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과 도서관이 잊은 이름, #강진국]
강진국(姜辰國)은 1905년 경남 동래에서 태어났습니다. 1942년까지 동래는 부산이 아닌 경남에 속했습니다. 1905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의 국권이 강탈당한 해입니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탄생한 이 해에 한국 도서관계의 ‘별’이 되는 인물이 여럿 태어났습니다.
#이재욱, #박봉석, 강진국 이 세 사람이 모두 1905년 #을사년 생입니다. 같은 해 태어난 이 셋은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영남에서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이재욱은 경북 대구, 박봉석은 경남 밀양, 강진국은 경남 동래에서 태어났습니다.
1896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난 #조근영, 1921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난 엄대섭까지 떠올리면, 영남은 초기 한국 도서관계의 ‘#태산북두’를 모두 배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영남의 딸’ 이혜숙 선생의 사심 어린 해석입니다).
변호사를 꿈꿨던 강진국은 일본 니혼대(日本大)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강진국은 '#경성부립도서관'에서 일했습니다. 지금의 남산도서관입니다.
경성부립도서관에서 일하던 시절, 그는 눈에 띄는 2가지 ‘족적’을 남깁니다. 하나는 조선도서관연구회 이사를 맡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문고에 대한 글을 써서 발표한 점입니다.
‘#조선도서관연구회’는 식민지 조선 전체를 아우르는 도서관 단체로는 처음 설립되었습니다. 도서관 단체의 명맥은 1939년 조선도서관연맹을 거쳐, 해방 후 조선도서관협회, 한국도서관협회로 이어졌습니다. 분단이 되면서 북한에 ‘조선도서관협회’가 생겼습니다. 땅과 체제, 사람이 나뉘면서 도서관 단체도 둘로 나뉘었습니다.
강잔국은 일제강점기 조선도서관연구회에서 단 둘 뿐인 조선인 임원이었습니다. #성달영(成達永)과 강진국, 두 사람은 일본 도서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식민지 조선의 도서관계를 이끌었습니다.
‘#농촌문고’에 대해 《동아일보》에 발표한 글은 도서관인으로서 그의 면모를 되새겼지만, 조선총독부 눈 밖에 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농촌문고에 대한 강진국의 글은 오랫동안 잊혔다가 가토 가즈오(加藤一夫)를 비롯한 여러 일본 도서관학자가 쓴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을 통해 재조명되었습니다. 일본 도서관학자가 쓴 이 책은 한국에서 잊힌 ‘강진국’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습니다.
해방 때까지 삼척탄광에 피신했던 강진국은 해방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산업건설협의회, 조선산업재건협회, 산업경제연구소에 참여하였고, 조선언론협회 상임이사로 활동했습니다. 해방 조국의 미래에 대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며, 훗날 ‘#중간파’로 평가받는 사상가, 정책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강진국은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에게 발탁되면서 신생 대한민국의 최대 현안인 #토지개혁 문제의 일선에 섰습니다. 죽산은 1925년 4월 17일 국립도서관 전신인 조선총독부도서관 근처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을 출범시킨 바 있습니다. 조봉암은 해방 조국에서 그가 생각한 ‘평등 세상’에 대한 구상을 강진국과 함께 펼치고자 했습니다.
강진국이 맡은 농림부 농지국은 토지개혁의 담당 부서였습니다. 농지국장이 된 그는 밤낮으로 농민을 직접 만나 농민이 원하는 개혁안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표현처럼 강진국은 토지개혁을 통해 “농지는 농민에게”라는 이상을 실현하려 했습니다.
7장 25조로 이뤄진 ‘#농지개혁법’ 시안은 1948년 11월 19일부터 20일까지 꼬박 이틀 동안 다듬어졌습니다. 역사적인 이 법안의 최종 조문은 강진국의 집에서 탄생했습니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주대환은 조봉암이 주도하고 강진국이 실무를 지휘한 토지 개혁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토지혁명”으로 규정했습니다.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으로 추진된 농지개혁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평등한 출발점에 섰습니다.
계급 철폐와 함께 평등해진 신분, 토지개혁으로 균등해진 경제력은 대한민국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자유 대한’은 ‘평등 대한’으로 출발했기에, 제3세계 신생국가보다 강력한 성장엔진을 얻었습니다.
대한민국 초기 역사에서 강력한 개혁을 성공시킨 토지개혁 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토지개혁의 주역인 조봉암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습니다. 이승만의 강력한 정적이 된 조봉암은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 당했습니다.
도쿄제국대학 농업경제학과 출신으로 당시 농업문제 일인자로 꼽힌 농림부차관 강정택은 납북되었습니다(울산 출신 강정택은 국립도서관 이재욱 관장의 대구고보 후배입니다. 강정택은 수재만 입학한다는 도쿄제일고교를 거쳐 도쿄제대를 졸업했습니다).
강진국과 함께 농지국에서 농지개혁의 실무를 맡았던 #윤택중, #안창수, #배기철 세 명의 과장은 월북했습니다. 강진국은 고초를 겪다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곧 잊혔습니다
한국 근현대 도서관사에서 ‘가장 뛰어난 도서관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하나는 강진국입니다.
도서관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은 여럿 있지만, 대한민국의 설계와 출범에 강진국 만큼 큰 영향을 끼친 도서관인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강진국은 ‘비운의 도서관인’입니다. 엄대섭은 『이런 사람 있었네』라는 책이 쓰이고 훈장까지 받았지만, 강진국은 ‘그런 사람이 있었느냐’라는 질문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강진국이 태어난 지 115년. 우리는 그가 말년을 어떻게 보냈고,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했으나 대한민국도 도서관도 잊은 그 이름, 강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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