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4일 월요일

‘행복 충전소’ 다문화도서관, 정부지원은 ‘0’

대전시 중구 은행동 대전이주외국인종합복지관 부설 다문화도서관에서 지난 16일 오후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어머니, 자원봉사 교사들과 앉아 동화책 놀이 수업을 하고 있다.

[현장 쏙] 다문화가족 75만명, 우리 현실은 

다문화가정의 부모와 자녀에게 다문화도서관은 사랑방이자 공부방이다. 부모 나라 언어를 익히고 이웃·친구들과 소통하는 공간이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은 거의 없고, 민간의 참여와 기부가 뒷받침하는 버팀목이라는데….

“너는 가짜 다문화가정 아이야.”
초등학교 5학년인 현수의 아버지 박성진(43)씨는 아이 담임교사가 칭찬 삼아 농담처럼 던진 말이 지금도 참 고맙다. 다문화가정 아이라고 하면 으레 피부 빛깔이 검거나 희고 얼굴 모양도 다른데다 한국말이 서툴 거라는 편견을 아들이 깼다 싶은 것이다. “현수가 2학년 때 여기 다문화도서관이 생겼어요. 매주 와서 책도 보고 자원봉사 선생님한테서 한두 시간씩 과외 공부도 했는데, 학교에서 다른 (토박이) 학생들이 부러워할 정도였어요.” 지난 16일 일요일 오후에도 박씨는 부인,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을 찾았다.
■ “학교생활, 더는 두렵지 않아요” 현수 어머니(40)는 타이 동부지역 출신이다. 2003년 9월 한국으로 시집왔다. 다른 어머니들 못지않게 그도 아이 공부에 열심이다. 4년째 일요일마다 대전시 중구 은행동에 자리한 대전이주외국인종합복지관 부설 다문화도서관을 찾는다.
대전 다문화도서관은 2010년 5월1일 문을 열었다. 복지관이 2009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해 교육을 시작한 게 계기였다. 처음엔 지금의 도서관 근처 교회 교육관을 빌려서 시작했다. 하지만 거리도 꽤 멀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오가기가 쉽지 않았다. ‘교육 공간을 만들어보자. 기부도 받고….’ 그렇게 출발한 다문화도서관 만들기가 이듬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복지관은 석달 동안 아동교육 공간 마련 모금운동을 벌여 3300여만원을 모았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없이 시작하다 보니 도서관은 헌옷에 헝겊 조각을 깁듯이 후원을 받아 하나씩 채워나갈 수밖에 없었다. 도서 대여 프로그램은 고려대 초미세생체연구실에서 기증받았고, 2012년엔 1년 내내 도서 기증 운동을 벌였다. 책장을 더 늘리는 건 특허청이 도와줬다. 어머니 나라가 제각각인 아이들을 위한 모국어 책들은 비영리 공익재단인 아름다운재단의 후원으로 채웠다.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등 10개 나라 언어로 된 어린이책이 3000여권, 어른을 위한 책 1000여권, 한국어로 된 어린이책이 2500여권 된다. 지난달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원들이 십시일반 보탠 기금으로 도서관 내부를 산뜻하게 새로 단장했다.
건물 2층 190㎡ 공간에 도서관 틀이 제법 갖춰지니 알찬 사업들도 하나둘 벌일 수 있게 됐다. 지난해에는 결혼이주 여성들이 성우로 나서 모국어 동화책 만들기 사업으로 오디오북을 만들었다. 콤팩트디스크(CD) 500장을 제작해 전국 다문화가족지원센터들에 보냈고, 도서관을 찾는 손님들에게 선물로 건넨다. 평일에는 결혼이주 여성을 위한 한국어 교육을 2차례씩 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한테는 일요일마다 동화책 놀이와 한글 배우기, 학습지 공부 프로그램을 한다. 도서관 들머리는 평일 20켤레, 주말이면 60켤레 넘는 신발로 빼곡하다. 1년으로 치면 5000명 이상이 찾는다.
이곳 도서관은 다문화가정을 사회적 약자로 보기보다는 그들의 강점을 살리는 데 더 애쓴다. 김애진 도서관 사무국장은 “다문화가정을 무조건 혜택만 받는 이들로 대상화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이들도 우리 사회에서 동등한 구성원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어에 능숙하지 않은 어머니가 자녀들과 심리적 거리감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도서관이라는 게 김 국장의 설명이다.
모금운동 벌이고, 후원받아
대전 다문화도서관 연 지 4년
이주 엄마와 자녀 함께 공부
학교 적응 도와 만족도 높아

정부 다문화정책 늘고 있지만
도서관 지원 빠져있어 ‘불균형’
건보공단만 꾸준히 손 내밀어
“글로벌 문화 배울 공간 지원을”

16일 제일 먼저 도서관에 들어선 중국 출신 리자오쥐(33)씨의 딸 오은비(7)양은 자리에 앉자마자 한글 동화책 <인어공주>를 펴들었다. 리자오쥐는 “은비가 저보다 한국어 더 잘해요. 내가 책 읽을 때 받침이 틀리면 은비가 가르쳐줘요”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현수 아버지 박씨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예전에 현수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는 혼혈아라고 손가락질을 받을까봐 걱정도 했어요. 다음달에 현수 동생 수빈이도 초등학교 가는데 이젠 걱정 안 해요.”
■ 흔들리는 다문화도서관…정부 지원은 ‘0’ 2014년 2월, 다문화도서관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211곳에 정부 지원으로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만들어져 있다. 이 가운데 에스티엑스(STX)그룹의 후원을 받아 2008년부터 7곳에 다문화어린이도서관 ‘모두’가 들어섰다. 하지만 그룹의 재정 상황이 급격히 악화하면서 지난해 말 모든 지원이 끊겼다. 1년에 5000만원씩 후원받던 도서관들에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대구시 남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권지영 사무국장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또다른 기업이 사서 인건비 등 3200만원을 지원해주기로 해 급한 불은 껐다. 대구에 하나밖에 없는 다문화도서관이어서 평일에도 어머니와 아이들이 많이 찾는데, 사정이 어렵지만 헤쳐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건강보험공단이 다문화도서관을 새로 단장해주는 사업도 큰 보탬이 된다. 공단 직원 1만1000여명은 다달이 월급에서 평균 5000원씩 떼어, 2011년부터 3000만원씩 들여 전국 18곳의 다문화도서관을 새로 꾸며줬다. 공단 직원들이 모은 건강나눔기금은 지난해 말 8억6000만원을 넘겼다. 공단은 단발성 지원에 그치지 않고 2년마다 도서관 시설 보수나 책 구입에 200만원씩 꼬박꼬박 지원해준다. 대전 다문화도서관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아니지만 지역에서 가장 크고 알찬 곳인 까닭에 심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시민단체 시설로는 처음 지원을 받기도 했다.
반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다문화도서관 관련 정책은 사실상 없는 상태다. 전국 다문화가족지원센터들에선 결혼이주 여성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거나 자녀들에게 어머니 나라의 언어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를 위한 기초 교재 정도를 마련해둔 수준이다.
지난 16일 오후 대전시 중구 은행동 대전이주외국인종합복지관 부설 다문화도서관에서 다음달 초등학교에 입학할 오은비양이 자원봉사 학생과 학습지를 공부하고 있다.
지난달 15일 여성가족부와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등 부처 6곳은 합동으로 다문화가정 정책 개선 방안을 내놨다. 유사·중복 사업을 조정하고,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건강가정지원센터를 단계적으로 통합해 가족통합지원센터를 만들겠다는 게 뼈대다. 다문화가정 부모와 아이들에게는 사랑방과 공부방 구실을 하고, 토박이 아이들에게는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인 다문화도서관 사업은 찾아볼 수 없다. 충남도 여성가족정책관실 관계자는 “중앙 부처나 충남도에 다문화도서관 사업 자체가 없다. 지금 추세는 다문화가족만 별도로 하는 것보다는 사회통합 차원에서 일반 도서관에 다문화가족을 위한 책을 두는 식으로 가는 게 정책 방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주외국인·노동자 시민단체를 이끌어온 이들은 다문화도서관의 필요성을 여전히 강조한다. 2008년부터 다문화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해온 경남이주민센터의 이철승 대표는 “이명박 정부 당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보수단체들에 위탁운영이 돌아갔다. 이곳처럼 자생적으로 만든 곳은 정부나 지자체 지원을 받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전했다. 대전이주외국인종합복지관 김봉구 관장은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게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교육이기 때문에 다문화도서관은 많을수록 좋다. 다문화가정뿐 아니라 이웃 토박이가정 아이들도 함께 이용하면서 다문화 감수성을 향상하는 것도 큰 장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75만명에 이르는 다문화가족을 겨냥한 정책 사업은 정부 93개(1232억원), 지자체 1229개(246억원)에 이른다. 4년째 정부 지원금 0원인 대전 다문화도서관은 부모와 아이들의 책 읽기를 도와줄 도서관 사서 1명을 두지 못하고 있다.
대전/글·사진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625516.html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