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의외의 응답 편
-〈시사IN〉, KBS 공동 기획 대규모 웹조사
〈시사IN〉은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조망하는 사회조사를 기획했다. 한국인들은 개방적·수평적이어서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했을까, 순응적·수직적이어서 성공했을까. 질문은 꼬리를 물었고, 결과는 의외였다.
“이 결과가 정말 맞습니까? 이건 지나치게 깔끔한데요?”
“저도 코딩을 잘못했나 싶어서 몇 번 다시 봤어요. 이게 맞습니다.”
“사회조사에서 이렇게까지 결과가 딱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가요?”
“거의 없죠. 정말 드물어요 이런 건.”
둘 사이에 노트북 한 대를 놓고, 기자와 임동균 교수(서울대 사회학과)가 이런 대화를 몇 번씩 주고받았다. 숫자를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가 어려웠다. 우리 앞에는 방대한 조사 문항을 분석한 결과가 주르륵 떠 있었다. 데이터는 일관되게 하나의 결론을 가리켰다. 사회심리학 연구자로 이런 종류의 데이터를 숱하게 다뤄본 임동균 교수를 당황시킬 만큼 결과가 선명했다. “이런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나왔네요.” 5월15일 서울 양재동의 한 카페에서 나눈 대화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한국 사회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말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시사IN〉과 KBS는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사회조사를 공동으로 기획했다. 해결해야 할 질문이 많았으므로 문항을 대규모로 써야 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리서치의 웹조사를 이용했다.
5월1일. 서울대 임동균 교수 연구실에 〈시사IN〉과 KBS, 그리고 한국리서치가 모였다. 주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국 사회’였고, 그거 말고는 결정된 게 없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부터 불확실했다. 흥미로운 도전 과제는 뜻밖에 프랑스에서 날아왔다. 기 소르망. 프랑스가 자랑하는 석학이다. 거시적인 문명비평으로 이름이 높고, 한국에도 그의 저서 여러 권이 출간돼 있다. 그는 4월27일에 프랑스 주간지 〈르푸앵〉과 인터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유교문화가 선별적 격리 조치의 성공에 기여했다. 한국인들에게 개인은 집단 다음이다.” 한국이 방역에 성공한 이유가 정부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국민성 덕분이라는 얘기인데, 유럽이나 미국은 정부 말에 순응적이지 않은 주체적인 국민이라서 방역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뜻도 된다.
한국은 왜 방역에 성공했는가. 이것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끝없이 논란이 된 질문이었다. 일종의 해석 투쟁이 세계적으로 벌어졌다. 첫 상대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방역을 일종의 체제 경쟁으로 받아들였다. 재난 상황에서는 유약한 민주주의보다 단호하고 유능한 권위주의가 더 낫다고 보여주려 했다. 2월26일 관영지인 〈인민일보〉 논평은 이렇게 쓴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가 이 전쟁에서 이길 중요한 제도적 보장이며, 세계적인 방역 전쟁에도 귀중한 노하우다.”
이 시기에 서방 언론은 중국의 주장에 대한 반례로 한국을 내세웠다. 한국은 개방성과 투명성을 무기로 방역에 성공한 모델 국가였다. 3월11일자 〈워싱턴포스트〉에 칼럼니스트 조 로진이 올린 논평 제목은 ‘민주주의가 코로나19에 맞설 수 있다는 걸 한국이 보여줬다’이다. 〈뉴욕타임스〉, BBC 등 주요 서방 언론의 논조도 이와 비슷했다. 이 시기는 서방 주요 선진국들이 코로나19를 ‘동아시아의 문제’로 한발 떨어져서 보던 때다.
이후 코로나19가 유럽과 미국을 휩쓸기 시작한다. 이제 미묘한 문제가 생긴다. 한국이 민주적 개방성과 투명성 덕분에 성공했다는 해석을 고수하면, 미국과 유럽이 그에 못 미친다는 뜻이 된다. 이때부터 한국의 방역 성공을 ‘감시국가’ ‘통제사회’ ‘동아시아적 집단주의’ 등으로 설명하는 시도가 일각에서 등장한다. 프랑스에서는 비르지니 프라델이라는 변호사가 4월6일 〈레제코〉 온라인판에 이 같은 주장을 담은 글을 올렸다. 주프랑스 한국 대사관이 이 글에 공식 항의하는 소동도 있었다.
한국을 중국의 라이벌 모델이 아니라, 큰 틀에서 ‘중국 모델’로 묶어 설명하는 담론이 등장한다. 권위주의, 집단주의, 개인 자유를 침해하는 강한 정부 등이 핵심 속성이다. 그 반대편에 서구 문명이 있는데, 이들은 개방적이고 시민 자유를 중시하며 정부를 끝없이 의심하는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감염병 대응에는 취약하지만, 그것은 더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다. 4월27일 기 소르망의 인터뷰는, 거물급 지식인이 이런 맥락에서 한국 방역을 평가한 중요한 자료다. 그러니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인들은 개방적·수평적이어서 성공했나, 순응적·수직적이어서 성공했나? 한국 모델은 중국 모델의 반대편에 있나, 중국 모델의 옆에 있나?
어떻게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방역 참여 태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 가능한 변수를 최대한 많이 검토했다. 권위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중 누가 더 방역에 적극 참여할까? 개인주의자와 집단주의자는? 정치 성향상 우파와 좌파는? 순응적 성향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은?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하는 성향과 그렇지 않은 성향은? 결과를 알고 보면, 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답을 모르던 5월1일의 시점에서, 우리는 이 모든 질문들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기 소르망의 지적은 틀렸다
그물은 최대한 넓게 쳤다. 어느 그물에 걸릴지는 결과를 봐야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도 있었다. “특정한 상황에 처할 경우, 나는 원숭이 고기를 먹을 수도 있다.” 우리가 당황스러워하자, 이 문항을 제안한 임동균 교수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역겨움에 민감한 정도를 테스트하는 문항입니다. 역겨움에 민감한 사람은 감염병을 더 위협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방역에 더 적극적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죠. 그걸 검증해보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가설을 최대한 집어넣고 나니 문항 228개짜리 방대한 조사가 나왔다.
5월15일은 어느 그물에 답이 걸렸는지 확인하는 날이었다. 이날 임동균 교수는 모든 가설을 통계 검증한 결과를 가져왔다. 방법은 이랬다. 조사 문항 중에는 방역에 적극 참여한 정도를 묻는 질문이 10개 들어가 있다. ‘전혀 하지 않는다’ ‘가끔 하는 편이다’ ‘자주 하는 편이다’ ‘항상 한다’ 네 단계로 답을 받았다. ‘전혀 하지 않는다’를 1점, ‘항상 한다’를 4점으로 해서 점수를 매겼다. 문항이 총 10개이므로, 최소 10점에서 최대 40점까지 ‘방역 참여 점수’를 계산할 수 있다. 10개 문항은 다음과 같다.
1. 외출 시 마스크 착용
2. 대중교통, 사무실 등 실내에서 마스크 착용
3. 손 씻기
4. 손세정제, 소독제 사용
5. 외출 자제
6. 외식 자제
7. 극장, 백화점, 대형마트 등 출입 자제
8. 모임, 회식 불참 또는 취소
9. 대중교통 이용 자제
10. 종교행사 불참(종교인만)
방역 참여 점수와 응답자들의 성향을 비교해보면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 방역에 더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를 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기 소르망은 틀렸다. 권위주의 성향은 방역 참여 점수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 성향이 강할수록 방역에 적극 참여하는 경향은 발견되지 않았다.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권위주의 성향이 강할수록 방역 참여에 오히려 더 소극적인 경향이 약간 있습니다.” 임 교수가 덧붙였다. 순응적인 성향도 방역 참여 점수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 집단주의 성향도 마찬가지로 나왔다.
이 결과는 꽤 의외였다. 방역 참여에 적극적인 사람은 정부 지침을 잘 따르는 사람이고, 정부 지침을 잘 따르는 사람은 권위에 순응하는 집단주의 성향이 강할 것이다. 이것은 비르지니 프라델 변호사와 기 소르망이 연이어 제기한 그 가설인데, 직관적으로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데이터는 다른 결론을 낸다.
그렇다면 방역에 참여하는 정도를 결정하는 무언가 다른 요인이 있다는 뜻이다(‘원숭이 고기’는 아니었다). 임동균 교수는 가설 둘을 지목했다. 첫째는 ‘민주적 시민성’이었다. 이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일수록 방역에 적극 참여하는 경향이 통계적으로 확인됐다. 둘째, ‘수평적 개인주의’ 성향이 강할수록 방역 참여에 더 적극적이다.
통계분석 결과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표 1〉을 그렸다. 권위주의 성향의 강도에 따라 응답자를 상중하 세 그룹으로 나눈 뒤, 각 그룹의 방역 참여 점수를 비교해보았다. 순응적 성향, 집단주의, 민주적 시민성, 수평적 개인주의도 같은 방법으로 그렸다. 앞의 셋(권위주의, 순응 성향, 집단주의)은 상중하에 상관없이 비슷하거나 차이가 크지 않다. 뒤의 둘(민주적 시민성, 수평적 개인주의)은 각 성향이 강해질수록 방역 참여 점수가 올라가는 경향이 더 확연하다. 권위주의, 순응 성향, 집단주의는 한국의 방역을 성공시킨 힘이 아니다. 민주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들, 수평적 개인주의자들이 방역 성공의 주역이다. 결과가 하도 선명해서 다른 결론을 내기가 불가능했다.
이쯤에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동화 같은 마무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동화보다 복잡하다. 민주적 시민성이라는 게 대체 뭘까? “그게 참 오묘합니다. 민주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데도 또 뚜렷하게 공동체 지향이 강해요.” 임 교수가 말했다. 민주적 시민성을 측정하는 데 우리가 쓴 방법은 아래와 같다. 다음 7개 문장을 제시한 후, 좋은 국민이 되는 데 각각이 어느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중요하다는 응답이 강할수록 민주적 시민성이 높다고 분류된다.
1. 선거 때 항상 투표한다.
2. 법과 규칙을 항상 잘 지킨다.
3. 정부가 하는 일을 늘 지켜본다.
4. 사회단체나 정치단체에서 적극 활동한다.
5.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6. 조금 비싸더라도 정치, 윤리, 환경에 좋은 상품을 선택한다.
7. 나보다 못사는 사람들을 돕는다.
민주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은 집단주의자나 권위주의자와는 구별된다(3번, 5번 등). 그렇다고 개인주의나 자유주의로 이들을 온전히 설명하기도 어렵다(2번, 6번 등). 개인주의 대 집단주의,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분법이다. 민주적 시민성은 이런 이분법으로 잘 포착되지 않고, 둘을 적당히 섞어놓은 절충과도 다르다. 이들은 개인이 자유롭기를 바라지만, 좋은 공동체 안에서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데 강하게 의무감을 느끼므로, 자신처럼 하지 않는 동료 시민들을 무임승차자라고 싫어하는 성향도 강하다. 그러니 마냥 이타적인 시민과도 다르다.
우리는 어쩌면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한국 방역의 성공을 두고 등장한 해석 투쟁은 대체로, 익숙한 이분법 위에서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논쟁이었다. 그런데 데이터는 아예 이 이분법을 뛰어넘는 곳에 답이 있다고 암시한다. 공동체 지향적인 개인주의자, 공공재 생산에 기여할 의지를 가진 시민, 무임승차자를 처벌하고 싶어 하는 자유주의자. 이런 사람은 한 단면만 보아서는 권위 순응형 인간으로도 보이고, 반대편에서 보면 공동체 자체에 무관심한 자유주의자로도 보인다. 민주적 시민성은 둘의 절충이 아니라 제3의 꼭짓점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에 기여하고자 하는 시민’을 뜻한다.
이 렌즈를 통해 사회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 한국인들은 물론 코로나19를 두려워한다(〈표 2〉). “내가 확진자가 될까 두렵다”라는 문장에 64%가 동의했다(다소 그렇다 46%, 매우 그렇다 18%). 하지만 한국인들은 감염 자체보다도, “주위 사람들에 피해를 끼칠까 봐 두렵다”라는 문장에 더 많이, 더 강력하게 동의했다. 86%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 중 ‘매우 그렇다’는 강한 응답도 48%나 되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으므로 매우 이기적이다”라는 문장을 주고 동의하는지 물었다. 85%가 동의한다고 답했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까 봐 가장 걱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방역 지침을 지키려 노력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어서 문제다. 무임승차자다. 하지만 그걸 국가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의견이 엇갈린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정부가 처벌해야 한다”라는 문장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47%다.
코로나19 국면에는 대단히 독특한 합의가 존재한다. 코로나19는 치명률은 높지 않은 반면 전파력은 대단히 강해서, 개인 건강보다 사회관계에 끼치는 파괴력이 더 크게 느껴진다. 감염을 조심해야 하는 핵심 이유는 남에게 피해를 줄 것이기 때문이고, 방역지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다. 이렇게 해서 코로나19 방역이란 질병을 회피하거나 건강을 염려하는 태도보다도, 공공재를 함께 만들어가는 싸움에 더 가까워진다. 민주적 시민성이 강할수록 방역 참여에 적극적인 이유가 여기서 확인된다.
공동의 목표를 앞에 두고 함께 싸워나가는 경험, 공동체에 중요한 일에 참여하는 경험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양시킨다. 극단적인 사례는 전쟁이다. 전시에 사람들이 들뜨고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느끼는 힘은 널리 알려져 있다. 코로나19 방역전에서 시민들은 전시 고양감을 저강도로 경험하는 것 같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방역 참여를 이례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방역 지침을 내가 잘 지킨다고 응답한 비율은 96%, 우리나라 국민이 잘 지킨다고 응답한 비율은 82%다. 일종의 ‘전우애’가 작동하고 있다.
응답자 48% “정치에 관심 늘었다”
코로나19 유행 이후로 생각이 바뀐 대목이 있는지, 여러 질문을 던져봤다(〈표 3〉). 우리 국민이 ‘단결이 잘되는 편’이라고 생각을 바꾼 비율은 64%나 되었다. 26%는 변화가 없었고, 11%는 ‘분열이 잘 되는 편’이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고양된 감정과 공동체 소속감이 뚜렷하게 잡힌다. ‘정치에 관심이 늘었다’는 응답도 48%로 상당히 높았다. ‘변화 없다’ 43%, ‘관심이 줄었다’ 10%였다. 이 숫자는 2020년 총선 투표율이 크게 오른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한다. 더 놀라운 결과는 다음 질문에서 나온다. ‘내가 낸 세금이 제대로 쓰인다고 믿게 되었다’라는 응답이 43%다. ‘낭비된다고 믿게 되었다’는 24%다.
코로나19 국면에서는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뢰가 크게 상승했다. 심지어 세금조차 그렇다. 세금 관련 질문에서 신뢰도가 올라갔다고 답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는데, 그 드문 일이 일어났다. 방역 공공재가 잘 생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정부가 매끄럽게 작동했다고 평가하는 한국인들은 공적 제도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전시 고양감과 한 쌍으로, 전시 사령부에 대한 신뢰다.
그 결과, 한국은 해묵은 선진국 콤플렉스를 벗어던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표 4〉). 선진국과 한국의 역량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을, 역시 여러 방법으로 던져봤다. 국가의 총체적 역량에서, 한국이 선진국보다 더 우수하다는 응답은 39%였다. 비슷하다는 응답도 31%였다. 둘을 합치면 70%가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일반 시민의 역량에 대한 평가가 더 후하다. 58%가 한국이 선진국보다 시민 역량이 더 위라고 평가한다. 비슷하다는 응답은 26%였다. 둘을 합치면 84%인데, 우리 국민이 방역 지침을 잘 지킨다는 응답 82%와 거의 일치한다. 방역 공공재를 함께 만들어내는 시민들의 역량을 서로 지켜보는 중이고, 이것이 코로나19 국면에서 두드러지는 자부심의 원천인 것 같다.
한국 사회 대부분 영역에 대해 신뢰가 쌓이고 있다. 우리는 사회 각 분야에 대해, 코로나19 이전과 대비해서 더 신뢰하게 되었는지, 불신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신뢰하게 되었다는 응답에서 불신하게 되었다는 응답을 빼서 ‘신뢰 변화 지수’를 뽑아봤다. 신뢰가 늘어난 분야는 플러스(+)로, 줄어든 분야는 마이너스(-)로 표시된다. ‘신뢰 변화 지수’가 큰 순으로 늘어놓은 결과가 〈표 5〉다. 질병관리본부가 +75, 의료인·의료기관이 +72로 단연 높다. 감염병을 직접 다룬 최전방이 가장 큰 폭의 신뢰 상승을 맛봤다. 특히 공적 제도 신뢰가 눈에 띄게 올랐다. 청와대가 +29, 정부가 +27이었다. ‘전우애’를 반영하듯 한국 국민에 대한 신뢰도 +21이었다. 가족(+67)이나 친척(+41) 등 혈연집단 신뢰가 높아졌다. 신뢰가 깎인 영역도 있다. 언론은 -45를 기록해 갈수록 신뢰 위기를 겪고 있다. 종교기관은 -46으로 언론과 비슷한 수준의 위기다. 국회는 -33인데, 제1당과 2당을 쪼개보면 결과가 엇갈린다. 1당인 민주당은 -3으로 선방했다. 2당인 미래통합당은 -56으로 크게 흔들렸다.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가 -36으로 낮아진 사실은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것은 감염병 국면의 전시 고양감이 진짜 전쟁 국면의 전시 고양감과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이다. 감염병은 연대와 협력의 의지를 북돋는다는 점에서 전쟁과 닮았지만, 같은 국민이라도 낯선 사람을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배척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전쟁과 다르다. 임동균 교수는 감염병 특유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들이 목표를 기꺼이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함께 추구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협이다.” 목표를 공유하는 ‘추상적인 동료 시민들’은 끈끈해진다(한국 국민 +21). 하지만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구체적인 동료 시민들’은 밀어낸다(낯선 사람 -36).
한국은 저신뢰 사회의 대표 국가로 오랫동안 알려져 있다. 혈연집단에 대한 신뢰는 강한 반면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는 낮다. 신뢰가 낮으면 같은 일을 할 때도 더 많은 계약과 보증서와 변호사와 치안 능력이 필요하다. 이게 다 비용이다. 그래서 한 사회의 신뢰수준은 그 사회의 보이지 않는 재산,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평가받는다. 코로나19 국면에서 신뢰수준이 올라간다는 발견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정부와 같은 공적 제도에 대한 신뢰는 올랐다. 한국 국민과 같은 추상적인 대상에 대한 신뢰도 올랐다. 하지만 사회적 신뢰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는 오히려 후퇴한다. 한국을 저신뢰 사회로 규정했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내 연구는 사회 신뢰를 다룬 것이고, 최근 한국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제도 신뢰 상승이므로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음 문항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표 6〉은 각각의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답한 비율을, 코로나19 유행 이전인 2019년의 기존 조사와 비교한 것이다. 코로나19 국면을 거치며 응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볼 수 있다. “정부는 우리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우리나라는 복지제도가 잘 갖춰져 있다”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다”라는 응답은 모두 크게 올랐다. 하지만 “법이 공정하게 집행된다” “계층 상승 기회가 열려 있다”라는 항목에는 예나 지금이나 응답자들이 시큰둥하다. 코로나19 국면이 만들어낸 고양감과 신뢰는 특정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 같으며, 이것은 ‘저강도 전시(戰時) 효과’여서 상황이 안정되면 사라질 수 있다. 이 힘이 사회를 질적으로 도약시켰다는 인식은 아직 없다. 법 공정성이나 계층 이동성에 대한 평가는 그리 호전되지 않았다.
감염병은 공동의 목표를 향한 준전시 상태를 가져왔다. 그로부터 ‘전우애’, 승리를 거둔 시스템에 대한 신뢰, 그 결과로 나타나는 자부심과 고양감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물론 좋은 출발이다. 사회가 질적 도약을 이뤄내려면 이런 재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재료들과 질적 도약 그 자체는 구분해야 한다.
민주적 시민성이 ‘자유로운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에 기여하는 좋은 시민’을 뜻한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동체’의 폭과 깊이다. 이 공동체는 넓어지고 있는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우리끼리의 결속’을 다지는 것은 아닌가? 깊이는 깊어지고 있는가? 감염병 특유의, 낯선 사람을 밀어내려는 힘과 민주적 시민성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이런 복잡한 질문들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코로나19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아직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왜 방역에 성공했나?”라는 질문을 붙들고 밀어붙이다 보니 더 많은 질문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코로나19라는 경험은 우리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나? 그 변화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단계로 나아가는 중인가? 한국 사회가 이 재난을 계기로 질적 도약을 이뤄낼 가능성이 있는가? 그걸 이뤄내려면 지도자는, 시민은, 지식인은,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다음 호에서 이 질문들에 답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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