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4일 수요일

김예슬 인터뷰

김예슬 씨대학거부 선언은 이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적지 않은 균열을 일으킨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식인들의 고뇌 어린 호소나 전국 각지의 삶의 터전에서 터져나오는 고통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이 후배 청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경향신문> 2010년 4월 14일자에 김지환 기자가 김예슬 씨와 인터뷰를 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제목이 '김예슬씨 거대한 적 ‘대학·국가·자본’에 작은 돌을 던진 것”'입니다.

 

대학과 국가와 자본을 '거대한 적'이라고 규정한 제목이 너무 무겁게 느껴집니다. 어느 사이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저 같은 놈에게도 대학과 국가와 자본에게 작은 돌을 던지기 시작한 후배가 있다는 것은 소중합니다.

 

아마도 저와 비슷한 세대인 것으로 보이는 김종배 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스런 마음으로 경청합니다. 후배 세대에게 모노톤의 꿈만 강요하는 사회를 만든 선배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죄스런 마음으로 김예슬 씨의 충고를 경청합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돌아봅니다. "정해진 몇 개의 직업" 만이 꿈은 아니라고 말할 용의가 있으면서도 "다른 길"을 언제 제시하고 "상상력"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 트랙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제 자신을 답답한 마음으로 돌아봅니다."

 

답답한 마음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젊은이의 충고와 호소, 그리고 쉽지 않은 결심의 기운을 함께 느껴보고자 여기에 그 인터뷰를 옮겨놓습니다.

 

ㆍ고려대 자퇴생 김예슬씨 인터뷰

“안녕하세요.” 지난 12일 오후 7시 경향신문사를 찾은 김예슬씨(24·여)는 밝게 웃었다. 대학 교정에 대자보를 붙이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한 달째. 세상으로 다시 나온 그의 손엔 「김예슬 선언」이라는 125쪽 분량의 작은 책자가 들려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대학을 거부한다는 게 단순히 치기어린 행동은 아니었다”며 “대학생활 내내 스스로에게 던졌던 물음 중 일부가 대자보의 내용이고 더 많은 고민들을 책으로 담아봤다”고 말했다. “사실 답보다는 물음이 많은 책”을 썼다는 그와의 인터뷰는 경향신문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ERISS) 사무실에서 2시간 넘게 진행됐다. 그의 이야기는 차분했지만 때로 단호했고, 함께 고통 받는 이들을 말할 때는 따뜻함도 느껴졌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난달 10일 대자보를 붙이고 한 달 사이 비판이든 지지든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어떻게 지냈나.

“생각지도 못하게 격렬한 반응이 있었던 것 같다. 나로선 한 달 동안 (스스로) 차분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김예슬이라는 개인보다는 메시지에 주목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처음엔 루머나 개인에 대한 관심이 제기됐지만 많은 분들이 갈수록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주셨다. 생각의 힘도 부족하고 살아낸 것도 부족한 터라 비판해주시는 분들이나 속울음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많은 분들이 쏟아낸 이야기를 통해 어떤 것을 느꼈나.

“3월 첫 수업시간에 대자보 전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선생님과 중학생, 거대한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고 싶다고 토로하는 직장인들, 대학을 그만둘 용기는 없지만 마음만으로라도 대학 보이콧을 하겠다는 대학생이 있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접하며 서로의 생각이 연결되는 시간이었다. 이것이 정말 우리 사회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라는 걸 느꼈다. 교육과 대학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고통이 돼 버렸다.”

-조용히 그만둘 수도 있었는데 대자보를 붙이고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이유는.

“너무나 약해서였다. 다시 비겁해질까봐, 다시 받아달라고 학교 문을 들어설까봐. 내 안의 비겁함과 싸우기 위해 그렇게 했다. 거대한 사회적 모순은 은폐되고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인 양 떠넘겨지는 세상이다. 그래서 무력한 개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고통이 깊어가고 있으니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했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대학생들이 대기업 하청업체가 된 대학에 절망하면서도 트랙에서 계속 경주를 이어간다. 실존적인 결단을 내리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용기라기보다는 끝이 안 보였다.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좋은 결혼을 하면, 뭐 하면, 뭐 하면…. 언제까지 트랙에서 경주마로 달려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앞으로 달려가야 할 길은 보이는데 내 영혼은 등을 돌려 불화하기 시작했다. 아파야 나으니까. 나부터 끝도 없는 트랙에서 멈춰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왜 살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런 큰 물음을 할 수 있도록 특권처럼 주어진 게 대학 시절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불가능해진 시대다. 대학(大學) 없는 대학이 인생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지 않은가.”

-대학생활의 고민을 압축해 본다면. 대학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고려대에서 보낸 생활은 스펙에 매달리자니 젊음이 아깝고, 다른 걸 하자니 뒤처질까 두려웠던 시간이었다. 크게는 세 번의 사건이 있었다. 2005년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을 짓는 데 400억원을 기부한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가 수여되는 것을 막으려던 학생들이 출교당한 사건, 2006년 이스라엘과 미국이 석유자원 확보를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불의한 전쟁에 침묵하는 '글로벌 코리아’ ‘글로벌 고대’에서 지내고 있는 나를 되돌아본 사건, 2008년 경영대 ‘이명박 라운지’에 앉아 신문에서 ‘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다’라는 말을 읽었던 사건이다. 이건 비단 고려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학이 이런 가치관을 부추기고 기업의 탐욕에 활짝 열려도 좋은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대학 내에서 대학을 바꿔보는 운동을 해볼 수도 있지 않으냐는 얘기도 나왔다. 이른바 ‘극단적인 선택’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대학 내에서 대학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중요하고 그런 분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대학은 공고해진 하나의 거대한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됐다. 기업에 인재를 조달하고 채용 일제고사를 기업 대신 실시해 등급을 매기고 있다. 대학의 존재 자체가 변화된 상황에서 안에서 바꾸는 것 이외에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성적경쟁의 의자에 앉아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야 하는 지금의 삶이 되레 더 극단적인 것 아닌가.”

-대학거부 선언 후에 많은 ‘각주’들이 달렸다. 88만원 세대론에 대한 논의도 다시 불이 붙은 것 같다.

“우리 세대의 현실 문제를 88만원이라는 숫자로 풀어낸 부분은 인정한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숫자만으로 담을 수 없는 진실이 축소되고 단순화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대학 거부선언 이후 88만원 세대의 저항이 시작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88만원을 188만원으로 올려달라는 것이 아니다. 등록금을 인하하고 비정규직 대신 정규직 일자리를 늘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청년실업의 문제를 넘어 국가가 모든 배움을 독점한 의무교육 제도, 자격증 유일잣대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 진보는 몸으로 살아내고 일상과 긴밀히 연결된 진보는 아닌 것 같다. 더 나아가 대학·국가·시장의 3각동맹이 공고히 하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 도시·기계 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의무교육이 아닌 대안적인 배움의 장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안 대학의 구체적인 상은 어떤 것인가.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이 있었다. 인간 자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한 나라 교육의 목표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모든 사람들이 인적자원화의 과정을 겪어 대학과 기업에 차근차근 보내지는 것이 의무교육의 실체다. 의무교육 문제는 말 그대로 배움의 권한을 국가가 독점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과정 속에서 배우고 겪는데 학교에서 커리큘럼을 잘 이수해야만 다음으로 갈 수 있는 자격증을 받게 된다. 또 의무교육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다고 하지만 실은 처음부터 패배자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대안 대학은 구체적인 상을 이거다라고 제시하긴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지옥으로 가는 길을 알면 천국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나. 문예창작과를 가지 않고도 시를 쓸 수 있고, 미대를 안 가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의 편리를 위해 개성이 무시되는 걸 인정해선 안 된다.”

-지인들과 부모님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특히 부모님의 반대가 컸을 것 같다.

“물론 반대를 많이 하셨다. 사실 부모님은 내가 배신했다고 느끼실 거다.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은 진정한 나 자신의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시대의 부모님들께 말씀을 드리면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모의 기대, 미련 이런 것들이 실상 어떤 것인가를 돌이켜보셨으면 좋겠다. 촛불집회 때 만난 중·고등학생들이 명박산성보다 넘기 힘든 게 부모산성이라고 하더라. 그 자체가 미래인 아이들이 상처받더라도 스스로 독립성의 날개를 키울 수 있게 사랑의 이름으로 길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대학·시장·국가의 3각 동맹에서 예슬씨 몫의 돌멩이가 빠졌지만 탑을 새로 세우려면 개인의 탈주만으론 불가능할 것 같다.

“방법론적인 이야기보다 각자가 품은 씨앗에서 어떤 꽃이 피어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학습된 두려움이나 난 무력한 개인이라는 두려움 앞에 지레 포기하지 않고 서로 격려하고 북돋우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미 균열은 시작됐다고 했지만 일상의 속도로 시스템은 계속 굴러가고 내 선언은 잊혀질 거다. 막막한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큰 존재다’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큰 존재들이 자기 안에 있는 물음들로 시작하고 옳은 일을 옳은 방법으로 밀어가는 힘을 믿으면서 갈 뿐이다.”

-세상에 하고 싶은 또 다른 말이 있다면.

“사실 이 말로 인터뷰를 시작해야 됐는지도 모르겠다. 대학문을 넘지 않아서 수많은 차별을 감내하고 사는 농촌, 노동현장의 수많은 분들에게 나의 선언이 또다른 상처가 되었다면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다. 그런 곳에서 고되게 일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힘들다고 주저앉거나 절망할 수 없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런 분들도 기업이나 시장에서 제품처럼 쓰고 버려진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박지연씨처럼. 비단 대학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학 나오지 못한 분들의 고통은 더 크다. 대졸자가 주류인 사회라 더 조명되지 않을 뿐이다. 그분들을 내 삶의 거울로 비추면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20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정해진 몇 개의 직업이 꿈이 되어버린 것들에 대해 분노하면서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상상력을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은 경향신문의 기사에서,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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