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3일 수요일

모두에게 좋은 대안미래는 없다/ 손현주 하와이대 정치학 박사, 미래학


누구에겐 좋은 미래가 누구에겐 나쁜 미래일 수 있다

일반적인 사회적 논의들에서 대안미래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보편적 이익을 관철시키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대안미래에서 제시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미래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과 바람직한 사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 가정의 일부는 사실이다. 대안미래는 미래에 대한 이해력과 통제력을 향상시킨다. 대안미래에 나타나는 미래상은 사회변동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이러한 미래상은 미래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사회구성원의 행동을 자극하고 격려한다. 대안미래에서 제시하는 가치와 미래상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장기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현실중심적인 생각을 지양하게 한다. 그리하여 현실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제공한다.

그러나 대안미래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집단이나 지역에 바람직한 대안미래로 간주되었던 것이 다른 집단이나 지역에는 가장 나쁜 미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미국의 신대륙은 이주 유럽인들에게 신세계였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이주 유럽인들의 꿈은 재앙이었다. 1940년대 아시아 통합을 추구했던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비전은 식민지 한국인들에게는 억압·차별·수탈을 강요하는 착취체계를 고착화시켰다. 히틀러 시대에 모든 독일인의 통일의 꿈인 ‘게르만 민족주의’는 유대인들에게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대변되는 대량학살의 이념이었다. 이란의 시아파 회교주의 꿈은 또 다른 권위주의적 디스토피아가 된다. 동유럽과 옛소련의 탈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 꿈은 무질서와 부패로 인하여 민중들에게는 빈곤이라는 최악의 사회였다.

이처럼, 대안미래의 한 형태인 유토피아와 꿈은 특정한 사회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편적인 사상과 실천은 아니다. 대안미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집단과 지역에 따라 이해가 항상 충돌할 수밖에 없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cience/future/823192.html#csidx7471ed7b088eaaba6b6c28eca205e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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