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23일 화요일

Ahn, Hae-Ryong

안해룡 개인전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도요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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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안상수, www.ssahn.com


 

1.

 

안해룡 선배.

언제 만났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 정말 언제 만났었는지 흐릿하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본 게 방송국 언저리였는지, 아니면 출판사 언저리였는지....

 

2.

 

안해룡은 비디오저널리즘 1세대의 중심인물이다. 1993년 일본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조합인 '아시아프레스 인터내셔널'에 참여하면서 비디어저널리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3년이라면, 8미리 소형 캠코더가 바야흐로 사람들의 손에 쥐어지기 시작하던 때다.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카메라나 디지털캠코더를 사용해서 인터넷 공간에 올리던 때와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거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다. 그 이전에 그이는 <인간> 시리즈로 잘 알려져 있는 사진작가 최민식 씨와 함께 '사진집단 사실'을 만들어 몇 번의 그룹전을 연 적이 있다. 말하자면 글에서 사진으로, 다시 사진에서 영상으로(어느 때는 글과 사진과 영상을 함께), 자신의 표현 수단을 확장하면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3.

 

1994년 12월 4일, 서울의 종로성당에서는 한겨레신문사와 아시아프레스센터가 함께 어떤 심포지엄을 열었다.

 

<한겨레> 1994년 12월 7일자에서 이근영 기자는  "비디오저널리스트 등장한다"는 기사를 통해, 이 심포지엄에서 아시아프레스센터의 대표인 노나카 아키히로가 "비디오저널리스트는 팀을 이뤄 대형 카메라로 촬영하는 일반 텔레비전 프로 제작방식과 달리 다루기 쉬운 보급형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해 독자적으로 취재 제작하는 사람들로 다채널 영상시대의 보도를 담당할 기수로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고 전하고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비디오 저널리스트는 89년 노르웨이의 한 방송사에서 뉴스를 8㎜ 비디오 카메라로 제작하면서 시작됐는데, 92년 초 미국 뉴욕지역 뉴스공급 종합유선방송인 〈뉴욕1〉에서 이 방식을 채택하면서 본격화했다. 이 방송국은 1백∼1백50명의 리포터가 뉴욕 각지에서 8㎜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편집해 보내오는 뉴스를 24시간 방영하고 있다. 흑인지역에는 흑인기자가 배치되며, 지하철 담당 기자는 하루 종일 지하철을 타고다니며 취재를 한다. 일본의 통신위성방송(CS방송)인 〈아사히뉴스타〉에는 한 사람의 저널리스트가 보급형 비디오로 취재·촬영에서 편집·해설까지 해내는 8㎜ 비디오 전문 프로그램인 〈프리존 2000〉이 편성돼 지금까지 아시아프레스센터 회원들이 제작한 60여편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고 한다. 안해룡은 이 <프리존 2000>을 통해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을 통해 비디오저널리스트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4,

안해룡의 작품 활동은 계속된다. 글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침묵의 외침>이라는 작품을 통해 거의 완전히 다큐멘터리 작가가 된 듯하였다. 하지만 <북녘 일상의 풍경>(리만근 사진)이라는 사진집의 글이나 노순택 씨나 오키나와 사진가 등과 함께 뉴욕 근대미술관 별관인 PS1에서 주한/주일 미군 문제를 다루는 사진전을 여는 등의 활동도 계속 병행하였다. 또한 KBS1 TV에서 방영된 '선택, 현대차 1공장 45번의 기록', 중국에 거주하는 위안부를 담은 '통한의 망향가' 등등의 작품은 수작이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담은 동영상 다큐멘터리를 사진과 문자로 재구성해 온-오프라인에서 동시에 선보이는 이색전시회가 열린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지난 28일부터 다음달 10일까지 서울 신문로 일주아트하우스 미디어갤러리에서 ‘침묵의 외침-일본군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목소리’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반세기 만에 일제의 만행과 식민지 민중의 아픔을 폭로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작가 안해룡 씨의 비디오를 기초로 한 것으로, 영상과 소리를 분리해 다시 평면에 재구성한 사진작품과 비디오작품, 그리고 인터넷에 올린 사이버작품 등 세 영역으로 나눠 소통의 확장을 꾀했다."(한겨레 2002년 12월 30일자, 군위안부 할머니 영상다큐 온-오프라인 동시 전시회, 이지은 기자)

 

 

4.

안해룡의 영상 작품에는 분단, 재일코리안(재일동포나 재일조선인 등의 표현이 아니라), 민족학교 등의 문제가 가로지르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언젠가 방송을 통해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어느 정도 의문을 해소했던 기억이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뿌리 찾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그런데 기억이 없다. 무엇이었나? 그것이 <도요하시의 민들레>였나?

 

5.

그리고 다시 2008년 가을, 서울 문래동.

문래동의 철재 상가들이 도요하시 조선초급학교로 변모하였고, 거기서 안해룡 선배가 사진 전시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의 임종업 선임기자는 이 사진전의 모습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아래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3116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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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비가 추적거리는 서울 문래동 철재상가 단지의 20일 오후. 칙칙한 낡은 건물들이 셔터를 내리면서 쏴한 쇳가루 냄새를 차단할 무렵, 사람들이 하나 둘 두리번두리번 새한철강을 찾아와 우산을 접었다. ‘학교법인 아이치조선학원 도요하시 조선초급학교’. 흰 바탕 먹글씨 임시간판이 걸린 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지저분한 벽에 10, 20년 단위로 시간을 끊은 흑백사진들이 걸렸다. 일본 아이치현 도요하시에 있는 도요하시 조선초급학교의 1945년부터 2004년까지의 60년 역사다.

 

낡은 교사 앞 조회, 가을 운동회, 봄 소풍…. 우리의 옛 시골 초등학교의 가난함과 다를 바 없고, 사진은 소풍이나 학예회 때나 찍는 것이라고 여겼던 점도 똑같다. 이 학교는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한 국어강습소에서 출발했다. 자주학교로서 이곳을 폐쇄하려는 미군정과 일본 경찰들의 물리력에 맞서며 민족교육을 해왔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조선인 됨을 지키기 위해 사립학교보다 더 비싼 학비를 마다지 않았다. 하지만 한때 150명이 넘던 학생들은 이제 유치원을 포함해 27명으로 줄어들었다.

 

계단을 올라 3층 철문을 열면 문래예술공단의 본부이자 전시실을 겸한 ‘랩 39’다. 지금껏 흑백세계가 컬러세상으로 바뀌면서 추억에서 화들짝 깨어난다.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사진전. 다큐멘터리 작가 안해룡(48)씨가 6년여 동안 도요하시 조선초급학교를 드나들며 찍은 사진들이 걸렸다. 10월10일까지.(070-7578-5439) 작가는 “조선학교에는 민족을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도요하시 지역에 사는 모든 동포들의 삶이 투영된 커뮤니티가 숨쉬고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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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안해룡

 

책을 한 아름 든 선생님과 활짝 웃는 어린이. 수업을 시작하려는 것일까, 우연히 눈이 마주친 것일까. 까르르 웃음소리와 자애로운 눈웃음이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있다. 긴 생머리의 선생님은 한복을 입었고 아이는 흰 양말을 신었다. 어린이 네 명이 전부인 통합수업. 2학년 동생들이 수업을 하고 3학년 언니는 자습을 한다. 빨간 유니폼을 입은 축구반 아이들. 남자 어린이가 한 명이라도 빠지면 성원이 안 돼 다른 팀과 시합을 할 수 없다. 박성대-황재는 3학년-6학년 형제다. 비 오는 날 학교에 모여든 학부모들. 아이들 신발이 촘촘한 신발장, 통합 화장실이 있는 현관에 비닐을 깔고 앉았다. 학부모운영위원회라도 여는 걸까. 잔디가 깔린 옥상에서 과외활동을 하는 아이들 너머로 신칸센 철도가 지나가고 있다.

 

“사진전을 한다면 학교 전체를 다 보여줄 것이다.” 작가의 약속은 새한철강 건물을 거대한 도요하시 초급학교 사진으로 뒤덮고, 옥상에 자그마한 목조 교실을 재현하고, 그곳을 도요하시 학부모들과 서울에 유학온 조선학교 출신 학생들로 채우는 것으로 지켜졌다. “비 오는 날엔 비가/ 눈 내리는 날엔 눈이/ 때 아닌 모진 바람도/ 창을 들이쳐/ 너희들의 책을 적시고/ 뺨을 때리고 할퀴고/ 공부를 못하게 만들어 놓은/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란다/ 초라하지만 단 하나뿐인 우리 학교/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란다/ 니혼노 가코요리 이이데쓰(일본학교보다 좋다).” 노래를 부르는 18명 유학생들도, 이를 바라보는 학부모 대표도, 3층까지 계단을 밟아 오르며 선행학습을 한 서울의 관객들도 눈물이 고였다. "

 

이 전시회 소개 기사문을 너무 감상적이라고 할 것인가?

 

6.

군더더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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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과 관련하여 '사회적 공익근무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스가야 아키코의 <미래를 만드는 도서관>(2004)을 자주 언급하게 되지만, 스가야 아키코의 책 <미디어 리터러시>(2001)도 이 사람, 안해룡이 번역한 것이다.

 

 

안해룡 Ahn Hae-Ryong
사진작가이자 다큐멘터리감독. 아시아프레스의 기자로서 동아시아지역을 횡단하며 재일동포의 민족교육 문제, 잊혀진 한국영화사의 기억 등에 관한 기록 작업을 진행해 왔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기록 <침묵의 외침>(2002)과 KBS 스페셜로 방영된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축구부원들의 이야기를 다룬<오사카 일레븐 - 오사카조고 축구부 이야기>(2007, 공동연출) 등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007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My Heart Is Not Broken Yet>
2007 <오사카 일레븐 - 오사카조고 축구부 이야기 Osaka Eleven : A Story of Osaka Korean High School Soccer Team>
2004 <지울 수 없는 역사 - '일본군' 위안부  Never Ending Pains _ A Story of Korean Military Sexual Slaves by Japan>
2004 <도요하시의 민들레  A Dandelion in Toyohashi _ A Diary of a Korean School Teacher>
2003 <침묵의 외침 Silent Crying _ The Voices of Korean Military Sexual Slaves by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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