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4일 금요일

한국사 감상법/ 박훈 서울대교수 동아시아사

한국인들의 역사인식(자국사인식)은 불안정하다. 별 근거도 없이 극에서 극으로 흔들려 과대평가와 자기폄하 사이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한다. 먼저 과대평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자국사가 단순한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국민설화’를 만드는 기둥이기도 한 이상, 예를 들면 교과서가 자국민에게 정당한 프라이드를 갖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러나 ‘국민설화’도 학문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 이걸 벗어나면 ‘국민마약’이 된다. 마약은 달콤하다. 가장 환호하는 것은 상고사 분야, 즉 잃어버린 ‘위대한 고대제국’에 대한 열망이다. 이 주장은 학술적으로 입증된 주장, 즉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학설을 부정하고, 거꾸로 중국에 대한 한반도 역사의 영향을 강변한다.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글의 맥락이나 복잡한 구조는(사실 그리 복잡하지도 않다) 모른 척한 채(진짜 이해를 못하는 거 같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일본학자와 비슷한 주장이 있으면, ‘친일사학’이라고 우긴다. 이런 태도는 맥락이나 진의는 어찌 됐든 북한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주장이면 ‘용공조작’을 자행했던 사고방식과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경악할 만한 것은 대학교수, 대학총장, 국회의원 등 지도적 인사들 중에 무슨 독립지사라도 된 듯한 표정으로 ‘위대한 상고사’를 지지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현상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연구주제라고 생각될 정도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조금이라도 관련 책을 찾아보면 금방 판단될 일을, 이 사회 엘리트들이 저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모종의 ‘종교적 심정’이 머리를 마비시키고 있다고 보인다. 역사와 종교의 결합이라…. 무시무시한 일이다.

반대로 한국사에 대한 자기폄하를 살펴보자. 사실 대다수 한국인들의 역사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패배주의이며, 열등콤플렉스다. ‘위대한 상고사’와 과도한 민족주의적 역사해석의 저변에는 이것이 자리 잡고 있다. 열패감을 지우기 위해 ‘위대한 역사’에 환호하는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 등을 읽다보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많은 지식인들(개중에는 내가 존경하는 분들도…)이 보이는 역사이해의 수준 때문이다. 얼마 전 한 필자는 “단군 이래 처음으로 G20에 들어간 우리나라”라는 표현을 태연히 했다. 이분의 한국사인식은 한국은 수천 년간 가난에 찌든 후진국이었고, 대한민국이 되어 처음으로 세계 주요 국가에 들어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분이 아니더라도 고구려 때 잠깐 반짝했다가 신라 삼국통일 이후에는 ‘별 볼일’ 없는 역사라는 인식은 일반시민에게도 넓게 퍼져 있는 듯하다.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고구려를 빼앗으려는 시도에 한국인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배경에 이런 고구려상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통일신라, 고려, 조선왕국은 후진국이고 별 볼일 없는 나라였나? 예를 들어 18세기 조선은 인구 1500만명이 먹고살 수 있는 나라였다. 다른 나라에 비해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도 아니었다. 주자학을 비롯한 지적 수준은 잘 알려진 대로 대단했다. 당시를 지금처럼 국가랭킹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조선이 ‘G20’과 한참 거리가 멀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 흔히 듣는 말 중에 “우리나라가 중국에 앞선 것은 20세기 몇십 년뿐인데, 그나마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있다. 그게 어디 한국뿐인가. 일본도 베트남도 다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현상을 나만 못났다고 하니 반성이 아니라 자학에 가깝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은 매우 특수한, 아마도 세계사에서 유일한 케이스일지도 모른다. 흔히 우리 역사에 대해 평할 때 “중국 옆에서 살아남은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하는데 결코 과분한 평가가 아니다. 베트남이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겠으나, 베이징과 하노이는 베이징과 서울에 비하면 저 너머 세상이다. 우리 역사를 바라볼 때는 이런 배경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의 역사는 중국처럼 수천 년간 지역의 패자로, 문명의 센터로 지내온 역사도 아니고, 일본처럼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서 지정학적 행운을 즐기며 자폐적으로 살아온 경우도 아니다. 그만큼 더 복잡하고 깊은 사연이 있다. ‘고투의 역사’에 대해 적절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지적으로 이만큼 흥미를 자극하는 역사도 드물 것이다. 독특한 조건 속에서 분투해온 한국사의 경험은 역사에서 지혜를 구하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교훈과 영감을 줄 것이다.

철부지 어렸을 때는 자기 아버지가 세상에서 최고인 줄 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내 아버지가 제일 ‘위대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때로는 능력에 부쳐 비웃음을 사거나, 살아남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몸엔 땀과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그러나 제일 잘나지는 않았지만, 끈질기게, 당당하게 살아온 그의 뒷모습을 보며 부끄러워할 자식은 없을 것이다. 그를 부끄러워하며 ‘위대한 아버지’로 분칠하는 것도, 위대하지 않다고 해서 비아냥거리는 것도 그의 삶에 대한 모독이다. 아니, 정말 무엇이 ‘위대한 것’인가?

<박훈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사>

원문보기: https://goo.gl/2gQc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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