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8일 금요일

강진국(姜辰國), 농촌사업을 부대한 농촌문고 창설의 급무 (1) 동아일보 1936년 2월 27일 기사(칼럼/논단)

강진국(姜辰國), 농촌사업을 부대한 농촌문고 창설의 급무 (1) 동아일보 1936227일 기사(칼럼/논단) 

농촌사업을 부대한 농촌문고 설창(設創)의 급무(1)

조선도서관연구회(朝鮮圖書館硏究會) 이사(理事) 강진국(姜辰國) *

1. 서론

조선 초등교육의 현상 특히 농촌의 문맹문제 

나에게 만약 힘이 잇다면 농구(農具) 이용과 농촌소비조합을 부대(附帶)한 농촌사업을 전조선적으로 망라하야 농민경제를 원조하는 일방(一方) 문맹퇴치운동의 상설적 기관이 되고 농촌개발운동 중심목표가 될 농촌문고(農村文庫)를 상설하엿으면--하는 턱없는 공상을 하여오다가 마지 못하야 이 붓을 잡아본다. 

입학률로 본 문맹문제

이것의 절실한 필요는 년이 증가하는 문맹, 더구나 우리 땅의 구성요소인 농촌의 암암상이 일증월가하는 심각한 현상에 즉하야 이 구제책의 방도가 여긔 제시한 농촌문고 사업을 제하고는 타에 보이지 안는 때문이다.

수년 전까지만 하여도 동아일보사를 위시하야 이삼(二三) 언론기관이 일시적이나마 학생들의 하계휴가를 이용하야 전조선의 농촌, 특히 산간벽지에 그 주력경주한 문맹퇴치운동이 수년간 정기적으로 계속 행사되더니 그 상당한 효과에 세인의 주목을 꺼을게 되자 이것마저 끝끝내의 성과를 맺지 못하고 돈좌(頓挫)한 금일, 좀처럼 늘지도 안코 또 가령 일년 수교(數校)의 증설이 된댓자 순농촌에 잇어는 그리 큰 혜택도 받지 못하는 보통학교의 증설을 공수기대하는 것은 마치 한천기우지격(旱天祈雨之格)인 감이 불무하니 연년이 격증하는 학령아동과 미취학아동, 아니 문맹굴에 빠지는 아동의 수는 작년도(쇼와 10년도, *편집자 주석: 쇼와 10년은 1935년이다.) 미치학아동률 도시미치학률 38푼 지방 동() 75푼을 보아 용이히 알 수 잇는 일이며 또 지방의 2할여의 취학률도 도, 군청 소재지의 준도시적 부읍면을 제한 순농촌아동의 취학률을 상상하야 본다면 새삼스리 놀래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면적상으로 본 교육보급의 현상

이제 조선 초등 □□□□ 대동맥이오 유일한 시설기관인 공립보통학교 수와 이것이 부담한 면적 관계를 고찰하야 볼진대(쇼와 105월 현재) 조선총면적 1. 4312방리(方里) 면행정구역 2. 342() 공립보통학교 2. 269교이니 수자 대비상 11교에 접근한 듯하나 경성부의 18교를 위시하야 기타 2,3교 이상을 갖은 부읍(府邑)의 소속을 제하고 본다면 상금불소(尙今不小)한 거리가 잇으며 또 당국의 작금의 태도에 감()하야 그의 실현이 불원하다 하더래도 1면 평균 60방리강(조선동수朝鮮洞數)의 면적을 갖은 면 행정구역의 중앙지점에 학교가 잇다고 하더래도 10리 이상의 통학이 불능하다면 11교제의 실현이 되는 날에도 벽지의 자녀들에게 대하야는 하등의 혜택을 주지 못할지며, 항차 공립보통학교의 현재 수가 부담한 면적이 1교 평균 약 70방리의 광대한 지역에 긍()하고 잇으며 또 지방에 따라 더욱이 함경북도와 같은 지역에 잇어는 면적 1319방리에 대한 68교는 물경! 200방리약의 거대한 부담을 가젓으니 조선의 문화운동, 아니 문맹타파 운동의 장래는 아직도 담담한 전도를 두고 십자기로에서 헤매는 한심한 상태에 빠저 잇으니 이를 구제할 묘계가 어디 잇으랴. 

근일 단급제도(單級制度)의 간이학교(簡易學校)가 현재 579(쇼와 105월말 현재)의 수를 늘리어서 주로 농촌 중심으로 하야 이 참담한 현상을 완화할려고 노력하고 잇으나 차역(此亦홍로점설(紅爐點雪)에 지나지 못하다. 또 사립보통학교가 87교 잇으나 그 대부분이 도시급 준도시에 잇으니 농촌문화를 주론대상(主論對象)으로 하는 여긔에서 고려할 숫자가 아니다. 

여긔다 비할 바는 아니나 일본 내지(內地)의 초등교육 보급의 현상이 이 일자(一字)(동리에 해당함) 1교 내지 수교로 소학교 총수가 25703교를 계상하고 학령아동취학률이 99.58%(쇼와 93월말 현재)에 비하여 보라! 이 땅에서 이것을 바람이 어찌 꿈속의 일이 아니랴. 

취학불능의 원인

초등교육 취학불능의 주인(主因)은 조선인의, 아니 농촌의 경제 피폐이 잇는 양으로 생각하야오든 우리는 이 교육기관의 불비와 면적상으로 거리관계에 중대한 관심을 환기치 안흘 수 없다. 그러므로 산간벽지에서는 전연 현대교육의 은총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다소 교통이 용이한 부락에서도 통학이 희유하니 사실상 농촌부락 학령아동의 취학률을 고찰한다면 현미경 하에서나 저억히 보일 비율의 숫자일 터이니 아! 조선의 문맹퇴치는 과연 우리들이 가공(架空)하는 공상이 아닐까?


*편집자의 주석: 권은경, 개화기·일제치하의 공공도서관에 관한 연구(1), 도서관연구 v.22. n.4. 한국도서관협회, 1981년, https://koreascience.kr/article/JAKO198173879550402.pdf

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Article.do?cn=JAKO198173879550402

권은경, 개화기·일제치하의 공공도서관에 관한 연구(2), 도서관연구 v.22. n.5. 한국도서관협회, 1981년, https://koreascience.kr/article/JAKO198173879586113.pdf

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Article.do?cn=JAKO198173879586113


농촌문고를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거론한 것은 이재욱(李在郁)(총독부도서관)농촌도서관의 경영법(1935)였으나, 완전히 이념화시킨 것은 강진국(姜辰國)(경성부립도서관)이 쓴 논문 「농촌사업을 부대한 농촌문고 창설의 급무(1936)*이었다. 강진국은 이 논문을 더욱 구체화하여 농촌문고 건설의 급무(農村文庫 建設急務)*라는 제목의 논문을 2회에 나누어 조선지도서관(朝鮮之圖書館)에 게재하고 이어서 1937년에는 농촌문고 경영론 그 필요성과 방법에 대하여」 「농촌문고에 비치할 농촌지도서*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이재욱은 상기의 저서에서 농촌도서관은 조선농촌 진흥의 기초공작’*이라고 서술하였는데, 이는 농촌도서관의 제일의 목표가 문맹타파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한국의 고래로부터 농업국으로, 인구의 약 8할이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자 또는 그 관계자로서 그 대부분이 문맹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농촌진흥을 무시하고는 도저히 조선의 번영을 기대할 수 없으며, 농촌 진흥의 원동력은 문맹타파이며 이를 담당하는 곳이 농촌문고라는 것이 농촌문고 운동가의 이념이었다. 

1935년도의 학령아동의 취학율은 도시는 7할약, 지방은 2할강이었다.* 당시 교육보급의 현황은 한국의 총면적 14,312방리중 면행정구역 2,342개소, 공립 보통학교 2,269개교이였으니, 소위 ‘11에 근접하기는 했으나, 1면 평균 6평방리 이상이므로 아동의 통학 거리로서는 너무나 멀다.* 농촌에 있어서 취학 불가능한 주요 원인은 농촌의 경제적 궁핍의 탓도 있겠으나, 너무나도 교육기관이 미비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리하여 농촌교육을 목표로 하여 최소의 경비로 설치할 수 있고 농촌의 산업·경제적 사업을 병행하면서 상설 항구적인 문화기관으로서의 농촌문고가 이념화된 것이다. 

이러한 농촌문고의 배경에는 모든 사회·문화시설기관-예를 들면 교육기관, 과학적 발명기관, 산업경제기관, 예술기관 등의 기관은 도서관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를 도는 궤도상의 운동과 같다는 이상적인 도서관상(圖書館像)이 있었다. 즉 도서관에는 장서를 오나전히 이용시키기 위해 가르치는 장소와 실험실을 설치하여, 한권 한권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는 시설이 되지 않으면 완전한 사회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론이었다. 이러한 이념을 근거로 학교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인접 부락을 한 단위로 그 중심에 간이문고(簡易文庫)를 설치하고, 이 문고를 상술한 바와 같이 문맹타파를 위한 교장(敎場)으로서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농산어촌의 산업경제개발을 위한 농구 이용조합, 농촌소비조합, 기타 실험기관을 부설하여 농민의 복리증진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후자를 설립 목적으로 한 이유인즉 경제개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경제적 이익과 원조를 쉽사리 제공하지 못하는 한, 순수한 도서관서의 역할만으로는 호응을 받지 못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이 농촌문고의 이론은 완전히 한국인 도서관인에 의한 독자적인 발상은 아니었다. 이재욱이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와다 만키치(和田萬吉), 이토 신이치(伊藤新一), 오토베 센자부로(乙部泉三郞) 등 당시 일본의 도서관학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문맹타파를 당시의 시정 방침이었던 농촌진흥운동과 병합시킴으로써 도서관을 보급시키려 했던 것은 조선의 실정을 반영한 실로 기발한 착상이었다 하겠다. 

이러한 농촌문고의 운동이 어느 정도 보급되었는가는 거의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행정지도기관의 설립은 현실화되지 않고, 지방의 향교재산과 유지 및 청년지도자의 헌신적 봉사에 호소하는 것 이외에는 여하한 물적 인적 자원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체계적으로 보급되지 못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농촌문고는 거의 설립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도서관으로 완전한 사회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었다는 점은 있으나, 한국인에 의하여 선구적인 도서관상(圖書館像)이 정립되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높이 평가된다. 

지금까지 기술해 온 향교재산에 의한 도서관의 설립, 농문문고 등은 조선의 사회적 실정을 감안한 한국인 관계자에 의하여 제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회적 지지도 얻지 못한 채 그대로 설치운동의 초기단계에서 끝나고 말았다. 역시 아직 강력한 행정적 지도 없이는 이것을 받아들일 만한 사회체제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 주석은 권은경의 논문에 나오는 주석임 

*동아일보에 1936227일부터 311일까지 연재

**朝鮮之圖書館Vol.5 no.6(1936.12) pp2-14

***동아일보, 1977125, 7, 12일 연재

****이재욱, 농촌도서관의 경영법, 경성, 조선총독부도서관, 1935, p1

*****강진국, 농촌문고의 급무(1), 조선지도서관, Vol. no6, p5

*편집자주의 주석: 

와다 만키치(和田萬吉, 1865~1934) 1910(메이지 43)에 구미 유학, 도서관 사정 등을 연구한 뒤 귀국, 귀국 후 일본에서 최초로 도서관학의 강의를 담당하였으며, 일본​​문고협회(후의 일본도서관협회)나 문부성 도서관원교습소의 창설 등에도 종사해 이마자와(今沢慈海)와 함께 일본 도서관학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토 신이치(伊藤新一). 이토 신이치와 관련해서는 다음 참조

http://transpoet-textcube.blogspot.com/2023/04/6-1936-3-6.html

http://transpoet-textcube.blogspot.com/2023/04/8-1936-3-8.html 

***오토베 센자부로(乙部泉三郎1897~1977) 1922(다이쇼 11)에 남만주철도봉천도서관南満州鉄道奉天図書館 사서가 되었으며, 1923(다이쇼 12)에 남만주철도무순도서관장南満州鉄道撫順図書館長이 되었다. 1929(쇼와 4)에 현립나가노도서관県立長野図書館이 개관하면서 그곳의 사서가 되었으며, 1932(쇼와 7)에 현립나가노도서관의 제2대 관장이 되었다. 농산촌 지역에 청년단의 설치를 장려하고 간이 도서관의 건설을 추진했다.


*편집자의 주석: 강진국(姜辰國)에 대하여. 

백창민, 이혜숙, 조봉암이 발탁한 농지개혁의 핵심 인물은 도서관 사상가였다,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대한민국 초대 농지국장 강진국 , 오마이뉴스, 20211017일 (인용 2023년 4월 30일)

"을사년 동래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 강진국의 유년 시절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법률가를 꿈꾼 그는, 일본 니혼대(日本大)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법학을 전공한 강진국은, 법률가의 길을 걷지 않고 농촌 문제 해결에 뜻을 두었다. 일본 유학 당시 농촌갱생과 협동조합 운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311025<조선일보>는 월간 문예잡지 <신흥문단>(新興文壇) 창간 준비 소식을 보도했다. 니혼대 출신 강진국도 창간을 함께 준비했다. <신흥문단> 임시사무소는 적선동 16번지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가, 1931년 무렵 귀국했음을 알 수 있다. <신흥문단>'프롤레타리아 문예잡지'를 표방했다는 기사를 통해, 당시 강진국의 사상적 지향을 알 수 있다. 

조선으로 돌아온 강진국은 '경성부립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에서 일했다. 19319월 조선도서관연구회에서 발간한 <조선지도서관>(朝鮮之圖書館) 창간호 회원명단에 강진국의 이름이 있다. 경성부립도서관 시절, 그는 눈에 띄는 두 가지 '발자취'를 남겼다. 하나는 '조선도서관연구회' 이사를 맡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문고'(農村文庫)에 대한 글을 써서 발표한 점이다. 

'조선도서관연구회'19263, 식민지 조선 전체를 아우르는 도서관 단체로는 처음 발족했다. 도서관 단체의 명맥은 '조선도서관연맹'(1939)을 거쳐, '조선도서관협회'(1945), '한국도서관협회'(1955)로 이어진다. 

강진국은 조선도서관연구회에서 단둘뿐인 조선인 임원이었다. 강진국과 성달영(成達永)은 일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제강점기 조선 도서관계를 이끌었다. 

강진국은 1936227일부터 311일까지 <동아일보><농촌문고 창설의 급무>를 기고했다. 1년 반 뒤인 1937108일부터 그는, 같은 신문에 <농촌문고 경영론 - 그 필요와 방법에 대하여>라는 글을 24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가 '도서관 사상가'인 이유

<조선지도서관>2회에 걸쳐 기고한 글과 <동아일보> 연재 기사를 통해, 강진국은 자신의 도서관 사상을 펼쳐보였다. 한국 도서관계 일부에서 도서관 사상가로 추앙하는 박봉석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에 반해, 강진국이 꿈꾼 도서관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도서관 사상가로서 강진국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다.

강진국이 꿈꾼 '농촌문고'는 어떤 공간이었을까? 강진국은 '농촌문고', 즉 도서관을 농사와 생활, 교육과 의료의 인프라로 삼자고 주장했다. 농촌문고를 도서관뿐 아니라 협동조합, 학교, 병원, 나아가 농촌공동체의 중심으로 활용하자는 주장이다. 동시에 그는 농촌문고 보급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강진국은 조선총독부의 농촌.교육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강진국이 주장한 '도서관 중심주의', 이 땅에서 주창한 도서관 사상 중 가장 '혁명적'이다. 농촌문고를 통해 개벽을 꿈꿨기 때문이다. 1930년대 동아시아 도서관 담론에서 강진국은,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였을 것이다. 강진국이 꿈꾼 농촌문고는, 훗날 엄대섭의 '마을문고 운동'을 통해 이 땅에서 꽃을 피웠다. 

연재 말미에 강진국은 '농촌문고에 대해 문의할 사항이 있으면,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지금의 종로도서관)에 있는 필자에게 연락하라'는 내용을 덧붙였다. 농촌문고에 대한 글을 연재하던 1937년 무렵, 강진국이 종로분관에서 일했음을 알 수 있다. 농촌문고 사상을 정립하고 펼치는 과정에서 강진국은, 대동콘체른을 세운 '광산왕' 이종만(李鍾萬)과 만났다. 강진국과 이종만의 인연은 해방 후 '중간파' 활동으로 이어진다. 

강진국은 언제까지 도서관에 몸담았을까? 1939<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강진국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강진국은 193944일 오후 6, '라디오학교'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도서관 이야기'를 방송했다. 이즈음까지 강진국이 도서관에 근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강진국이 '농촌문고'에 대해 <동아일보>에 발표한 글은 '도서관 사상가'로서 그의 면모를 되새겼지만, 조선총독부 눈 밖에 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그의 글을 문제 삼았다. 이재욱의 <농촌도서관의 경영법> 추천사를 쓴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 조선총독부도서관장은, 강진국과 그의 글을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강진국의 주장은,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의 근간을 뒤흔드는 불온한 사상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가 임원으로 활동한, 조선도서관연구회 기관지 <조선지도서관>1938년 유야무야 폐간된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 이끌던 조선도서관연구회 역시, 조선총독부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의 전신)이 주도하는 조선도서관연맹으로 전환되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1935년부터 <문헌보국>(文獻報國)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했다. 간행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총독부도서관과 <문헌보국>'국가주의'에 복무하는 도서관을 지향했다. 

농촌문고에 대한 강진국의 글은 오랫동안 잊혔다가, 가토 가즈오(加藤一夫)를 비롯한 여러 일본인 학자가 쓴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을 통해 재조명되었다. 일본 도서관학자가 쓴 이 책은, 한국에서 잊힌 강진국에 대한 관심을 촉발했다. 일제에 의해 도서관을 떠난 강진국을 조명한 이가, 한국이 아닌 일본 도서관계인 것이다. 역설이라면 역설이지만,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은 아닐까.


*편집자의 주석: <朝鮮之圖書館>과 관련하여 

http://transpoet-textcube.blogspot.com/2017/10/blog-post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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