때가 있다. 너나없이 유튜브로 달려가는 시대에 감히 글쓰기를 권유한다. 쓰고 싶다는 소망이 당신에게 남아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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