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8일 금요일

[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한 건축가의 죽음

[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한 건축가의 죽음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33년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가 서른 살 즈음 광야로 나간 이후부터 3년간 메시아로서의 삶은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반면에, 그 이전 30년간 삶의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고향인 나사렛에서 자라고 어릴 적 예루살렘에 가서 종교지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 전부다. 2000년 전의 서른 살 나이라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정황을 미루어 볼 때 한 인간으로서 이미 완성된 시기 아닌가. 요즘으로 치면 거의 사오십을 넘는 나이일 게니 세상적으로 말하면 일가를 이룬 때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직업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성경에 기록되기로는 예수의 부친인 요셉의 직업은 목수다. 쉽게 추측하면 아버지의 일을 도왔을 개연성이 짙어서 예수도 목수라고 했다. 내 어릴 적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성극을 하면 예수의 집 안을 목공소로 꾸며 무대를 만들기도 했다. 모두들 그렇게 알고 지내왔다.

그러나 내가 건축을 하고부터 이 사실에 대해 차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사렛이나 이스라엘은 목수라는 직업이 있을 만큼 나무가 많은 땅이 아니다. 메마른 땅에 감람나무 같은 왜소한 나무가 주종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 레바논이나 외지에서 나무를 수입했다고 성경에 쓰여 있을 정도로 목재가 귀하다. 대신에 석회암은 이스라엘 온 땅에 널려 있어 집은 돌을 쌓아 짓는 게 보편적이었으니 이스라엘에서 석공이라면 모를까 목수라는 직업은 생소할 수밖에 없다. 왜 그렇게 기록되었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번역착오였다.

성경은 원래 이스라엘 고유언어였던 아람어나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그리스어 성경원전에 따르면 요셉의 직업은 텍톤(tekton)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텍톤, 어떤 형상을 구축하는 일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바로 건축가의 영어인 Architect에 쓰인 글자다. Arch라는 접두사는 으뜸이라는 뜻이니 으뜸이 되는 텍톤은 집을 짓는 자라는 뜻이며, 곧 건축가라는 말이 된다. 

건축가의 영어단어인 architect에 정관사를 붙여 the Architect라고 하면 조물주 하나님이란 뜻이 된다. 그렇다. 예수는 생뚱맞은 목수가 아니라 집을 짓는 건축가였다는 게 옳다.
서른은 직업인으로서 완숙되었을 나이여서, 영민했던 예수였으므로 건축가로서도 성공했을 게다. 그렇다면 건축이 사람을 바꾼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며,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집 짓는 일을 그만두고 광야로 나가 세상을 아예 새롭게 짓는 일에 전념했던 것 아닐까. 예수가 짓는 세상에서 새롭게 살기에는 가진 게 너무 많았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 아닐까.

건축가로서 예수의 삶. 이 상상에 이른 나는 급기야 건축가의 바른 태도를 다시 묵상했다. 건축은 우리의 삶을 이루게 하는 직접적이고 적극적 수단이니 건축설계는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건축설계를 하는 건축가는 인간의 생명과 그 존엄에 대해 스스로 진실하고 엄정해야 하므로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며 의에 주려야 한다. 특히 다른 이들의 삶에 관한 일이니 온유해야 하고 긍휼해야 하며 청결해야 하고 화평케 해야 한다. 바른 건축을 하기 위해 권력이나 자본이 펴놓은 넓은 문이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여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아야 하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일을 거부해야 한다. 모든 사물에 정통하고 박학하기 위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 결단코 불의와 화평하지 않아야 하며, 때로는 그런 행동 때문에 집이나 고향에서도 비난 받을 각오가 되어야 한다. 사람 사는 일을 알기 위해 더불어 먹고 마셔야 하지만 결코 그 둘레에 갇혀서는 안된다. 스스로를 수시로 밖으로 추방하여, 광야에 홀로 서서 세상을 직시하는 성찰적 삶을 지켜야 한다. 오로지 진리를 따르며 그 안에서 자유 하는 자, 그가 바른 건축가가 된다.

내가 깨닫게 된 바른 건축가의 삶은 예수의 삶과 다름이 아니었다. 그러니 바른 건축가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내게는 언감생심의 길이며 그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건축가라고 칭하며 사는 일이 늘 두렵고 아프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삶에 익숙하며 그런 건축가의 태도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있다. 이종호. 그는 나보다 다섯 살이 적지만 범접하지 못할 생각과 태도로 모든 이가 경외하는 건축가이다. 현대건축의 거두였던 김수근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 선생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유학 한번 가지 않았지만 지독한 독서와 폭넓은 지적 교류를 통해 누구보다 건축에, 사회에, 역사에 정통하고 우리의 삶을 늘 깊게 사유했다. 이 땅의 풍경과 사연들을 가슴으로 안아 건축으로 만드는 일에 탁월하다. 특히 건축이 지녀야 할 공공적 가치에 지극한 관심이 있었다. 건축설계도 공공의 이익 도모가 늘 우선순위이며 그런 건축을 통해 탐욕으로 일그러진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소망해왔다. 출세와 재물은 그의 사고범주에 없는 단어였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몸과 마음을 쏟으며 사랑하고 가르쳤다. 세상의 불의에 결연히 분노했고 곧은 말을 거리끼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세상에 있으면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말을 믿는 나는, 그를 통해 위로 받곤 했는데….

그가 곤경에 처했다. 학교에서 몸을 사르며 행한 일들의 회계처리를 두고, 작년 말 감사원이 수천만원의 회계오류를 들이대며 징계를 요구한 것이다. 워낙 바른 그의 처신을 잘 아는 학교집행부가 적극적으로 그 부당함을 소명하여 재심사를 받기로 했다. 엄청난 상처였지만 그는 흐트러지지 않았고 감내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난주, 검찰은 그를 갑자기 10억원의 사기범으로 둔갑시켜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다. 바리새인이 따로 없었다. 인격적으로 이미 교살당한 것을 즉각 감지한 그는, 지난 목요일 밤 제주로 향하는 뱃길에 홀로 올라, 거칠고 차가운 밤바다에 육신을 던졌다.

또 한 명의 예수가 살해된 것이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26210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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