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22일 월요일

키코(KIKO)의 살덩이 재판과 베니스의 상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라는 '씽크탱크'가 있다. 이 연구원의 정희용 씨가 쓴 '키코(KIKO)의 살덩이 재판과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글을 옮겨놓는다. 너무 '문학적'이라고 평해야 할지 모르겠다. 키코의 상행위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그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키코로 말미암아 멀쩡한 중소기업의 도산이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현실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 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경제용어의 본질에 대한 거다. 투자은행, 그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은행이 아니라는 것이 정희용 씨의 주장이기도 하다. 최근 부쩍 사용 예가 늘어나고 있는 선진화, 그 말의 뜻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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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중소기업인 태산LCD가 키코(kiko) 등 환헤지 상품 거래 손실로 끝내 기업 회생절차를 신청했다. 아다시피 헤지(hedge)란 가격 변동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거래를 말한다. 파생 금융상품의 세계가 워낙 복잡하므로 단순하게 비유하자면, 독감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예방주사를 맞았는데, 오히려 그 예방주사의 독성으로 인해 사람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른 셈이다.

환헤지 상품 거래의 놈, 놈, 놈

현실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정부당국은 의식을 잃은 환자에 대해서도 살피거니와 주사를 처방한 자 그리고 애초에 그같은 위험성이 내포된 주사약을 제조한 자 각각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면밀하게 조사해 제2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재빨리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 회사에게 키코 가입을 권유한 은행(주사를 처방한 자), 환헤지 상품을 설계하고 국내 은행을 통해 판매한 외국계 투자은행(주사약 제조자) 그리고 정부의 책임을 각각 살펴보자. 그러다 보면 키코 환헤지 상품 거래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밝혀질 것이다.

먼저 응급실에 누워 있는 환자에게는 안쓰러운 일이지만, 태산LCD에 대해서는 한번만 맞으면 될 주사를 두세번 맞는 등 혹시 남용하지는 않았는지, 또는 예전 나이 많은 분들이 대개 단순 수액에 불과한 링거액을 무슨 대단한 영양제로 알고 맞으셨듯이 환헤지라는 주사를 다른 용도로 오용하지는 않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보도된 바에 의하면 태산LCD는 한해 달러 결제 매출액을 훨씬 초과하는 금액에 대한 환헤지 상품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명백한 약물 남용이다. 필요 이상의 헤지 거래가 만일 단기적 투기 차익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는 약물 오용까지도 겸한 것이다. 잠 못드는 고통을 줄이기 위한 수면제도 오남용되면 자칫 영원한 잠을 자거나 최소한 위 세척을 해야 하는 유사 독극물이 된다.

금융 선진화의 실체 여지없이 노출한 국내 은행들

태산LCD의 주거래은행인 하나은행은 진료와 처방을 내린 의사 및 약사에 해당한다. 약품 처방이 늘어날수록 은행의 환헤지 상품 판매 수수료 수입은 늘어난다. 사실 자고 나면 몇개씩 새로운 상품이 생기는, 그것도 노벨 경제학상이니 수학상이니를 수상한 천재들이 최첨단 이론을 동원하여 만들어 내는 파생 금융의 세계를, 일년 열두달 부품 제조와 기술 개발에 겨를이 없는 중소기업이 어떻게 소상하게 알겠는가. 진료와 처방은 전적으로 은행의 몫이다. 만일 중소기업이 약물 효과를 턱없이 과신하여 주사를 더 놓아달라고 요청하더라도 자제시켜야 하는 게 은행의 임무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 키코 상품 거래 손실을 본 많은 중소기업들이 하소연하듯이 애초에 이 상품의 계약 자체가 부족한 자금을 거래 은행으로부터 조달할 수밖에 없는, 을의 입장에 선 기업들에게 반강제된 것이라면,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불공정 거래다. 과거에도 은행은 중소기업에게 대출을 해주면서 돈줄을 쥔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이른바 ‘꺾기’라는 불공정 거래를 자행하곤 했다. 몫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강요 반 권유 반으로 자사 상품을 얹어 판다.

그러나 꺾기를 당하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성한 몸으로 뛰어도 어려운 살벌한 경쟁시장에서 팔 하나가 꺾인 채로 뛰어야 하는 억울함이 복받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 국민들은 4년간의 인고에도 불구하고 부상으로 인해 금메달 도전에 좌절하여 눈물을 뿌리는 왕기춘 선수를 숙연한 심정으로 보았거니와, 우리 중소기업들이 지금도 매일같이 국내 은행들로부터 이런 꼴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키코 사태로 다시 한 번 드러난 것이다.

은행이 경제 활동에 필요하는 자본을 공급하는 ‘기관’이 아니라, 수익성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금융 기업’으로 변신한 것이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금융 시장의 가장 큰 변화다. 만만한 중소기업에게 리스크 방지랍시고 통화옵션 상품을 떠안기고서 수익을 거둬내는 것이 결국 금융 선진화의 한 단면이다.

의도적으로 잘못된 처방, 과다 진료나 불공정 의료 행위는 엄격히 단속, 처벌되어야 한다.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키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불거지자 금융감독원은 7월말 처방자인 은행을 대상으로 키코 상품 불완전판매에 대해 전수 조사를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키코 상품을 가장 많이 판매한 sc제일은행은 조사에서 빠졌다.

불공정 과다진료 원성이 가장 높은 곳만 유독 건너뛰고 조사하겠다는 것은 금융 당국이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재발을 방지할 의지나 있는지를 의심케 하는 일이다. 올해 상반기 동안 시중은행이 키코와 같은 파생상품 판매로 거둔 순이익이 1조 원을 넘는데 그 가운데서도 sc제일은행은 외국계 은행답게 한국씨티은행과 함께 키코 상품을 가장 많이 판매한 은행이다.

중소기업들이 은행의 불공정 거래를 문제삼자, 공정거래위원회는 한술 더 떠서 ‘키코 약관에 문제가 없다’며 은행의 손을 들어주었다.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전체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는 약관의 문구가 맞는지 틀리는지 철자법을 가리는 것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임무는 아닐 것이다. 약관 내용이 기업들에게 충분히 설명되었는지,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도 기업이 통화옵션 상품에 가입할 수밖에 없는 거래상의 정당성이 존재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밝히는 것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존재 이유 아닌가. 아무래도 모든 책임을 중환자 자신에게 떠넘기려는 이상한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금융감독원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중립을 가장한 은행 편들기로 키코라는 독감 예방주사를 마구 처방한 당사자인 은행의 책임이 미궁에 빠지게 생겼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듣도보도 못하던 상품의 제조자인 글로벌 투자은행에 대해 알아보자.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키코

키코, 즉 녹인 녹아웃(knock in knock out)이라는 통화 옵션은 구조적으로 매수자(즉 기업)에게 ‘유한 수익 무한 손실’을 가져다 주는 상품이다. 일정하게 설정한 변동 구간 아래로 환율이 떨어질 경우 상품의 원 제조자(옵션 발행자라고 한다)인 투자은행은 권투에서 KO(녹아웃)가 게임 종료를 의미하듯이 녹아웃을 선언하며 계약 자체를 원천무효화하도록 되어 있다. 투자은행은 환율 하락에 대한 손실 부담 의무를 더 이상 지지 않는 것이다. 반면, 환율이 정해진 범위를 넘어서면 게임 아웃이 되는 게 아니라 그때부터 환율이 오르는 한에서는 기업의 무한 손실이 지속되는(녹인, knock in) 구조다.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식의
요상한 상품인 셈이다.

현물(여기서는 외환)의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개발한 파생상품은 원래 그 목적상, 상품 매수자에게 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제한하도록 하는 것이 본연의 취지인데 키코 상품은 완전히 반대로 설계된 셈이다. 이 역시 유형무형의 모든 자산을 상품으로 둔갑시켜 판매하는 첨단 기법을 자랑하는 글로벌 범위의 투자은행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 국제 투자은행들이란 누구인가?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리만브라더스, 베어스턴스 등이 그들이다. 우리나라 역시 이런 투자은행을 모델로 삼아 자본시장통합법을 제정하고 산업은행을 민영화해 글로벌 투자은행으로 바꾸겠다며 안달이 난 실정이다. 그러나 지난주 전세계 금융시장을 요동치게 하며 이들 투자 은행 가운데 두 개가 부실로 인해 사라졌다. 리만브라더스는 파산했고 메릴린치는 다른 은행에 인수되었다. 베어스턴스는 그보다 훨씬 전인 지난해 이미 파산했다. 이 중 리만브라더스는 태산LCD에게 치명상을 안긴 키코, 피봇 등의 상품을 만들어 국내은행을 통해 판매한 당사자다.

투자은행에게 도덕성을 묻느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다

이들을 투자은행이라고 부른다 하여 우리가 통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은행’ 개념을 떠올리면 절대 오산이다. 상업은행이 기본적으로 예금과 대출 업무를 통해 자본을 운용하는 곳이라면, 투자은행은 자본이라는 것을 이용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수익만 올리면 그만인 ‘금융 기업’일 뿐이다. 그 신묘한 수익 창출 방법을 통해 전 세계의 부를 끌어오려 하는 곳이 월스트리트이며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강하게 힘을 실어준 것이 레이건 이후 이른바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권들이다 또한 뒤늦게나마 우리나라도 그 흉내를 내자는 것을 이름하여 ‘금융 선진화’라 부른다.

부실채권도 이들 손을 거치면 유동화증권이라는 새 상품으로 포장되어 전 세계 은행과 국부펀드를 비롯한 투자자에게 팔린다. 미국에서 발생한 부동산 대출 부실이 미국에 한정되지 않고 지구촌 곳곳을 어지럽힌 이유다. 수익만이 목적인 투자은행은 자신들이 개발해 판 제품에 치명적 독이 들어있든 아니든 신경 쓰지 않는다. 미국 ‘켈너 모기지 인베스트먼트’의 설립자이자 CEO인 비트너는 팔면 안되는 금융상품을 마구 팔아치웠던 지난 시기의 자신을 반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참회했다.

“월스트리트와 투자은행은 마약왕들이나 다름없어요. 저는 그 밑에서 마약을 팔아먹는 사람이었지요.”

통화 관련 파생상품을 발행하는 것도 그들의 업무 가운데 하나이지만 특정 국가의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리고 내릴 막강한 힘을 쥔 것도 이들 투자은행과 그들의 자금을 지원받는 헤지펀드들이다. 환율 변동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이들이 발행한 옵션 상품에 가입하는 것 자체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지켜달라는 격일 수도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들이 발행한 원천적 위험성을 내포한 금융상품을 아주 제한적으로만 그리고 독이 되지 않도록 사용하고 방어할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정부당국과 금융 선진화의 대표주자라는 은행들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키코 사태로 중환자가 발생한 것은 분명하건만 이를 해결할 좋은 놈은 없고 나쁜 놈과 이상한 놈들만 판을 친다.

샤일록의 살덩이 재판에 처한 중소기업의 운명

이익을 위해서는 상대방의 파국마저 거리끼지 않는 위험한 금융거래는 수백년 전에도 이미 존재했던 모양이다. 셰익스피어의 고전 <베니스의 상인>은 상업 자본주의가 발흥하고 메디치 가문 등 금융재벌이 탄생하던 16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데, 작품의 주요한 모티브를 당시 화제가 된 ‘인육 재판’ 즉, 빌린 돈을 갚지 못한 자의 생살을 도려내는 대부업자의 악랄한 징벌 행위에서 얻었다고 한다.

잠시 작품 내용을 환기해 보자.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친구의 결혼을 돕기 위해 유태인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으로부터 돈을 빌린다. 샤일록은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부위의 살 한 파운드’를 도려내는 것을 조건으로 단다. 사실상 죽이겠다는 이야기다. 안토니오의 상품을 실은 배가 실종되고 빌린 돈을 정한 날짜까지 갚지 못하게 되어 이윽고 살덩이를 청구하는 재판이 열린다. 늙은 재판관은 계약상 하자가 없는(?) 이 재판에 대해 어떤 성의도 안토니오에 대한 동정도 보이지 않는다. 키코 약관에 문제가 없다는 공정거래위원회나 금융감독원처럼 무기력, 무관심하다.

죽을 운명에 처한 안토니오의 마지막 결심 재판일, 뜻밖에도 재판관이 젊은 사람으로 바뀌었다. 사실은 안토니오의 도움으로 결혼하게 된 친구의 아내인 포샤가 변장한 것이다. 재판관이 된 포샤는 판결을 내린다.


“계약대로 안토니오의 살을 베어내시오. 단, 이 계약에는 피를 흘린다는 조건은 없으므로 샤일록 당신은 한방울의 피도 흘려서는 안 될 것이오. 만일 피가 단 한방울이라도 흐른다면 당신에게 벌을 내릴 것이오”

물론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필자와 같이 무미건조한 대사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나, 오래 전 기억을 더듬으면 대략 판결 내용은 위와 같다. 피를 흘리지 않고 살을 도려낼 방법이 없는 샤일록이 맥없이 물러나고 <베니스의 상인>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작금의 국내외 환경은, 수틀릴 경우 심장 가장 가까운 부위의 살덩이 한 파운드를 요구하는 16세기 베니스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니 더 나쁘다고 해야 할까. 자신들의 수익을 위해 기업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는 상품을 설계하고 판매하기에 급급한 금융회사들이 판을 친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며 이런 금융 질서를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세계에 강요하던 미국 정부는 막상 이들 투자은행의 부실로 위기가 발생하자 안면을 싹 바꾸어 국민의 혈세를 동원한 ‘국가의 개입’으로 위기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사기(이 용어는 강만수 장관이 먼저 사용했다)에 다름없는 키코 위기에 몰린 우리 중소기업들의 운명은 가혹할 뿐이다.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의 살을 요구하는 샤일록은 곳곳에 번뜩이건만 이런 위험으로부터 우리 중소기업을 사전에 보호하는 ‘좋은 놈’이나 최소한 사태 발생 후에라도 신속히 살덩이 재판에 개입해 창조적 발상으로 키코 위기에 빠진 중소기업들을 구해낼 포샤와 같은 명 재판관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임기 초반부터 그토록 ‘기업 프렌들리’를 입에 달고 살았던 이 정부에서 말이다.

정희용/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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