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7일 금요일

2014년 한국 사회의 길 찾기 / 도정일

안녕하지 못한 사회의 다른 이름은
‘실패하는 사회’다. 지난 한해 우리
가 안녕하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가
2013년 내내 실패하는 사회에 살았
다는 얘기와 같다. 나는 이 실패가
우리 사회의 세 영역에서 가장 심각
하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교육이 그 세 영역이다

나흘 뒤면 2013년의 끝이다. 감회가 없을 수 없다. 2013년은 이제부터는 ‘지난 한해’라고 불러야 할 과거 속으로 후퇴하고 있다. 최근 한국인의 일상 언어에 빠르게 퍼진 표현 하나를 빌려 쓰면, 지난 한해 우리는 안녕했는가? 답변은 두 갈래로 나뉠 것이 뻔하다. “안녕하지 못했다”가 한쪽에 있을 것이고 다른 쪽에는 반대 답변이 있을 것이다. “그래 난 안녕했어. 어쩔래?”라며 다른 한쪽을 약 올리고 싶은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안녕 여부에 관한 ‘개인 보고서’를 내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시민의 답변 방식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안녕했건 안녕하지 못했건 간에 시민은, 적어도 그가 대한민국 국민이고 시민이라면, 자기 한 사람의 안녕/불령(이런 말이 있었던가?)을 떠나 공동체 전체의 한해살이를 고려하는 신중한 판단 위에 자신의 답변을 세우고 싶어 할 것이다.
지난 한해, 한국 사회는 전혀 안녕하지 못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정치의 각도에서 보면 여권 야권 어느 쪽에도 안녕한 한해가 아니었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여당 야당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에 관계없이 2013년 한해 한국 정치는 국민들에게 지독한 불만의 계절을 안겨주었다. 사회적으로도 그러하다. 최근의 철도노조 파업은 안녕하지 못한 사회가 빠져드는 갈등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노조는 노조대로 안녕하지 않고 강경책을 밀고 나온 정부도 안녕하지 않고 시민도 안녕하지 않다. 대학가에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로 시작된 대자보의 물결은 우리의 젊은 세대가 겪고 있는 좌절, 분노, 고통을 있는 대로 표출한다. 지난 한해 우리 사회는 안녕의 반대편으로 질주하기 위해 가속페달을 밟아온 사회 같다.
이 안녕하지 못한 사회를 보면서 기분 좋아할 쪽은 ‘질투의 여신’뿐이다. 오비디우스가 신화시집 <변신>에 등장시킨 질투의 여신은 타인의 안녕이나 성공을 절대로 그냥 봐넘길 수 없다. 그녀에게 타인의 성공은 그녀 자신의 실패이고, 타인의 안녕은 그녀에게는 불행이다. 남들이 우는 곳에서 그녀는 웃고, 남들이 아파하는 곳에서 그녀는 즐겁다. 타인이 실패해서 꼬꾸라지는 것을 볼 때에만 그녀는 최고로 행복하다. 잘 사는 인간들의 도시 아테네 상공을 지날 때마다 그녀는 눈물을 쏟는데, 그 도시의 아름다움과 사람들의 행복이 그녀를 한없이 슬프게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뱀의 독에서 질투의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그래서 그녀의 입술은 늘 뱀독으로 검게 물들어 있고 가슴은 바싹 말라 있다. 그녀에게 가슴은 연민, 동정, 사랑 같은 감정의 샘이 아니라 질투, 선망, 저주 같은 독극물 저장 탱크다.
나흘 뒤면 2014년 새해가 시작된다. 신년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안녕하지 못했던 한해를 보내고 신년을 맞는 시민들은 신년에는 우리 사회가 좀 안녕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은, 간절하다면 간절한 소망 같은 것을 세우고 싶어진다. 안녕을 소망하는 사회는 무턱대고 행운을 비는 사회가 아니라 성찰하고 반성하는 사회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안녕을 위해 사회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겠는가? 무엇을 바꾸고 고쳐야 하겠는가? 개인 아닌 ‘사회’가 이런 식의 집단적 소망을 세울 수 있을까? 노자나 장자가 들었다면 코웃음 칠 소리지만, 변화를 향한 개인의 소망이 있듯 사회도 집단소망을 발동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집단소망은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해보려는 시민적 성찰이 있을 때에만, 그리고 사회를 바꾸고 고쳐보자는 시민들의 소망이 모이고 뭉치고 방향을 잡을 때에만 가능하다.
안녕하지 못한 사회의 다른 이름은 ‘실패하는 사회’다. 지난 한해 우리가 안녕하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가 2013년 내내 실패하는 사회에 살았다는 얘기와 같다. 나는 이 실패가 우리 사회의 세 영역에서 가장 심각하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교육이 그 세 영역이다. 가장 쉽게, 그러나 근본적으로 규정했을 때 정치란 다양한 이해관계와 복잡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고자 할 때 필요한 ‘모둠살이의 기술’이다. 공존의 정의라거나 공생의 윤리 같은 것은 그 기술을 대표한다. 경제는 그 모둠살이의 물질적 토대를 구축하고 교육은 그 모둠살이의 정신적·철학적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정치건 경제건 혹은 교육이건 간에 한 사회, 한 공동체의 집단적 삶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그 세 영역이 모둠살이를 가능하게 하는 ‘도덕과 가치’의 튼튼한 안내를 받고 있을 때다. 애덤 스미스 같은 사람의 지혜를 빌려 말하면, 이때의 도덕과 가치란 시민적 도덕성과 시민적 덕성을 의미한다. <국부론>의 스미스는 자본주의 경제의 대부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큰 오해다. 인간 사회에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치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감성의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 스미스다. 그의 <도덕감정론>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세계에서 근본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할 때 너무도 요긴한 통찰과 지혜를 제공한다.
지난 한해 우리 사회에서 정치는 모둠살이의 기술보다는 극단적 편가르기, 국민 분열, 저열한 욕지거리, 속임수, 위선의 기술을 더 많이 발휘한 영역이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현실 정치와 도덕성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도덕성의 기초를 갖지 않는 정치는 반드시 (그렇다, 반드시) 실패하는 정치로 내달린다. 경제의 경우도 그러하다. 모둠살이의 삶은 시장 아닌 ‘공동체’의 삶이며, 시장은 그 삶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 ‘부분’이 ‘전체’를 장악하고 대체한 지금 방식의 시장체제에 교정을 위한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것이 지난 한해의 우리 정부 경제 정책이다. 경제 영역에서 경쟁은 불가피하고 이해관계의 관철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경쟁, 이기심, 이익중심주의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부분적 수단이다. 수단이 목적을 대체하고 부분이 삶의 전체성을 장악할 때 모둠살이는 비뚤어지고 파괴된다.
교육의 경우는 어떤가? 지금 방식의 한국 교육이 공동체 사회를 만들고 지탱하는 데 기여하는 교육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 한국 교육은 극단적 이기주의를 키우고 허영을 자극하는 교육이라 말해야 더 정확하다. 이런 교육방식과 정책의 문제점을 뻔히 알면서도 속수무책인 양 교정의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것이 역시 지난 한해의 우리 교육이다.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고 그 삶의 기초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도덕성과 가치의 토대를 만들지 못하는 교육은 실패한 교육이다. 도덕성과 시민성과 가치, 이런 중요한 사회적 기술을 배양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교육이다. 시장은 그런 기술을 배양하거나 재생산하지 못한다. 모둠살이에서 교육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육은 그런 일에서 거의 손 놓은 지 오래다.
실패하는 사회의 특징은 품위 상실, 약자의 처지에 대한 동정과 공감 능력의 극단적 위축,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흡수할 상상력의 궁핍화다. 이런 상실, 위축, 궁핍화의 진행이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 사회는 안녕할 수가 없다. 질투의 여신만이 그런 사회를 보며 미소 짓는다. 2014년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가 생각해볼 일들이 많다.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717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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