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의 수하한화]‘좋은 삶’과 4대강 파괴
지금 세계는 전대미문의 복합적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기후변화와 환경위기, 석유 및 각종 자원이 값싸고 풍부하게 공급되던 시대의 종식, 광범위한 농경지 축소 혹은 사막화, 근대적 금융통화제도의 파탄과 세계 동시 채무위기, 사회적 격차의 심화, 걷잡을 수 없는 실업률과 범죄의 증가 등등, 인간다운 삶의 지속을 근원적으로 위협하는 사태 앞에서 인류사회는 현재 속수무책이다.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도 믿지 않는 헛된 공약을 남발하며 임시미봉책에 골몰할 뿐, 미래에 대한 신뢰할 만한 장기적인 비전을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무능력의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답한다면, 아직도 그들이 성장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져보면, 오늘의 이 위기상황은 유한한 지구상에서 무한한 진보의 추구라는 맹목적인 성장 논리가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기술적 재간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지구가 제공하는 한정된 자원과 생태적 조건을 벗어나서 영위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 근본적 제약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이라는 주문(呪文)을 무작정 외며 위기를 돌파하려 해봤자 헛일이라는 것을 아직도 세계의 다수 권력 엘리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2010년 시정연설에서 “지금부터 세계에서 창출되는 고용은 전부 미국 내에서 생기지 않으면 안된다” 혹은 “미국경제의 성장에 공헌하지 않는 외국인 젊은이들을 미국 대학에서 교육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따위 난폭한 발언을 주저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경제성장에의 뿌리 깊은 신앙 때문이다. 그러나 오바마식의 접근방식이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인 성공을 거둘 확률은 제로라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기의 원인을 가지고 위기를 해결하려는 어리석고 무모한 방식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낡은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는 정치세력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주목할 것은 세계 곳곳에서 대안적 방식을 찾는 진지한 움직임이 근래에 한층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유럽에서는 유로권 경제(나아가 글로벌 경제)의 사실상 파산을 진작부터 예견하면서 상당수의 지식인·활동가들이 탈성장 사회와 새로운 경제논리를 탐색하고 논의하는 장을 계속적으로 확대해왔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에서도 눈에 띄게 이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정치는 여전히 미망 속을 헤매고 있지만, 사회 저변에서는 이제부터는 성장 확대가 아니라 축소균형의 경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이겠지만, 지난 1년간 일본 아마존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서적의 제목도 ‘작은 상업의 권유’였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 중에서도 가장 괄목할 곳은 아마도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일 듯싶다. 예를 들어, 에콰도르와 볼리비아가 특히 그렇다. 이 두 나라는 룰라의 브라질이나 차베스의 베네수엘라가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아온 것에 가려져 왔지만, 자본주의 이후의 삶의 대안적인 모델 제시라는 면에서 매우 모범적인 개혁을 착실히 수행해왔다. 그 가운데서 특기할 것은 각기 2005년과 2006년에 선거를 통해 민주정부가 수립된 이후 ‘좋은 삶’을 강조하고, 근대국가로서는 최초로 ‘자연의 권리’를 명확히 규정한 새로운 헌법 제정이다. 여기서 ‘좋은 삶’이란 종래의 상투적 행복관, 즉 풍부한 재화의 소유나 소비를 기반으로 한 개인주의적 삶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동체 속의 조화로운 관계를 중시하는 검소한 삶을 뜻한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두 나라의 신헌법에서 말하는 공동체란 인간공동체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연만물이 어울려 사는 생명공동체 전체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좋은 삶’이란 인간끼리의 관계를 넘어서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근본 인식이 이 헌법에 내포돼 있는 것이다. 신헌법에서 ‘자연의 권리’를 명시해 국민들이 자연의 혜택을 누리는 대신에 자연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헌법에 명시된 ‘자연의 권리’라는 사상은 기본적으로 안데스 전통문화의 세계관·자연관을 토대로 한 것이다. 안데스 토착문화는 원래 파차마마(어머니 대지)에의 끝없는 공경심에 기초한 문화였다. 안데스의 농민은 대지를 단순히 땅이나 흙덩어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지는 만물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돌도, 흙도, 온갖 식물도, 물도, 안개도, 바람도, 해와 달과 별도 모두 자신들과 함께 사는 식구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연만물을 인격화해 ‘그이’ 혹은 ‘그이들’이라고 불러왔다. 이러한 근원적인 생명 옹호 사상과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바탕으로 그들은 생태적 악조건 속에서도 놀랄 만큼 다양한 작물을 만년 이상 길러왔다. 세계 전역에서 생물종이 급속히 소멸되고 있는 지금도 안데스 농가에서는 평균 50종 이상의 감자를 수확하고 있다.
결국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의 신헌법이 언급하고 있는 ‘좋은 삶’이란 서구인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식민화되기 이전의 토착문화에 내포돼 있던 근원적인 생명가치의 복구를 통해 지금 자본주의 이후의 삶에 대한 창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세계는 자유, 평등, 우애를 늘 말해왔지만, 본시 그것은 자연과 사회적 약자를 원천적으로 배척·차별하는 구조 위에서만 작동 가능한 자본주의 논리로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일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안데스의 이 두 나라 신헌법은 세계사의 오래된 숙제를 푸는 해법을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지구의 다른쪽에서는 이처럼 중대한 정신적 각성에 따라 진지한 정치적 실험과 사회적 개혁이 시도되고 있는 동안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공동체의 가장 값진 보물 중 보물인 4대강과 그 주변 농경지를 철저히 파괴하고 유린하는 광태가 벌어졌다. 게다가 그 광란은 ‘녹색성장’이라는 거짓이름 밑에서 정권의 최대 업적으로 국내외에 널리 선전되었다. 부끄러운 것은 둘째 치고, 이 광란의 후유증으로 ‘좋은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반이 영구히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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