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5일 일요일

국제신문 기획시리즈- 기억하라 그날의 함성〈 5 〉 부마정신의 계승과 과제, 2004년 10월 14일

◇부산 민주화운동 일지

1974 4월3일 인민혁명당 재건사건 발표

1975 5월13일 긴급조치 9호 발동

1976 2월10일 중부교회 책방골목사건

1977 4월 부산도시산업선교회 창립

1978 4월5일 양서협동조합 설립

1979 8월7일 YH무역사건

10월9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 위원회 사건

16일 부마민주항쟁 발발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1980 5월18일 5·18민중항쟁

1981 9월7일 부림사건 조작발표

1982 3월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5 5월3일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결성


#역대 정권의 부마항쟁 인식

지난해 4·19혁명 43주년 기념 행사때 노무현 대통령은 "4·19혁명의 정신은 부마항쟁·광주항쟁, 그리고 6월항쟁으로 이어져 오늘의 참여정부에 이르고 있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6·10항쟁 16주년을 맞아서도 부마항쟁을 언급,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이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냈다며 관련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참여정부의 부마항쟁 인식은 구체적인 것은 없어도 일단 긍정적이다.

군사정권에 의해 '난동·소요'로 매도됐던 부마항쟁이 처음 역사적으로 복권된 것은 지난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초기였다.

당시 김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부마민주항쟁을 "우리나라 민주발전사에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으로 규정, 그 성격과 의미를 재평가했다.

비록 별도의 후속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지만, 부마항쟁은 이때부터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과 함께 한국 민주운동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된 것이다.

지난 7일 부산을 방문해 민주공원을 찾은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도 "부마민주항쟁기념일을 국가적인 행사로 준비하는 방안을 정부 관련 부처와 협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끝나지 않은 유신체제

부마항쟁은 10·26사태와 박정희 정권 몰락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4·19혁명이 12년 자유당 정권을, 6월 항쟁이 전두환 군부통치를 종식시켰듯, 부마항쟁은 18년 박정희 철권통치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됐다. 80년 항쟁과 87년 6월항쟁이 부마항쟁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경성대 안철현(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전에 일부 대학생들의 산발적인 데모 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부산의 척박한 민주운동 토양에서 부마항쟁은 인적·이념적 저수지 역할을 했다"며 "70년대 부산 경남지역 민주화 운동의 모든 기운이 부마항쟁으로 흘러 들어갔고, 이후의 민주화 역량도 모두 이곳을 기점으로 뻗어나갔다"고 평가했다.

물론 그것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시발점일 뿐이었다. 부마항쟁 자체가 군병력 투입을 통한 무력진압으로 일단락됐고, 박정희 정권의 몰락 역시 권력 내부의 암투와 맞물린 10·26을 통해 마무리가 됐다는 점에서 부마항쟁은 미완의 항쟁이었다.

특히 그러한 성과마저도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한 채, 신군부의 쿠데타로 다시 빼앗겨버리는 상황을 맞이했다. 부마항쟁이 광주나 6월항쟁처럼 전국적이고 장기적인 시위로 이어졌다면, 신군부가 들어서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지지부진한 보상·명예회복

부마항쟁 주역과 직접 관련자들에 대한 보상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지난 2000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는 지금까지 120차례에 걸쳐 6500여명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이 가운데 명예회복은 6000건, 보상은 497건이 이뤄졌다.

부마항쟁의 경우 부산에서만 1058명이 연행돼 6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고, 마산지역은 505명 연행, 59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지만 극히 일부만이 관련자로 인정받았을 뿐 명예회복이나 보상은 단 한명도 이뤄지지 않았다.

관련자 대부분이 10·26사태가 터지면서 방면되거나 공소기각이 되면서 현행법상 요건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부마항쟁정신계승위원회 관계자는 "당시 대부분 30일 이상 구금된 상태에서 온갖 고문에 시달리는 등 고통을 겪었는데 실형 기록이 없다고 해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화합에 기여한다는 법 제정 취지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당사자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소외감은 부마정신이 고질적인 색깔논쟁과 지역주의 앞에 짓눌리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부마정신 계승은 시대적 과제

부마항쟁은 서슬 퍼렇던 유신체제를 송두리째 흔든 항거임에도 4·19나 6월항쟁과는 달리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오히려 지역에 한정시키려는 분위기마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부산 시민들이 스스로 나서 부마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부산지역의 자랑스런 민주항쟁 역사를 재조명해 지역민들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민주주의 교육자료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

부산대 이행봉(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시 시민 대중이 제기했던 인권보장·독재타도·언론자유 등은 요즘 우리 사회가 제기하고 있는 국보법 폐지와 과거사청산 등과 엄연히 연결돼 있다"며 "부마정신을 통해 이같은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부마항쟁이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기폭제가 됐지만 박정희 없는 박정희 시대는 지금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안철현 교수는 "부산의 정치지형은 복잡하다"고 전제, "지금처럼 고질적인 지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41015.22005205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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