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문명, 녹색으로 맞선 ‘생태적 인간’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별세
격월간지 <녹색평론>의 발행·편집인인 생태사상가 김종철 전 영남대 교수가 25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73.
영문학자이자 운동가, 사상가로 지속가능한 생태 문명과 공동체 건설을 주장해온 그는 2008년께부터 기본소득 논의에 참여하며 초기 주창자로서 이론을 소개하고 운동에 참여하는 등 끊임없이 행동해온 지식인이자 실천가였다.
194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영문학과와 대학원을 수료했다. 1970년대에 문학비평을 시작한 그는 계간 <문학과지성> 편집동인으로 참여했으나 그만두고 창작과비평 계열의 민족문학론과 제3세계 리얼리즘론에 입각한 비평활동을 펼쳤다. 1978년에 첫 평론집 <시와 역사적 상상력>을 내놓고 무려 20여년 뒤인 1999년에 두번째 평론집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을 묶어 냈는데, 그사이에 그에게는 근본적인 사상적 변모가 있었다. 역사와 리얼리즘에 바탕한 문학비평보다는 환경과 생명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지금은 생태학적 관심을 중심에 두지 않는 어떠한 새로운 창조적인 사상이나 사회운동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판단은 1991년 생태 비평지 <녹색평론>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1999년에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녹색평론>을 내기 전에 저는 거의 미칠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현대 산업기술문명은 인류라는 종의 “거대한 집단자살체제”와 다름없었는데, 그런 절박한 문제의식을 내보이고 나눌 마당이 마땅치 않았다. 1991년 창간 뒤 올 5·6월호로 통권 172호를 기록하기까지 꾸준히 발행해 오고 있는 <녹색평론>이 그 마당 역할을 했다.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라는 제목을 단 <녹색평론> 창간사를 그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으로 시작한다. “지금 상황은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전면적인 위기, 정치나 경제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문화적 위기, 즉 도덕적·철학적 위기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를 발한 그는 농업과 생태적 상상력에서 희망의 희박한 근거를 찾는다.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녹색평론>은 그와 생각을 같이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모았으며, 그렇게 모인 목소리는 전국 곳곳의 독자모임 등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갔다. 김종철 발행인은 2013년 녹색전환연구소 이사장을 맡아 문명사적 사상 전환을 모색하는 한편, 녹색당 창당에 참여해 ‘녹색 사상’의 정치 세력화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그 무렵부터 최근까지 <한겨레> 오피니언면 ‘특별기고’ 칼럼을 통해 생태적 상상력 회복과 함께 추첨제 민주주의, 기본소득제, 대안 에너지 등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녹색평론> 발행을 비롯한 생태적 글쓰기와 환경주의 활동에 매진하느라 어느 시점부터는 문학비평에서 거의 손을 떼다시피 했던 그는 지난해 4월 윌리엄 블레이크, 찰스 디킨스, 프란츠 파농 등 외국 문인들의 작품을 다룬 글을 묶은 문학론집 <대지의 상상력>을 내고 오랜만에 <한겨레>와 만났다. 이 자리에서도 그는 “지금은 전면적인 문명의 전환기이자 인류의 존속이 걸린 위기 상황인데 지식인들과 문인들은 이런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며 안타까움과 서운함을 나타냈다.
김 발행인은 지난 4월17일 치 <한겨레>에 실린 칼럼을 마지막으로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칼럼 집필을 중단했다. 이 칼럼을 보완해 <녹색평론> 5·6월호 권두언에 ‘코로나 환란, 공생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실은 글에서 그는 지금 지구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 사태가 “자본주의의 폭주, 과잉 산업발전과 소비주의의 소산”이라며 “이윤을 위한 이윤 추구, 소비라기보다는 끝없는 낭비를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소비 시스템을 종식시키는 방향으로 사회적 역량이 총동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태언씨와 아들 형수씨·딸 정현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3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7일 오전 9시다. (02)2227-7556.
최재봉 김정수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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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신화 비판’ 녹색사상가, 자연으로 돌아가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별세
생태·평화운동 앞장선 실천가로
기존 문명과 제도 꾸준히 비판
기본소득·숙의민주주의 제안도
한국 사회의 성장제일주의와 반생태적 가치관에 대해 급진적 비판과 대안을 내놓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3세.
김 발행인의 유족은 이날 새벽 고인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녹색적 삶’의 가치를 선구적으로 전파한 김 발행인은 한국 사회 담론의 지평을 확장하고, 생태운동과 더불어 평화운동에도 앞장선 이론 겸비의 실천가였다. 고인은 194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6·25 전란을 겪었다. 전쟁 이후 마산에서 중·고교를 나왔다.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1980년부터 영남대 교수로 재직했다.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거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주로 시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과 비평에 힘썼다. 2004년 교직을 그만두고 녹색평론 편집·발간에 전념했으며,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녹색당 활동에도 참여했다.
김 발행인은 ‘근본적 생태주의자’이자 생태 문제를 문명사적 차원에서 고민하는 ‘녹색사상가’였다. 그가 1991년 11월 창간한 격월간 ‘녹색평론’은 무한 성장 신화에 빠져 있던 한국 사회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그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창간사에서 “오늘날 생태학적 재난은 인간이 진보와 발전의 이름 밑에서 이룩해온 문명의 위기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주장했다. 최신호인 2020년 5·6월호(172호)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의 결호도 없이 30년 가까이 지속해왔다.
고인은 ‘녹색평론’을 창간하는 데 동독 출신 녹색사상가 루돌프 바로의 영향을 받았다고 2016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밝혔다. 1983년 미국 뉴욕에서 바로의 “핵무기에 반대하려면 먼저 뉴욕시를 질주하는 자동차 문명에 반대해야 한다”는 말에서 충격을 받은 뒤 기존 문명과 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그의 주장을 두고 급진적 혹은 근본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기후위기와 그 위기에서 파생된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가 신음하는 오늘날 더욱 울림이 있는 외침이었다.
그는 지난해 펴낸 책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 비판의식의 고갱이를 고스란히 담았다. “선진화를 향한 사회적,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오늘날 우리의 삶은 갈수록 수렁에 빠지고 있다. 출생, 양육, 교육, 취직, 주택, 의료, 노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단계, 모든 국면에서 우리의 삶은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끊임없이 유린되거나 뒤틀리고 있다.”
이러한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기본소득제 도입을 주창하고 소농체제로의 전환에서 지구와 인류 생존의 희망을 찾았다. 지금처럼 경제성장에 매달려서는 기후변화와 그에 따른 인간 파괴를 막을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으로 생계를 보장해 경쟁의 절박함이 줄어들면, 사람들이 성장과 공동체에 대한 성찰을 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또한 지구의 유한한 자원으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농촌 중심으로 재생가능한 에너지와 생산 기반을 닦아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정치제도에 있어서도 경제성장이 한계에 다다른 오늘날 기존 대의민주주의 대신 시민의회가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하는 숙의민주주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고인은 경향신문에 ‘나무 아래서 나누는 한담’이라는 의미의 칼럼 ‘김종철의 수하한화(樹下閑話)’를 7년간 연재했다. 저서에는 <시와 역사적 상상력>(1978),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1999), <간디의 물레>(1999).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2008), <땅의 옹호>(2008). <발언 I, Ⅱ>(2016), <大地의 상상력>(2019) 등이 있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02),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2007)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고인은 생전 마지막이 된 지난 4월17일자 한겨레신문 칼럼 ‘코로나 환란, 기로에 선 문명’에서 오늘날 사회에 대한 진단을 남겼다. “근본적인 대책은 우리 모두의 정신적·육체적 면역력을 증강하는 방향이라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의 생태계 훼손을 막고, 맑은 대기와 물, 건강한 먹을거리를 위한 토양의 보존과 생태적 농법,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소박한 삶을 적극 껴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를 구제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 두기도 마스크도 손씻기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태언씨(전 인제대 교수)와 아들 형수씨(대학강사), 딸 정현씨(녹색평론 편집장)가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7일 오전 9시.
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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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선생님, 절집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스승이셨습니다
[고 김종철 선생 추도사] 명진, 평화의길 이사장
김종철 선생님, 김종철 선생님...
몇 번이나 불러봅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에 계십니까?
저는 승을 떠나 속으로 살고 선생님은 속을 떠나 승으로 사셨으니 선생님과 저는 승속이 뒤바뀐 것 같습니다.
세상을 연민하고 끝없는 인간의 욕망을 성찰하면서 평생 수행자 자세로 살아오신 김종철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수행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스승이셨고 이 어지럽고 어두운 세상에 길을 일러주시는 사표가 되는 어른이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을 이렇게 황망히 떠나보내는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반백년 넘게 출가해 수행한다고 애쓰고 살아가면서 입버릇처럼 '생사가 없다' '생사가 둘이 아니다' 이렇게 노래했건만, 속절없이 무너지는 가슴, 허전하여 기댈 데 없는 가슴은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김종철 선생님,
살아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끝없이 고민하시면서 물질의 욕망으로부터 세상과 인간이 더렵혀지는 것을 보면서 괴로워하시던 생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절집에 갇혀 있던 제가 광주항쟁을 알고서 비로소 세상에 눈뜬 1986년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가까이 있으나 멀리 있으나 언제나 저의 스승이셨습니다.
절집에서 만나 보지 못한 스승을 저는 세속에 나와 참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런 스승 중 한 분이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왜 더 자주 찾아뵙지 못했나 하는 자책이 자꾸 듭니다.
선생님, 1990년대 초반 <녹색평론>을 만드실 때 저는 반대했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려 파멸이 아니고서는 결코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러한 세상인 줄 모르지 않으셨지만, 그런 세상에서 인간다움을 꿈꾸는 것이, 더불어 사는 것을 꿈꾸는 것이 비록 꿈일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하셨지요.
돌이켜보면 선생님께서 희망을 버리시지 못한 까닭은 인간에 대한 연민, 생명에 대한 한없는 자비였다고 생각합니다. 생명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 때문에 절망의 세상에서 결코 절망할 수 없었고, 타락한 세상이지만 결코 저버릴 수도 없으셨던 것이겠지요.
김종철 선생님,
빈소에 앉아 선생님의 환한 영정사진을 보면서 다시금 그리워지고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세상사람들이 선생님을 까칠한 분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물은 건너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말처럼 30년 세월을 건너 제가 아는 선생님께서는 따뜻하기 그지없는 분이셨고 한없이 인간적이 분이셨지요. 다만 더러운 세상, 타락한 세상에 대해서는 추상같이 비판하셨고 탐욕의 세상에 대해 한 치의 타협도 양보도 없으셨을 따름이겠지요.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제 삶을 담은 책 <스님은 사춘기> 출판기념회에 오셔서 "모든 사람에게 박수 받으려 마십시오. 그 길은 사기꾼의 길입니다"라고 일갈하셨습니다. 이 그릇된 세상에서, 이 비뚤어진 세상에서, 가진 자와 강자가 없는 자와 약한 자를 억누르는 이 불의한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박수 받는 길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려 하고 좋은 평판을 받으려 하기에 흔히 그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할 길은 김종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박수 받는 길이 아니라 옳은 길입니다. 옳은 길을 가다 고통 받을지라도, 또 때로는 오해받고 비난받을지라도 그것이 인간 양심으로 부끄럽지 않다면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꿈꾸시던 것과 같이 그것이 비록 꿈이고 이상일지라도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라면, 생명이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이라면 가야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일일 것입니다.
선생님,
평생 자리 욕심도 없으셨고 물질적 욕심도 없으신 선생님께 지금 제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평화의길'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아주십사 부탁드렸을 때, 결코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셨지만 두말없이 맡아 주시면서 생태운동은 본질적으로 함께 살자는 평화운동이고, 평화운동도 우리가 생명답게,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것이니 둘이 아니라고 하셨던 것 기억합니다. 그 둘이 아닌 길을 선생님과 함께 오래도록 같이 걷고 싶었는데 이렇게 먼저 가셔야했는지 아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김종철 선생님,
선생님을 떠나보내면서 제 마음 속에 가장 많이 맴도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부끄러움'입니다. 하지만 단지 '부끄러움'만으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남은 자들의 몫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종철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언젠가 말씀하셨지요? 죽지 않으려 하지 말라고. 우리가 죽어야 후손들이 살 수 있고, 뭇 생명들이 또한 살아갈 수 있다고. 절집에서는 밥 먹는 것을 '공양(공양)'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본래 '공희(공희)'에서 왔다고 하시면서요. '공희', 다른 말로 희생입니다. 내가 산다는 것은 다른 존재의 희생에 기대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위해서, 뭇 생명들을 위해서 기꺼이 우리 자신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
육신의 덧없음과 허망함을 몸으로 보여주고 가시니 이 또한 큰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머리를 깎았으나 어리석기 한이 없는 이 중생에게 얼마나 큰 가르침인지 모릅니다.
김종철 선생님,
참담한 가운데 큰 가르침을 남겨 주신 것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가기로 다짐했던 뭇 생명이 더불어 사는 평화의 길, 제가 이어 가겠습니다. 그 길에 늘 함께 해주십시오. 이 생에 만나 뵐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덧붙이는 글 | '평화의 길' 이사장인 명진 스님은 생태사상가 고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 겸 발행인(전 영남대 영어영문과 교수)과 평소 각별하게 지냈다. '평화의 길' 창립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고 김종철 선생은 6월 25일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27일, 발인 이후 유골함은 북한산 금선사에 안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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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선생님의 유언은 다시 제 삶을 지탱할 겁니다
[최종수 신부의 추모사]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라는 말씀 따라
내 영혼의 별이 떨어진 것일까요? 종종 전화로 안부를 물었던 선생님, 아니 제 인생의 아버지 생태운동가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님이 하늘의 별똥별처럼 떨어졌습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 제가 대구녹색평론 사무실을 찾아가 처음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후로 선생님은 제 삶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2008년 진안 산골짜기로 들어가 만나 생태마을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그 생태마을공동체의 사상적인 뿌리와 제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교구의 도움 없이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막막한 시기였습니다. 함께 농사 지을 땅을 매입하고 함께 살 목조주택 집을 짓고 똥돼지 생태화장실을 만들고 자급자족 농사를 위해 비닐하우스 등을 설치해야 했습니다.
자금이 여의치 않아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해야 했습니다. 집짓기도 처음이고 농사도 처음이었습니다. 밤이면 함께 사는 형제가 부항을 해줘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런 날은 새벽에 눈을 떠도 몸을 일으킬 수 없어 다시 부항을 맞아야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면 회복이 되었지만 공동체 식구와의 갈등과 외부의 소문은 생태마을공동체를 포기하고 싶은 절망으로 증폭되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지칠 때, 하소연이라도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을 때 떠오르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신 분이 김종철 선생님이셨습니다.
10년의 생태마을 자급자족 공동체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두 가지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는 프란치스코 교종님 알현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종철 선생님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송금해 주신 후원금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저의 버팀목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2~3년 만에 생태마을공동체를 포기하고 성당 신부 생활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힘과 용기를 주신 선생님이 계셨기에 프란치스코 교종님을 알현할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 힘드시죠. 우리 신부님이 큰일을 하고 계십니다. 농촌이 희망입니다. 생태적인 삶, 자급자족 생태공동체가 대안입니다. 흙과 함께 단순소박하게 사는 것이죠. 내가 도울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통장 번호 문자로 주이소."
며칠 뒤 핸드폰에 송금 문자가 떴습니다. 블루베리 모종을 손질하고 새참을 먹을 때였습니다. 문자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금액이 너무 많았습니다. 두 눈을 믿을 수 없어 손가락으로 숫자를 하나씩 짚어가며 확인했습니다.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 다시 믿을 수 없어,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 이렇게 세 번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후원을 하셨어요. 녹색평론 발행도 쉽지 않는데요. 너무 큰 금액이라 손가락을 짚어가며 세 번이나 확인했어요. 아버님 큰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아버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이고 그리 많지 않아요. 생태마을 초창기에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겠나. 밑 빠진 독에 물 붇기 아닌가요. 종자돈 알지요. 힘내고 용기 내라고 보낸 겁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바치시는 부모님, 그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아는 자식이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그 어떤 어려움도 고난도 이겨냅니다. 김종철 선생님은 저에게 그런 아버지셨습니다.
남은 제 삶, 선생님의 유언으로 지탱하겠습니다
촛불정국 때 전북지역 4대 종단 성직자들이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며칠 전 선생님께 안부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버님, 건강은 어떠세요. 이번 토요일 광화문 집회에 갑니다. 근데 아버님, 4대 종단 성직자들이 연단에 올라 남행열차 개사곡인 박근혜 호송열차를 노래하기로 했어요. 아버지, 저희들 저녁밥 맛난 것 사주세요. 막걸리도 한 잔 사주시고요."
프레스 센터 뒷골목에서 김치찌개에 막걸리까지 마시게 되었습니다. 식사 후 연단에 올라 남행열차 개사곡 호송열차를 신명나게 불렀습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광화문 집회현장에서 만났습니다. 초겨울 쌀쌀한 날씨 선생님과 팔짱을 끼고 거리행진을 했습니다.
선생님 성격에 쑥스러우실 법한데 아무렇지 않게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를 함께 따라 갔습니다. 선생님과 팔짱을 끼다니, 20년 가까이 소통한 정이 만든 아름다운 동행이었습니다.
간디가 비폭력 평화주의자라면, 선생님은 생태평화주의자 간디였습니다. 제 삶의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 이정표가 보이지 않고 시대의 빛을 읽을 수 없을 때, 하소연이라도 해야 할 때, 선생님은 제 인생의 스승이자 아버지이셨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앞으로는 어찌해야 합니까.
코로나 사태를 진단하신 말씀이 유언으로 제 삶을 지탱할 것입니다.
"생태계 훼손을 막고, 맑은 대기와 물, 건강한 먹을거리를 위한 토양의 보존과 생태적 농법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소박한 삶을 적극 껴안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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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권
6월 27일 오후 11:00 ·
김종철 선생님을 보내며
어제 오늘 선생님 가시는 길에 함께 했다.
영광 산속에서 처음 비보를 들었을 땐 너무도 놀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막상 장례식장에 오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수많은 동지와 지인들이 장내를 채워서일까. 선생님께서 최선을 다해 살고는 “난 여기까지야” 하고는 마음 편히 저 세상으로 가신 것 같았다. 사실상 김종철 선생님은 남한 땅의 거의 유일한 생태사상가였다. 국민 사이에 그리고 정치권에 생태주의의 중요성을 받아들이게 한 강력한 인플루언서였다. 처음엔 생경했지만 지금은 친숙해진 말인 기본소득, 지역화폐 등이 대표적이다.
내가 감옥에서 야생초를 통해 생태적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녹색평론이 없었다면 내가 몸으로 체득한 그 감성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황대권의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야생초 편지> 역시 김종철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샘은 감옥에서 갓 나온 나를 시민 사회에 데뷔시켜준 은인이기도 하다. 2001년 11월 <녹색평론 10주년 기념 강연회>에 생태사회계에 완전 무명인 황대권을 메인 강사로 초청한 것이다. 파격이었다. 중요한 강연회이니만큼 편집진에서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김지하 시인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허나 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를 지목했다고 한다. 무슨 근거로? 나는 출소 직후 앰네스티 초청으로 2년 동안 유럽에 있다가 강연회 직전에 귀국했다. 샘이 나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라곤 내가 영국에 있을 적에 녹색평론에 기고한 글 두 편이 전부였다. 아마도 그 글을 보시고 뭔가 들어볼만한 것이 있을 거라고 자신만의 직감을 믿은 것 같다.
강연회장에는 한국에서 생태운동과 관련해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다 모여 있었다. 무명의 인사가 너무도 귀중한 자리에서 첫 인사를 올리게 된 셈이다. 강연 말미에 잡초와 함께 하는 농사 얘기를 하면서 감옥에서 보낸 편지 구절 일부를 인용하였다. 이것을 보고 어느 귀 밝은 출판인이 내게 접근하여 책을 만들자고 제안하여 <야생초 편지>가 탄생하였다. 이후로 샘은 나를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 명단에 끼워주시어 지금까지 함께 해왔다.
샘과 함께 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녹색평론사에서 출간한 <오래된 미래>의 판권과 관련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와의 분쟁이었다. 양쪽의 얘기를 들어보면 각자의 입장이 이해되지만 헬레나 여사가 신의를 저버린 것만은 분명했다. 샘은 싫어하시는 것에 대해 적대감 표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내 앞에서 육두문자를 써 가며 분을 삭이지 못하셨다. 그런데 그 얼마 후 헬레나 여사가 나를 자신이 주도하는 국제 컨퍼런스에 발표자로 초청한 것이었다. 샘과의 관계도 있고 해서 잠시 고민했지만 장소가 내가 꼭 가고 싶었던 호주의 ‘크리스탈 워터스 공동체’ 근처에 있는 Byron Bay였다. 크리스탈 워터스 공동체가 아니었다면 나는 일정을 핑계로 거부했을 것이다. 영어도 신통치 않은 사람이 공연히 국제 강연회까지 쫒아가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샘에게 말도 않고 열흘 전에 출국하여 크리스탈 공동체와 강연회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돌아왔다. 다녀와서도 괜히 화만 돋울 것 같아 그냥 호주에 다녀왔다고 얘기하고 말았다. 사실 <오래된 미래>는 오랫동안 녹색평론사의 자금원 역할을 했기 때문에 판권을 잃은 것은 크나 큰 타격이었다. 어찌 되었건, 샘 이제 하늘나라에 가셔서는 헬레나 여사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다 자기 나름대로 생태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에서 빚어진 해프닝 정도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샘의 유골함은 명진 스님의 소개로 삼각산 금선사에 안장되었다. 거기에는 사회운동을 하시던 분들과 장기수 어르신들이 함께 안장되어 있고 자택에서도 그리 멀지 않아 안성마춤의 장소가 아닌가 싶다. 주지 스님도 오랫동안 사회운동을 하신 분이라 샘을 모시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신다. 금선사에서 마지막 의식을 치르고 경내를 둘러보니 샘께서도 맘에 들어 하실 것 같다. 아래에 사진을 첨부했는데 영정 사진이 놓인 탱화가 보기 드문 걸작이었다. 주지스님의 지휘로 만들어졌다는데 탱화 속에 한국 현대사의 장면들이 다 들어 있다. 주지스님은 탱화가 몇 십 년 후에는 문화재가 될 거라고 농을 하신다.
샘, 사랑합니다.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났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샘께서 남겨놓은 과제들은 전국의 녹색평론 독자들과 편집위원들, 그리고 수많은 녹색동지들에게 맡겨두십시오. 생태평화를 앞당기기 위해 남은 힘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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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6월 27일 오전 10:24 ·
(어제 추도식에서 읽은 것을 약간 고쳤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더 들어가도록...)
냇물의 목소리
-김종철 선생님 영전에
함께 아픈 강에 가시자 했더니
밥과 술을 먹자 했습니다
대도시의 골목에서, 무슨 말을 나눴는지
기억은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면서 제게 주시던
웃음만 기억납니다
내 못남이 조금 맘에 들으셨구나 하는 벼락이
너무 높지 않은 전압으로 제 몸에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너무 아둔했습니다
일자무식, 어둑한 자아였습니다
제 입에서 강이 나오고
선생님이 밥과 술을 흘려주신 순간이
제게는 역사(役事) 같습니다
아니 지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글로 불세례를 주시고
말과 웃음으로 침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냥 콸콸 솟는 지하수였습니다
마른 논에 천천히 들어오는 물줄기였습니다
어린모가
이제 조금 환해졌습니다
아버지 없던 시간에
아버지를 할 수 있는 한 멀리 내쫓으려 했던 기억에
니는 해외여행 가봤나?
여권도 없는데요
아이고, 촌놈 같으니라고
똑똑 문을 두드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동무 하자 하셨습니다
어제는 왜 빨리 갔나?
속상했나?
아뇨, 다른 일정이 있었습니다
내가 언제부터 니들 걱정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꼭 살아남으래이
물이 끊긴 어린모가 무엇으로 자랄지
이제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억지로라도 불러 앉히던 목소리가 사라졌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검정 옷을 입다 던졌습니다
괜히 어려운 소리 하지 말고
니 어머니가 알아듣게 써라
저는 이 말씀으로 계속 자학하고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다 떠나야겠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앓고, 사랑하고, 그리워하자 하셨으나’*
오늘 쓰는 이 시는 조시가 아닙니다
생전에 보여드리지 못한
돌아갈 고향 없는 가난의
어둑한 내면입니다
자꾸 귀에서 비행기 소리가 나신다고 하니
그냥 한번 읽어드리는 읊조림입니다
비행기 소리는 이제 그만 벗으시고
다시, 냇물 소리로 오시리라 믿습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남은 우리가 말라가는 냇물에 한 모금씩 보태겠습니다
아직도 이렇게 아둔하기만 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사람이 나이 들면 다 아픈 것이고
그러다 죽는 것이다
*「장마」라는 에세이를 보여드렸더니 답을 주셨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고마워. 앞으로 이런 글 많이 써라고 권하고 싶네. 괜히 어려운 소리 하지 말고. 고향을 잃고, 잃어가는 슬픔과 고통을 솔직히 나누는 게 문학의 본질이 아닌가 싶어. 때가 되면 다 떠나야겠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앓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말이야.” 2020년 6월 24일 20시 47분이 발신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백사실 계곡에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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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산
6월 25일 오후 3:14 ·
김종철 선생님
고맙습니다.
애쓰셨어요.
뒷일은 너무 걱정 마시고
편안히 가세요.
빛이 되어주시고
나침판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둡고 깜깜한 밤에 만나
따라갈 수 있는 별이 있어
정말, 고마웠어요.
울지 않을께요.
가시는 모든 길에
입맞춤과 기도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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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은
3일 동안 김종철 선생님 장례식장에 있으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제게 호통을 치실 때는 무서워 떨었고, 가볍게 칭찬해 주실 때는 큰 것을 얻은양 기뻤습니다. 실력 있는 평론가가 되라는 말씀 깊이 새기고 노력하겠습니다. 각성하겠습니다. 저는 정신의 스승을 잃고 흔들리는 존재가 되었지만, 마음 다잡겠습니다. 김종철 선생님께서 사주신 밥, 대략 70끼니가 넘는 것 같습니다. 밥 값하는 삶을 살도록 조심 조심하겠습니다. 운구하면서 너무 가벼워, 나비처럼 자연의 일부가 되어 날아가신 것 같았습니다. 구기동 금선사 가끔 찾아 뵙겠습니다. 선생님의 호통소리가 듣고 싶으면 저는 앞으로 어찌해야 합니까, 깨침을 얻고 싶어 선생님, 간절히 보고 싶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선생님의 빈 자리는 앞으로 무엇으로 메꾸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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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살기 위해 선생이 보여준 ‘공생공락’의 삶 따르렵니다”
최종수정2020.06.28. 오후 6:28
[가신이의 발자취] 고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영전에
“탈성장 주장 민주주의자이자
소농 중요성 강조한 농본주의자”
“풀뿌리 민중 눈으로 세상 본
사상가이면서 실천가”
“민중 언어로 쓴 글 높이 평가
후쿠시마 이후 ‘녹색당 전임강사’”
김종철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모습이 떠올랐다. 선생님도 엄청난 고통을 겪고 계셨을텐데, “하 변호사 너무 애쓰지 마소”라고 말씀해주셨다. 선생님은 마음이 따뜻한 어른이셨다.
집에 돌아와 책장에 있는 <녹색평론> 창간호를 꺼내 들었다. 선생님은 1991년 11월에 이 창간호를 만드셨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로 시작하는 창간사는 선생님의 사상이 축약되어 있는 글이다. 심각한 생태위기속에서 과학기술 만능주의와 전통적인 진보사상의 한계를 지적하며, 산업문명을 넘어설 수 있는 ‘생명의 문화’를 재건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셨다. 그리고 녹색평론의 창간이유를 이렇게 밝히셨다.
“<녹색평론>을 구상한 것은 지극히 미약한 정도로나마 우리 자신의 책임감을 표현하고, 비슷한 심정을 느끼고 있는 결코 적지 않을 동시대인들과의 정신적 교류를 희망하면서, 민감한 마음을 지닌 영혼들과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나가기 위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은 희망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이 마음으로 173호가 나올 때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두 달에 한번 잡지를 만드셨다.
선생님의 생각은 추상적이거나 허공에 떠 있지 않았다. 선생님은 근본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현실주의자였다. ‘장포심(장기적이고 포괄적이며 심층적으로 생각하라)’의 관점을 강조하셨고, 이반 일리치와 같은 중요한 사상가를 한국사회에 소개하면서, ‘문명의 전환’을 위한 굵직굵직한 현실의제들을 공론화했다.
선생님은 경제성장주의에서 벗어나야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다는 ‘탈성장’을 주장하셨다.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났을 때에는, 핵발전의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알리셨다.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를 소개한 것도 선생님이셨다. 특히 농업·농촌·농민을 살리기 위해 농민기본소득이 절실하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선생님은 화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하셨다.
선생님은 민주주의자이셨다. 민중을 먹여 살리는 것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신념을 가지고 계셨다. 109호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하늘이 맑아지는 순간이 잠시뿐이라고 해서,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가 잠시 동안만 실현될 수밖에 없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포기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영물(靈物)이어서 그 잠시 동안의 맑은 하늘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마음속 깊이 그 기억을 평생 갖고 살면서 언젠가 그것이 다시 실현될 날을 꿈꾸고, 노력하고, 싸우는 게 인간이다.”
선생님은 농본(農本)주의자이셨고, 소농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농민들이 스스로 기른 작물을 불태우는 것을 보며 충격을 받은 것이 <녹색평론> 창간의 직접적인 계기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상층부 엘리트가 아니라 풀뿌리 민중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 사상가였다. 식량자급률이 20%초반인 나라에서 민중의 생존을 걱정했기에 농업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용산참사에, 밀양 송전탑 공사에, 강정해군기지 건설에 분노했고,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비판했다.
선생님은 쉬운 글을 좋아하셨고, 민중의 언어로 쓴 글을 높이 평가하셨다. 그래서 권정생 선생님의 글을 모아 <우리들의 하느님>이라는 산문집을 펴냈다. 또한 일본의 작가인 ‘이시무레 미치코(石牟禮道子)’를 이 시대 최고의 작가로 평가하셨다. 이시무레 미치코는 중금속에 오염된 어패류를 먹고 미나마타 병을 앓던 일본 민중들의 얘기를 글로 풀어낸 작가이다. 작가 스스로 “문학적 소양도, 학문도, 의학지식도 없는 그저 시골마을의 주부가 신변의 비상사태에 떠밀려 쓰기 시작”했다고 한 글에 대해, 선생님은 근대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묻는 글이라고 평가했다.
선생님은 사상가이면서 실천가이셨다. 선생님은 2007년 12월 한 대담에서 “저는 녹색당이 한국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없을 것같고, 그거 해서 문제가 풀리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지만,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 ‘녹색당 전임강사’를 자임하며 녹색당 창당을 가능하게 하셨다.
선생님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을 몸으로 보여주셨다. 후배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면 격려를 해 주셨고, 알려지지 않게 큰 돈을 여기저기에 후원하셨다.
선생님은 장일순 선생님을 무척 존경하셨다. 173호(2020년 7-8월호)에 남기신 마지막 글에서도, “돼지가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듯이, 사람은 세상에서 이름이 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장 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급진적인 탈속(脫俗)의 정신을 담은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김종철 선생님의 생각과 삶을 잘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이제는 선생님께서 고통없이 평안하시길 빌 뿐이다. 선생님의 사상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은 남은 사람들의 숙제일 것이다. ‘위기의 시대’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공생공락’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끝까지 선생님과 함께 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하승수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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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선생님에 대한 추모의 글 중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글이다.
하승수 변호사님은 오랜 기간 <녹색평론> 편집에도 참여하며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오셨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 전, 어떤 매체에도 관여하지 않고 시인으로 살겠다며 편집자문위원을 그만 둔 게 내내 송구스러웠다. 대신 광주에서 <녹색평론> 독자모임을 하고, 이따금 청하신 글을 쓰는 걸로 선생님을 돕는다고 여겼다. 돌아보니 스무 번 가까이 <녹색평론>에 글을 쓴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은 선생님을 위한 것도 잡지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도록 주신 기회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다른 어떤 지면보다 <녹색평론>에 글을 쓰는 일은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늘 등 뒤에 예리하고 엄정한 잣대를 지닌 선생님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안이한 생각과 정직하지 않은 말이 그분의 눈에는 여지없이 보일 것이기에...거창한 담론이나 문학적 수사에 의지하지 않고 내 삶을 투명하게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의 생각과 문체가 형성되는 데 선생님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앞으로 선생님의 뜻을 이은 공부와 글쓰기와 실천을 어떻게 해나갈까 며칠째 숙고하고 있다. 저승에서 선생님의 원고청탁을 하신 것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써야겠다. 이현주 목사님이 스승 장일순 선생님과 노자에 대한 대화를 나눈 기록을 책으로 냈는데, 그 후반부는 스승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쓰신 것이다. 눈을 감고 여쭈면 마음에서 스승이 대답하셨다 한다. 그걸 받아적어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가 완성되었다. 1990년대 중반 대구의 녹평 사무실에서 처음 뵌 이후로 선생님 강연을 열심히 들었고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니, 그 사랑과 가르침의 흔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길을 모를 때마다 여쭈리라, 마음 속의 스승께. 그리고 선생님이 늘 지켜보신다는 마음으로 살고, 읽고, 쓰고, 말할 것이다. 선생님을 보내며 나 자신과의 약속 삼아 몇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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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Ra Heeduk
6월 26일 오후 9:57 ·
김종철 선생님 빈소에서 조촐한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평소에 격식을 싫어하시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일체의 공식행사는 하지 않고, 정과 배움을 나누던 문우 몇분과 이반 일리치 모임 제자들이 시와 추모의 글을 읽었다. 김해자 시인과 황규관 시인의 추모시가 아주 절절했다. 다음 글은 일리치 모임 홈페이지에 최근 선생님이 올리신 것인데, 마치 작별인사 같아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녹색평론> 창간사에 나오는 “이미 늦어버린 싸움인지는 모르지만”이라는 구절이 뒤늦게 마음을 울린다. 아, 선생님은 불가능한 싸움이라는 걸 이미 알고 계셨구나.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절박함에 30년을 싸워오셨구나. 불가능한, 이미 늦은, 싸움을 혼신을 다해 하셨으니 선생님이야말로 진정한 전사이고 시인이시다. 선생님의 싸움이 불가능하지만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는 걸 그곳의 사람들을 통해 확인한다.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과 삶 속에 선생님은 살아 계시는 듯하다. 아니, 계속 살아 계실 것이다. 선생님과 가장 긴 하루를 보내고, 이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선생님, 잘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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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자유로웠던 ‘김밥 모임’ 자리…선생님의 유머가 그립습니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날 오후 제게 메일을 주셔서 카뮈의 <페스트>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소상하게 개진하신 후에, 잠을 이룰 수 없는 ‘이명’의 고통에 대해 말씀하시며,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를 피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007년 즈음이었을까요? ‘녹색평론’이 나오면 우리가 ‘김밥 모임’(김종철 선생님과 밥을 먹는 모임)으로 불렀던 자리가 열리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지행네트워크를 함께했던 저와 오창은·하승우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고영직·김해자·황규관·손제민·이문영·김남일·정우영·노지영 등과 같은 문인과 기자들이 선생님과 식사를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그야말로 자유롭게 하는 자리였지요.
선생님께서 대학을 사직하시고, 녹색평론사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서, 저희들과의 만남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이반 일리치를 읽는 독자모임’과 같은 공부 모임도 녹색평론사에서 정기적으로 하셨는데, ‘김밥 모임’과는 성격이 달랐겠지만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라는 선생님 특유의 삶의 철학이 잘 녹아든 모임이었죠.
몇년 전부터는 일본의 평화운동가인 오다 마코토를 기리는 ‘오다 마코토를 읽는 시민모임’과 함께 연례적으로 ‘한·일 식견교류’도 하게 되었지요. 이때 처음으로 ‘김밥 모임’과 ‘이반 일리치 모임’이 함께 참여해, 선생님께서 제안하고 현순애 선생님이 동참해 만든 한·일 시민교류회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작업을 생각해 보면, 저는 무엇보다도 풀뿌리 민중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의 방식에 대한 신뢰가 지적·감성적 토대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교류해왔던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담론을 펼치면서, 선생님이 문학으로부터 생태주의로 이행해갔다는 주장을 흔히 식자들은 거론하곤 합니다.
그런데 ‘김밥 모임’을 통해 선생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곤 했던 것은 문학함의 진실한 태도, 그 가운데서도 ‘시인의 마음’에 대한 심원한 강조였습니다.
“원시적 언어, 살아있는 상징과 은유, 삶의 깊이, 반전, 궁극적인 것에의 탐구, 근본적 겸허와 감수성”의 가치와 함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책임을 문인과 지식인들이 예리하게 자각하고 실천해야 하는데, 우리의 지성계는 언제부턴가 트리비얼리즘에 함몰되어버렸다는 말씀이셨지요.
선생님께서는 이문재 시인의 말을 빌리면,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것 속에 숨어있는 위대한 가치를 섬세하게 감지하고 의미화하는 민감한(delicate) 정신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주 조언했던 것은 “맥락 없는 추상적 개념의 남용, 장식적 수사의 남발, 실감을 동반하지 않는 작품과 현실에 대한 재단”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런 유머. 책을 너무 많이 읽지 말고, 인용하지 말고, 내지 말라는 말씀도 기억납니다. 그 말씀의 아이러니를 부단히 의식하면서 저희들은 글을 쓰고 책을 내곤 하였지요.
슬프게도 우리는 생동하는 선생님의 쾌활한 유머와 풍부한 표정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크게 울고, 내일은 크게 웃어야겠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김밥 모임’이니까요.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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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을 추모하며 /김해창
선생님, “다음에 서울 올라가면 찾아뵙겠다”고 통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지난 25일 믿기지 않는 부음을 접했습니다. 26일 빈소에서 “이명 현상이 있으셨지만, 잘 관리해오셨던 선생님께서 산책 중에 운명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들으니 더욱 애통합니다. 올해 일흔넷이신데….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저한테는 ‘교수님’이 더 익숙한 선생님께서는 영남대 교수 시절이던 1991년 11월 개발지상주의의 척박한 이 땅에 생태 전환의 지혜를 담은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창간해 30년을 한결같이 해오셨죠. 1990년대 초반 기자였던 저는 우연히 ‘녹색평론’ 독자가 됐고, 그 뒤 환경 담당을 하면서 부산환경운동연합·녹색연합·전교조·한살림 초청으로 강연 오신 선생님을 틈틈이 뵙고 지면에 소개하곤 했지요. 특히 1994년 국제신문이 언론사 최초로 환경과학부를 만들고 ‘푸른 신문’을 표방하며 ‘녹색소비자’ 시리즈, ‘3환 운동’ 캠페인을 벌일 수 있었던 근저에 ‘녹색평론’이 있었답니다. 저는 ‘녹평’의 평생독자가 되면서 자연스레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시민단체 강연을 취재하면서 뵌 선생님은 처음엔 좀 까칠하고 좀은 쑥스러워 하시는 모습이셨지만, 말씀하실 때는 우리 시대와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죽비를 치셨습니다. 선생님 강연엔 늘 ‘정곡을 찌르는 불편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르침이었지요. 선생님만큼 엄격하게 원칙을 지키는 분이 없었으니까요.
2004년 부산의 한 강연 뒤풀이에선 이런 속내도 털어놓으셨죠. 세계 지성을 모셔서 해오던 인문생태학 대강좌에 대한 당시 대학 수뇌부의 몰이해와 비협조에 일갈하신 뒤, 교수직을 그만두고 ‘녹색평론’ 발행에 전념하시기로 결심했다고 말이죠. 그 허탈함과 결기가 동시에 느껴지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함께 가난을 나누며 즐겁게 살자며 ‘공생공락(共生共樂)’ 말씀을 자주 하셨죠. 밤이 늦어 주무시고 가시라고 강권해도 잠은 집에 가서 자야 한다며 손사래 하시던 선생님은 그만큼 가족 생각을 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전 모 방송의 인기 프로그램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 제작팀이 녹색평론사가 출판한 권정생 선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이 선정됐으니 미리 대량 인쇄에 들어가라고 요청했는데 이를 거절하셨지요. “아무리 좋은 취지라도 아이들에게서 책을 골라 읽는 재미를 빼앗으면 되는가?” 하신 저자의 말씀을 듣고는 수십만 권이 팔릴 좋은 기회를 정중히 사절하신 선생님. 우리 시대에도 이런 멋진 어른들이 계신다는 게 참으로 마음 든든했습니다.
지난 5·6월호 ‘녹색평론’에 선생님의 발간사 ‘코로나 환란, 공생의 윤리’를 다시 보니 “역병의 창궐이라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흥망이 결정된다”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고 말씀하셨지요.
선생님 목소리를 마지막 들은 게 지난 7일이네요. ‘녹색평론’ 7·8월호(제173호)에 제 원고를 보내고 전화를 드리니 “농업문제를 빠트릴 뻔했는데, 덕분에 균형을 갖추게 돼 고맙소. 농민기본소득을 강조해주신 김에, 이 문제에 더 천착해주셨으면 해요”라는 말씀이 저한테는 유언 아닌 유언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기본소득제, 특히 농민기본소득을 선생님께서는 10여 년 전부터 누누이 강조하셨지요. ‘녹평’은 대안교육, 대안의료, 지역자치, 자급자족, 불평등·차별 해소 등 생태평화를 이뤄낼 ‘대안문명의 공론장’이었습니다.
선생님, 26일 상가에서 함께 한 많은 분이 ‘녹평’이 우리 시대 전 국민 애독서가 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다고, 그런 일에 조금씩 마음을 보태겠다는 말을 나눴습니다. 앞으로 많은 ‘시민 제자들’이 뜻과 마음을 모아나갈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 선생님의 부재로 참으로 막막하고 황망합니다. 선생님의 그 생태·생명의 불꽃은 이어질 것입니다. 선생님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보면서, 소탈하신 웃음과 따스한 마음 씀을 제 마음에 담습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이제 이 세상일은 잊어버리시고 훨훨 우주를 여행하고 계십시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경성대 건설환경도시공학부 교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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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을 추모하며
셀수없이 많은 이들에게 스승으로 남는 분들이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그렇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제자를 계수하는 속좁은 직업꾼과 달리, 선생은 이미 피하고 싶어도 스스로 거대한 사상 공동체의 초석이었다. 선생의 글을 읽는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도반(道伴)을 자청한다. 어설픈 너스레로 살아온 나 역시 그를 사숙해온 ‘나 홀로 제자’였다. 어제 갑자기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버스창에 스쳐 지나가듯, 며칠에 한번씩 존경하는 분들의 부음(訃音)을 듣지만, 선생의 부음은 너무 갑작스러워 눈물도 안 나왔다.
김종철 선생을 처음 만난 건 지난 2012년 4월 6일 ‘리얼리스트’에 선생님 인터뷰를 싣기로 해서 노지영 평론가와 함께 찾아 뵈면서였다. 도서출판 녹색평론, 달랑 방 두 칸의 작은 공간인데 왜 그리 큰 출판사로 보였는지. 영적인 눈으로 보면 물리적인 크기가 달리 보인다다. ‘4대강 재앙사건’과 ‘후쿠시마 사건’이라는 지리멸렬한 시대에, 선생의 표정은 어두웠다.
“독일과 일본의 차이를 이야기하자면 독일에서는 68혁명의 세대가 나중에 녹색당 창당으로 귀결되면서 녹색운동, 시민운동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전공투 세대가 대부분 대기업으로 들어가 버리면서 오늘날 독일과 일본의 차이가 생겨버렸지요. 일본이 보이는 ‘무책임의 체계’하고도 관계가 있을 겁니다.”
이명박 시대의 총선 전이었는데, 선생께서 지지하던 녹색당은 1석도 가망이 없었다.
“지금처럼 계속 가면 도시는 장기 지속이 불가능하죠. 농업 인구가 전체 인구의 7%밖에 안 되는데, 적어도 50%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안정된 사회가 될 수 있고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될 수 있죠. 비정규직 문제도 농업인구를 늘리는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모여서 살면 농사가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혼자서 하려면 고달파지죠. 준비를 해야죠. 당장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시적 삶이 유기농 삶으로 갈 수 있는 징검다리를 만들어야 되겠지요.”
선생의 표정은 곧 저물녘처럼 여전히 어두웠다.
“두부 나오는 갈치 조림 잘 하는 괜찮은 집 있는데, 가실까?”
대화가 끝나고 김종철 발행인이 같이 막걸리나 하자고 하셨다.
막걸리를 권하시면서 그제야 선생은 예의 소리없는 미소를 자주 보이셨다. 내 주량을 금방 파악하시고, 막걸리 두 사발 이상 권하지 않으셨다. 두부를 자꾸 권하셨다. 내가 갈치 조림을 금방 먹자, 한 마리 더 시켜 주셨다. 생태계 얘기하다가 ‘나무’를 ‘나무님’이라 하셨다.
이후로 선생은 내게 반은 반말, 반은 경어로 대하셨다. 얼마 후 내게 부탁하셨다. 일본 여류 시인의 시집인데 꼭 ‘녹색평론’에서 내고 싶으니 판권을 알아봐 달라 하셨다. 이시무레 미치코(石牟禮道子)였던 거 같다. 알고 보니 일본에 있을 때 잠시 일을 도왔던 일본 출판사에서 판권을 갖고 있었다. 이 출판사에는 나는 ‘고은 시선집’을 일본어로 공역해 내고, 김명인 평론집, 신경림 시집, 황석영 소설 등을 여기서 냈다. 마침 한국을 방문한다는 출판사 대표에게 ‘녹색평론’이 한국에서 얼마나 중요한 출판사인지, 김종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설명했다.
인사동에서 두 분 자리를 마련했는데, 출판사 대표가 반술에 취했는지 고자세였다. 한국 작가들에게 깎듯하게 대하는 출판인인데, 왜 이러시나 싶었다. 통역하면서 대표의 말을 겸손한 말로 바꾸어 전했다. 찌는 여름밤, 모기까지 물어 짜증스러웠다. 선생은 기분 언찮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저작권을 받아내려 하셨다. 선생은 대나무처럼 꼿꼿하며서도 대나무 잎새처럼 유연하셨다. 꼿꼿함과 유연함의 절묘한 품성으로 그는 자신을 ‘책장사하는 사람’이라고 늘 낮추셨다. 이 분은 모든 것을 내려 놓으셨구나, 이 날 느꼈다. 선생의 태도를 시험해보려 했던 출판사 대표를 설득했고, 얼마후 이시무레 미치코 시집 ‘신들의 마을’이 번역되어 나왔다.
이후에 내게 ‘녹색평론’에 글 쓰게 하셨고, 일본 문학이나 일본 현대시에 대해 가끔 전화 주셨다. 이후에 한번 더 내가 찾아 뵈었다. 그때 또 두부 나오고 갈치 조림이 괜찮은 그 집에 가서 막걸리와 함께 저녁을 들었다. 지난 2019년 4월에 대구 지역의 작가 후배인 김용락 시인의 시집 출판 식사 모임에 오셨다. 옛 제자를 만나 밝게 웃으시며 반가워 하셨다. 시대가 바뀌고 선생님 빈 표정에 웃음이 많고 즐겁게 말씀하셨다.
선생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한국 지성인들은 큰 그림을 그릴 줄 몰라요. 쓸데없는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버릴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큰 그림을 갖고 굵직하게 써야 해요. 지금 르포가 가장 필요한 문학 형태라고 봐요. 잡문이 중요해요. 세상은 잡풀이 주인이거든.”
쓸데없는 장식을 버린 그의 문장은 꾸밈없고 검박하다. 가볍고 쉽지만, 그 안에 사상은 진득하고 울림이 크다. 그의 강연은 아무 준비를 안 한 듯 허허로웠는데, 사상의 총량이 넘친다 할까. 익은 포도주의 넘치는 포도즙처럼 맛깔났다. 그의 강연은 느림으로 가득했고, 그 느림은 모든 빠름을 부끄럽게 했다.
생태운동을 하면서도 도시 안에서 사는 자신을 그는 자주 자책했다. ‘녹색평론’을 창간했던 1991년 11월 당시 더 큰 출판 운동과 영업을 하려면 서울로 옮겨야 했고, 전국에 녹색운동을 강연하려면 서울로 출판사를 옮겨야 했다. 도시와 농촌 격차가 사라져서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도시가 생태를 망쳐 놓고 있으니 오히려 도시에서 생태계 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래도 선생은 자주 자신의 글과 삶이 다르다며 자책하곤 하셨다.
자책하면서도 선생은 스스로 ‘나무님’으로 사셨다. “병원 안 간지, 신체 검사 안 한지 삼십 년이 넘었어요”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병든 지구가 아파하듯 그는 지구와 함께 아파했다. 지구의 고통은 얼마나 그를 괴롭히고 압도했을까.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는지 우리는 몰랐다.
“곧 시스템이 붕괴됩니다. 정권을 잡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생명이냐? 죽음이냐? 전환이야? 자멸이냐? 그걸 걱정해야 할 시기입니다.”
선생이 늘 걱정하듯이,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죽음과 자멸을 체험하고 있다. 그의 예언을 사람들은 가볍게 생각했었다. 후학들 앞에서 잘 웃으셨지만 골목길을 돌아서는 선생의 뒷모습은 외로워 보였다.
빈소에는 선생을 스승으로 모셔온 단독자들이 많이 모였다. 더 오래 사셔서 더 귀한 글과 말을 남겨주셔야 하는데, 73세. 우리는 90세 이상으로 살아 글 써주시기를 바랐나 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선생의 ‘숙환’을 함께 아파했다. 자주 웃으셨기에 선생의 깊은 병을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했다.
빈소에서 돌아와 선생의 책을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모셨다. 선생의 글 읽기 모임을 만들어 이 정신을 배우고 이어야지. 다음 학기부터 수업 때 선생의 산문 읽는 시간을 마련해야겠다. 뵐 때마다 책을 주시곤 했는데, 없는 책이 있다. 녹색평론사에서 낸 단행본을 더 구입했다.
“소년 시절에는 시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로 시작하는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선생의 문학론 핵심이 다 들어 있다. 신동엽 시인이 우리 생태문학의 핵심이니 잘 연구하라고 권하셨다.
“신동엽의 반(反)권위적이고 원시 반(反)봉건에 대한 몽상이랄까. 이것은 시인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 가지고 시인이 있는 거 아닙니까? 시인은 ‘현대에 사는 원시인이다’라는 얘기도 있듯이 삶의 원천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몽상하고 전달하는 것이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동엽은 전형적인, 순결한 시인이죠. ”
이 책에 실린 평론 ‘신동엽의 도가적 상상력’은 신동엽 연구하려는 이들에게 필독해야 할 명문이다. 스스로 “한국인이라면 이 책 정도는 읽어야 하는데”라며 말씀하셨다는 ‘근대 문명에서 생태 문명으로’은 선생님 사상이 종합되어 있다. 선생은 제대로 된 세계인의 사상을 겸허하고 전했다. 블레이크, 디킨스, 매슈 아놀드, 리비스, 프란츠 파농, 이시무레 미치코 등 작가론이 담긴 『대지의 상상력』은 세계인과 연대하는 선생님의 비교문학적 연구다.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근대 문명에서 생태 문명으로’, ‘대지의 상상력’. 이 세 권은 2학기 수업과 학회에서 초등학생처럼 문장 하나 하나 읽으며 강독해야겠다.
이 거대한 존재를 따를 길이 없다. 평론의 가치를 가르쳐 준 선생들 중 선생의 오롯한 글은 범접하기 어려운 경계에 있다. 그는 종교인들에게 ‘집단실천으로서의 하느님’, ‘나무님으로서의 하느님’을 제시했다. 그저 두부에 갈치 조림에 막걸리를 즐기시던 선생님 곁에 한번이라도 단 한번이라도 더 갔다면, 허탈하고 그립고 힘없이 무너진다. 거대한 산맥 하나가 사라진 큰 사건이다. 누가 선생의 빈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지.
이 심야에 조용하게 불러봐요, 김종철 선생님
이제 씨앗으로 살아나실 거예요.
선생님 정신의 씨앗이 움트고 새싹이 오르기 시작할 거예요.
전국에 ‘녹색평론’ 독자 모임, 작가 후배들의 선생님 저서 읽기 모임 등
선생님 정신을 깊게 넓여 나갈 거예요.
선생님이 절망하시고 아파하시던 그 고통,
우리가 새기며 선생님 사상을 나누며 조금씩 실천할께요.
잊을 수 없어 선생님을 배웅하지 못해요.
떠나보내지 못해요. 선생님, 편히 쉬셔요. 이제부터 또다시 시작할께요.
글: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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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Jun Lee
6월 25일 오후 3:25 ·
김종철 선생님 작고. 마음에 모시던 분이 이렇게 하나둘 가시고 있다.
1987년 관철동 민음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할 때 김수영문학상 심사위원으로 모시면서 처음 뵙고 선생님의 철사줄 같은 꼿꼿함을 목도했다. 그 후 만나뵐 때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미처 따르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고 그래서 어려웠다. 내 강의나 심포지움에 강연을 모셨을 때마다 모두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씀을 하셨더랬다. 지구 멸망의 위기 상황임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지식인이 아니라는 열변이 아직 귓가에 남았다.
작년에 인사동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한 것이 마지막이었구나.
안식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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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균
6월 25일 오후 10:58 ·
김종철 선생님
김종철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2002년 초여름 원주 토지문학관에서였다.
당시 생존해 계시던 박경리 선생님께서
정부의 새만금사업 재개 여부 결정을 앞두고
"정치권이 표심만 쫓고 있다"
며 '새만금토론회'를 마련하셨다.
토론회가 끝나고 뒷풀이 자리에서
" 사람이 철새만 못하냐고 말합니다"
김종철 선생님,
"사람이 철새보다 나은 게 뭐가 있어요?"
죽장자로 머리를 강하게 후려갈겨 맞은 느낌이었다.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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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수
6월 26일 오후 5:22 ·
김종철 선생님 빈소가 차려진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사실은, 선생님 살아 계실 때 꼭 여쭤볼 말이 있었다. '어떤 운동'에 대한 이견이었다. 어쩌면 수십 년 동안 질문을 미뤄왔다. 평생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선생님의 주변만 빙빙 돌았다. 이제 선생님의 답변은 이승에서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됐다. 저승에서 만나 여쭤볼까? 거기서는 이런 저런 질문과 이견들이 모두 부질없는 일일 테지만... ㅠㅠ.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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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
6월 26일 오전 12:28 ·
아...김종철 선생님. 2018년 성공회대-한의생태연구소와 합작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자연과 인간'이라는 주제로 동물실험에 기반한 현대 양의학의 무자비함과 서구에서의 호스피탈러티에서 시작된 좋은 호의가 병원(호스피탈)으로 진화된 과정과 정치적인유 그리고 그 좋은 의미가 붕괴이유 등 매우 유익한 강의를 해주셨었는데...그리고, 뒷풀이에도 꽤 오랫동안 머무셨는데.....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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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철
6월 27일 오전 6:49 ·
#1 중국생태문명포럼
2년 전 봄, 김종철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나: 선생님 박경철입니다. 안녕하시죠.
선생님: 아 박선생 오랜만이요. 잘 지내나요? 요즘도 농민기본소득 운동 열심히 하지요?
나: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래 별일 없지요?
나: 네. 그런데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선생님: 뭔가요?
나: 중국 귀주성정부에서 생태문명포럼을 개최하는데 한국측 기조발제자를 찾는다고 하네요. 선생님이 딱 적임자 같아서 먼저 연락드립니다.
선생님: 그래요? 어떤 포럼인가요?
나: 이게 귀주성에서 개최하는 포럼이지만 중국정부 차원에서 생태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개최하는 포럼입니다. 올해가 10회라서 규모가 엄청 큰 것 같습니다.
선생님: 아 그런가요. 어떻게 발표를 해야하나요?
나: 영어로 7~8분 한국의 생태관련 사상이나 운동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선생님: 내가 영문과 교수했지만 영어 발표 잘 못하는데 허허
나: (순간 당황) 그래도 영문과 교수이셨는데요.. 시간도 짧으니 한번 해주세요.
선생님: 영문과 교수라고 영어발표 다 잘 하는 게 아니에요. 한번 고민해 보고 연락줄게요.
나: 네 알겠습니다. 연락주세요.
며칠 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박선생. 혹시 중국에 가게 되면 집사람이랑 같이 가도 되나요.
나: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귀주성에 한번 물어볼게요.
선생님: 내가 사실 중국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거든요. 이번에 가면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나: (당황) 아니 중국에 한 번도 안 다녀오셨다고요? 정말 몰랐어요. 녹색평론에 원톄쥔 교수님 글도 자주 싣고 중국의 3농문제와 생태문제 얘기가 많이 나와 전 선생님께서 중국에 많이 다녀오신줄 알았어요.
선생님: 그러게요. 한데 지금까지 기회도 없었고 비행기 타는 것을 싫어하니 못 간 것 같아요.
나: 아 그래요? 그럼 저희랑 같이 갔다가 선생님 내외는 다른데 들렀다 오시면 되겠네요.
선생님: 그렇게 한번 해봅시다.
나: 그럼 제가 중국측에 연락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나는 중국측에 연락해 선생님 내외가 방문해도 된다는 승낙을 받아 선생님께 전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생님: 박선생. 미안한데 중국에 못 갈 것 같아요.
나: 왜요?
선생님: 발표시간도 얼마 안되는데 간다는 게 너무 형식적인 것 같아서요.
나: 그렇긴 하지만 워낙 중요한 분들이 많이 오시는 자리라서요. 발표는 얼마 안되지만 이번 기회에 중국도 한번 가보시고 중국 생태문명을 어떻게 논의하는지 한번 보시구요.
선생님: 그렇고 싶은데 녹색평론 일도 있고 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은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나: 아닙니다. 저는 선생님과 함께 가면 정말 영광이어서 말씀드린 거구요. 선생님 못 가시면 제가 다녀와 나중에 소식 전하겠습니다.
선생님: 그래주세요. 암튼 박선생 미안합니다.
나: 아닙니다. 그럼 다녀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시구요.
선생님: 박선생도 건강히 다녀오구요.
나: 네
이렇게 해서 김종철 선생님과 함께 중국에 가는 기회는 잃게 되었다. 그때 좀더 우겨서 함께 가시자고 할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은 이명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으셨다고 한다. 심할 때는 귀에서 비행기소리가 날 정도로 고통이었다고 하신다. 그래서 더 비행기 타는 일이 힘드셨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님 마지막으로 뵙고 오는 길이 무척이나 슬프고 허망하다. 장례식장에서 뵌 따님(녹평 편집장)께서 박선생님이 많이 도와줬는데 하시면서 눈물을 쏟는 바람에 나도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약식으로 진행된 추도식 때도 참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인생의 나침판이셨는데 이제 방향을 어떻게 잡아갈지.. 이제 선생님의 글들을 다시 읽으며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 대담
작년 가을,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선생님: 박선생. 녹색평론 다음호에 농민기본소득 대담을 실을까 합니다. 박선생이 3~4명 패널을 좀 구성해 주세요. 아무래도 농민기본소득을 강하게 밀고 나가야겠어요.
나: 아 그래요? 네 한번 구성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후 나는 박웅두 정의당농민위원장, 강정남 나주여성농업인센터장을 패널로 구성해 서울 녹색평론사무실에서 선생님과 대담시간을 가졌다. 그 내용은 2019년 11-12월호에 "농민기본소득이 나라를 살린다"는 제목으로 실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해주셨다. 참 대단한 안목이셨다.
세상에서 농사가 제일 중요하고 농업 농촌 소농을 위해 건배를 하시고 퇴직하고 농촌으로 내려가 농사짓는 친구가 제일 부럽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그렇지 못해 도시에서 죗값을 치른다고 말하셨다. 그런 선생님께서 이제 땅으로 돌아가셨다. 육신의 고통과 번뇌를 모두 내려놓고 부디 영면하시길 빕니다.
발인 아침 박경철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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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6월 27일 오후 11:07 ·
김종철 선생님이 떠나시다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부음이다.
황망함과 아쉬움...
문명앞에 숲이 있고 문명뒤에 사막이 남는다는 샤토브리앙의 말은 내게 지금도 화살처럼 박혀 있다.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게도 되었을 것이다.
녹색평론으로 만난 선생님.
생태적 삶이란?
생태적 감수성이란?
돌이키면...이런 말들의 깊이감을 끝없이 생각하고 놓지 않게 잡아주셨던 것 같다.
어떤 때는 든든한 백그라운드 같았다고 할까?
함부로 지나쳐온 길들을 때로 말씀으로 글로 다시금 뒤돌아 보게 하셨는데...
부끄럽기 그지 없는 내 삶에 더이상 갚지 못할
큰 빚이 생기고 말았구나..
안타까운 부음...
우리 모두 이제 어떡하지...
김종철선생님.
사람이 사는 세상을 좀 더 자연과 닮도록
부단히 이끌어 주시느라 평생 애쓰신 선생님.
글로써, 말씀으로, 몸의 큰 옮김으로 다시 뵐 수 없음에 쓸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아...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부디...자연의 이치 그대로 순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영면하소서..
고 김종철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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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참어른 김종철 선생을 보내며
"가신 곳 그 곳에서도 무지한 우릴 인도하소서. 부디 영면 하소서"
생태사상가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 겸 발행인(전 영남대 영어영문과 교수)이 25일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생태사상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공생공락(共生共樂)의 가난'을 말하며 생태사상을 뿌리 내리게 한 김종철 선생은 그는 21세기 벽두에 한국 사회를 향해 "21세기는 환경과 평화의 세기가 돼야 한다"고 외쳤다. 그의 전망은 현실화되고 있고, 우리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손문상 화백이 김종철 선생을 추모하는 판화와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어두운 세상의 끝에 서서 한가닥 녹색 깃발을 들어 고독한 생명과 평화의 사유를 외치신 선생님. 시대의 참어른 김종철 선생님. 날카로운 현실 감각으로 위기의 세상을 설명하고, 절망적 미래를 직시하시면서도 불가능을 부인하고 끝내 깨어 있으시고자, 결코 희망을 놓지 않았던 선생님. 가신 곳 그 곳에서도 무지한 우릴 인도하소서. 부디 영면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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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철 광주마당 이사장의 남도일보 월요아침-사상가 김종철
사상가 김종철
이민철((사)광주마당 이사장)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이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김종철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사상가라고 부르고 싶다. 사상가는 상투적이지 않는 사람인데, 선생은 언제 만나도 뻔한 이야기가 거의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각도에서 현실을 분석하고 눈이 번쩍 열리는 대안을 내놓았다. 타고난 감수성도 있겠지만 성실한 독서와 사색, 대화의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빈소에 앉아 함께 한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선생은 ‘교만한, 오만한, 불경스러운’ 행위들에 특별히 예민했던 것 같다. 빈소에서 장흥에서 온 분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순천 강연회에서 ‘선생님은 세상에 절망하거나 좌절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선생은 절망과 좌절도 오만한 생각이 아닐지 반문했다고 한다. 명진스님은 추도사에서 자신은 수행자이지만 세속적인 사람이고, 김종철은 세속에 있지만 자신보다 수행자 같은 사람이었다고 추억했는데, 선생은 제도화된 종교로 설명할 수 없는 수행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한다.
선생과 가깝게 지낸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선생은 진짜와 가짜를 기가 막히게 감지한다는 말이다. 자만에 빠져있는, 그러니까 자기가 가진 지위, 재산, 지식만 믿고 난체 하는 사람들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모든 문제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발언하는 유명인들에게는 당연히 경계를 보냈다.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소비되면서 자만에 빠지면 선을 넘게 되니 책임 있는 사람들은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해했다.
김종철 사상을 집약한 책으로 생태사상론집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가 있다. 선생의 강연, 대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존엄한 인간이, 자존심 있는 사람이, 품위 있는 인간이’라고 기억한다. 인간이 존엄과 품위를 지키며 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존엄과 품위를 가진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묻고 세간의 일들에 발언했다. 언젠가 대화모임에서 우정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할 정도로 ‘우정과 환대에 기초한 삶과 문명’을 추구했다. 자신이 존엄과 품위를 지키고 살려면 이웃의 존엄과 품위를 지켜주어야 한다.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와 사회제도는 그 범위와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 그 선을 넘어서면 교만하고 불경한 문명으로 폭주한다. ‘서구식 근대’의 논의에 따른 세계와 우리들 삶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이반 일리치 읽기 모임 친구들에게 남긴 글이 가슴에 깊이 남는다. ‘사람들 다 같아요. 다 어린애입니다. 벌거벗은 자기 마음 안 나타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그러다가는 병 걸립니다. 솔직히 자기를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게 제일 좋아요’. 남들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포장하지 말고 솔직하게 후회 없이 살면 좋겠다는 말씀이다. 빈소에서 조촐하게 치른 추도식에서 일리치 읽기 모임 회원 한 분이 글을 읽어 내려갈 때 뭉클했던 것은 선생이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음을 느껴서다.
나는 활동가로서 세상을 해석하고 대안을 설계하고 운동을 기획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그런 나에게 선생은 최고의 사부였다. 인간다운 삶 뿐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고 바꾸는 길 위에서도 그랬다. 선생은 인간과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대안을 탐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현을 위해 판을 만들고 활동가로 현장을 뛰었다.
대표적인 기획이 이제는 주류 담론이 된 기본소득이다. 처음 선생이 한국 사회에 기본소득을 제안했을 때, 현실성이 없는 너무나 이상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의외로 우파가 적극적일 가능성이 있다며 가능성을 높게 봤다. 전국 각지를 열정적으로 돌며 기본소득이 대안이라고 설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선생은 평생을 존엄하고 품위 있는 인간으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분투했고, 시적 직관과 유머와 우정 안에서 존재했다. 생각이 길을 헤매던 젊은 시절, 하늘의 도움으로 김종철 사상을 만날 수 있었음에 깊이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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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6월 26일 오전 1:38 ·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접하자마자 '사실 확인'을 위해 그를 따르는 황규관 시인에게 제일 먼저 확인 전화를 했더니 세브란스로 가는 길이라 했다. 그리고 어젯밤에도 메일로 글을 보내고 그 답장도 받았는데 참으로 황당하다고 했다.
마침 황규관 형의 포스팅에 이제는 지상에서의 그의 마지막 글이 되어버린 김종철 선생의 답글이 실려 있는데 읽어보니 뜻밖에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고마워
앞으로 이런 글 많이 써라고 권하고 싶네.
괜히 어려운 소리 하지 말고.
고향을 잃고, 잃어가는 슬픔과 고통을 솔직히 나누는 게
문학의 본질이 아닌가 싶어.
때가 되면 다 떠나야겠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앓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말이야."
위의 글은 황규관이 어느 인터넷 매체에 연재를 시작한 산문 <한여름 밤 이야기-(1) 장마>를 읽고 보낸 것이다. 괜히 "어려운 소리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황 시인을 아는 사람들은 대략 짐작 가는 대목일 것 같으니 생략하기로 하자. 그러나 이어지는 몇 소절의 이야기는 한 문학 후배에게 당부하는 아주 각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아니 '문학의 본질'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평생 복원하는 일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사정은 다르고 곡절은 다양하겠지만 "고향 잃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아니 대지로서의 고향뿐만 아니라 의지할 마음의 거처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나는 김종철 선생이 문득 그 고향을 찾아 조금 일찍, 우리 곁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초가을 낮, '병후' 근 일년 만에 인사동 거리를 나갔는데, 이층 찻집에서 나를 발견하곤 부리나케 뛰어내려와 팔을 끌고 가 차를 권하던 그 소년 같은 모습이 영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아는 김종철 선생은 사실 소년 시절부터 시를 쓰던 문사였다.
내가 그에게 제일 잘한 일은 그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와 <대지의 상상력>을 완독한 후 전화를 걸어 '당신은 이제부터 이 시대의 사상가'라고 말해준 것이고, 제일 미안한 것은 아주 최근에 <녹색평론> 기획연재인 '내 인생의 책 한권'을 집필해 달라는 걸 "나는 그런 건 안 쓴다"며 단칼에 거절한 일이다.
지금 내 책상 위엔 그의 손길이 많이 닿았을 <녹색평론> 172호(2020년 5-6월호)가 놓여 있다. 부디 영면하시라!
이시영
6월 26일 오전 8:27 ·
눈을 뜨니 지인이 2019년 9월 18일의 예의 인사동 찻집에서의 사진을 찿아 보내주셨다. 그는 그날 한 일본 작가의 감동적인 에세이 '어머니의 우산'을 꺼내어 읽어주며 해맑은 소년처럼 즐거위했다. 맨 아래 사진이 그가 필사해 가슴에 간직하고 다니던 명문 '어머니의 우산'. 그 글을 꼭 찾았으면 좋겠다.
이시영
6월 26일 오후 8:26 ·
지인께서, 그의 휴대폰 사진(2019.9.18)을 확대하여 김종철 선생이 가슴에 간직하고 다니며 꺼내보시곤 하던, 그리고 그날 인사동 찻집에서 우리 일행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준 마루야마 가오루(1899-1974)의 <어머니의 우산>이란 시를 보내주셨다.
오늘 오후 빈소에 들러 김종철 선생 따님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그 사실을 말해주었으며, 조문객으로 와 있던 나희덕 황규관 시인에게도 카톡으로 전송해주었다.
참고로 마루야마 가오루는 여성(?)시인으로 동경대학을 중퇴했고, 쇼오와 10년대의 '사계파' 서정시인의 한사람이었으며, 시집으로 <돛, 램프, 갈매기> 등이 있다. 추정컨대 번역은 김종철 선생 자신이 한 것 같다.
어머니의 우산/마루야마 가오루
어머님
당신이 떠나신 지
오늘로 스무날 째
산촌엔 호젓이 가을비가 내립니다.
그 빗속을
당신이 남기신
그 조그마한 우산을 받고
저는 생활을 위해 나섭니다.
연로하신 후로
언제나 출타하실 때면 손에서 떼지 않으시곤
아득히 이 쓸쓸한 북쪽 산촌까지
저승길로까지 받고 오신
이 노인용 검정 헝겊 우산.....
이걸 받고 있으면
비도 저의 머리와 어깨엔 내리지 않으며
전 어머님과 함께 있는 꼭 그런 심정입니다.
뿐일까요. 아직 제가 어리고
당신께서 젊으시던 옛날부터
할머님이 되시어 조용히 살으시기까지
항시 저희들 마음속에 부어주시던
그 부드러운 애정의 그늘에 기어드는 것 같아
저의 가슴은 뿌듯이 뜨거워지며
달콤한 회상에 젖어듭니다.
어머님
저는 시방
이 조그마한 우산 속으로부터
이승에 퍼붓는 차가운 빗살을 바라보고
저 오록한 먼 산 단풍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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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는 것
최종수정2020.06.30. 오후 7:00
정홍수 ㅣ 문학평론가
김종철 선생님은 환하게 웃고 계셨다. 절을 올린 뒤, 차려주신 밥을 한그릇 잘 먹고 돌아와서 이 글을 쓴다. 작년 봄에 책을 한권 보내주셨다. <대지의 상상력: 삶-생명의 옹호자들에 관한 에세이>(녹색평론사). 꽤 긴 분량의 ‘책머리에’에서 선생은 영문학자·문학평론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소산인 이 책이 <녹색평론> 탄생의 정신적 전사로 읽히기를 소망한다는 뜻을 특유의 정연하고 담백한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 리처드 라이트, 프란츠 파농 등 책에서 다루는 여덟 작가는 선생에 따르면 “근대의 어둠에 맞서 ‘삶-생명’을 근원적으로 옹호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인데, 내게 특히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흔히 난해하다고 알려진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편이었다. 선생은 ‘책머리에’에서 대학 때 우연히 집어 든 블레이크의 시집 한권이 가져다준 놀라운 충격과 이후 그이의 문학에 빠져들면서 한국 사람이 영문학을 한다는 자괴로부터 얼마간 빠져나오게 된 경위를 술회하고 있지만, 그 오랜 공부와 감동의 온축을 보여주듯 민중적 세계관과 상상력에 단단히 뿌리박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해방적이고 혁명적인 시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이 깊이를 덜어내는 바 없이 너무도 명료하고 풍부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접근조차 힘들 것 같던 윌리엄 블레이크로 들어가는 문 하나가 그냥 쉽게 열려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블레이크 편이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블레이크의 시적 도정을 서술하는 선생의 글이 자신이 감동받은 시인에게서 삶과 사유의 실천적 이정표와 지향을 얻겠다는 마음을 글의 행간에 차곡차곡 채워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시인을 ‘시대의 예언자’로 부르는 오래된 수사학은 상당히 낡은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블레이크에게는 아주 온당한 호칭이었던 듯하다. 블레이크에게 ‘예언자’는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이어서 선생은 쓴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예언’은 자신이나 남들에게 속임수를 쓸 것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삶과 역사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중적 삶의 진실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간에게만 그 예언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1991년 <녹색평론>을 창간하면서 근대 산업문명에 대한 근원적 비판과 함께 삶의 전면적인 위기를 선언한 선생의 외로운 외침과 이후의 묵묵한 실행이 ‘예언’에 값하는 것이었음을 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정직하겠다고 다짐한다 해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적 제약과 왜곡 없는 공평무사한 인식의 추구가 쉽지 않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사유의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객관적이고 타당한 인식에 이를 수 있다 하더라도, 동의의 영역이 적거나 거의 보이지 않는 갈등의 사안에서 우리의 판단은 결국 어떤 입장의 선택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김종철 선생이 블레이크에 기대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정직한 인식’의 용기와 가능성 또한 보편적이고 해방적인 인간 역사의 실현이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불가피하게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면, 시는 구체성과 감각적 충실성을 보존하면서 인간 진실의 보편성을 향한 인식론적 경합의 장에 참여한다. “자신이나 남들에게 속임수를 쓸 것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삶과 역사의 진실”은 이데올로기의 언어가 아니라 시의 언어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 새는/ 온 하늘을 분노로 떨게 한다./ 주인집 대문 앞에 굶주려 쓰러진 한 마리 개는/ 제국의 멸망을 예고한다.” 선생이 대학 때 우연히 집어 든 고풍스러운 시집에서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블레이크 시의 한 대목이다. 선생의 사상적 전모를 잘은 모르지만, 일찌감치 근대 산업문명에 기반한 발전사관으로서의 마르크시즘의 한계를 꿰뚫고 욕망의 절제와 생명 존중에 기반한 생태 사상의 구체적 의제를 끊임없이 한국 사회에 제출했던 용기와 자유의 뿌리 하나를 이 어름에서 짐작해본다. 생각해보면 이 지면에 어쭙잖은 글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 나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입장과 언어가 있는가 하는 자문이었다. 날선 목소리의 회피를, 나 자신을 조금은 덜 속이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던 지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내가 나 자신에게 썼던 속임수는 남는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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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승리’, 김종철 선생님께
2020.07.01 03:00
정희진 여성학자
열정에 찬 어느 배우가 대가에게 물었다. “감독님, 인생에 의미가 있나요?” 영화감독은 바로 대답했다. “없지.”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생애는 지구상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자연 순환의 미미한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의미 없이 살 수 없다. 삶의 의미는, ‘사회적 존재와 자연의 일부’ 이 인간의 두 가지 조건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진다. 분명한 한 가지는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 이것이 만악의 근원인 대문자 역사(The History)라는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처럼 “(퇴임 후) 잊혀지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사는 동안 자연을 덜 망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의미다.
지난 25일 김종철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아직 ‘고(故)’를 붙일 수가 없다. 선생님과 개인적 인연은 없다. ‘다행히’ 녹색평론 2020년 5월/6월호에, 선생님께서 내게 원고를 의뢰하셨다. 원고 때문에 메일이 오갔다. 김종철 선생님은 내게 ‘한국 사람’ ‘한국 사회’에 대한 행복한 경험을 선사하셨다. 최근 내가 접한 가장 윤리적인 분이셨다. 몇 차례 오간 짧은 메일에서도 문학, 역사, 예술 전반에 대한 논쟁을 원하셨다.
주지하다시피 선생님은 1991년 사재로 녹색평론을 창간하셨다. 2004년에는 녹색평론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그만두셨다. 책을 만들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주변적 이슈’인 생태·인문을 주제로 한 정기간행물을 173호(2020년 7월/8월)까지 냈는데, 가장 어려운 문제는 경비가 ‘아니다’. 필자가 없다. 정말, 필자 구하기가 어렵다. 녹색평론에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을 만들지 못한, 만들지 않는, 만들고 싶지 않은 곳이 한국 사회다. 나는 이 이슈가 한국현대사를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녹색평론은 한 권 한 권이 단행본이었고, 선생님은 173권의 편저자셨다. 기획, 편집, 엮는 일보다 단독 저서 쓰기가 훨씬 편하다. 당신은 한국 사회의 일방향성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이들을 발굴하고 조직하셨다.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한국 사회에서 드물게 ‘사상가’가 되셨다. 여전히 ‘한·일관계(식민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1950년대 출간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전집(全集)을 읽고 주눅이 든 적이 있다. 내용은 불문하고, 일본에는 전집을 낼 수 있는 지식인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한국 사회에서 일관된 자기 생각을 열 권 이상 책으로 묶어 낼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김종철 선생님 외에 생각나는 이가 없다.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저를 너무나 왜곡되게 과대히 평가하시는 것은 대단한 실수입니다. 선생님(나)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며 펄쩍 뛰셨다. ‘의미 없음’의 의미를 아시는 듯했다.
선생님의 글이 언제나 선물이었던 것처럼, 당신은 세상과 이별하면서도 선물을 주고 가셨다. 오십이 넘도록 나의 고민은 여전히 ‘진로’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뭘 먹고살아야 하나. 이것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 삶은 언제나 임시방편이었고, 잘못과 민폐를 반복했다. 그러나 김종철 선생님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나는 “세상에 놀라지 말고 할 수 있는 일만 하자”고 다짐했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돈이든 명예든 타인의 인정이라는 의미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인생은 결국 죽음을 향한 가벼운 발걸음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죽음을 염두에서 잃어버린 순간, 타락은 필연이다.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은 삶과 죽을 운명이라는 두 가지 조건의 길항에서 나왔다. 근대 문명에 이르러서는 이 ‘갈등의 균형(생각하는 능력)’은 박살나고, 죽음은 자연사(自然事)가 아닌 삶의 대척에 서게 되었다.
삶은 무의미하지만 이 진실을 의식하면서 살 수는 없으므로, 사람들은 의미라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었다. 그런데 물질문명이라는 ‘의미’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더 큰 재앙을 대비하며 이 여름을 맞는다. 아수라의 한복판을 직시하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세상이 망한 듯 나는 흐느껴 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200701030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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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2020.07.01
추도식에서인가, 40대 이후 나의 정신을 형성해 준 분이 바로 김종철 선생님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선생님이 기획한 마지막 <녹색평론>에 실린 ‘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에는 일본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를 언급하면서 의미심장한,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의 굳어진 상식을 뒤집는 구절이 있는데 자주 말해지지 않았을 뿐이지 내가 선생님께 느꼈던 평소 생각이시기도 하다. 옮겨 보겠다.
“흙과 함께 살아온 백성들의 정신세계로부터 아득히 떨어져 나간 것은 도쿄의 출세한 엘리트들만이 아니다. 이시무레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들의 ‘군대 언어’로부터 시골에서 ‘근대화’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산업체 임금노동자들의 언어, 그중에서도 특히 노동운동가들의 언어가 시골에 침투해 들어옴에 따라 토착사회의 언어와 사고와 풍습이 변질되기 시작했음을 주목한다. (...) 따져보면, ‘인권’이라는 것도 극히 근대적인 개념이다. 대지와 바다의 풍요로운 은혜 속에서 살아오다가 느닷없이 유기수은중독의 희생자가 되어 모든 것을 잃고, 극한적인 고통과 번뇌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인권 운동’이라는 게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을까.”
선생님은 뒤이어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촉발된 사태에 대해서도 바로 이 ‘언어’ 문제를 되짚는다.
물론 지금 대지가 어디 있느냐는 항변도 있을 것이다. 대지가 없으니 대지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 또한 필연적 아니겠느냐는 비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늘날 ‘민중’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냐는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 도리어 근대 문명으로 인해 인간의 가치가 나날이 떨어지고 무시되고 있으니 ‘인권’이야말로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는 반론도 귀에 쟁쟁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저런 현상 진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지가 사라지고, 민중이 보이지 않으니 그에 발맞춰 사는 것이 리얼리스트의 태도인 것처럼 말하지만, 잃어버린 대지와 민중을 사고하지 못하거나 상상하지 못하는 능력의 부재가 우리의 존재를 ‘권리’에 가두는 것일 수도 있다. 존재가 권리에 갇히니 언어도,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 존재를 밝히는 게 아니라 권리를 주장하고 증명하는 것으로 후퇴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선생님이 이 지점을 비판하고 있다고 본다.
만약 ‘새로운 것’이 어디엔가 웅크린 채 빛나고 있다면, 그것을 발굴해내는 태도는 바로 ‘시대착오적인 것’에 있을지 모른다. 내가 왕왕 말하곤 했던 니체의 반시대성도 아마 그런 종류일 게다. 따라서 언어가 다시 존재를 열어 밝히는 것이 되려면, 역으로 존재를 근대적인 권리의 울타리 안에서 구원해내야 할 것이다. 언어가 권리의 울타리 안에 갇히니 언어가 상품이 되고, 모든 자본주의 근대 산업에서 만들어낸 상품의 마지막이 언제나 ‘쓰레기’이듯, 언어도 쓰레기가 되어 여기저기 둥둥 떠다닌다. 코로나 보다 더 고약하다. 선생님은 어느 호 <녹색평론> ‘서문’에서인가 근대 문명의 본질은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
신문에 실린 두 편의 추도사를 읽고 떠오른 생각이 있어 적어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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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2020년 7월 1일
(예전에 김종철 선생님이 작가회의 회원들에게 기본소득 강연을 하신 적이 있는데, 이 대목에서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고 박수가 나왔다. 현직 교수이신 어느 선생님은 ‘옳습니다’라고 외쳤다. 작가들 앞이어서인지 매우 유쾌하게 강연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 녹취록과 <삶이 보이는 창>에 주셨던 원고는 녹색평론에 보냈다.)
그럼 이 수많은 대학들은 어떻게 하느냐? 지금 전국에 대학 통폐합한다고 난리죠. 학교가 그냥 쑥밭이 되어 있는데. 좋잖아요, 대학 캠퍼스들 다 마당 넓고 건물도 좋고. 업종 전환하면 되잖아요. 무슨 잠실로 만든다든지 큰 농장을 만든다든지. 나는 10년 전부터 대구에 있을 때부터 지방대학부터 시작해서 대학들 업종 변경해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가망 없는 중국인 학생들을 돈 주고 사와 가지고 자연과학계에 뭐 실험실 운영하려고 그런 엉터리짓 하지 말고. 그게 지속가능한 방법이 아니거든요. 내가 있던 영남대학은 100만 평입니다, 100만 평. 얼마나 땅이 넓은지 몰라요. 거기다 농사지으면 참 와따인데....(웃음)
건물들은 호텔해도 되고
, 그리고 예전에는 잠사가 있었잖아요
, 뽕나무
. 뽕나무 키워서 잠실 만들고 말이야
, 가축도 키우고 말이야
. 축산업도 하고
. 지금 뭐 시원찮은 놈들 교수랍시고 앉아 있는 그 방들
, 인간 앉아 있는 것보다 소들 앉아 있는 게 훨씬 낫잖아요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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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김종철 선생님
입력 2020-07-01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이 지난주 세상을 떠나셨다. 향년 73세. 선생의 갑작스러운 별세는 생태위기에 맞선 우리 시대의 가장 신실한 목소리를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슬픔과 아쉬움이 더 크다. 누가 선생의 빈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인데, 선생은 내게 그런 분이셨다. 학생 기자 신분으로 선생을 인터뷰한 1990년대 중반부터 선생의 말과 행적을 지켜보며 지금껏 실망한 적이 없었다. 선생의 얘기는 때론 너무 크고 때론 너무 근본적이어서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중요하고 진실한 이야기라는 점은 분명했지만 현실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로서는 너무 멀고 무력한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독보적인 사상가로서,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 탁월한 편집인으로서 선생에 대한 존경을 거둬들인 적은 없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어른도 찾기 어려웠다.
선생은 1991년 11월 대구에서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창간한 이후 지금까지 29년간 물질주의와 산업문명을 비판해왔다. 돌이켜보면 그 세월은 물질주의가 극성을 부려온 세월이기도 하다. 진보, 보수 구분 없이 모두가 성장과 경제에 목을 매달고 있었다. 선생은 그런 세월을 ‘자발적 가난’ ‘농경적 삶’ ‘공생의 윤리’ ‘생명의 문화’ 같은 말들을 붙잡고 맞서왔다.
선생과 녹색평론이 없었다면 지난 30년간 한국에서 생태주의는 그 씨앗을 보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선생이 지키고 키워온 생태주의는 인간과 문명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대전환을 요구하는 사상으로 어느새 한국 사회에서 주요한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물질주의의 파탄과 환경 위기가 분명해지면서 생태주의는 점점 더 많은 이들을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선지자였다.
선생의 목소리가 더욱 필요해진 시점에 세상을 떠나신 것이 안타깝다. 선생이 평생을 일궈온, 분신과도 같은 잡지 녹색평론의 미래에도 신경이 쓰인다. 영문과 교수와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던 선생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홀로 녹색평론을 창간했다. 2004년부터는 교수직도 버리고 녹색평론 발행인으로 살아왔다. 녹색평론은 2020년 5·6월호(172호)에 이르기까지 한 번의 결호도 없이 30년 가까이 지속해왔다. 창간 이후 지금까지 제호나 판형, 편집 등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사무실을 대구에서 서울로 옮긴 것이 두드러진 변화라면 변화였을 것이다. 출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 명의 편집인이 30년 가까운 세월 한 잡지를 만들어왔고, 그 잡지가 그 긴 시간 일관된 주제와 태도를 유지해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잡지라는 쇠락한 매체, 생태주의라는 급진적 사상, 교수직을 던져버린 중년의 지식인, 이 조합이 녹색평론이었다. 그 잡지가 29년을 이어왔고,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잡지 중 하나가 됐다. 그 잡지를 읽는 자발적 독자모임이 전국에 수십 개나 된다.
선생이 소규모 종이 잡지를 사상의 수단으로 선택했다는 점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선생은 담론과 출판 시장의 틀을 벗어난 독립적인 ‘공간’을 스스로 만들었다. 그가 만든 녹색평론이라는 지적 공간은 허술해 보였지만 오랜 세월 훌륭하게 역할을 해왔다. 무엇보다 비즈니스의 논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마음껏 하고 싶은 얘기를 해왔다. 이제 선생은 땅으로 돌아가셨다. 선생이 떠나신 뒤 발표된 추모의 글들을 찾아 읽으며 ‘김종철이라는 사상’의 영향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깊어지는 생태위기의 시대에 선생의 이름은 오랫동안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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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가 망해 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등록 :2020-07-05
[토요판] 특집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의 마지막 말
이명 잊으려 “자잘한 이야기” 요청
작고 전 이틀간 벗들과 나눈 말·글
생전 이 세계에 남긴 마지막 언어
고통의 시간 견디며 생의 끝까지
몰두한 일은 유례없는 지구적 재난
파악하고 성찰하고 모색한 글쓰기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을 추모(6월25일 새벽 별세)하는 글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개인적 인연이 있든 없든 그 글들에선 ‘저마다의 김종철’이 생전 모습처럼 카랑카랑합니다. 그만큼 그가 한국 사회에 찍은 발자국은 깊고 짙었습니다. 코로나 사태 뒤 건강이 나빠진 그는 외부 기고(4월17일치 <한겨레> 칼럼을 끝으로)와 강연을 모두 중단했습니다. 바이러스는 그의 목소리가 타전되는 길목을 막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이틀 동안 ‘김밥모임’의 “벗들”과 나눈 말과 글을 모임의 일원인 이문영 기자가 모았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언어들입니다.
“몹시 더운 날들입니다. 6월 기온으로는 사상 최고라죠. 시베리아가 뜨거운 시베리아로 되고 있다니, 무섭습니다. 나는 때때로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다 사라진 후의 지구의 풍경을 그려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인간 중에는 굉장히 강인하게 살아남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어떤 형태로든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무리 중에 적어도 나는 포함되지 않겠지만.”
김종철 선생님의 이메일 편지가 10명의 “벗들에게”(제목) 동시에 도착했습니다. 6월23일 오전 10시42분이었습니다. 일찍 닥친 더위와 그 더위가 달굴 지구를 염려하며 선생님의 편지는 시작됐습니다.
“조해일씨가 세상을 떠나셨군요. 그리고 까치의 박종만씨도.”
6월19일 작고한 소설가(조해일·향년 79)와 그보다 닷새 앞서 별세한 출판인(박종만·향년 75)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대표작 <겨울여자>가 대중소설로 “오해”돼 진지한 평가를 받지 못한 작가의 영면 앞에서 선생님은 “우리 문단에는 섬세한 촉각을 가지고 좋고 나쁜 작가를 섬세히, 충분히 평가하는 전통이 부재한 게 아닌지 늘 유감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상업성을 따지면 엄두도 내지 못할 책들을 과감하고 꾸준히 내온” 출판인의 사망 소식엔 “쓸쓸해진다”고 쓰셨습니다.
“인생무상, 이보다 더 진실이 없지요.”
선생님은 당신의 건강 악화를 전하셨습니다.
“벌써 잠을 못 잔 지 여러 날입니다. 이명이라는 것 때문에. 원래 이명이 있었는데, 그런대로 적응해서 살아왔는데, 최근에 갑자기 음, 비행기가 가면서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그게 어느새 증폭되어, 낮이고 밤이고 단 일각도 멈추지 않습니다. 평생 소음을 지독히 싫어해온 것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병원에서는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자체가 죽을병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온종일 신경이 쉬지 못하니 버티기가 참 만만치 않습니다. 일생 동안 제가 많이 아파봤지만, 이번에는 난감하네요.”
선생님은 부탁하셨습니다.
“결국 적응을 빨리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끊임없이 주의를 돌려야 하는데, 그게 혼자서는 잘 안 되네요. 여러분들이 자잘한 이야기라도 자주 저에게 보내주면 그걸 읽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 이야기라도 좋아요. 폼 잡지 말고, 그냥 기탄없이 있는 그대로 자기를 스스럼없이 표현하면서 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절감하며 지냅니다.”
편지를 보내신 지 이틀 뒤였습니다. “벗들”이 보내오는 “자잘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이명과 싸우시던 선생님의 사망(향년 73)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벗들”은 땅이 흔들리는 충격으로 얼어붙었습니다.
“인생, 이리저리 궁리할 것 아닙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선생님은 글을 쓰셨습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이명을 견디며 몰두하신 일은 유례없는 재난에 대한 파악과, 성찰과, 모색이었습니다. 재난의 실체와, 원인과, 이후에 가닿으려는 사고의 조각들이 이 세계에 남긴 선생님의 마지막 언어들이 됐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거의 반강제적으로 칩거 상태로 지낸 지 벌써 몇 달이 되었군요. 저는 원래 이런 생활에 익숙한 사람인데도, 때때로 갑갑증을 느낍니다.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계절이면 지독한 미세먼지로 괴로움을 겪던 것을 생각하면 이 상황이 종결되고 또 그 지옥으로 되돌아가면 어떻게 하나, 그런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 이 와중에, 책상 위에 늘 흩어져 있는 종이들이나 노트들에 이것저것 떠오르는 상념들을 즉흥적, 단편적으로 적어놓았는데, 며칠 전 우연히 그것들을 대충 훑어보니 버릴 게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여러분과 나눠봐도 될 만한 이야기들이 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코로나 일지를 시작하며)
선생님은 오랫동안 두개의 모임에서 후배들을 만나오셨습니다. 영남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둔 2004년 ‘이반 일리치 읽기 모임’을 시작하셨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녹색평론사 사무실에서 일리치(오스트리아 사상가)의 글을 나누던 모임은 만남의 주기와 장소를 달리하며 지금까지 이어져왔습니다. ‘김밥모임’(김종철 선생님과 밥 먹는 모임)은 2007년 출발했습니다. 두달 간격으로 <녹색평론>이 나오면 만날 날을 잡아주셨습니다. 시인(김해자·정우영·황규관)과 소설가(김남일), 문학평론가(고영직·노지영·오창은·이명원), 정치학자(하승우), 출판인(김선정), 기자(손제민·이문영) 등이 선생님께 밥과 술을 얻어먹었습니다. 일체의 권위를 싫어하신 선생님은 20~30년 어린 후배들과도 격의 없이 대화하고, 귀 기울여 듣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는 메모하셨습니다. 새로 읽고 공부한 내용을 나누실 때 가장 기운 넘치고 신나 하셨습니다. 그 기운을 받으며 후배들은 지난 13년간 선생님 곁에서 나이를 먹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통권 170호가 발행된 지난 1월 이후 김밥모임도 멈춰 세웠습니다. 소소한 만남조차 차단된 현실이 선생님의 이명을 키우고 있을 줄 후배들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5월24일에도 단체 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코로나 일지’가 첨부돼 있었습니다. 일리치 읽기 모임 카페에 올리신 글을 “심심할 때 구경하시라”며 김밥모임에도 공유하셨습니다. ‘일기’가 아니라 ‘일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일기는 쓰지 않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허전할 때 가끔 들춰보는 타르코프스키의 일기 같은 것을 보면, 저 자신도 일기를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에게는 맞을지 모르지만, 나 같은 인간은 일기를 쓰면, 그 일기라는 것은 매우 위선적이고 거짓된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 정도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세상에서 제일 혐오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출판을 의식하며 쓴 일기입니다. 그런 일기를 쓰는 개인은 일기를 씀으로써 좀 더 정직하고 열린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에고(ego)에 더욱더 갇히게 된다고 저는 봅니다. 노골적인 나르시시즘의 표출이 왜 문제냐 하면, 그게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미학적으로 보기 흉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제가 가끔 종이에 휘갈겨 적는 것은 어디까지나 낙서이지 일기가 아닙니다. 왜 지금 낙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이 낙서들 중에서 그래도 쓸 만한 이야기가 있다면, 여러분들이나 저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심란한 시간을 버티고 이겨내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코로나 일지를 시작하며)
모두 6개의 파일이었습니다. 이 글들과 이후 추가로 보태신 글들이 선생님의 손을 거친 마지막 <녹색평론>(7·8월호)에 ‘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이란 제목으로 묶였습니다. “서문을 쓰려는데 이 증상(이명)이 나타나는 바람에 쓰지 못했다”며 일지가 서문을 대신한 까닭을 선생님은 작고 이틀 전 메일에서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당부하셨습니다.
“인생, 그거 너무 이리저리 궁리할 것 아닙니다. 사람은 모두 다 똑같아요. 다 어린애죠. 이 난경에 처해보니, 뼈저리게 알겠습니다. 평소 건강할 때 사람들에게 충분히 배려하고, 관심을 베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여러분은 후회 없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계사는 감염병의 역사”
이명을 잊을 ‘글의 대화’를 청하시는 편지를 받고 김밥모임 후배들은 ‘이상하게’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시인 황규관(<삶이 보이는 창> 편집인)의 회신이 가장 빨랐습니다. 메일 수신 한시간 뒤(6월23일 오전 11시42분)였습니다.
“코로나 이후 출판계의 양극화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 요즘에는 저도 참 괴롭습니다. 삶창 하면서 주위에 신세를 많이 졌는데 그것 못 갚고 그만두면 어쩌나, 이런 불안이 자주 듭니다….”
그가 전한 문학판 소식에 선생님은 “서양어의 번역말을 쓰기 시작한 한국 근대 100년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적어도 일본 사람들은 생소한 서양어를 자기 나름으로 번역하면서, 말하자면 서양과 일대 대결을 하고, 고투를 한 역사를 경험했는데, 우리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당연한 듯이 일본 사람들의 번역어를 그대로 받아썼으니, 서양정신과의 대결 경험이 없었고, 그 없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찰해야 한다는 지적(6월23일 오후 2시1분)이었습니다.
한시간 뒤엔 소설가 김남일이 메일(6월23일 오후 3시18분)을 보냈습니다. 조해일·박종만 두분의 소설과 출간도서를 읽으며 통과한 젊은 날을 회고하며 선생님의 건강을 걱정했습니다.
“실은 지난 시절, 저도 아마 등 떠밀려 광장으로 가고는 있었지만, 마음은 얼른 골방으로 들어가 좋아하는 책이나 실컷 읽었으면 하고 자꾸 망설이고 주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놓친 세월에도 이제 먼지가 켜켜이 쌓였습니다.”
선생님은 이튿날 오전 “응원해줘 고맙다”(6월24일 11시50분 회신)고 하셨습니다.
“남일씨처럼 욕심 없이 좋은 소설, 책들을 읽으며 평온한 마음으로 사는 게 제일 부럽습니다. 최소한 생계만 꾸릴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후회해봤자 소용없지만, 지나간 날들을 많이 돌아보고 있습니다. 견뎌볼게요.”
김남일의 편지 10분 뒤 문학평론가 노지영의 메일(6월23일 오후 3시29분)이 선생님께 갔습니다. 그는 ‘폼 잡지 말고’ 소식 전해달라는 선생님의 글에 일부러 “미주알고주알 잡다한 이야기”로 회신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 ‘개발 바람’이 불며 공동체가 쪼개지는 과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했습니다. 지난해 그 동네를 방문한 적 있는 선생님의 답장(6월23일 오후 6시37분)엔 개발을 주도하는 “출세하고 성공했다는 인간들의 빈약한 정신”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어려 있었습니다.
“맑은 하늘 밑에 사람들이 소박하게 생활하는 곳, 빈터에서 아이들이 아무 걱정 없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그런 곳이야말로 낙원인 줄 모르고, 그냥 돈 몇 푼 생기는 게 목표가 된 사람들의 세상, 참 끔찍합니다. 요새는 그냥 사람들이 모두 불쌍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맘이 약해져서인지, 어쩔 수 없다는 체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혹은 어쩌면 ‘고향’을 잃어가고 있다는 상실감으로 너무 오래 속을 썩여온 끝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문학평론가 이명원(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의 응답은 날짜가 바뀐 직후(6월24일 오전 1시2분)였습니다. 그는 코로나 시대에 카뮈의 <페스트>를 두고 쓴 글을 “선생님의 이명을 잠깐 잊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첨부했습니다. 선생님은 답신(6월24일 낮 12시17분)에서 그 글을 칭찬하며 최근 “나도 <페스트>를 다시 읽어보려고 꺼내놓았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대학생 시절 처음 <페스트>를 읽었을 때는, 그때는 카뮈를 늘 사르트르와 비교해서 읽는 풍토였던 탓도 있겠지만, 이 소설이 파시즘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생각하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 나도 동조했고, 그래서 역병과 파시즘이라는, 전혀 성격과 차원이 다른 문제를 그런 식으로 다룬다는 것에 대한 저항감 때문에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이었지요. 더욱이 그 당시 불문학자 김붕구 선생 같은 분(반공주의자)이 늘 카뮈와 사르트르를 대비시키면서 사르트르를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발도 아마 있었던 것 같소. 그러나 역시 카뮈는 좋은 작가임에 틀림없소. 다만 알제리 식민해방투쟁에서 카뮈가 별 역할을 하지 않은 데는 아직 의구심이 남아 있지만.”
선생님도 ‘코로나바이러스 습격’의 의미를 묻는 재료로 페스트를 불러오셨습니다.
“이번에 새삼 느낀 것은 세계사는 질병의 역사, 그중에서 특히 감염병의 역사라는 점이다. 몽골제국이 망한 것도 결국은 페스트 때문이고, 유럽 중세 질서가 해체된 것도 결국은 페스트 창궐의 여파였다. 게다가 실크로드가 폐쇄된 것도 페스트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면, 맑스주의 역사관에서 말하는 생산력의 발전이니 교역의 확대니 하는 것들은, 역사적 변화의 주된 요인이라기보다 실은 부차적인 요소로 봐야 하지 않을까.”(코로나 일지)
“정부의 재난지원금이라는 거
이참에 항구적인 제도 됐으면
이론투쟁 활발해져야 하는데 답답”
“때가 되면 다 떠나야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앓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길”
“화폐공급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
선생님은 이 세계의 근본적 전환을 쉼 없이 호소하셨습니다. 혁명 없는 시대에 가장 혁명적인 사상가셨습니다. 구호가 아닌 대안을 내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읽고, 쓰고, 행동하셨습니다. “온종일 신경이 쉬지 못하는 중에도” 선생님의 생각이 끝까지 더듬고자 했던 것은 전 지구적 감염 시대로 진입한 이 세계의 미래였습니다.
“지금까지 (국내외의) 언론과 지식분자들이 쏟아내는 견해나 주장들은 대부분 소비활동 위축, 수요 급감에 따른 경기후퇴에 관한 우려와 그 해결책에 관한 제안들에 국한되어 있다. ‘그린뉴딜’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으나, 그것도 대부분 경제성장 논리와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코로나 일지)
작고 한달 전 메일에선 치열한 논쟁의 시급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나마 저는 (연금 덕분에) 이런 ‘고독한’ 생활이 가능하지만, 타인들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없으면 생활이 곤란해질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걱정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정부지원금이라는 거, 우리 집도 받아서 쓰고 있습니다만, 이참에 항구적인 제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이론투쟁이 활발해져야 하는데, 아직도 기본소득론자들도 대부분 증세나 세수 조정을 통한 재원, 혹은 좀 더 진전된 생각으로는, 토지보유세를 통한 재원 확보라는 생각에 머물고 있어 답답합니다. 은행을 국유화하거나 엠엠티(MMT·Modern Money Theory: 국채 발행이 아니라 국가가 돈을 찍어 재정을 충당해야 한다는 ‘현대화폐이론’은 최근 미국 진보정치 진영에서 그린뉴딜의 재원 조달 방안으로 재조명)를 적용하면 간단한데, 왜 우리나라에는 그런 공부를 한 경제학자가 없는지, 설혹 있다고 해도 용기 있게 발언하는 사람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저녁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기본소득론자와 반대론자 간의 맞토론을 보았는데, 거기서도 결국은 ‘한정된 국가수입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쓰느냐’는 게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국가가 마련할 수 있는 돈이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에 양쪽 다 고착되어 있는 거죠.”
엠엠티를 주제로 칼럼을 쓰려고 공부 중이던 기자 손제민(<경향신문> 사회부장)은 “뵙게 되면 듣고 싶은 말씀이 많다”며 조언을 구했습니다.
“화폐를 보는 패러다임 전환이 생태위기 해소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독자들에게) 풀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5월28일 낮)
선생님은 답장(5월28일 오후)에서 “(엠엠티를) 잘만 적용한다면 획기적인 경제정책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를 표하셨습니다.
“엘렌 브라운(<부채의 덫> 저자)이 제창하는 공공은행 운동도 그래서 늘 관심 갖고 보고 있는데, 브라운이 작년 가을에 전주시가 개최한 심포지엄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요즘 뒤늦게 알고 자료집을 구해서 읽어봤소. ‘한국의 경제 기적’이 가능했던 배경으로 (박정희 시대의) 한국의 은행들이 국유였다는 점을 주요 요인으로 지적하던데, 별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소. <녹색평론> 다음 호에 재정 건전성이라는 것은 미신일 뿐이다, 화폐공급이란 궁극적으로 경제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다, 라는 이야기를 부각시키고 싶소.”
이 문제의식은 ‘균형재정론은 틀렸다’(홍기빈)는 글로 7·8월호에 실려 선생님의 장례 기간 중 정기구독자들에게 배달됐습니다.
“마흔에 접어들면서 갑상선 종양 진단을 받고 여러 달 후 수술을 받기까지, 나는 사람이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에 빠져 지냈다. (…) 불교책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마음의 평정을 얻는 데에는 산책이 더 효험이 있었다. 집 근처의 개천 길이나 산길을 몇 시간씩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길가의 풀들에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 풀들도 인간과 다를 게 없는 생명체였다. 함부로 밟을 수가 없었다.”(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
6월25일 새벽 선생님은 새와 물 소리로 이명을 덮으려 이른 산책을 나가셨습니다. 무엇 하나 함부로 밟을 수 없는 생명들을 피해 걸으시다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전날 저녁(8시47분) 황규관에게 도착한 메일이 선생님의 마지막 메시지였습니다. 그가 ‘읽을거리’로 보내드린 에세이 한 편(‘장마’)에 대한 격려였습니다.
“고마워. 앞으로 이런 글 많이 쓰라고 권하고 싶네. 괜히 어려운 소리 하지 말고. 고향을 잃고, 잃어가는 슬픔과 고통을 솔직히 나누는 게 문학의 본질 아닌가 싶어. 때가 되면 다 떠나야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앓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말이야.”
3시간 전(6월24일 오후 5시25분)엔 시인 김해자에게 편지를 쓰셨습니다. 잠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물으시며 “고맙다”고 하셨고, 안 그래도 아픈 사람에게 “내 고통만 이야기해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함부로 밟을 수 없었다”
일리치 읽기 모임과 김밥모임이 주관한 작은 추도식이 6월26일 저녁 빈소 한켠에서 열렸습니다. 김해자가 조시를 낭송했습니다.
“세계가 죽음을 향해 나자빠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비행기 바퀴 구르는 소리가 일각도 멈추지 않는 이명/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만이 아니라 대지가 온몸으로 절규하는 귀울음.”
재난 앞에서 터진 약한 생명들의 울음이 그들의 소리에 누구보다 예민했던 선생님의 귀로 달려가 차곡차곡 쌓였을 것입니다. 시인 정우영은 선생님의 이명을 “지구가 깨지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온몸에 받아 홀로 삭인 이”가 떠난 뒤 남은 자들의 세계는 그 울음들에 귀 닫고 득의양양할지도 모릅니다. 지난 5월 띄운 편지를 맺을 때 선생님은 쓰셨습니다.
“이 세계는 그냥 이대로 망해 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문학평론가 오창은(중앙대 다빈치교양대학 교수)은 김밥모임의 총무로 매번 선생님과 만날 날짜를 조율해왔습니다. 그가 선생님을 운구한 뒤 썼습니다.
“(몸이) 너무 가벼워, 나비처럼 자연의 일부가 되어 날아가신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사주신 밥, 대략 70끼니가 넘는 것 같습니다. 밥값 하는 삶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빈자리는 무엇으로 메꾸어야 합니까?”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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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은
2020.07.05.
김종철, 「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 중에서 「‘인명재천’이라는 생사관」(<녹색평론> 2020년 7-8월호, 162~164쪽.)
‘인명재천’이라는 생사관
며칠 전부터 몸이 이상하다. 누워 있으면 좀 견딜 만하기는 해도 그리 편치는 않다. 왜 이럴까. 안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 심란한 터에 몸이 이러니, 자연히 기분이 처진다. 소위 ‘코로나블루’가 내게도 이런 식으로 오는가.
마흔에 접어들면서 갑상선 종양 진단을 받고 여러 달 후 수술을 받기까지, 나는 사람이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에 빠져 지냈다. 모든 것을 책으로 해결하려는 ‘학필이’ 근성 때문에 불교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하지만 별로였다. 아마도 그 무렵 내 (정신적인) 나이가 죽음을 명상하기에는 너무 어린 탓이었을 것이다. 불교 책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마음의 평정을 얻는 데에는 산책이 더 효험이 있었다. 나는 학교에는 가능한 한 나가지 않고, 집 근처의 개천 길이나 산길을 몇 시간씩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길가의 풀들에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 풀들도 인간과 다를 게 없는 생명체였다. 함부로 밟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생명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란 심신 허약의 징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도, 몇 번인가 건강이 좋지 않을 때마다 자연히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얻었을까. 자신의 죽음을 미리미리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이외에는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 중에서 내가 제일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몽테뉴가 들려주는 프랑스 농민들의 이야기다. 즉, 16세기 프랑스 남부 시골의 농민들은 늙어서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미리 알고 밭 한가운데에 구덩이를 판 다음, 거기에 들어가 쪼그려 앉아서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곤 한다는 것이다. 그 지방의 오랜 풍습이었던 이 광경을 몽테뉴는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썼다.
생각하면, 근대 이후 도시화, 산업화를 거치며 우리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지, 원래 토착 농경사회에서는 어디서나 죽음은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농민의 삶이란 하루하루가 목숨붙이들의 태어남, 성장, 쇠약, 죽음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는 사이클에 함께 참여하는 생활이기에, 농민들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은 우주질서의 불가결한 요소이지 결코 회피해야 할 ‘재난’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에세이에는, 몽테뉴 자신도 “죽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고뇌한 흔적이 보인다. 그는 죽음에 대해 골똘히 사색하는 습관을 기르면,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옛 스토아 사상가들의 생각에 따라, 자신도 그렇게 해봤지만 소용없다고 말한다. 죽음이라는 숙명적 과제에 대한 몽테뉴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어느 날 말을 타고 숲속을 달리다가 낙마를 한 뒤부터였다. 무엇인가에 충돌하면서 낙마를 한 순간, 몽테뉴는 아마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임사체험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부상을 당하여 쓰러져 있는 동안 통증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그 이후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음을 느꼈고, 따라서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도 달라졌다. 그의 결론은, 죽음은 미리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그냥 자연에 맡겨둘 문제라는 것이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명상”이라고까지 했던 몽테뉴의 최종 결론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그런데 그가 얻은 결론은 사실은 동아시아의 전통에서는 오랫동안 극히 상식적인 생각이었다. 즉,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려 있다(人命在天)”는 상식…. 내 생각에, 이보다 더 고매한 철학은 실제로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불안의 시대에 우리가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데 이토록 명쾌한 ‘철학’보다 더 좋은 약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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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2020.07.05.
적잖은 사람들이 김종철 선생님에게서 생태적인 사상이나 래디컬한 근대문명 비판을 읽지만 나는 그것보다 먼저 자신을 향한 비판과 채찍질을 읽었다. 처음 뵈었을 때, 선생님은 젓가락 등을 소리나게 내려놓으셨다. 나는 첨에는 살짝 당황했지만, 거듭된 행동과 언어를 살피면서 자신이 지식인임을 버리려는 나름의 수행(?)을 하고 있다고 받아들이게 됐다.
예컨대 선생님은 가끔 죽은 윤중호 시인이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대전 생활에서 윤중호 시인이 당신에게 술 취해 몇 번 주사를 한 모양이었다. 그 핵심은, 선생님 같은 서울대 나온 엘리트가 지방에서 우골탑 나온 자신의 심정을 알기나 하냐는 것. 그에 대해 선생님은, 자슥이 꼭 남의 아픈 데를 찌른단 말야, 이러곤 하셨다.
지식인들의 자의식 강한 언어도 무척 싫어하셨는데, 일테면 포기나 절망 같은 회색 언어를 비판하실 때 늘 하시던 말씀이, 아니 도대체 자신들이 뭘 했다고 포기하는 건데? 이런 투였다. 내가 느끼기로는 그들이 뭘 안 했다는 게 아니라 뭘 했다는 ‘아상’을 겨냥한 것이었고 동시에 당신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아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런 비판은 문학인들에게도 향했다. 그래서 나처럼 뭘 아는 척하는 문학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한번은 어느 시인의 시집에 대해 내가 서평을 자청했다. 물론 이런 행동은 선생님이 조금 더 능동적인 참여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히 거절당했다. 나는 뭘 대단한 철학을 가진 것처럼 시를 쓰는 시인에게는 녹색평론 지면을 줄 수 없다, 그가 비록 노동자시인이라 하더라도. 아직도 이 사건은 내가 선생님의 좀 빠른 오해라고 생각하지만 선생님의 비판의 핵심을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문학인들이나 지식인들이 그 특유의 에고나 아상을 안으로 삭이지 못하고 자기 홍보 수단으로 삼는 되는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김종철 선생님의 괴로운 자기 투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아마 당신 주위를 내게 허락하신 큰 이유도 내가 노동자라는 점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하지만 자주 문학인 특유의 내 에고를 따끔하게 말해주시곤 했다
. 나는 다른 것보다 이게 가장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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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바꾸고자 한 예언자이자 실천적 사상가, 김종철
[김종철 선생을 기리며]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박승옥 햇빛학교 이사장 | 기사입력 2020.07.06
말과 글과 행동으로 시대를 바꾸고자 한 사상가
모든 역사는 오늘 지금 여기의 역사로 늘 재편성된다, 지금 여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살아 있는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역사는 늘 다시 재조명되고 다시 쓰여 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편집과 편찬의 역사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모든 시대의 시공간은 오늘 지금 여기의 시대와 시공간으로 늘 다시 호출된다. 그래서 개인이든 공동체든 국가든 지나간 시공간은 현재의 시공간으로 불려 나와 지금의 시공간과 병존하게 된다. 우리의 삶과 세상은 지금 여기의 삶이자 과거와 함께 사는 병존과 공존의 삶이고 세상이다.
김종철. 많은 사람들이 대놓고 까칠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다정했던 사람. 더불어 사는 공생공락의 삶을 추구했던 사람.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이 부박한 세상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사람. 대쪽 같은 원칙주의자이면서도 누구보다도 염치를 중시한 현실주의자였던 사람. 그는 20세기와 21세기라고 이름 붙은 시대에 한반도라는 시공간을 산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히 시대에 적응하거나 순응하면서 일생을 살지 않은 특출한 사람이었다. 홀로 그리고 스스로 전혀 낯선 새로운 삶과 세상의 길을 개척하고 그 길을 여럿이 함께 걸어가고자 했던 선각자였다. 그는 그야말로 피를 토하듯 시대의 종말을 소리 높여 외친 예언자였다. 예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시대를 뒤바꾸고자 노력한 실천가였다.
기후위기가 이미 임계점을 지나 여섯 번째 멸종 사태가 급속도로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날, 파국의 징후가 거세질수록 생태주의자 김종철은 앞으로 수없이 다시 살아 있는 우리 앞에 호명되고 수없이 다시 지금 여기 현재의 역사로 재구성될 것이다.
<녹색평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자모임이 있는 생태주의 잡지
1991년 11월 25일, 김종철은 44세의 나이에 격월간 잡지 <녹색평론>을 창간했다.
이후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그는 일관되게 <녹색평론>을 근거지로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무모하면서도 거대한 도전을 이어왔다. 착취와 피착취, 억압과 피억압의 인간관계를 우애와 환대의 인간관계로 바꾸고자 한, 어쩌면 유격전의 해방구 투쟁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있는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당시는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구소련의 해체가 진행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89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이란 논문을 발표해 사이비 체제종말론이 막 유행을 타고 있던 때였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로 한반도 역사상 최고조에 달한 서구 산업화의 풍요와 고도 경제성장의 떡고물이 노동자들에게도 떨어지고 있었다. 대기업 노동자들 중심으로 자가용 보급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거리거리에 의식주 상품이 넘치고 넘쳐 흘렀다. 그런 시대 상황 속에서 김종철은 벌건 대낮에 등불을 들고 자본주의 산업화도 곧 망할 것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경제성장과 개발은 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정면으로 시대를 부정하고 시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는 도전장이나 다름없었다.
150여 쪽의 얇은 소책자에 불과한 <녹색평론> 창간호의 글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거의 혁명에 가까운 도전과 외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종철의 창간사는 지금 읽어도 생생하게 각인되는 서구 산업화의 종말, 경제성장과 개발의 중단 선언문이었다. 사회와 국가를 생태사회와 국가로 바꾸자고 제안하고 실천을 촉구하는 성명서였다.
김종철은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를 똑같은 서구 근대 산업화의 자연 파괴 이데올로기로 비판하고 세상의 파국을 피하려면 농업 중심의 소농사회를 복원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바로가기 ☞ : <녹색평론> 창간사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1991. 11. 25.)
<녹색평론>은 이후 한 호도 거르지 않고 29년 동안 173번이나 세상을 바꾸는 사자후의 목소리를 내놓았다. 많은 정기구독자들이 <녹색평론>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고 <녹색평론>을 삶의 등대로 삼았다.
이들 열혈 정기구독자들이 만든 전국 각지의 <녹색평론> 독자모임은 특이하고도 전 세계에서 유일한, 잡지를 매개로 한 결사체이다.
173호에 실려 있는 독자모임 광고만 헤아려 보더라도, 강원 홍천, 충남 청양, 충남 홍성, 북대전, 충남 서산 태안, 세종, 충북 북부, 경기 부천, 경기 군포, 경기 성남, 경기 화성 동탄, 서울 강서, 서울 강남 서초, 서울 중랑, 대구, 대구경북 가톨릭, 경남 창원, 김해 장유, 경남 진주, 전북 군산, 전북 전주, 제주 서부, 제주 풀무질 등 23개에 이른다. 이외에도 천안 아산, 대전 가톨릭 등 독자모임을 준비 중이거나 잠시 휴지기를 가지고 있는 지역까지 합하면 30여 곳을 훌쩍 넘는다.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농민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에게는 기관지 ‘이스크라’의 배포망을 지하당 조직의 뿌리로 삼았던 러시아 사민당을 떠올리게 만들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녹색당 창당에는 이들 ‘녹평 독자모임’ 회원들이 대거 참여해 산파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김종철은 손사래를 치며 싫어하겠지만, 케이팝, 케이방역에 앞서 케이 독자모임이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사대주의 앵무새에서 벗어난 조선의 생태주의자, 김종철
김종철을 어떤 사상가이자 실천가로 자리매김할지 그 논의는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 그런 자리매김의 시론으로 주제넘고 두서없지만 김종철의 사상과 실천을 몇 개의 주요한 측면으로 간략하게 서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김종철은 사대주의의 열등의식을 완전히 극복하고 새로운 생태주의 사상의 지평을 연 조선의 생태주의자였다.
오리엔탈리즘과 그 대항으로서의 옥시덴탈리즘을 뛰어넘어 그런 차원과는 전혀 다른 사람과 세상의 밑바탕으로부터의 생태 전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 이래 한반도 주민들은 이른바 중화주의 사상과의 오래고 질긴 긴장과 갈등, 투쟁의 역사를 계속해 왔다. 고려,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 자체가 사대주의와의 대립과 자립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글의 창제와 조선 중기 이후의 실학과 동도서기론 등의 대두는 중국 모방과 앵무새 따라 하기를 거부하는 현실주의의 실천이었다.
19세기 말 서구의 침략과 함께 조선의 식민지로의 전락은 한국 인민들에게는 천지개벽 같은 사건이었다. 이후 1세기 이상을 한반도 인민들은 오직 서구 근대화, 산업화를 신앙처럼 숭배하며 부국강병의 경제성장과 개발을 향해 좌고우면 없이 돌진해 왔다.
당연히 사상과 학문의 서구 추종과 따라 하기, 앵무새 같은 식민지성은 거의 유전자처럼 한국 인민들의 내면에 깊숙이 각인되어 버렸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가능하다면 황인종 피부까지도 하얗게 바꾸고자 한 '누런 피부 흰 가면'의 교수와 학자들이 지금까지도 온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과 유럽 유학파들이 장악한 대학은 이같은 식민지 학문과 사상의 온상이었다. 김종철은 이같은 앵무새 따라 하기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우리의 문화와 토양에 맞는 생태주의 사상을 꽃피웠다는 점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그가 최해월의 동학과, 동학을 이어받아 한살림운동을 시작한 무위당 장일순을 높이 평가하고 따르고자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줄기차게 소농사회의 복원을 주창한 것도 기본소득을 강조한 것도 한국 인민의 몸과 마음에 걸맞은 한국의 옷을 만들고자 한 그의 지론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백석의 시 낭송 듣기를 즐겨 하고, 해월의 동학사상과 소태산 박중빈의 원불교를 자주 언급했던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 김종철
김종철은 배움을 멈추지 않고 가르침을 멈추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녹색평론>을 발간하면서 거의 하루 25시간을 매달려 실사구시의 철저한 검색과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글을 청탁하고 번역했다. 그는 애매하거나 정확한 조사연구가 덜 된 주제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이같은 엄격한 태도는 가식과 몰염치가 판치는 이른바 교수들과 학자들의 학문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김종철은 누구보다도 염치를 중시하고 염치를 아는 독서인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생태주의 삶을 실천하는 듯이 화장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가족의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예 상종을 피했다. 그가 존경하는 이반 일리치를 굳이 '이반 일리히'라고 부르는 일종의 허세와 고집에 대해서도 지독스러울만큼 싫어했다.
그가 거액을 주는 강연 요청을 거절할 때는 그 강연을 요청한 사람이나 단체가 염치를 모르는 허세와 가식으로 치장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아무리 적은 소수의 사람이 모여 있어도 녹색 사상을 넓고 깊게 할 수 있고 <녹색평론>의 정기구독자를 늘릴 수 있는 강연 요청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2004년 영남대 총장의 뺨싸대기를 후려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정규직의 대학교수 직을 미련없이 때려친 것은 이 시대의 대학교육은 이제 더 이상 배움과 가르침의 현장이 아니라는 선언과도 같았다. 예수의 성전 파괴와 같은 행동이었다.
그 뺨싸대기는 근대 대학교육 자체에 대한 후려치기였고, 대학교육 자체에 대한 사망선고와 다름없었다.
이후 근 10여년 동안 김종철은 매주 토요일 ‘일리치 읽기모임’이라는 배움과 가르침의 독특한 공동체를 지속시켜 왔다. 젊은 청년 몇몇과도 ‘김밥 모임’(김종철과 밥 먹는 모임)을 오랫동안 이어 왔다.
공생공락의 삶을 강조하고 실천한 김종철의 다정다감한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모임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철의 평소 일관된 소신에 따라 그의 장례식은 일체의 행사나 의례 없이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지만, 아쉬움에 장례식장에서 조용히 추모 모임을 가졌던 것도 이들 ‘일리치’ 식구들과 ‘김밥’ 식구들이었다.
(바로가기 ☞ : "이 세계가 망해 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근본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 행동하는 사람 김종철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파한 뒤 김종철은 녹색당 창당에 나섰다. 녹색당 창당은 김종철이 근본주의자이자 동시에 몽상가가 아닌 현실주의자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영어 래디칼(radical)은 뿌리라는 뜻의 영어 root에서 파생한 단어라고 한다. 김종철은 그 어원에 딱 들어맞는 래디칼리스트, 근본주의자였다. 김종철의 글에서 가장 많이 발견하는 단어 또한 근원적, 근본적, 본질적 등등일 것이다. 진보와 개발에 대한 인민의 맹신을 뿌리부터 뒤엎지 않으면 문명과 세상의 종말은 물론 생명체 자체의 멸종 또한 피할 수 없다는 김종철의 절박한 문제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김종철은 누구보다도 실현 가능한 생태 전환 사회와 국가를 추구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녹색당 창당은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녹색평론 초대 편집장이었던 장길섶이 홍성에서 2년제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전공과정을 개설할 때 이를 누구보다도 앞장서 격려하고 적극 후원한 사람은 김종철이었다.
그가 줄기차게 주장하던 소농사회의 복원을 따르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있으면 누구든 김종철은 격려하고 후원했다. 국가에 대한 생각의 변화 역시 김종철의 현실주의자 면모를 여실히 입증한다.
김종철은 2016년 2월 1일 딴지일보의 초청으로 벙커1 특강 <국가 같은 소리 하네>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왜 아나키즘의 국가부정론에 공명하다가 국가를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방향을 틀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후쿠시마 이후 녹색당 창당에 발벗고 나선 현실주의자 김종철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강연이었다.
밑바닥 인생 편에 선 사람, 김종철
마지막으로 김종철은 자비와 연민을 중요시한 사상가였다.
그는 개발과 성장을 멈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 탐욕을 멈추어야 한다고 재삼재사 강조했다. 탐욕을 멈출 때 사람은 비로소 내면에서부터 자비와 연민의 고유한 감정과 생각을 키울 수 있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이면 그가 누구든 김종철은 자비와 연민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곤 했다. 자비와 연민이란 돈으로 환산된 동정이나 자선과는 뿌리부터 다른, 공생공락과 우애, 환대의 인간관계에서 유래되는 인간의 ‘근원적’ 감정과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제자이기도 했던 윤중호 시인을 아꼈던 것도 우리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 청소부와 일용직 노동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그들에 대한 자비와 연민의 시를 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른바 명문고 명문대를 나와 대학교수를 역임한 우리 사회의 상층 기득권에 속했지만, 그런 기득권을 거부한 사람답게 육체노동을 하는 우리 사회의 하층 계급에 대해 늘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김종철은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김종철이 필자와 인연을 맺은 계기도 필자가 노동운동의 생태적 전환을 주장한 2004년 <당대비평> 가을호의 글이었다. 당시 그 글 전문이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는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실리고 논쟁으로 전개된 적이 있었다.
김종철은 그 글과 논쟁을 지켜보고 한참 뒤 지인을 통해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김종철은 늘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의 생태적 방향 전환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성장과 개발의 최일선 담당자들인 ‘산업화의 역군’ 노동자와 농민 자신이 성장과 개발을 거부하고 생태적 전환의 회심을 하지 않는 한 체제 전환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녹색평론 창간호를 꺼내 다시 읽었다.
그리고 김종철이 그렇게 두려움까지 느끼고 연구 금지 모라토리움이라도 해야 한다는 인공지능의 구글 유튜브 검색도 해보았다. 벙커1 특강 <국가 같은 소리 하네>도 인공지능이 알려 준 것이다.
30여년 전 <녹색평론> 창간호의 시애틀 추장 연설을 읽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선명하게 다시 떠올랐다.
170여년 전 아메리카의 대자연 속에서 생태순환의 삶을 살고 있던 인디언들이 개발과 성장의 백인 침략자들에게 유린당하면서 절규하던 말은 지금 여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생생한 녹색 저항의 언어다.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출처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70610455420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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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언’을 넘어 생명을 껴안는 문학
최재봉 한겨레 책지성팀 선임기자 / 2020.07.16.
문학평론가에서 출발해 사상가로 나아간 가라타니 고진이 2003년에 발표한 논문 ‘근대문학의 종언’은 그의 고국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문학이 근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고, 그 때문에 특별한 중요성, 특별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런 것이 이젠 사라졌다”는 그의 주장의 타당성 여부는 따로 따져봐야겠지만, 가라타니가 그 글에서 ‘종언론’의 유력한 근거로 한국의 문학평론가 김종철과 나눈 대화를 든 사실이 우리에게는 특히 흥미로웠다.
가라타니는 김종철이 문학을 떠나 생태 잡지 <녹색평론>을 발행하고 지역통화운동을 펼치던 2002년 가을 그의 초대로 한국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왜 문학을 그만두었는지 물었다고 한다. 김종철은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고 그에 대해 자신 역시 동감을 표했다고 가라타니는 소개했다. 김종철은 1999년에 행한 한 대담에서도 “문학에 대해 더 이상 큰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며, “우리 사회에서 문학은 더 이상 최전선에 있는 것 같지 않(고), 덜 절박한 자리에 있는 것 같다”고 그 까닭을 든 바 있다. 그런 문학을 떠나 그가 가장 절박하다고 생각한 생태 문제를 다루는 잡지를 발행하고 관련 단행본을 출간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지난달 25일 아깝게 숨을 거둔 뒤에도 문학평론가보다는 생태 사상가이자 운동가의 면모가 더 부각되고 평가받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고인과 문학 사이에 냉정하게 선을 긋는 데 대해서는 아쉬움과 회의가 남는다. 1999년에 낸 두번째이자 마지막 평론집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서문을 “소년 시절에는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 그였다. <녹색평론>에 매호 시가 실렸고 그가 마지막까지 어울렸던 ‘김밥 모임’(김종철 선생님과 밥을 먹는 모임) 구성원 대다수가 문인이었다는 사실도 문학을 향한 그의 여전한 관심과 애정의 징표라 믿고 싶다.
1999년 대산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을 읽어 보면, 그에게 시는 생태적 사유를 펼치고 만날 가장 유력한 수단임을 알게 된다. 그에 따르면 “시적 사유의 본질에는 어떠한 인공적인 조작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세계의 근원적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대한 본능적인 인식이 내재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진정한 시인은 본질적으로 가장 심오한 생태론자일 수밖에 없”다. 그가 ‘시적 사유’라고 할 때 그것이 반드시 문학 장르로서의 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시적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 누구나가 소유하고 있는 근원적 심성”이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그렇다면 시적 사유 또는 시적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모든 생명을 하나로 보는 사고방식”이 그가 생각하는 시적 사유 또는 시적 마음이다. 시는 “사물들 간의 내재적 친연성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은유적 사고’에 주로 의존하는데, 그런 점에서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일부이며 만물이 우리의 형제라는 생태적 사유와 통한다는 것이다. “시인이란 본래 생명을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김종철 득의의 정의가 그에서 비롯된다.
이미 문학에 대한 흥미를 잃었노라고 밝힌 1999년의 대담에서도 그는 “어쩌면 시의 르네상스가 올지 모”른다는 희망 섞인 예측을 내놓는다. 시는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가장 쓸모가 덜한 장르인데, 그런 쓸모없음이 오히려 시의 활로가 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시는 아예 돈이 될 수 없는 물건이니까,” 오히려 정직하고 진실된 인간성의 표현으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시와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문학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그것은 “굉장히 근원적”인 작용이다. 문학을 떠났다고 한 김종철이 <녹색평론>에 계속 시를 청탁해 싣고 문인 후배들과 교류를 이어 간 것은 시와 문학에 대한 그런 믿음과 기대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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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 안 붙는 ‘사상가’ 김종철 / 장정일
2020.07.18. 오후 1:54
김종철 선생님이 6월25일 세상을 떠났다.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였던 그는 지방의 한 사립대학교 영문과에 재직 중이던 1991년 11월, 생태주의 잡지 〈녹색평론〉을 창간했다. 이문재 시인이 “하나의 정부”라고 불러 마지않던 이 잡지는 고인이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나신 달까지 한 번의 결호도 없이 제173호가 발행됐다. 그사이에 선생은 ‘대학에 학문이 없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어느 대담에 나온 사퇴의 변은 이렇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문교육이 파산지경에 이르렀어요. 곤혹스러운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인문계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이 별로 저항하는 기색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미나에 참석하고,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게 정말 절실하게 아파서 하는 일이 아니라 그저 학자나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확인을 위한 습관적인 형식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산업사회의 생산과 소비 유통구조 속에서 이 체제의 불가결한 요소의 하나로 지금의 인문과학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몰라요. 진정한 행복의 비전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물음과 갈망이 오늘의 지식사회에 과연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얘깁니다.”
선생은 두 번째 문학평론집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삼인, 1999년 개정증보판) 서문 첫 줄에 “소년 시절에는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시인이 되지 못하고, 겨우 다른 사람들이 쓴 시를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일을 업으로 해올 수 있었을 뿐이다”라고 썼다. 선생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지 못했으나, 또 다른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우창 선생은 1997년에 발표한 ‘김종철론’에서 대학 시절의 제자였던 그를 가리켜 시종일관 ‘시적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생전의 마지막 저서가 되어버린 생태사상론집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 2019)에서 선생은 “시인은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매사에 불만을 쏟아내는 ‘프로 불편러’도 모두 시인일까. 김수영만 하더라도 붙잡혀간 소설가나 베트남전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고작 설렁탕에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설렁탕집 주인더러 “돼지 같다”고 분개하는 자신을 “옹졸한 위인”이라고 자학했다. 선생이 시인의 모범으로 삼은 이의 제기자는 이반 일리치다. “일리치 같은 사상가는 기본적으로 시인입니다. 사물의 근본을 생각해보자는 것이죠.” 말하자면 〈녹색평론〉을 통해 제기했던 기본소득, 추첨 민주제, 지역화폐, 소농(小農) 사회 등은 모두 오늘의 문명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이의였으니, 선생은 소년 시절의 꿈을 이룬 것이다.
대학생이 된 그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한 편을 읽게 됐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 새는/ 온 하늘을 분노로 떨게 한다/ 주인집 대문 앞에 굶주려 쓰러진 한 마리 개는/ 제국의 멸망을 예고한다.” 이 강렬한 언어가 준 충격은 매우 컸다. “나는 맑스나 그 밖의 중요한 변혁사상가들의 글을 읽기 훨씬 이전에, 예컨대 블레이크와 같은 시인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근대문명이 근본적으로 얼마나 부조리하고 야만적인 것인가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산업혁명 초기의 사회적 격변기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온몸으로 체험했고, 그 체험에 의거하여 후세의 어떤 변혁사상가들보다 더 일찍 그러한 시대 변화의 심층적 의미를 가장 통렬하게 투시하고 포착했던 시인이자 예술가, 민중 사상가였다.”
블레이크를 깊게 읽고 난 이후로 선생은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인·작가·평론가들을 차례로 발견하는 행운을 누렸다고 한다. 그들은 한마디로 ‘근대’의 어둠에 맞서 ‘삶-생명’을 근원적으로 옹호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문학을 읽고 생각함으로써 나는 이른바 압축적인 산업화로 인해 온갖 인간적인 비극과 재난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인류 사회 전체가 공통적으로 경험해온 곤경의 일부로 보는 사고 습관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사고 습관이 길러지지 않았더라면 내가 에콜로지 사상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결과 〈녹색평론〉의 발간 작업에 열중하는 일도 없었을 것임은 거의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이 누린 행운의 끄트머리에 일본 소설가 이시무레 미치코가 있다.
민중, 공동체, 리얼리즘, 역사
선생은 매슈 아널드와 F. R. 리비스 같은 비평가의 영향을 받으면서 비정치적이고 문화주의적인 텍스트 중심주의와 거리를 두게 되었고, 민중과 공동체를 옹호하고 리얼리즘과 역사를 중시하는 문학비평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첫 문학평론집 〈시와 역사적 상상력〉(문학과지성사, 1978)을 낸 뒤부터 문학비평과 점차 거리를 두었다. 오늘의 한국 문학이 삶과 생명의 근원인 대지(공동체)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자본주의와 기술·산업에 저항하기는커녕 문화산업의 일부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좌파와 우파는 물론 전 세계의 야망 있는 정치가들은 한입으로 ‘민주주의를 하려면 경제발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제성장이 민주주의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점차 많아지는 비정규직과 갈수록 벌어지는 양극화가 입증한다. 정치가들이 외우는 저 주문은 오히려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를 외면해도 된다’는 되먹임으로 국민에게 돌아온다. 선생은 경제성장을 멈추어야만 민주주의가 가능해지고, 파멸 직전의 생태가 살아난다고 말한다. 마지막 저서의 제목에 그런 뜻이 담겨 있다.
선생은 생전에 ‘생태사상가’나 ‘녹색사상가’로 불렸다. 그런데 고인이 되고서는 ‘생태’나 ‘녹색’이라는 접두어가 사라지고 있다. “김종철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사상가라고 부르고 싶다(이민철, 광주마당 이사장).” “선생님은 풀뿌리 민중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 사상가였다(하승수, 시민운동가).” “당신은 한국 사회의 일방향성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이들을 발굴하고 조직하셨다.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한국 사회에서 드물게 ‘사상가’가 되셨다(정희진, 여성학자).” “독보적인 사상가(김남중 〈국민일보〉 국제부장).” 접두어가 떨어져나가는 현상은 나쁘지 않다.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이지 ‘실존철학자’나 ‘분석철학자’로 의미가 한정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철학자이고 김종철이 사상가인 것은 좀 더 해명이 필요하다. 엄밀히 말하면, 철학자란 서양의 지적 전통에서 생겨난 철학을 훈련받은 전문가를 가리킨다. 그래서 철학이라는 번역어로 서양의 필로소피(philosophy)를 동양에 처음 들여온 일본에서는 서양철학 훈련을 받지 않은 이를 사상가라고 불러 철학자와 구분한다. 철학은 분과 학문이고, 사상은 그보다 더 큰 개념이다.
격월간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이 6월 25일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김종철 선생은 인생의 모든 단계, 모든 국면에서 우리의 삶은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유린되거나 뒤틀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러한 체제에 대항하면서 녹색평론을 지금까지 이끌어 왔다. 김종철 선생은 1991년 녹색평론을 창간하여 한국사회에 생태사상을 뿌리내리는 데 큰 몫을 했으며, 탈핵 담론을 끊임없이 펼쳤다. 탈핵신문은 활동가들이 기억하는 <김종철과 한국 탈핵운동>을 주제로 글을 소개하고, 고 김종철 선생을 기억하고 추모한다.
탈핵 운동의 든든한 동지이자 후원자, 김종철
고 김종철 선생을 기억하며 _ (1)탈핵 운동의 든든한 동지이자 후원자, 김종철
이헌석 편집위원, 탈핵신문 2020년 7월(79호)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벌써 몇 년 동안이나 말 못 할 큰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다. (중략)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면 국민들 사이에서 지역민의 고통을 분담하자는 기운이 일어나야 합니다. 정부에 대한을 마련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밀양 주민들이 겪는 고통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정 교육이나 학교 교육을 통해서 윤리를 배우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의 현대 생활 자체가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고는 유지가 안 되는 구조입니다. 오늘날의 사회 구조가 약자를 희생시키는 구조적인 악행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비단 핵발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근대 문명 자체의 본질적 성격이 그렇습니다.- 김종철 <탈핵학교 '탈핵의 윤리와 상상력'> 중에서 -
무너져버린 사회시스템, 희생과 갈등
핵발전소에 반대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 핵발전소 사고의 위험성이나 관리할 수 없는 핵폐기물 문제는 물론이고, 사고가 일어나지 않아도 유출되는 방사성 물질이나 대형 송전탑, 온배수 문제도 중요한 탈핵 운동의 근거다. 하지만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은 언제나 핵발전소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 구조와 문명 문제를 중심으로 탈핵 운동을 설명했다.
핵발전소는 단순히 기술 발전으로 만들어진 기계가 아니다. 대용량 에너지원이 필요한 우리 사회의 요구로 만들어진 기술이며, 그간 핵발전소는 우리 사회의 이런 요구를 정확히 충족시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끊임없이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벌어진다. 우라늄 채굴에서 핵발전소 운영, 폐로 과정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폭 노동자, 핵시설 인근에서 사는 지역주민들,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핵폐기물로 고통받을 많은 후손들…
전력 생산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이 이어지지만, 정작 이 전력을 사용하는 시민들은 대부분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 ‘어쩔수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경우가 다수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약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다고 김종철 선생은 설명했다. 독일 아우슈비츠 경험을 담은 프리모 레비의 ‘증오없는 폭력’과 일본 다카하시 데쓰야의 ‘희생의 시스템’ 개념을 오고가며 핵발전을 둘러싼 희생과 시민들의 무관심, 그리고 폭력을 설명했다. 이는 자본주의가 갖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이며, 이런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핵발전소도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김종철 선생은 현장 활동가가 아니었다. 내 기억에 그를 집회나 기자회견 현장에서 본 기억이 없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 만들어졌던 탈핵교수 모임 결성식에서 발언한 정도가 사실상 거의 유일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탈핵운동가였다. 기술용어나 수치를 말하지 않지만 그는 왜 핵발전소가 우리 사회에 들어오게 되었고, 왜 그리도 핵발전소를 없애는 것이 힘든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지역주민들의 현장 운동으로 시작한 탈핵운동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각계각층으로 확산되었지만, 대부분 핵발전소의 위험성이나 과학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 머물렀다. 탈핵학교를 비롯해서 전국 각지에서 진행되었던 탈핵 강의에서 김종철 선생이 대표적인 연사로 초청된 것은 이런 부분을 짚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연사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석 달이 되었습니다.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산업재해가 아닙니다. 거의 묵시록적 파국이라고 해야 할 사건이죠.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실은 요즘은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요. - 김종철 <녹색평론 2011년 7-8월호 서문> 중에서 -
후쿠시마 사고 직후 김종철 선생은 사석에서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핵발전소가 폭발하고 난 직후 긴박한 상황과 혼란, 무너져버린 사회 시스템, 그 속에서 생기는 또다른 희생과 갈등을 목격하면서 그는 “우리가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실감했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고민은 녹색평론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1년 간 녹색평론은 사실상 ‘격월간 탈핵운동 잡지’라고 할 정도였다. 탈핵운동에 대한 다양한 시각, 일본 현지 목소리, 어떻게 탈핵을 이룰 수 있을지 등 다양한 글이 녹색평론에 실렸다. 사고 1년 이후에도 탈핵 서평이나 기획 기고 등의 흐름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단편적인 기사가 아닌 원고지 50-60매 이상 되는 긴 탈핵 관련 글을 지속적으로 접할 수 있는 잡지는 국내에서 녹색평론이 유일했다.
인문학적 지식에 기반한 탈핵 이야기
그는 탈핵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든든한 배후였다. 편치 않은 건강 상태에도 탈핵 강의를 요청하면 두툼한 책을 대여섯 권씩 들고나와 다양한 이들의 관점을 바탕으로 핵발전소 이야기를 풀어내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경제성이니 안전성이니 하면서 과학적 사실과 숫자로 핵발전소 문제를 지적할 때, 인문학적 지식에 기반해 상황을 설명하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지식인을 잃은 것은 탈핵 운동의 큰 손실이다. 탈핵운동이 더 풍부해졌으면 좋겠다고 어려운 걸음 부탁드릴 때, 허허 웃으면서 ‘내가 이런 거라도 해야지’하는 소탈할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찬핵-탈핵 논쟁에 지치고 탈핵운동 내부의 복잡한 사정이 있을 때, 그는 편하게 상의하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탈핵운동의 ‘어른’이자 ‘동지’였다.
한국 생태주의 운동에서 김종철 선생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다. 탈핵운동은 그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탈핵운동 입장에서 그는 매우 중요한 동지이자, 후원자였다. 그는 방향성을 잃고 현실 논쟁에만 빠져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누구보다 통렬히 비판했고, 어둡고 절망적인 운동 상황에서 사회 구조와 문명의 전환을 통해 탈핵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10년과 녹색평론 30주년을 앞둔 지금, 그의 부재가 더욱 아쉽다.
출처: https://nonukesnews.kr/1861?category=634462 [탈핵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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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이 민주주의임을 알려준 김종철 선생
고 김종철 선생을 기억하며 _ (2)반핵이 민주주의임을 알려준 김종철 선생
김현우 편집위원, 탈핵신문 2020년 7월(79호)
자신이 발행하는 <녹색평론>과 녹색평론사의 책들을 통해 핵에너지의 본질적 문제점을 앞서서 환기해 온 김종철 선생이었지만 후쿠시마 핵사고의 충격은 그에게도 엄청났을 것이다. 사고가 일어난 2011년 3월 11일 직후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해야 할지 막막해할 때 그는 사람들과 긴 시간을 들여 대화하고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그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가 특히 강조했던 것 중 하나는 핵이 존재하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후쿠시마 사고 열흘 뒤인 3월 21일 <한겨레>에 실은 ‘원자력과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핵사고는 우리가 순응해야 할 재해가 결코 아니며, “원전이란 원폭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국가의 군사적 야망과 핵 자본의 이익, 기생적인 정치가, 관료, 학자, 언론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해에 여러 차례의 강연에서 핵발전의 비민주성을 조목조목 파헤쳤다. 핵발전 가동을 위해서는 세 가지 차별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너무나 설득력이 있다. 첫째는 원자로 내부에 들어가 피폭을 무릅쓰고 일해야 하는 하도급 노동자가 겪는 차별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는 이 차별이 제염 작업 노동자로까지 확대되었다. 둘째는 지방과 서울의 격차 문제다. 김종철 선생은 차별의 문제를 의식하는 서울시장 후보라면 서울시만 좋게 하겠다는 공약을 할 게 아니라 핵발전소를 서울시에 짓겠다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세 번째의 격차는 현세대와 미래 세대의 격차다. 현세대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핵폐기물을 처리할 곳이 없는 데도 핵발전을 계속하는 것은 차별이자 반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는 이 세 가지 차별을 기초로 하지 않고서는 단 한 순간도 성립할 수 없는 게 핵발전 시스템이라고 일갈했다.
그가 일본에서 어렵사리 반핵의 목소리를 이어 온 ‘시민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 선생과 양심을 지키려다 평생 교토대학 원자로연구소의 조교로 근무해야 했던 고이데 히로아키 선생을 한국에 소개한 것도 그들과 느끼는 동질감, 그리고 그들의 존재를 통해 알리고 싶은 핵발전과 윤리, 그리고 민주주의의 관계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 4주년이 되는 2015년 3월 11일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에서 그는, 핵발전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또 한 번 환기했다. 그즈음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설계수명이 다한 월성1호기의 연장 가동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당시 원자력안전위 위원장은 연장 가동을 반대해 온 사람들을 “외부세력”으로 지칭하며 “기술문제에 정치가 개입하는 현실”을 비난했다. 하지만 김종철 선생은 이런 발언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 혹은 몰이해의 소산이라고 반박했다. 핵발전소 건설이나 운영에 관한 ‘노하우’는 전문가들의 몫이겠지만, 원전 자체의 사회적 용인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주민과 시민들이어야 한다는 것은 민주사회의 대원칙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나라의 중대사를 좌지우지하는 이 한심한 상황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사용후핵연료 공론화 파행 상황과 정확히 들어맞는 대목이다.
핵폐기물 처분의 불가능성을 “화장실 없는 맨션아파트”라는 유명한 비유로 잘 알려진 다카기 박사의 책 제목은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이다. 거짓 신화로부터 해방될 때 우리는 자율성과 민주주의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민주주의를 위해 반핵은 필수이며 또한 반핵은 민주주의와 함께해야만 올 수 있다는 것은 김종철 선생이 우리에게 건네준 잊지 말아야 할 가르침 중 하나일 것이다.
출처: https://nonukesnews.kr/1862 [탈핵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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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종철 선생을 기억하며 _ (3)김종철 선생을 떠나보내며
김복녀 통신원(원불교 원자력정보연구소 소장), 탈핵신문 2020년 7월(79호)
단순하게 살고 싶어 시골살이 준비하던 2011년 3월, 핵발전소 터지고서야 동일본 지진을 알았다. 2011년 시월, 나는 핵발전소 사정권에서 가장 먼(?) 서울로 이사했다. 내 메일 아이디는 ‘단순명쾌’. 위도 핵폐기장 싸움 시절 짧고 쉽게 핵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정했다. 후쿠시마 이후 뉴스 말고도 반핵아시아포럼 메일이나 인터넷 속의 정보와 절규가 넘쳤다. 에너지활동가들에게 탈핵 관련한 내용을 메일로 보내면서 메일링 주소에 김종철 선생이 계신 줄은 몰랐다. 어느날 김종철 선생이 ‘단순명쾌’가 누구냐고 좀 만나자 하셔서 처음 뵙게 되었다. 아마도 ‘사요나라 핵발전소’ 발표 즈음이었을 거다.
2012년 유월, ‘탈핵학교’ 운영위원장에 김정욱 교수, 교장 선생님으로 김종철 교수를 모셨고 나는 실무를 맡았다. 강좌는 물론 모임에서 들려주신 얘기도 알곡 챙기듯 새겨들었다. 한 친구는 그 어려운 어른 앞에서 밥이 넘어가느냐고 했다. 나는 행운이란 생각에 밥 먹고 차 마시는 내내 들떴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 정기 법회 때 ‘녹색평론’ 속 얘기를 자주 하시고 구독을 권유하신 모양이다. 김종철 선생은 창간호부터 진열해놓은 길상사 ‘맑고 향기롭게’ 사무국 풍경을 보고 자기 집에도 그렇지 못한다며 감사를 전한다. 선생님은 법정 스님 생전에 만나지 못했음을 한탄하고, 여러분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나처럼 후회 말고 바로 만나라고 당부한다. 강원도 암자에 계신다지만 길상사 법회 오실 때 “제가 김종철입니다”라고 다가갔으면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술회한다. 선생님은 ‘알량한 자존심’에 먼저 다가가지 못했다지만 나는 선생님이 수줍음이 많아서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타고난 수줍음 떨치고 낯선 이들 앞에서 하는 ‘강연 여행’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김종철 선생은 광주에서 5·18 상황도 모른 채 학교 인근에서 술잔 기울인 것이 살아가는 내내 아픔이었다고 했다. 타인의 아픔을, 타지 고통을 몰랐다는 것 자체로 자괴감을 크게 느끼는 분이라 지병도 얻었지 싶다. 선생은 자주 피곤할 수밖에 없는 몸으로 살면서도 죽음을 거스르려는 노력을 ‘불경’이라고 여겼다. 가톨릭 일꾼 세미나에서 “생로병사를 통틀어서 생명”이라며, 한창 기운이 팔팔하고, 성생활도 왕성하고, 머리에서 윤기가 나고, 이런 게 ‘표준’인 사회는 병든 사회라고 했다. 선생은 이런 병든 사회에서는 누구나 돈을 들이든지 성형외과를 가든지, 보약을 먹든지, 화장을 하든지, 건강한 상태로 젊은 상태로 복원하려고만 든다며, 생사와 관련해서는 ‘인명재천’ 사상을 가장 높이 사셨다.
선생님은 녹색평론을 내면서 망하면 관두리라 생각했는데 예약금이 계속 들어와 중단하지 않았다고 하셨지만, 정기 발행이란 얼마나 고되고 대단한 일이겠는가. 선생님은 필자를 발굴하고 영어권 일어권 자료까지 찾아내느라 새벽 2시까지 공부하셨다.
나는 비교적 핵발전소 문제를 일찍 알았지만, 무력감 보따리도 끼고 살았다. 선생님 가시고서야 뒤늦게 찾은 영상에서 무력감에 대항할 귀중한 답을 찾았다. 변혁을 추구하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권력에 ‘저항의 흔적’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말씀에 ‘이래 봤자...’라는 생각은 다시 안 하기로 했다.
출처: https://nonukesnews.kr/1863?category=634462 [탈핵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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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공락을 위한 담대한 상상과 실천
작지만 큰 공존을 위한 성찰
고영직 _ 문학평론가 2020.07.13.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Luis Su’lveda, 1949~2020)의 소설 『연애 소설 읽는 노인』(1989)을 다시 읽는다. 적도 부근 아마존 땅, 엘 이딜리오에 사는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가 치과의사인 루비쿤도 로아차민이 건네주는 연애 소설을 자신의 오두막에서 고독을 즐기며 읽는다는 기본 플롯의 소설이다. 글을 쓸 줄은 모르지만, 읽을 줄 아는 노인이 연애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저작(詛嚼)하듯 즐기며 읽는 모습이 재미있다. 예를 들어 노인은 “그런데 키스를 할 때 어떻게 하면 ‘뜨겁게’ 할 수 있지?”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며, 두 남녀가 사랑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결국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연애 소설에 심취한다.
그런데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제목처럼 마냥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아니다. 뚱보 ‘읍장’으로 대표되는 국가 권력이 ‘발전’과 ‘성장’이라는 이름을 앞세우며 등장하는 백인 노다지꾼, 밀림 개발꾼, 원전회사들과 더불어 아마존 밀림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내용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그들은 아마존 밀림이 주는 ‘주인 없는 푸른 세계’의 매력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이 전혀 없다. 자연에 대한 경외(敬畏)의 마음을 잃어버린 탓일까. 그들은 살쾡이·꼬리긴원숭이·금강앵무새메기·보아뱀 같은 아마존 유역에 사는 온갖 동식물들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모른다. 그들의 눈에는 아마존 밀림은 ‘푸른 지옥의 세계’일 뿐이다.
‘혼맹’이 되어버린 근대 문명인들 고발
루이스 세풀베다는 작중 노인의 행동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공생(共生) 관계가 근본적으로 훼손되어버린 근대의 파괴적인 시간을 고발한다. 나는 아마존 밀림을 둥지 삼아 사는 수아르족 인디오들의 생활양식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포스트휴먼(post-human)’의 감수성을 역설하는 대목이야말로 아마존을 위한 위대한 서사시와 같다고 생각한다. 수아르족은 ‘낮에는 인간과 밀림이 별개로 존재하지만, 밤에는 인간이 곧 밀림이다’라는 원리를 철저히 따르며 아마존에서 산다. 젊은 시절 노인 또한 이들과 생활하며 ‘인디오-되기’의 과정을 몸으로 학습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인이 백인 개발업자를 물어 죽인 암살쾡이를 결국 총으로 쏘아죽인 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부끄러움과 회한의 눈물이라는 점은 설명이 따로 필요 없으리라. 소설 속 노인의 사고와 행동에서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이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다른 자기들을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한 근대 문명인들의 유아적 고립 상태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제시한 ‘혼맹(魂盲, Soul Blindness)’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 근대인들은 자연(=대지)에서 우리 모두가 존재의 사슬을 이룬다는 점을 철저히 망각한 헛똑똑이 ‘까막눈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노인이 오직 연애 소설에 탐닉하는 이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쓰인 연애 소설이야말로 이따금 인간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세풀베다가 아마존 밀림을 지키다 무장 괴한들에게 불의의 죽임을 당한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Chico Mendes, 1944~1988)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애석한 것은 피노체트 군부가 일으킨 1973년 9·11 사태 이후 망명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세풀베다가 지난 4월 스페인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희생자가 된 것이다. 2005년 방한 당시 『소외』 『핫라인』 같은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을 한국 독자들에게 설명하며 지구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는 ‘상상력의 국제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던 장면은 내 인생의 문학 수업이었다고 자부한다. 피노체트 독재 경험에 맞선 자의 실존적 ‘소외’와 더불어, 독재 이후 칠레 사회에 일상화된 ‘사회악’을 고발했던 루이스 세풀베다의 문제의식은 최근 번역 출간된 소설 『역사의 끝까지』(2016/2020)에서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앎은 앓음’이다
문제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이 그 누구도 종료 시점을 자신할 수 없는 ‘위드(with) 코로나’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 이른 코로나19 확진자가 7월 1일 기준으로 1천만 명을 돌파했고, 사망자는 무려 50만 명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인들은, 아니 한반도 주민들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매우 회의적이다. 리베카 솔닛이 처음 언급한 외상 후 성장이란 트라우마적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예전보다 더 나은 쪽으로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코로나 블루처럼 정신적 외상은 분명 실재하겠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이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지난 6월 25일 생태 사상가 김종철 선생(1947~2020)의 죽음은 못내 비통하다. 1991년 [녹색평론] 창간 이후 30년 동안 기후 위기를 비롯한 생태계 파괴 같은 ‘자연의 역습’ 상황을 어느 누구보다 예민하게 앓으며 온몸으로 걱정했던 선생은 말과 글을 통해 ‘인간을 초월한 인간’을 지향하는 사이비 휴머니즘 따위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공생공락(共生共樂)하는 좋은 사회를 향한 철저한 민주주의자로서, 생태 사상의 독전관(督戰官)으로서, 지난 30년 동안 ‘발전’과 ‘성장’ 담론 같은 경제성장 제일주의에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특히 『녹색평론』 173호(2020년 7~8월호)에 실린 「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의 행간을 더듬으며, 이른바 근대인들의 ‘언어’에 대한 비판에서 선생의 예리한 문제의식을 확인하게 된다.
선생은 말한다. ‘혼(魂)의 구제’와는 거리가 멀어져 버린 근대 문명인들의 언어는 흙과 함께 살아온 백성들의 정신세계로부터 아득히 떨어져 나간 데에서 비롯한다고. ‘흙’을 의미하는 라틴어 ‘후무스(Humus)’라는 말이 ‘겸손’을 뜻하는 ‘휴밀리티(Humility)’와 어원이 같다는 점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소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근대인들은 흙에서 한사코 멀어짐으로써 겸손의 미덕과 자연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결국,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나와 우리 일신의 안락(安樂)을 위한 전체주의를 용인한 결과라는 문제의식이 아닐 수 없으리라. 선생이 철학자 이반 일리치를 비롯해 영국 시인 블레이크, 일본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 우리나라 시인 백석 그리고 미국 작가 웬델 베리와 리 호이나키를 깊이 사랑한 이유를 헤아려보아야 마땅하다. 이들은 하나같이 침통한 눈빛으로 ‘근대의 어둠’을 깊이 응시하며, ‘현재는 과거의 미래’(이반 일리치)라는 점을 투시한 작가들이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코로나19 시대, 예술 혹은 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루이스 세풀베다와 김종철의 삶과 문학을 더듬으며 ‘앎은 앓음이다’라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예술(교육) 활동이 과연 누구의 편에서 일하느냐를 성찰하며, 담대한 사유와 급진적인(radical)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사회적 유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종철 선생이 어느 후배 시인에게 남긴 말은 ‘탐욕’이라는 바이러스에 맞서 우리 자신이 ‘흙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괜히 어려운 소리 하지 말고, 고향을 잃고, 잃어가는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솔직히 나누는 게 문학의 본질이 아닌가 싶어.”
두 사람의 문학(=예술)과 사상을 디딤돌로 딛고 징검다리로 활용해 지금 여기에 실현 가능한 ‘언더그라운드’ 유토피아를 세우는 데 예술(교육)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그 유토피아는 분명 경쟁과 희소성 모델에 근거한 서바이벌 사회는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가 패배자가 되는 서바이벌 사회가 아니라 우정과 환대에 기초한 ‘지탱 가능한’ 공생공락의 사회여야 한다. ‘교만의 기술’(그레고리 베이트슨)을 넘어,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자연과 생명을 바라보려는 시인(=예술가)의 마음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나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행동하려는 담대한 실천이 요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기후야 그만 변해, 나부터 변할게’ 같은 비전을 공유하고, 일상적으로 작은 실천을 하는 예술(교육)적 과정이 필요하다. 세풀베다, 김종철, 위대한 작가이고 사상가였던 두 분의 죽음을 두 손 모아 애도한다.
http://arte365.kr/?p=80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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