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6일 월요일

1000개의 강좌, 1000권의 책

1000개의 강좌, 1000권의 책

1. 대안 인문학 공동체를 꾸리고 있음인가. 현 정권 들어 아주 간혹, 정부나 산하 연구소 관계자의 전화를 받는다. 시민 인문학 진흥을 위해 무슨 아이디어가 없느냐는 것이다. 대통령이 문화 융성의 일환으로 인문학을 언급하자 유관 부서들이 정책 개발에 나선 모양이다. 내 대답은 회의적이다. 인문학이 4대강처럼 될까 봐서다. 인문학의 본령은 비판과 성찰이다. 녹색 마인드 없는 정부의 4대강 사업이 4대강 생태계에 치명타를 가했듯이 인문 정신과 거리가 먼 정부의 인문학 사업 또한 인문학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다.


정부의 인문학 지원 사업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문한국(HK)사업이다. 2000년대 중반, 대학 교수들이 인문학 위기라며 난리를 치는 통에 만들어진 프로젝트, 인문학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고 세계 수준의 연구 역량을 확보하겠다며 진행되고 있는 이 사업을 위해 연간 평균 400여억 원이 대학에 투입된다. 그러나 보라. 연구 성과의 학문적, 사회적 확산을 도모하고 세계적 담론의 생산과 소통을 주도하겠다며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는 이 사업이 인문학 진흥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한국연구재단이나 지자체의 시민 인문학 강좌 지원도 그렇다. 물론 이 프로그램으로 시민들은 대학이나 지자체, 도서관 등지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인문학 강의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문학의 저변을 확대하거나 인문학 연구 풍토를 개선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수없이 개설되는 시민 강좌에도 불구하고 인문 출판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효과라면 적잖은 학자들이 대학의 비정규직 강사에서 시민 강좌를 찾아다니는 지식 소매상으로 변신하고 있는 정도라고 할까.

2. “하이데거의 철학과 불교 사상에 대해 비교 철학적 강의를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1995년 가을학기였다. 그 해 강의를 모험적으로 실시한 이후 필자는 필자 나름의 내면에서 하나의 학문적 확신을 얻었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그의 책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에 쓴 머리말 첫 부분이다. 김 교수는 전공의 경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색채의 철학 세계를 섭렵한 것으로 유명하다. 서양철학에서 마르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베르그송,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라캉, 푸코, 데리다 등 서양 철학자와 맹자와 순자, 노자와 장자, 주자와 퇴계, 율곡, 다산, 불교의 유식학과 화엄학, 원효와 지눌, 제자백가 등의 동양사상을 종횡무진하며 수많은 연구서와 논문을 냈다. 그리 많은 책을 냈으면서도 대부분이 묵직한 노작이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인문학 공동체를 꾸리는 내게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의 저술 이면에 ‘모험적인’ 강의가 있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난해한 ‘존재와 시간’을 불교의 유식사상으로 풀어낸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만 하더라도 두 학기에 걸친 강의가 바탕이 됐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문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라는 안정된 직장을 가졌던 김 교수와 달리 대다수 소장 인문학자들은 비정규직 강사라는 것이다. 이들이 김 교수처럼 자신의 지적인 여정을 따라가며 강의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칸트를 전공한 학자가 교양 글쓰기를 강의하고, 니체를 전공한 학자가 철학 입문을 강의하는 식이다. 이건 대학뿐 아니라 대학 밖 시민 강좌에서도 비슷하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연간 400억 ‘인문한국’ 사업비를
인문학자의 강의·저술에 지원 땐
인문학의 위기 절로 해소될 것


3. 지난주 시작한 우리 공동체의 프랑스 철학 입문 강의에 세 사람이 새롭게 참여했다. 크지 않은 방이 꽉 찼다. 방이 비좁아 애를 먹는 강의는 몇 개 더 있다. 2주 전 시작한 지젝 강독이 그렇고 니체, 푸코, 칸트 강의도 마찬가지다. 들뢰즈 강독과 라캉 강독은 연 몇 주씩 출석률 100% 기록을 이어갔고 ‘에티카’ 강독은 32강을 진행했는데도 강의를 거듭할수록 참여자가 늘어난다. 불교경전과 동양고전, 인문 프랑스어, 희랍어 성서 강독에도 열기가 넘친다. 해당 분야 최고의 학자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열정적으로 시민들과 만나는 덕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이들이 여기서 강의하는 것이 썩 바람직한 현상만은 아니다. 역량과 열정을 갖춘 학자가 자원봉사하다시피하며 대학 바깥에서 강의해야 하는 현실부터가 그렇다. 그 좋은 강의가 이렇게 작은 방에서 겨우 열 명이나 스무 명 앞에서 말하는 것으로 허공에 흩어져 버리는 것은 더욱 안타깝다. 강의 내용을 책으로 쓰고자 하나 이들에게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 이들이 연구하고 강의하며 집필할, 보다 나은 여건을 만들 수 없을까.

이제,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 이렇듯 좋은 시민 강좌를 여는 학자에게 정부(기업도 좋다)의 강의 및 출판 지원비를 얻어 주어서라도 강의 내용을 책으로 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이게 가능하다면 시민들에게 질 높은 강의를 제공하면서 인문 출판을 살리고 인문 학자를 지원하며 제대로 된 연구 풍토도 조성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사조다. HK사업으로 매년 대학에 주는 돈의 4분의 1만 있어도 해마다 1000명의 학자를 지원하며 1000개의 고급 강좌를 개설하고 1000권의 인문학 책을 출간할 수 있다. 하기에 따라 최고의 인문학 진흥 사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 지원 대상 선정 심사를 철저하게 독립시키고, 대학 교수는 아예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적어도 인문학 진흥에 관한 한, 대학과 대학 교수들은 문책 대상이지 지원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정부에서 인문강좌와 인문출판과 인문학자와 인문학계 모두에게 좋은, 꿈 같은 일이 가당키나 한가. 꿈…깨자!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15205226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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