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5일 수요일

그는 왜 ‘문학은 사기’라고 했을까

장 폴 사르트르의 대표 희곡 <닫힌 방·악마와 선한 신>(민음사)이 처음 번역됐다. 두 작품 가운데 앞의 것은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라는 대사로 유명하고, 뒤의 것은 지은이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희곡이다. 사르트르는 <구토>나 <존재와 무> 같은 난해한 소설과 철학서를 쓴 소설가이자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처음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극작가로서다. 하지만 워낙 철학자로 유명해진 바람에 독자들은 사르트르의 모든 문학 작품을 그의 철학을 보조하는 유사 철학서로 읽는다. 어느 대담에서 사르트르는 그런 독법이 자신에게는 손해라고 항변했지만, 그의 문학 작품이 하나같이 본인의 철학을 대변하는 것도 사실이다.

번역본으로 1000쪽이 넘는 <존재와 무>는 전문가들에게도 어려운 철학서이지만 이 책의 기본개념인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먼저 즉자존재(卽自存在)는 ‘있는 그대로의 나(존재)’를 뜻하는 것으로 이것은 무엇과도 관계하지 않으며 다른 존재로 되지 못한다. 컵이나 의자는 딱히 무엇과 관계하지 않더라도 컵이고 의자라고 할 수 있으며 깨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이상 결코 지금과 다른 무엇이 되지 않는다. 사물이거나 사물 상태를 뜻하는 즉자존재는 의식이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지영 그림</font></div> 
ⓒ이지영 그림
대자존재(對自存在)는 ①의식을 가진 존재이자 ②무엇을 대하고 있는 나(존재)이다. ②는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만난 ‘한국 대 일본’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저 구도 속에서 한국과 일본 팀은 서로를 대하고 있으며 서로가 대하고 있지 않으면 어느 팀도 존재할 근거가 사라진다. 아무리 뛰어난 팀도 또 다른 팀이 없이는 축구 경기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나의 존재가 건재할 리 없는 것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대자존재라는 용어는 대자(對自) 앞에 이 누락된 형국이니, 독자들은 현재 자신이 가장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거기에 대입하면 된다. ‘국가 대(對) 나(自)’ ‘사장 대(對) 나(自)’ ‘사랑하는 그녀 대(對) 나(自)’…. 

누락된 에 사르트르는 무엇보다 ‘의식’을 대입하고자 상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①에 나왔듯이 대자존재는 즉자존재와 달리 처음부터 의식을 가진 존재라고 했으니, 사르트르의 의도대로라면 ‘의식 대(對) 의식’이 되어버리므로 동어반복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對) 뒤의 의식이 아직 ② 이전의 의식이라고 한다면 즉자존재와 다를 게 무엇인가?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의식은 있지만 대(對) 앞의 의식, 즉 ‘반성적 의식’과 마주하고 있지는 않다. 동물과 다르다는 인간 역시 자신의 의식을 한 번 더 돌이켜보는 반성적 의식을 마주하고 스스로를 개방할 때라야 사물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나만을 생각하는 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지금과는 다른 무엇으로도 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은 자유롭게 된다. 반성적 의식과의 대면은 여러모로 인간을 편치 않게 한다. 반성적 의식은 필연적으로 존재 이전을 추동하므로 그것과 마주한 사람은 무(無)로 떨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이 무야말로 자유와 가능성의 영역이지만 무나 자유는 내 발밑을 허무는 것과 똑같은 불안을 안긴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의 책 제목으로 유명한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시작된다. 우리는 결핍인 동시에 가능성으로 가득한 무(대자존재)가 되기보다 완결되고 충족된 존재(즉자존재), 다시 말해 아무 생각 없고 변화를 모르는 사물이 되고자 한다. 

 <닫힌 방·악마와 선한 신>장 폴 사르트르 지음민음사 펴냄 
<닫힌 방·악마와 선한 신>장 폴 사르트르 지음민음사 펴냄
예컨대 카페에서 일하는 웨이터는 자신이 웨이터라는 것을 과장되게 나타낸다. 이런 태도는 웨이터로 하여금 세계와 나 사이에 아무런 빈틈이 없는 자기 충족감을 느끼게 해주는 한편 자신을 웨이터라는 직분에 고착시킨다. 사르트르는 대자존재 되기를 포기하고 고정된 신분(기득권·권리)과 습관(가치·윤리)으로 도피하는 부르주아 일반의 도착적인 태도를 ‘자기기만’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을 비판하는 용어로 삼았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 ‘여러분, 예슈님을 미슘늬까?’라고 말하는 대한민국 대표 ‘먹사’님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쉰여덟 살에 출간한 사르트르의 자서전 <말>(동서문화사)에는 “문학은 사기행위다”라는 말이 나온다. 비록 스쳐지나가듯이 말했고 위악적인 상황에서 한 말이지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데가 없지 않다. 문학을 숭고하게 여기면서 글쓰기를 특권화하는 작가는 웨이터나 ‘먹사’님처럼 자기기만하기 십상이고 문학마저 물신화하게 된다. 문학인이 자기기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문학을 대상화할 수 있는 반성적 의식이 필요하다. ‘문학은 사기’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닫힌 방>은 낯모르는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사망 직후 지옥에서 한방을 쓰며 벌이는 이야기다. 세 사람은 너무나 공통점이 없어서 연극 초반부에는 아무런 원칙 없이 무작위로 한방에 갇힌 듯이 보이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세 사람은 죽기 전에 이승에서 습관처럼 벌였던 치정 관계로 얽히게 된다. 신은 무작위로 세 사람을 모은 게 아니었다. 이제 세 사람은 이승에서 했던 것과 동일한 상황을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데, 이런 지옥이야말로 그 어떤 반성적 의식을 갖거나 변화를 거부했던 사물화된 존재에게 퍽 어울리지 않는가? 이 지옥에는 자신을 비춰볼 거울이 없다.

어느 원로 불문학자는 지난해에 펴낸 회상록에서 사르트르의 사상이나 작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지 않는 게 한계라면서 “사르트르의 글은 그런 면모를 보여주지 못해서 실존적이라기보다 관념적”이라고 썼다. 내 생각은 다르다. 다섯 살에 죽음과 초대면했던 사르트르는 평생 죽음을 의식하면서 그것과 고투했다. 실존주의자이자 무신론자였던 그의 철학에 따르면 사물 상태에 저항했던 인간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물이 된다. <닫힌 방>에도 나오듯이 죽음이란 철저히 산 자(타자)들이 나를 소유하는 현상으로, 타자의 시선 앞에 죽은 자는 어떤 부정이나 반격도 불가능하다. 인간은 죽는 순간 “덫에 걸린 쥐새끼 꼴”이자 “일종의 공공 재산”이 된다. 여기에 맞서는 방법이 사르트르에게는 글쓰기였고 참여였다. 매우 공교롭게도 1963년에 나온 자서전 <말>에서 그는 “내 작품이 2013년에도 읽힐까?”라고 물었다. 2014년인 지금도 그의 작품은 읽히고 있으며, 노구를 이끌고 공장의 파업 현장을 찾아 다녔던 그는 오늘도 전 세계 지식인의 귀감으로 남아 있다. 그의 상반된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작가의 “명성은 영생의 대용품”이면서 그를 “인류의 기생충”으로 만든다. 

출처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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