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보다 빠르다고 하지만…’. 필자는 얼마전 <직지>(1377년 간행)보다 138년 빠른(1239년) 금속활자본(보물 제758-2호 공인박물관 소장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 국내에 존재하고 있다는 연구성과를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고려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구텐베르크가 이룬 것 같은 혁명은 없었다’는 독자반응이 만만치 않았다. ‘발명은 있었지만 혁명은 없었다’는 뼈아픈 지적이 아닌가. 그렇다면 고려·조선은 왜 애써 금속활자를 만들어놓고 서양처럼 역사를 뒤바꾼 혁신을 이루지 못했을까.
■억지로 우겨 설립한 주자소
굳이 <남명증도가>이나 <직지심체요절>까지 들춰볼 필요도 없다. 구텐베르크(1400년 전후~1468년)가 불과 10~20대초였던 조선의 15세기 초중반으로 돌아가보자. 조선의 임금들은 이미 금속활자의 주조 및 인쇄를 국책사업으로 여기며 고군분투 중이었다. 예컨대 태종(재위 1400~1418년)은 즉위 3년만인 1403년 금속활자본을 찍어낼 관청(주자소)을 설립했다. 신료들은 이때 “잘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결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태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짓누르고 ‘억지로 우겨서’ 주자소를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이때는 조선의 태종·세종 시대라면 고려가 금속활자를 발명한지도 160여년이나 지난 때였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금속활자의 주조 및 인쇄술을 자세히 설명해놓았다.
“나무에 새긴 글자를 모래가 함유된 부드러운 갯벌을 평평하게 편 인판(印板)에 찍으면 찍힌 곳에 글자가 새겨진다. 인판이 말라 굳어지면 쇳물이 통할 구멍과 길을 만들어놓고 다른 판을 겹친 뒤 녹은 구리를 구멍으로 쏟아붓는다. 그러면 구리액이 패인 곳에 들어가 하나하나 글자가 된다.”
이것이 모래주형(주물사) 주조법이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금속활자 주조기술이 부족했다. 최근의 연구성과인 <남명증도가>)에서도 주조 때 생긴 쇳물찌꺼기 등 온갖 흠결이 보인다. 주조기술도 그랬지만 인쇄 때가 더 큰 문제였다. 주조한 활자들을 조판틀에 움직이지 않게 배열하고 먹을 묻힌 뒤 종이를 덮고 골고루 문질러야 인쇄가 됐다. 하지만 한 자 한 자 조판된 활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인쇄할 때 먼저 밀랍(蜜蠟·꿀 찌꺼기를 끓여서 짜낸 기름)을 조판틀 밑에 펴고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는다. 그러나 밀의 성질이 본디 부드러우므로 조판활자가 굳지 못했다. 겨우 두어 장만 인쇄하면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져서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세종실록> 1434년)
태종이 주자소를 만든다고 할 때 대소신료들이 “절대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아 반대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태종이 설치한 주자소에서 서적을 인쇄한 것은 ‘정해자’를 만들고(1407년) 그 뒤로도 3년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인 1410년(태종 10년)의 일이다.
■‘활자의 백미’ 갑인자 개발 비화
그럼에도 여전히 활자와 인쇄기술은 턱없이 부족했다. 세종은 1420년 ‘경자자’와 1434년 ‘갑인자’를 개발했다. 세종의 명을 받아 금속활자 주조 및 인쇄술을 완성한 이는 과학자 이천(1376~1451)이었다.
“경자년(1420년)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아…공조참판 이천에게 명해 새로 글자모양을 고쳐 만드니 매우 정교하고 치밀했다…하루에 인쇄한 것이 20여 장에 이르렀다.”(<세종실록> 1422년 10월29일)
세종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인쇄 때 글자가 이리저리 쏠리고 비뚤어지는 폐단’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겼다. 1434년(세종 16년) 세종은 현직에서 한발 물러난 지중추부사(명예직·정2품) 이천에게 “당신이 한번 개선해보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천은 “매우 힘든 과업”이라고 난색을 표했지만 소용없었다. 세종이 ‘당신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면서 실록의 표현대로 ‘강요’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강요하자’ 경(이천)이 지혜를 써서 밀랍을 쓰지 않고도 조판한 글자들이 흔들리지 않으니….”(<세종실록> 1434년)
<용재총화>는 밀랍을 쓰지 않고도 조판한 활자들을 고정시킨 방법은 ‘대나무였다’고 소개했다.
“처음에는 글자를 조판하는 법을 몰라서 밀랍을 녹여서 글자를 붙였다. 그 뒤에 대나무로 빈 곳를 메우는 재주를 써서 납을 녹이는 비용을 없앴다.”
1420년 ‘경자자’를 개발하고, 조판틀이 흔들리지 않게 개선한 다음 주자소 관리들에게 “수고했다”면서 술 120병과 고기를 하사했다. 주자소에서는 1420년부터 2년간 <자치통감강목>을 찍어냈다. 1434년 개발한 ‘갑인자’는 ‘경자자’에 비하여 조금 크고 글자의 체가 매우 좋았다. ‘경자자’의 자체가 가늘고 빽빽해서 보기 어렵다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갑인자’를 20여 만 자를 주조했다.
이 ‘갑인자’로 하루에 40여장 인쇄하는데 성공할만큼 조판틀(활판)을 고정시키는 기술도 발전했다. 현전하는 ‘갑인자본’은 글자획에 필력(筆力)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있게 떨어지고 있고 판면이 커서 늠름하다. 또 먹물이 시커멓고 윤이 나서 한결 선명하고 아름답다. ‘갑인자’는 활자본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이로써 활자는 정해자(1407년)→경자자(1420년)→갑인자(1434년)로, 인쇄는 두어장(태종 때)→20여장(1420년)→40여장(1434년)으로 진보했다.
각종 문헌을 읽어보면 금속활자 인쇄술을 개발하기 위한 태종과 세종의 분투는 유별났다. 내부(內府·왕실의 재정이나 물품을 맡아보던 관청)의 구리를 금속활자의 재료로 썼으며, 부족분은 대소 신료들이 자원해서 기부하는 형식으로 충당했다. 귀한 금속활자로 만든 서적이 잘못되면 감인관, 즉 서적간행을 책임진 관리를 곤장으로 때렸고, 의금부에 구속시키기도 했다.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은 “그렇게 감인관을 곤장으로 치니 잘못된 글자가 아주 없어졌다”고 전했다.
■태종·세종이 금속활자에 올인한 이유
그렇다면 태종·세종 같은 임금들은 왜 그렇게 금속활자 개발과 인쇄에 시쳇말로 ‘집착’했을까.
1434년 ‘갑인자’를 개발한 세종은 무지몽매해서 불효를 저지르고 심지어는 존속살인까지 저지르는 일이 잇따르자 삽화와 그림설명 및 시까지 붙인 <삼강행실도>를 간행 배포했다.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수신서인 <소학>도 찍었고, 역사서인 <자치통감>까지 간행했다.
“이제 큰 활자(갑인자)를 주조했으니 중한 보배가 되었다. <자치통감>을 인쇄하고 전국에 반포해서 노인들이 보기 쉽도록 하고자 한다. 종이 30만권만 준비하면 500~600질을 인쇄할 수 있다.”(<세종실록>)
눈이 침침한 노인들도 책을 보게 하려고 활자가 큰 갑인자를 개발했다는 얘기다. 금속활자를 그토록 개발하려 했던 세종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가 구구절절 배어나온다.
세종은 “‘경자자’ ‘갑인자’ 개발로 서적이 널리 인쇄되어 배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문화와 교육이 번성하고 세상의 도리가 높아질 것”이라 했다. 물론 태종도 “훌륭한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서적을 넓게 보고 널리 보급해야 한다”면서 주자소를 설립한 바 있다. 조선의 15세기초는 문화와 교육을 발전시키고 훌륭한 정치를 펼치기 위한 태종과 세종의 동분서주와 노심초사가 절절이 배어있던 시절이었다.
■모호한 행적의 구텐베르크
그렇다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살았던 서양의 15세기는 어떠했을까. 그런데 구텐베르크의 행적을 살펴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태종과 세종이 숱한 시행착오 끝에 ‘정해자’와 ‘경자자’, ‘갑인자’를 개발한 15세기 초까지도 구텐베르크의 행적이 모호하기 이를데 없기 때문이다.
금속활자의 주조법과 인쇄과정은 물론이고 활자를 개발한 주자소 직원들에게 술까지 120병 하사했다는 내용을 미주알고주알, 시시콜콜 죄다 남겨놓은 15세기 조선의 기록정신이 오히려 감탄사를 자아낼 정도다.
우선 구텐베르크의 탄생연도부터 불확실하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있다.
1434년, 조선의 세종이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갑인자’ 20만자를 주조한 그 해에 비로소 구텐베르크의 흔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도 훗날 구텐베르크와 동업자들의 법정다툼 소송문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소송문에는 후대의 인쇄용어인 ‘프레스’(Press·인쇄기)와 ‘폼’(Form·거푸집) 등과 함께 포도주, 그리고 구텐베르크가 진행 중인 ‘또다른 비밀기술’, ‘모험과 기술’ 등의 용어가 암호처럼 등장한다. 구텐베르크가 이 무렵부터 비밀리에 인쇄술을 연구한 것이 아닌가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인터넷 혁명과 같은 활자혁명을 이룬 구텐베르크
구텐베르크는 1430년대까지도 인쇄술의 걸음마를 막 떼었거나 아직 떼지도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금속활자술을 완벽하게 터득한 구텐베르크는 고향인 마인츠로 돌아온(1448년) 뒤 1450년 무렵 라틴어 표준문법인 <도나투스>를 간행했다. 1454년에는 1쪽에 42줄로 구성된 <구텐베르크 성서>(일명 <42줄 성서>) 180부를 찍어낸다. 1282쪽인 이 성서에 소요된 활자는 약 10만개였다.
구텐베르크가 시위를 당긴 서양의 활판인쇄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불과 50여 년 만에 유럽 전역 350개 도시에 1000개 이상의 인쇄소가 생겼다. 그 사이 대략 3만종 900만부의 서적이 출간됐다.
정보 대폭발이었으니 지금의 인터넷 혁명을 방불케 한다. 유럽은 구텐베르크의 활자혁명으로 책이 대량 보급되었고,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문예부흥시대가 이어졌다. 물론 학계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유럽에 전래된 고려의 기술을 바탕으로 나름의 금속활자를 제작했다는 견해도 발표됐다. <구텐베르크 성서> 인쇄에 쓰인 활자들이 고려의 이른바 모래주형법(주물사주조법)으로 제작된 흔적들이 역력하다는 것이다. 물론 구텐베르크가 1430~40년대에 개발한 것으로 보이는 ‘모종의 비밀기술’이란 고려의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든저렇든 고려·조선의 인쇄술은 지식의 창제와 복제라는 측면에서 뒤쳐졌고, 서양의 인쇄술은 세상을 뒤바꾸는 일대혁명을 일으켰으니 명암이 갈렸다 할 수 있다.
■발명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
그 원인이 무엇일까. 우선 구텐베르크는 시대가 구텐베르크를 낳았다고 할만큼 운이 좋았다.
구텐베르크는 주화주조조합에 종사한 부친에게서 금화주조법을 배웠고, 그 자신 금세공술 분야의 장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전은 금덩어리를 문양이 새겨진 펀치로 강하게 때리는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또 당시에는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짜내는 압착기(press)가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 인쇄기라는 뜻인 프레스(press)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전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주변의 도구를 응용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구텐베르크(혹은 그의 후예들)는 바로 이 점에서 착안했다. 우선 펀치와 같은 금속 끝면에 날카로운 도구로 활자를 새긴다. 펀치 끝에 새긴 글자 모형을 구리 같은 무른 금속 위에 대고 망치로 두들긴다. 그러면 구리판에 글자가 새겨진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에 납과 주석, 안티몬을 섞어 녹인 쇳물을 붓는다. 그 쇳물이 식어 굳으면 비로소 활자가 된다. 그렇게 활자들을 만든 구텐베르크(혹은 그의 후예들)가 떠올린 장치는 바로 압착기, 즉 프레스였다. 압착기로 포도에서 즙을 짜는 원리를 적용하여 균일한 인쇄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인쇄술
이 뿐이 아니었다, 당대 유럽은 인쇄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다.
중세 후기 교양운동과 그에 따른 학문의 번영으로 14세기 말부터 대학들이 속속 생겨났다. 또한 필경사 한사람이 성서 1부를 필사하는데 3년이 걸릴 정도(1282쪽 짜리 <구텐베르크 성서>의 경우)였으니 끓어오르는 대중성서의 수요를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구텐베르크와 그의 후예들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들어 대중성서 판매에 뛰어들었다. 특히 “설사 성모 마리아를 겁탈했어도 면죄부를 사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수도사 마르틴 테첼(1465~1519)의 파렴치한 주장은 마르틴 루터(1483~1546)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됐다(1517년).
그러나 만약 인쇄술이 없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도 없었다. 면죄부를 찍어내며 돈을 벌었던 구텐베르크의 후예들은 이제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문을 비롯한 연설문과 논문, 반박문, 그리고 신구약성서를 대량으로 찍어대며 돈을 벌었다. 루터는 “인쇄술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도와주신 하느님이 주신 가장 고귀하고 무한한 자비의 선물”이라고 토로했다. 이제 유럽인들은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쇄매체를 통해 스스로 정보를 해석하면서 기존의 견해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비단 종교개혁 뿐이 아니었다. 인쇄매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얻게 되면서 폭넓은 식자층의 시대가 열렸다. 르네상스와 과학혁명도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에겐 목판인쇄가 있었다
반면 금속활자 발명국인 고려~조선에서는 왜 혁명을 이루지 못했을까. 다양한 견해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첫번째 우리에게는 금속활자 말고도 또 하나의 인쇄술이 있었으니 바로 목판인쇄였다.
불교경전과 그 경전을 필사하는 것을 수행과 공덕을 쌓는 행위로 여긴 선조들은 목판인쇄술을 발명했다. 그 결과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42년)을 필두로 초조대장경(1011~1087)과, 고려대장경(1233~1248) 등을 찍어냈다. 그러나 목판인쇄의 단점도 만만치 않았다. 목판을 새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한번 삐끗해서 글자를 잘못 새기기라도 하면 그 목판은 버려야 했다.
그래서 활자 1개를 주조하면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는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그것이 1230년대 찍어낸 책이 바로 <남명증도가>와 <고금상정예문> 등이다. 하지만 금속활자 인쇄는 이미 고도로 발달된 목판인쇄를 보완하는 정도로 쓰였다. 예컨대 급히 전국적으로 알려야 했던 국왕의 윤음(임금이 백성들에게 내리는 훈유의 문서) 같은 문서와 무지몽매한 백성들에게 보여야 했던 <삼강행실도> 등의 서적은 중앙에서 일단 금속활자본으로 소량 인쇄해서 각 도의 감사(도지사)에 내려보냈다. 그러면 각 감사들은 그것을 다시 목판으로 새기거나 베껴서 예하 각 수령에게 배포했다.
■모래와 금속의 차이
두번째로는 앞서 살폈듯 당시 제작한 금속활자 주조법과 인쇄법으로는 하루에 40여장 인쇄한 것이 고작이었다. ‘모래주형’을 이용해서 주조하다보니 모래알갱이 때문에 활자가 깔끔하지 않고, 네모 반듯 하지도 않았다, 물론 주조 때 너덜이(쇳물찌꺼기)도 생겼다. 그러니 활자들을 배열·조판할 때나 인쇄할 때 밀리거나 쏠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서양에서는 금속(펀치) 끝에 글자를 새긴 뒤 구리판 등에 대고 망치로 두들겨 새겨 깔끔하게 주조했다. 또 서양에서는 활판을 조여 주는 장치, 즉 압축 인쇄기가 발달했다. 고려·조선의 부족한 주조 및 인쇄기술을 탓할 수 있겠다. 하지만 구텐베르크(혹은 그의 후예들)은 이미 폭넓게 쓰였던 동전제작용 금속펀치와 포도주 압축기 등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인쇄술을 발전시켰다. ‘맨땅에서 헤딩’ 하다시피한 고려·조선의 지도자와 기술자들을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평가라 할 수 있다. 고려·조선에는 목판이 ‘주(主)’이고, 금속활자가 ‘부(副)’였다.
세번째 평지보다는 산지가 많았던 조선에서는 아무래도 금속보다는 나무를 구하기 쉬웠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각종 문헌을 읽어보면 태종과 세종 등 조선의 임금들은 금속활자 개발을 위해 내부(內府·왕실의 재정이나 물품을 맡아보던 관청)의 구리를 금속활자의 재료로 썼다. 심지어 부족분은 대소 신료들이 자원해서 기부하는 형식으로 충당했다. 재료 및 비용조달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려준다.
■‘기밀누설죄’로 혹독한 고문 받았던 조선의 출판
네번째로 지적되는 것은 인쇄의 지향점이 달랐다는 점이다. 물론 조선의 세종은 “금속활자 개발로 서적이 널리 인쇄되어 배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조선에서 서적은 기본적으로 대중용이 아니었다. 주로 왕실과 사대부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처럼 몇 부 찍어서 4~5대 사고(史庫)에 보관하는데 그쳤다. 가령 1577년(선조 10년) 의정부의 승인 아래 조보(조선시대 관보)를 상업용으로 인쇄해서 팔았던 업자 30여명이 의금부에 붙잡혀 사경을 헤맬 정도의 고문을 받고 죗값을 톡톡히 치르기도 했다. 그들의 죄명은 ‘국가기밀누설죄’였다. 그러니 지식의 확대재생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널리 서적 등을 보급하는 상업용 출판으로 시작했던 서양과는 출발점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5만자 한자와 26자 알파벳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바로 문자이다. 기본적으로 서양에서는 26자 알파벳으로 모든 글자를 표현할 수 있다. 대문자와 소문자 두 종류를 쓴다 해도 52자면 모든 단어를 구현할 수 있다. 아닌말로 서양에서 활판인쇄를 위해서는 52개의 활자 주형만 만들면 그만이 아닌가.
하지만 동양의 공식문자인 한자는 어떤가. 5만자가 넘는다. 게다가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글씨체는 또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면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어떤가, 현대국어에서 표현될 수 있는 글자는 최소 2350자에서 최대 1만1172자라 한다. 하물며 고어(古語)와 한자를 섞어 써야 했던 조선시대 때는 어떠했으랴. 이루 말할 수 없는 활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금속활자의 유용성은 주조한 활자들을 이 책 저 책을 찍을 때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문은 말할 나위 없고 쉽다는 한글로 된 책을 금속활자로 제때 찍어내려면 과연 얼마만큼의 활자가 필요했을 지 가늠하기 어렵다. 동양에서 활판인쇄보다 목판인쇄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으뜸 이유가 될 것이다. 물론 안타깝기는 하다. 고려·조선이 비록 금속활자 발명국이지만 서양의 구텐베르크 혁명과 같은 사회변화를 이끌 토양이 마련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남권희 경북대 교수, 박상국 동국대 석좌교수, 이윤석 전 연세대 교수,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 최경은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등이 기사작성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활자기술의 제작원리는 https://blog.naver.com/ohryan77/221419516664에서 도움받았습니다.)
<참고자료>
슈테판 퓌셀, <구텐베르크와 그의 영향>, 최경은 옮김, 연세대 대학출판문화원. 2014
존 맨, <구텐베르크 혁명>, 남경태 옮김, 예지, 2003
박상국,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 김영사, 2020
이윤석, <조선시대 상업출판>, 민속원, 2016
남권희, ‘목판과 활자인쇄를 통해본 전통시대 지식과 정보의 소통’, <사회과학 담론과 정책>6(1), 경북대가회과학연구원, 2013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050600001&code=960100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050600001&code=9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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