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의 이름으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를 받았다. 이것은 경제개발에 다급했던 박정희 정권이 미국 주선하에 성사시킨 정치적 결정이었지만, 당시 한국 정부는 일제 강제병합의 불법성은 물론 강제동원된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고, 몇 사람이 끌려가서 어느 정도의 임금을 받지 못했는지 등에 대해서 제대로 된 근거나 자료를 준비하지 못했고, 또 그것을 근거로 일본과 협상을 진행할 능력도 없었다.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당시 일본 관방장관은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서 구 일본군이 관여했다고 발표했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일본의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사실 한국 정부는 일제하 위안부 동원에 대한 기초 사료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일제의 조선인 재산 약탈, 강제동원, 위안부 동원,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독립운동 및 친일파 문제, 그리고 독도문제 등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한국 측이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이 모든 기초 자료와 지식 중 정부가 체계적으로 수집·정리한 것은 거의 없었다. 대일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미관계에서는 더 심하다.
한국 문제에서도 그렇다. 1990년대 말 <전쟁과 사회>를 집필하던 중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 자료를 찾아보니 그때까지 전쟁을 거친 한국인 상당수의 삶을 고통에 빠트린 이 중요한 사실에 대해 정부는 물론 학자들 중에서도 연구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후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이 되어 조사를 하다 보니 국방부와 경찰의 공식 역사는 거의 엉터리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굴절된 한국 근현대사, 국가폭력과 전쟁, 군사독재, 돌진적 산업화 과정에서 회복할 수 없는 피해와 상처를 입은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거리에서 울고 외쳤지만, 김대중 정부 이전의 역대 정부와 정치권은 외면했다. 90년대 이후 시민·인권운동은 그들의 울음을 외면할 수 없었던, 민주화운동의 세례를 받은 극소수의 청년들이 외롭게 응답한 몸짓이었다. 그리고 극소수의 재야 연구자들이 정부의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은 채 자발적으로 축적한 자료들이 오늘 국가 정책과 외교의 큰 거름이 되었다.
정부나 정치권이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극소수 활동가나 연구자들의 고군분투는 정부 부서의 일상 활동, 그리고 국립대학의 공식 아카이브와 강좌나 공식 연구센터의 중심적인 임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30년이 더 지난 지금 역시 한국 정부 어디에도 여러 식민지 과거사, 전쟁 분단 피해나 인권침해 사실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부서가 없고, 어느 국립대학에도 관련 연구소나 자료 센터, 담당 교수가 없다. 그런데 지난 국회에서 ‘여성인권평화재단’ 설립을 포함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법’ 개정안은 미래통합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언론은 문제가 터지면 “어디 전문가 없나” 하며 극소수의 활동가와 연구자들을 못살게 군다.
코로나 방역 성공으로 국격이 크게 높아진 한국이 장차 제대로 국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서는 바로 20세기 한국인들이 겪은 고통을 세계화·보편화하고, 아직 한국 정도의 해결 단계에까지 오지 못한 대부분 나라의 활동가, 전문가들을 불러서 함께 연구하고, ‘인권과 평화’라는 가치를 재정립하는 일이 필요하다.
윤미향 의원이 정의기억연대 운영 과정에서 비리를 저질렀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고, 이번 기회를 거울삼아 다른 시민단체도 회원과 기부자의 감시 속에서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수언론들이 이 문제를 들추어 공격하려면 국가의 직무유기 상태에서 외롭게 이 일을 끌어안아온 시민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지금의 무차별적인 폭로는 국가를 대신해서 대일 과거사 문제를 끌어안아온 시민운동가와 이름 없는 공공지식인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공적인 일에 헌신해온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을 모욕함과 동시에 이런 활동에 감동하여 함께할 의지를 갖는 청년들을 허탈하게 만든다.
물론 상징적 활동가 한 사람을 의원으로 발탁하여 대일 과거사 관련 정책 결함을 보완하려 한 여권의 행태도 못마땅하다. 정치권의 임무는 정부가 할 일을 대신 하는 시민운동을 지원하고 공공지식의 축적이 이루어질 수 있는 학문 인프라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제 ‘의병’이 ‘관군’을 대신하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 언론의 감시와 비판은 위안부나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삶을 외면해온 정부나 정치권을 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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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75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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