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4일 금요일

영화 ‘범죄도시’와 제노포비아/ 조재휘 영화평론가

‘범죄도시(2017)’는 한국 영화 일련의 범죄 느와르 중 독특한 면면을 보여준다. 영화의 시선은 마석도(마동석) 형사가 순찰하는 차이나타운의 일상에 머무른다. 경찰의 관리감독 아래 조직폭력배들은 큰 말썽 없이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마을 주민들은 나름대로 평화를 구가하며 살아가는 작은 소우주. 그러던 중 마을에 신흥 폭력조직 흑룡파의 두목 장첸(윤계상)이 들어와 기존 조직들을 무너뜨리고 급격히 세력을 불린다.

악한은 술집을 거점 삼아 조금씩 마을을 장악하고 횡포를 일삼는다. 이에 경찰과 주민, 지역 폭력배까지 합심해 장첸과 그의 조직을 몰아내고자 한다. ‘범죄도시’의 특이한 점은 암울한 사회·정치상과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분열하는 인간 군상을 주로 다루어온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드물게 공동체가 살아있는 풍경을 그려내는 데 있다. 

외부 세력이 들어와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히자 보안관을 중심으로 뭉친 내부 구성원이 이를 물리친다는 서사의 얼개. 그런 점에서 영화의 플롯은 기존의 한국형 범죄 느와르보다는 고전적인 정통 서부극에 가깝다.

총잡이들의 연대로 갱을 소탕하는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1959), 다양한 목적과 이해관계에 놓인 인물들이 아파치족의 습격에 맞서 단합하는 존 포드의 ‘역마차’(1939)와 같은 서부극의 구도가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변주되는 셈이다. 보안관은 형사로, 인디언 또는 갱단은 범죄조직으로 치환된다. 공동의 적을 맞아 미묘한 갈등을 봉합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 서부극의 이데올로기는 ‘조선족’ 악한을 상대로 일치단결하는 ‘범죄도시’의 인물들을 통해 한국의 사회적 맥락 속에 자연스럽게 이식된다.

문제는 이러한 공동체의 단합이 적대적 타자의 존재를 설정함으로서 성립한다는 점이다. ‘황해(2010)’와 ‘신세계(2012)’에서 전조를 드러낸 지속적인 조선족에 대한 범죄자 프레임은 ‘청년경찰(2017)’처럼 강력범죄의 온상으로 지목하고 미디어와 대중의 편견, 근거 없는 괴담과 혐오를 투영하는 작품이 나오기까지 극단화되어 ‘범죄도시’에까지 이어진다.

특정 외국인 집단에 대한 혐오의 조장과 이를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주장하는 일련의 흐름은 은연중에 ‘유대인 쥐스(1940)’와 같이 유대인 혐오를 자국민 단결의 구실로 삼았던 나치 집권기의 독일영화까지 상기하게 한다. 물론 ‘범죄도시’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적응해 살아가는 조선족 주민에 대한 묘사를 잃지 않으며 균형을 맞추지만 내지인과 외지인의 충돌이라는 전형성, 제노포비아(Xenophobia·외국인 혐오증)의 배타적 함의를 피하기 어렵다.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적대자)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영화는 만들어진 시대의 사회·정치상을 증언한다. ‘국가의 탄생’(1914)이 흑인, 서부극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다룬 태도에서 지금의 관객은 당대 사회의 인종차별주의가 투영되어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가 외국인 집단에 대한 적대를 설정하고 있음은 위험의 징후인지 모른다.

다문화의 시대에 접어들어 섞임과 공존의 화두를 두고서, 한국영화는 얼마나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는가? 웰메이드 장르 영화임에도 ‘범죄도시’를 끝까지 편하게 바라볼 수 없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영화평론가 
출처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71124.22021010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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