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8일 토요일

희망이라는 이데올로기

"하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어도 없고, 목적어도 없습니다.

 

그냥 "하면 된다"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면 되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이 사라지고 나면, 세상은 끔찍한 지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요즘에는 정말 "하면 안된다"는 구호가 절실한 시기가 아닐까요? 그런데 "하면 안된다"는 말에도 주어나 목적어가 없기는 마찬가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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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estlight.tistory.com/category/

 

 

서경식 선생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철수와영희, 2009년 1월 출간)를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의 여섯번째 꼭지인 '희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라는 글에서  서경식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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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희망이 'hope'일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희망의 희자가 희박하다는 '희' 자이지요. 'lttle', 거의 없다는 겁니다. 절망은 전혀 없다는 것이죠. 끊어버렸다는 것이 절망이고, 소망이 거의 없다는 것이 희망이에요. '우리의 언어에는 희망이 거의 없는 것하고 절대 없는 것, 이 두 가지밖에 없다.' 쓸데없는 생각인지 모르지만 저는 글쟁이니까 항상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163쪽)(중략) 그러니까 우리가 주인공으로, 자신들의 해석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다수자가 그러듯이 "그래도 희망이 있는데......" 하는 식으로 해석을 당해 버리는 것이 서벌턴(기층민중)이죠. "안 그렇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없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허망이다." 하고 저항하고 충돌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수자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문제 제기할 수 있고, 어떤 새로운 개념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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