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기획 - 2013년을 말한다](2) 최장집 교수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ㆍ“국민의 절실한, 엄중한 요구에 비해 대선 후보들이 너무 약했다”
ㆍ“안철수씨 제3정당 만들어 양당구조 깨는 게 한국 정치에 더 바람직”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국정 방향을 놓고 “‘박정희식 발전모델’은 권위주의와 정치적 억압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불완전한 모델”이라며 “아버지를 단순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 개인 연구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최 교수는 “이번 대선은 민주진보 진영의 쇠퇴나 실패가 아니라 당으로서 제대로 조직과 역할을 갖추지 못한 민주당의 전략적 실패”라며 “긴 쇠락의 마지막 과정에서 민주당은 간신히 후보를 만들긴 했으나 결국 힘을 모으지 못했다”고 말했다.
▲ 박 당선인 통합 내용 빈약
사회적 약자 인정해야 진정한 통합 이뤄져
▲ 또 경제민주화 통해
아버지 단순계승이 아닌 그 유산에서 벗어나야
- 18대 대선을 어떻게 봤는지 총평을 부탁한다.
“대선에서는 ‘지금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요구가 어느 때보다 컸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변화 요구가 절박했고, 노동, 복지, 고용확대, 빈곤문제 등 사회경제적 이슈가 전면에 부상한 최초의 대선이었다. ‘전환적 리더십’이 요구됐다. 그러나 시대적 엄중함에 비해 후보들은 너무 약했다. 국민의 요구는 절실했으나 정치적 대응은 기대할 게 없었던 선거였다.”
- 이번 대선 결과가 갖는 의미는.
“한국 정치사에서 두 차례의 민주정부가 있었지만 실망이 컸다. 뒤를 이은 이명박 정부도 실패했다. 거듭된 실패 속에서 이번 선거가 정치 발전의 계기를 만들었으면 하는 희망이 컸다. 나는 이번 선거가 과연 ‘중대선거(重大選擧 ·critical election·정치가 크게 재편되는 선거로 한국의 1987년 대선이 이에 해당)’가 될 수 있다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2013년 체제’라는 말은 현실에 기초하지 않았던, 단지 관념적이고 추상화된 어떤 이상이랄까, 희망을 담은 슬로건적 담론이상이 아니었다. 중대선거가 되려면 정당체제가 재편되고 전환적인 리더십을 갖추는 게 필요한데, 이번에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후보들은 강력한 후보들이 아니었다. 보수를 대표하는 박근혜 후보는 시대가 요구하는 미래비전이나 변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먼 것으로 보였고, 민주당후보는 의미있는 정치적 경력이 없는 후보였다. 후보들 중에 누가 더 바람직하고 이상적인가를 평가하기보다는 덜 약한 후보를 선택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새누리당 후보의 승리는 상대적으로 잘 정비된 당 조직과 좋은 전략의 결과물이다. 반면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의 전략은 진보 진영은 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주의적 민주관’이 지배했다. 민주당이 한 파벌의 범위를 넘어 통합적인 정당으로서 기능하지 못한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였다. 되돌아보면, 민주당은 지금까지 정치개혁의 이름으로 여론조사 정치와 모바일 경선을 도입했는데, 이것이 정당을 급진적으로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민주당에서는 이번 선거를 선과 악의 대립에 기초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설정했다고 할수 있겠는데, 선거결과는 이런 식의 진영간 대립을 전제로 한 전략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이번 대선은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교과서적인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번 대선 과정은 4·11 총선의 실패를 반복한 것이기도 하다. 안타깝지만 예견된 것이었다.”
- 정당정치를 그나마 구현한 새누리당의 승리라고 했는데, 박근혜 후보가 선택받은 결정적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는가.
“ ‘민주 대 반민주’ 슬로건이 왜 틀렸는가를 입증했다. 유권자들이 민주당의 바람과는 달리 이번 선거를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의 대결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권교체는 회고적 심판의 요소가 강할 때 발생할수 있다. 원래 원래 선거는 회고적 심판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현직 정부가 인기 없다고 해서 정권이 교체되는 것은 아니다. 필요조건일 수 있어도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민주화 이후 우리 유권자들의 중요한 평가 기준은 후보가 속한 정당이 과연 좋은 정부가 될 수 있는가이다. 좋은 정책을 실현할 능력을 가진 정부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정당은 평상시 유권자들에게 신뢰할 만한 집단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회고적 투표의 수혜자가 될 수 있으려면 전망적 견지에서도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이 점에서 민주당과 후보가 취약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높은 불만과 반감에도 새누리당이 재집권한 것은 민주당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결과다.”
- 세대별로 표심이 갈린 것이 이번 대선의 특징이라는 분석이 있다. 2030세대와 50대 사이에 정치의식에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가.
“ ‘세대별 표심’ ‘세대 균열’이라는 말은 세대를 사회경제적 공동의 조건을 공유하는 그룹으로서 범주화하는 것인데, 세대를 범주화하는 게 정확한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030 청년세대는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취약하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들이 기성질서에 가장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사실이다. 정치사회학적으로 세대를 중요한 기준으로 볼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이고 현상적으로 볼 때 2030세대가 그런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2030세대는 박근혜라는 대안에 정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긍정적일 수 없는 세대다. 그에 비해 50대는 민주화를 겪으며 민주정부에 기대도 컸고 그 기대만큼 실망도 함께 가진 경험을 한 세대다. 그래서 50대는 정치적 판단에 있어 이상과 이념적 요인에서 벗어나서 점점 더 현실주의적 선택을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50대가 그렇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그러나 사회경제적 조건과 상황이 청년세대와 중년세대를 갈랐다고 보진 않는다. 두 세대가 지금 다 어렵다. 두 세대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있어 상호 대립한다든가 차이가 있어서 다른 투표 행태를 보여준 건 아니다. 이들의 표 차이를 만든 것은 민주정부에 대한 경험과 실망이 가져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 50대는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정권교체로 본 것일까.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정당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메시지와 선거 전략 면에서 새누리당이 민주당보다 우월했던 결과다.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연결시켜서 회고적 심판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야권은, 진영논리의 틀에 사로잡힌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 집권 내내 ‘반MB’에 주력해왔다. 그러다가 대선 국면이 돼서 갑자기 ‘반박근혜’로 전환하다보니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 보이는 것이다. 박근혜 진영은 재빨리 당명을 바꾸고 당의 주도세력도 바꾸면서 새누리당과 이명박 정부의 분리에 주력했고 결국 성공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기간 동안 정국을 운영할 때 새누리당을 배제하고 소외시켰다. 역설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요소도 있다.”
- 사회적, 시대적 요구에 비해 후보들 면모가 취약했다고 평가했는데, 선거 캠페인은 진일보했다고 보나.
“유권자의 행태라는 측면과 정치적 측면으로 나눠 생각해볼수 있을것 같다. 유권자의 행태라는 관점에서 보면 과거에 비해 조용하고 차분하고 질서있게 치러진 선거였다. 그러나 정당을 중심으로 많은 유권자들이 선거에 참여했나를 살펴보면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선거법이 과도하게 선거과정에서의 열기를 가라앉게 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후보와 투표자 간의 접촉과 관계가 적극적이되고, 확대되는 것을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선거 과정이 기본적으로 정당 중심인 것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는 정당활동 대부분이 금지돼 있다. 민주주의 원리의 측면에서 볼 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민주화 이후 선거제도 개혁의 결과는 유권자를 탈정치, 탈정당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민주주의 중심 요소 중 하나가 참여라고 본다면 매우 부정적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 정치적 측면에서 본다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나.
“민주당이 선거막판에 ”나꼼수“로 대표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네가티브 전략을 펼쳤던 것은 유감이다. 지난 총선에서도 ‘김용민 사건’에서도 볼수있듯이 그러한 전략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것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되풀이했다. 민주당이 정상적으로 당을 조직하고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것에 진력하는 대신 단기적이고 즉각적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사용하려는 유혹에 빠진것 같이 느껴진다. 이런 선거운동방식은, 젊은 세대가 정치를 이해하고 참여하는 과정에 있어, 해악적인 영향을 미칠수 있다. 또 정치환경과 공론장이 과도한 공격성과 이견을 수용하지 않는 부정적 태도, 음모론에 쉽게 오염될수 있게한다.”
- 대선 결과는 민주화 세력이 많이 쇠퇴했음을 보여줬다는 분석이 있다.
“글쎄요. 민주화 세력이 쇠퇴했다는 표현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차라리 민주파엘리트들의 문제가 지적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선거과정을 운동 중심적으로 접근했고, 어떻게 능력있고 신뢰받을수 있는 대안적 정부를 만들수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제보다, 정서적 급진주의에 사로잡힌것처럼 보였다. 아마 ‘민주 대 반민주’를 고수하고 이것을 담론화하려는 언론, 지식인엘리트들의 영향력은 쇠퇴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을 민주진보 진영의 쇠퇴라고 보지는 않는다. 민주화 세력의 쇠퇴라는 말은, 부지불식간에 민주 대 반민주라는 진영 간 대립을 상정한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의 실패, 그리고 그 실패를 가져온 전략적, 이데올로기적 실패는 비판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을 민주화 세력의 쇠퇴라고 정의하는 것은 현실과 다르다고 본다. 이번 대선은 민주당이 당으로서 조직과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결과라고 본다. 정치적으로 신뢰할 만한 세력으로 거듭나면 야권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거의 변혁적인 변화를 해왔다. 문제는 이것을 제도적으로 더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걸 못한 사람들이 책임지고 비판을 받아야지, 전체적으로 진보 진영이 쇠퇴했다고 보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것 아닌가. 한 사회에서 진보적인 세력을 대표하는 표가 48%에 이른다는것은, 서구 어떤 나라에서도 보기어렵다.”
▲ 당으로서 조직과 역할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민주당의 전략적 실패는 비판할 수 있어도
민주화세력 쇠퇴했다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
-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고민이 진행되는 와중에 치러진 첫 대선인데 국민들은 보수를 선택했다. 이 같은 국민들 선택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봐야 하는가.
“정치가 잘못한 것을 신자유주의 문제로 돌리는 환원주의적 사고와 발상에 찬성하고 싶지 않다. 신자유주의가 정치·사회·경제적 기반과 민주주의를 위협할 정도로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지만 정치는 정치로서 자율의 영역이 있다. 정치가 잘하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사회경제적 결과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대선 결과를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로 돌리는 것은 정치가 할 수 있는 역할과 공간을 회피하게 하고, 보이지 않게 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이 경제운용에 대한 어떤 선명한 대립적 대안을 놓고 선택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려운 경제환경에서 어느 후보가 이 문제를 더 잘 해결하거나, 현실의 경제문제를 더 잘 해결할 능력이 있는가를 평가한 것이다. 새누리당도 신자유주의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경제민주화와 양극화문제, 복지확대라는 경제 이슈를 갖고 민주당과 경쟁했다.”
- 박근혜 당선인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과제를 무엇이라고 보는가.
“정치적·이념적 양극화를 완화하는 것이다. 승자를 지지하지 않았던 이들과 지역적, 세대적 대통합을 강조하는 것도 필요하다. 경제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성장과 경제민주화가 어떻게 병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통합’이라는 것이 그럴싸해 보이지만 내용이 빈약하다. 보통 반대편 진영의 인사들을 영입하면 마치 그 근원이 된 갈등까지 해소된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식의 통합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동안 통합 과정에서 전체 사회의 공익을 강조하다가 사회의 ‘부분 이익’들이 무시되고 억압되는 과정을 거쳐왔다. 경제성장 과정에서도 노동자들의 부분 이익은 무시되고 제대로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기회나 인권이 허용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우리는 심각한 노동문제를 안게 됐다. 진정한 통합을 위해서는 소외된 사회집단과 사회적 약자들을 인정해야 한다. 강자나 권력자들은 권위적, 온정적, 위계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다루고 국가 시스템을 통해서 혜택을 주려 한다. 복지도 온정주의적으로 접근한다. 집단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가치를 상호 인정하는 태도와 정책이 요구된다. 거기에 수반해서 부분 이익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 ‘부분 이익’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인정해야 하나.
“장 자크 루소의 말을 빌려보면 한국사회에서는 ‘일반의지’(개인의 자유로운 계약으로 성립하는 국가가 가지는 단일한 의지)는 존재해도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 이익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 전체의 공익은 특정 사회집단이나 이익과 병립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와 권력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목표가 정의되고 그것이 사회 전체에 부과되고 약자는 소외되는 과정을 거쳐왔다. 통합은 부분 이익과 전체 이익이 조화될 수 있어야 한다. 권위주의 시절에 썼던 ‘총화단결’이라는 단어를 지금은 쓰진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이런 요소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 박근혜 당선인이 부분 이익과 전체 이익의 조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새누리당이 민주적 가치에 부응하는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하다. 박 당선인이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새누리당의 변화가 곧 한국 사회 전체와 정당정치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박 당선인은 아버지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박정희식 발전모델’은 권위주의와 정치적 억압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불완전한 모델이다. 박 당선인은 경제민주화를 통해서 아버지를 단순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야 한다. 책임정치의 구현이라는 것은 평상시 통치할 때부터 순환적 관계로 굴러가야 한다. 국정운영에서 정당을 소외시켜서는 안된다. 행정부와 청와대 중심의 정치가 강해질수록 권위주의적 요소가 강해질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에 역할을 많이 부여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신도 좋고 중요한 전환적 계기를 만들 수 있다.”
- 이번 대선에서 정치쇄신이 화두가 됐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정치쇄신이라는 말은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애매한 말이다. 안철수씨가 정치쇄신을 들고나와 이번 대선에서 새누리당이나 민주당 모두 정치쇄신을 강조했다. 이번 대선이 경제민주화 이슈를 중심으로 갔다면 그 문제는 더 많이 진전됐을것이고, 더 구체적이 됐을 것이다. 정치쇄신이 갑자기 들어와서 논점이 흐려졌다. 한국의 정치는 정당이 발전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나는 제도를 통해 정치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에 반대한다. 정당공천 개방, 국민경선제 법제화, 국회의원 정수 축소 등의 안은 전부 정당의 기능을 약화시키거나 범위를 좁히는 개혁이다. 내 기준에서 보면 반민주적인것이 강한 표현이라면, 반개혁적이다.”
- 박 당선인의 초기 인수위 인사가 ‘깜깜이 인사’ ‘밀봉 인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의 경우 일부러 인사 전에 후보를 띄우고 여러 방향에서 평가와 비판을 받는다. 인사는 임명 전 검증 결과를 거치는 것이 맞다. 그러나 통치를 위임받은 지도자가 자신의 가치, 목표, 취향을 잘 이해하고 따르는 측근을 임명하는것을 부정적으로 볼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선 다른 나라에 비해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공직이 굉장히 많다. 제도적으로 대통령의 임명 범위를 정하고 줄이는 방향으로 개혁이 있으면 좋겠다. 현재 문제가 되고있는 MBC, KBS 사장 인사와 그로 인한 분란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정부에 의해 자의적으로 임명되는 인사의 결과이다. 새 정부는 이런 문제가 재발되지않는 인사원칙을 제도화하는 모델을 보여줬으면 한다.”
- 개헌의 필요성이 여러 번 제기됐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개헌은 쉽게 해선 안된다고 본다. 지금 제도를 갖고도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습관적으로 개헌해 권력의 구조를 바꾸는 것에 아주 비판적이다. 5년 단임제도 부정적이지 않다. 5년 단임제는 한국 민주화 정착 과정에 상당히 기여했다. 5년 단임제를 바꿔야 할 필요는 있을 수 있지만 권력이 바뀔 때마다 개헌을 내거는 것은 곤란하다.”
- 야권은 안철수라는 유력 후보는 물론 진보정당 후보까지 사퇴시키면서 총결집했지만 패했다.
“민주화 이후 보수 세력에 대응하는 민주진보 세력이 단일 정당으로 조직화하는 데 실패했고, 이것이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민주진보 진영은 ‘운동’의 방식과 논리, 언어로 민주주의를 이해했기 때문에 정당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실현가능한 이념과 정책 프로그램을 가지고 통치하는 능력을 배양하지 못했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진영 간 대립으로만 일관했을 뿐 국가를 운영하는 대안세력으로서의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이분법적 진영논리를 만들어내고, 이런 것이 민주진보 진영 내에서 다양한 이념이나 정책 대안의 정치세력화를 억압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안철수 현상’에서도 나타난다. 안철수 현상의 핵심은 무당파가 민주당의 규모만큼 커졌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실패이기도 하지만, 이 영역 안에 다양한 정치이념과 이해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세력이 하나의 정당으로 대표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대통령 중심제의 투표는 양당제를 부추기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 힘이 야권에는 끊임없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상대적으로 한국의 보수 세력은 단일 정당으로 통합하는 데 있어 야권보다 잘해왔다.”
- 그렇다면 민주당은 깨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꼭 그런 뜻은 아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 야권의 재편은 불가피해 보인다. 야권 재구성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돼야 하나.
“민주당의 강령이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인데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넓은 의미에서는 현실적인 정책과 대안을 발전시키고, 진보를 향해서는 사민주의와 결합해 외연을 넓힐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이런 노력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확대해야 한다. 이런 노력 없이는 정당으로서 구실을 하기 힘들다. 현재 민주당의 진로는 자유주의적인 정당으로 가는 방향도 있을 것이고, 보다 진보적인 사민주의적 영역까지 확대하는 포괄정당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주당의 방향은 광범하게 열려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야말로 포말 같은 이론이다. 민주당이 정당 기초부터 만들어 나가는 노력 외에 무슨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
- 18대 대선은 1987년 이후 진보 후보가 없는 첫 선거였다. 이번 대선에서 진보정당 역할은 무엇이었고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한다고 보는가.
“노동자의 이익과 요구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이번 대선에서 느껴지는 것은, 한국 진보정당의 초라한 모습과 해체였다. 나는 여기에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에 대해서나,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에 대해 새삼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노동 세력이 꼭 정당으로 발전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들이 표로 결집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정당과 함께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 단일화 폐해를 막기 위해서는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는데, 어떤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결선투표제 도입이야말로 민주진보 세력의 최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 단일화 문제로 상당히 큰 의미가 될 수 있었던 대선을 망쳤는데 결선투표제가 있었다면 야권이 분명히 이겼을 것이다. 1차에서 50% 득표를 받지 못해서 결선으로 가면 일단 검증기간이 더 길어지고 후보와 정당의 실력이 충분히 드러날 수 있다. 결선투표제는 다당제의 장점도 유지할 수 있다.”
- 여당이 19대 대선에서 결선투표제 도입을 받을까.
“여권 후보도 항상 통합돼 있는 것은 아니다. 여야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사명감을 갖고 양보하면 안될 이유가 없다.”
- 안철수의 첫 대선 도전을 어떻게 평가하나. 앞으로 그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한다고 보는가.
“신자유주의하에서 누적된 청년문제를 안철수씨가 사회적 문제로 제기하고 정치적 이슈까지 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역시 정치는 정치다. 기성정치의 무대 안으로 들어온 뒤 안철수씨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그가 나타난 것은 현대정치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적 현상이다. 정당에서 대표되지 않았고 제기되지 않았던 이슈가 카리스마적인 인물을 통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뒤 소멸되거나 정당으로 통합되거나 둘중 하나이다. 그 자체로서는 오래갈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가 제3의 정당을 만들지, 민주당으로 들어가서 개혁의 중심 역할을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민주당에 들어가서 개혁하는 것을 중요한 역할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제3의 정당을 만든다면 그것 자체가 한국 정치사와 정당체제의 중대한 변화다. 한국 정치는 양당 구조가 기본 틀인데 제3의 정당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바람직하다. 양당제가 잘못 돌아가면 일종의 담합구조가 된다. 안철수씨가 한국 정치사에 기여하려면 제3의 정당을 만들어서 성공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다. 민주당의 개혁을 위해서도 외생적 정당의 충격은 필요할 것 같다.”
<인터뷰 진행 | 이중근 정치부장>
▲ 최장집 교수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70·경향시민대학장)는 진보 진영의 대표적 민주주의 이론가다.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83년 미국 시카고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5년간 모교에서 강의했다. ‘한국 민주주의와 정당’이라는 화두를 연구하며 현실 정치와 한국 사회 정치담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최장집 사상 검증 사건’을 계기로 대중에게도 알려졌다. 김대중 정부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이던 1998년 11월 ‘월간조선’은 그가 쓴 한국전쟁 관련 논문의 일부 문구를 문제 삼아 그가 ‘친북적’인 대북관과 전쟁관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 교수는 일부 표현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며 조선일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최 교수의 손을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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