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7일 월요일

방탄소년단, 한류의 새로운 문법/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때가 1997년이었고, 이 즈음부터 한국의 대중문화가 하나의 상표가 되어 국경 너머 수용자들에게 대량 소비되었다. 올해를 ‘한류 20주년’이라 부르는 근거이다. 하지만 ‘한류’라는 용어는 기실 언론이 수사적으로 사용하고 과잉 의미를 부여했을 뿐, 산업적·정책적으로는 별 실효성이 없는 개념이다. 가요부터 화장품까지 하나로 묶어서 무슨 전략을 짜고 정책을 만든다는 말인가. 특히 정부기관이 나서서 “이제는 게임, 만화, 한식, 한복까지 포함하는 K컬처의 시대! 한류 3.0을 실현시키자!”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보면 창피하고 화가 난다. 아류 문화제국주의를 부추기거나 시대착오적인 국수주의를 소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나마 정부의 한류 지원정책이 산업현장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적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계속 한류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이론적 설명력’ 때문이다. 할리우드나 맥도널드로 대변되는 일방향적 문화 유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국경을 넘나드는 대중문화의 초국가적 흐름은 이제 훨씬 다변화되고 중첩화되었다. 문화적 변방에 있던 작은 나라의 드라마나 가요가 할리우드의 본산지로 수출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그 내용물을 딱히 ‘한국적’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이미 혼종화된 대중문화가 국경을 넘어 다시 현지화되기도 한다. 즉, 한류는 한국에 부를 가져다주는 상품이나 도구가 아니라 21세기 ‘전 지구 문화’의 양상을 비춰주는 설명력 높은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방탄소년단’이 ‘2017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AMA)’ 시상식 무대에서 공연한 것은 전 세계 대중문화의 지형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건이다.
‘방탄소년단’은 올해 빌보드 ‘톱 소셜 아티스트 상’을 수상했고 빌보드 ‘핫 100’ 진입에도 성공했다. ABC의 2018년 신년맞이 특집방송 출연도 예약되어 있다. 신곡 ‘마이크 드롭’ 리믹스 버전은 발표 15시간 만에 유튜브 조회수 1000만건을 돌파했고, 40개국 이상에서 아이튠스 ‘톱 송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넘어서는 엄청난 성공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는 이전의 한류와는 다른 새로운 문법을 본다. 
방탄소년단은 미국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치밀한 전략을 세운 적이 없다. 2009년 ‘원더걸스’의 상처뿐인 실패와는 달랐다. 방탄소년단은 뮤직비디오만이 아닌 엄청난 양의 부가 콘텐츠를 오랜 기간 동안 생산하고 유통시켰다. 유쾌한 뮤직 비디오 하나의 벼락 히트로 스타가 됐던 싸이와는 달랐다. 방탄소년단은 장기 리얼리티쇼를 하듯 멤버 각자의 캐릭터를 구축해나가는 동시에 스토리텔링을 구성했다. 카리스마와 군무만으로 무장한 이전의 한류 아이돌과는 달랐다. 아, 물론 성공의 가장 큰 이유는 재능과 성실함을 겸비한 매력적인 멤버들이지만. 
따라서 방탄소년단의 성공은 미디어 기술환경, 즉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21세기 전 지구 문화’의 핵심적 기반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질적 문화에 대한 관용도가 높아진 것도 미디어 환경과 관련이 깊다. 물리적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생긴 이산성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문화적 흐름이 고정된 중심부-주변부 구조에서 작동되는 시대가 아니라는 의미다. 물론 인터넷만으로도 전 세계 팬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아주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SNS를 통해 무대 뒷이야기를 영상으로 올리고, 사진과 메시지를 시시콜콜 제공하면서 (잠시만 방심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팬덤과의 유대감을 유지하는 것은 최근 생겨난 성공의 문법이다. 방탄소년단의 팬덤인 ‘아미(A.R.M.Y.)’는 국내 팬덤이나 미국 내 아시안 커뮤니티와 연결되지 않은 채 SNS 내에서 다양한 사람과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방탄소년단이 미국으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팬들이 공간을 만들어 이들을 부른 셈이다. 그러니 굳이 국내에서 먼저 인기를 얻을 필요도 없다.
신인 그룹인 ‘카드’는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인기를 모은다고 한다. 방탄소년단은 트위터 팔로어만 1000만명이 넘는다. 업계의 ‘빅3’로 불리는 SM, YG, JYP 소속이 아니지만 AMA 무대에 설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방탄소년단의 성공에서 새로운 한류의 가능성을 읽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또 누군가가 흥분해서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한국문화 광고를 하거나 강남 한복판에 말춤 동상을 세우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다. 한류의 새로운 문법은 낯설고 새로운 문화를 언제든지 쉽게, 그리고 자주 만나서 이해하고 즐기는 전 지구 문화의 문법이다. 방탄소년단과 K팝의 성장은 역사적인 문화변동의 한 단서로 이해했으면 한다. 설마 재기 넘치는 한국의 아티스트들을 저열한 ‘애국주의 한류-2.0’의 포로로 만드는 일은 없겠거니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1261141011&code=990100#csidx593a8ed209e1fc8bf16247122381a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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