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5일 월요일

정의연 이나영 이사장의 글, 윤미향과 돈 문제에 대해.

정의연 이나영 이사장의 글
윤미향과 돈 문제에 대해.

1975년 위안부임을 밝힌 배봉기 할머니가 한국사회에 알려진 것은 몇해 되지 않았다. 아니 일본 사회에서도 그녀는 91년 자신의 아픔을 말한 김학순 할머니와는 대조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이 둘 사이가 이 증언들을 들을 사회적인 기반, 듣는자의 문제이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전자의 배봉기 할머니는 불행히도 오키나와라는 일본과는 분리돼 미군정 하에 놓여있던 토지에서 살았고, 미군정에서 일본으로 복귀하는 즉시 외국인으로 강제 추방당할 위기 속에서 자신이 위안부 임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사회는 군사독재 하의 엄혹한 정치 현실 안에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그녀와 연대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중의 하나가 분단 현실이었다. 오갈 곳 없는 이 여성을 도와준 것은 조선총련의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 김현옥(73)씨 부부였던 것이다.
여성운동의 발전 특히 정신대문제 협의회의 발전이 이야기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초기 정대협의 멤버 윤정옥을 비롯, 많은 여성들이 분단이데올로기로 피해 여성을 대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윤정옥은 80년과 88년 오키나와를 방문했고 배봉기 할머니를 만났으나, 초기에 조선총련의 도움을 받은 배봉기 할머니를 만나는 것 조차 정부차원의 방해를 받았다. 그녀는 오랜시간 공적자금을 받는 것을 경계해 왔다고 이야기 해 왔는데 그것은, 한국정부가 어떤 방식으로든 조사, 진상규명, 이후의 협상까지 정대협이 가진 피해자 중심주의에 간섭을 하게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한일합의는 왜 피해자 중심주의를 위해 가난을 감수했던 이 조직의 역사를 긍정하게 한다.
초기 정대협 선배들의 성명문을 보면서, 이 긴시간의 경제적 곤궁을 무릎쓰고 운동한 여성운동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연일 보도되는 윤미향과 돈의 문제 보도는 복잡한 심경을 가지게 한다. 개인적인 소회를 말하자면... 내가 윤미향 전 대표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 것이 바로 그녀가 가진 이상한 돈에 관한 비현실성 때문이었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2000년대부터 그 많은 강의 강연 강사료를 꼬박꼬박 챙겨 기부하곤 했다. 자기 단체에...이유는 상근강사임이 미안해서라고 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때 나는 귀를 의심했고 정말 이 여자 뭔가 싶었다. 그녀는 초기 정대협 멤버들이 정부 간섭을 피하기 위해 철저히 거부했던 공적자금 당시 부터 몇안되는 상근강사 중의 한명이었다.
수요시위나 소녀상 건립 운동 등에서도 여러가지 클라우드 펀딩을 기획하고, 마리몬느 등 자선단체와의 연대 등 윤미향이 대표가 된 이후 위안부 문제 운동은 좀더 다양한 방식과 아이디어로 여전히 돈문제로 힘든 일본의 위안부 문제 운동 단체에도 <귀감>이 되었다. 엔지오를 해 본 사람들, 아니 작은 정치운동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결국 운동이라는 것이 이런 돈을 모으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으리라.
20년도 더 된 이야기이지만, 윤미향이 상근강사에서 대표가 된 이후까지 지속된 자기 단체, 자기 밑의 비상근 활동가들에 관한 과도하리 만큼 강한 죄책감, 기부, 그것을 알았을 당시 내가 느꼈던 부끄러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이후 나 역시 위안부 문제로 강연을 하게 될 경우 반드시 기부를 하고 있다. 억대의 돈이 연일 신문에서 보도되고 있는데, 정대협 상근강사 여덟과 그녀의 위와 같은 기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검찰은 또 무엇을 어떻게 밝힐 것인가?
작년 9월 끝까지 배봉기 할머니를 돌 본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 김현옥(73)씨 부부 중 한분인 김수섭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당장 장례비가 없었다. 두분 다 생활보호 대상자이고 납치문제 이후 일본 사회 내에서 엄혹해진 조선국적자에 관한 편견과 생활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이 두분들 몫이었다.
오키나와의 위안소 연구자인 나는 이 분들의 곤궁을 잘 알고 있었다. 긴장됐다. 두분들과 친분이 없더라도 오키나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던 연구자들 모두 전화를 돌려 돈을 모았다. 윤미향도 내가 전화를 돌린 한명이었으나, 역시 그녀의 돈 관념은 달랐고 그것이 나를 울게했다. 정대협 이름으로 기부를 받기로 했는데, 또 한번 전화가 왔다. 자기 이름으로 따로 몇만엔을 김현옥 선생님께 직접 전달해 달라는 것이다. 장례식 비용이 너무 빡빡해서 다 쓰고 나면, 장례를 다 치루고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이후 김현옥 선생님 식비가 없을까봐 였다. 그녀는 돈이 다 빠져나간 이후 외롭게 남아 있을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그토록 많은 위안부들의 장례식 장을 지킨 사람이다. 긴 세월 정대협은 어려운 재정환경에 있었고, 정의연으로 새로 운동을 시작한 배경도 재정문제와 함께 생각했을때.. 운동단체의 방만? 혹은 영수증? 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문제제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전에 왜 30년 이상 지속해 온 이 운동 단체가 초기에 그토록 정부 보조금을 거부했었는지는 한국사회가 위안부 문제를 다루어 온 역사와 함께 보면, 중요한 주제일 수 있다. 취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어려움을 감수하고 활동비를 기부금에 의존하며 꾸려온 내부사정의 역사를 한국사회의 군사독재부터 현재까지 정대협이 꾸려온 주머니 사정과 겹치게 그려낼 수 있다. 인권운동 전반의 국가 기금운용의 실과 허에 대해 논할 수 있다. 건물 비용만 기부하고 나머지는 환수해 버리는 기업의 <보여주기 식> 기부문화가 얼마나 많은 폐해를 낳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으며, 안받고 말지.. 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을 낳게 하는 사회적 약자를 향한 기부금이 얼마나 많은지도 점검할 수 있다.
정의연은 5월 21일 새벽5시경까지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검찰의 개입 전에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충분히, 그들의 주머니 사정과 우리의 도덕이 얼마나 불일치하는지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얼마전까지 국회의원들이 때만되면 드나들던 쉽터에, 아무도 관심 조차 갖지 않았을 때부터 정의감 하나로 상근하는 분과 할머니 한분이 계신 마포의 그 작은 쉼터가 이제 방만한 조직 운영이라는 기사로 둔갑된다.
한명의 위안부가 외롭게 사는 공간 자체에 대한 상상력 조차 없는 당신이, 죽어나간 단 한명의 위안부를 위해 만원 한 장 낸 적이 없는 당신이, 윤미향을 향해 영수증 요구를 뻔뻔하게 하는 그 소소한 입질을 더이상 참을 수가 없다.
내게는 세계적 위안부 운동의 폄훼 보다 위안부 한명? 방만운영의 여론이 더 분노스러운 것이다.
나는 윤미향의 시간을 믿는다. 믿은 만큼 엄중히 물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시민 언론 조차도 한순간에 돌팔매질을 할 수 있는 운동이 이 운동이다. 30년은 누가 돈을 쥐어 준다고 해서 버틸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아니다. 버티길 바란다.

덧 - 김수섭 선생님 장례식 비용모금. 당시 나는 일본에 있었기에 나는 내가 가진 돈을 정대협 이름으로 기부를 했고, 이후 윤미향이 자신의 이름으로 기부해 달라고 한 것까지 일단 내가 먼저 드리고 나중에 받았다. 한국에서 윤미향이 기부금을 주었을 때, 전자의 차마 받을 수 없어서 김복동 기금과 제주도에서 어렵게 운동하는 운동단체에 기부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정대협 이름으로 기부된 수 많은 평화운동의 기부금들. 직접 위안부 문제와 상관 없으나 작고 어렵게 일하는 평화운동 단체에 기부한 것이 조직 차원이 아니었다고 충분히 상상하는 일인이다. 내가 정대협과 윤미향에게 받은 돈을 제주도에 기부한 것처럼.. 사회의 각지에서 어렵게 운동하는 평화 운동 단체에 , 자기 이름으로 하지 않고 조직의 이름으로 기부한 .. 수많은 문제의식의 발자취 였을지 모른다고 어렵지 않게 상상한다. 이 기부금들에 영수증을 달라고 요구하는 이 사회는 정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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