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4일 월요일

염무웅 선생의 회고--백지연 교수



개헌청원 낸 문인들 구속, 저항의 ‘자실’이 싹 텄다
[한겨레] 김경애 기자 기자블로그 기자메일
등록 : 20141116 19:00 | 수정 : 2014111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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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① 백지연이 묻고 염무웅이 답하다
» 1974년 11월18일 서울 광화문 문인협회 사무실이 있던 의사회관(지금의 교보빌딩) 현관 앞에서 문인 대표들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식을 한 뒤 ‘자유실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와 ‘자유언론 실천 선언’ 언론인 대량해직 사태를 비판한 이 선언 직후 대부분은 경찰의 닭장차에 실려 끌려갔다. 왼쪽부터 송기원·고은·조해일·황석영·임정남·염무웅·박태순·윤흥길 등이다. 작가회의 제공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첫 주자인 문학평론가 염무웅(오른쪽) 교수와 백지연(왼쪽)씨가 회고한 60~70년대 문인운동의 전사와 작가회의 창립의 배경을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사진은 두 선후배가 지난주 서울 운니동 운현궁 돌담길을 걸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다.

이어 소설가 이호철-유시춘, 시인 고은-김형수, 문학평론가 백낙청-임홍배, 시인 양성우-이승철,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염무웅은

염무웅(73) 영남대 명예교수는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최인훈론’이 당선된 이래 반세기 동안 문예비평과 문인운동의 선두에 서왔다. 67년부터 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에 참여해 72년 주간, 78년 발행인을 맡았다. 리얼리즘문학·농민문학·민족문학 등의 평론을 개척해왔다.

80년부터 영남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시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6·15민족문학인협회 남측 대표단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지도위원 등으로 활약했다.

평론집 <한국문학의 반성>(1976), <민중시대의 문학>(1979),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1995), 번역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하우저 지음, 백낙청 공역), 카프카의 <성> 등 여러 저서가 있다.

백지연은
백지연(44)씨는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9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서 평론 ‘아담의 글쓰기, 환유적 욕망의 변주’로 당선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염무웅 교수가 심사위원을 맡은 인연이 있다. 2000년대 들어 문단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여성평론 백가제방 시대’의 선두주자 가운데 한명으로 꼽힌다.

첫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창비·2001), 공저로 <페미니즘 문학비평>(김경수 편·프레스21·2000), <20세기 한국소설>(최원식 외·창비·2005) 등이 있다. 경희대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경희대와 단국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72년 유신이 선포된 이후
학생데모와 개헌청원 운동 시작
문인들도 가만있을 수 없었어요
74년 1월7일 이호철 주도로 61명이
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하고
차례로 중정에 잡혀갔어요
2월 문인간첩단 사건이 터졌고요

백지연(이하 백) 오늘 이 자리에서는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창립을 전후한 무렵 한국문학의 흐름과 문인들의 사회적 실천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데요. 먼저 자실이 출발하게 된 문학사의 배경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염무웅(이하 염) 우리 문학사에서 자실이 평지돌출로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4·19의 전환기적 의미에서 찾아야겠지요. 남북분단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휴전선 이남 대한민국의 질서는 극우 냉전체제에 완전히 포획되었고, 이에 따라 문단도 체제순응적인 소위 순수문학 일파에 장악이 됐어요. 현실비판적인 문학은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다가 1955년 예술원의 출범을 계기로 조연현, 김동리가 주도하는 문인협회(문협)와 김광섭, 이헌구 주위에 모인 자유문학가협회(자유문협)로 문단이 양분됩니다. 이렇게 기성 문단이 분열되어 세력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전쟁을 겪고 상처 입은 젊은 세대들이 문단에 진출해서 새로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지요. 그런 점에서 4·19 직후 결성된 전후문학인협회(전후문협)라는 단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백 전후문협에는 어떤 분들이 참여했는지요?

내가 이 단체의 이름을 처음 안 것은 <한국전후문제작품집>(1960)과 <한국전후문제시집>(1961)에서였습니다. 거기 보면 서기원·오상원·이호철·최상규·송병수·최인훈 등의 소설가와 박성룡·성찬경·박희진·고은 등의 시인들이 자기 약력에 전후문협 회원이라고 밝히고 있고, 특히 신동문·구자운·박희진 등은 간사라는 직책까지 밝히기도 했어요. 그런데 최근 옛 기사를 검색해보니 60년 5월28일 17명 회원을 발기인으로 해서 창립총회를 했어요. 훗날 홍사중·이어령·유종호 등 평론가들도 함께했더군요. 몇 차례 정기총회도 열었고, 특히 61년 5월에는 ‘제3회 문학강연회’를 연다는 기사도 있어요. 어쨌든 전후문협은 4·19를 계기로 각성한 젊은 문인들이 기성 문단과 다른 목소리를 내고자 모였던 최초의 집단적 시도로 주목할 만합니다.

그다음으로 청년문학가협회(청문협)가 이어집니다. 해방 직후 김동리 주도로 만들어진 조선청년문학가협회와 우연히 이름이 같아요. 알다시피 62년 이후 서정인·김승옥·이근배·이성부·조태일·이청준·박태순·김현 등 젊은 세대가 속속 대거 등장합니다. 나도 이때 등단했지요. 전후문학 다음의 세대, 즉 4·19세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6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등장한 겁니다. 이 무렵 김승옥·김현을 중심으로 <산문시대>동인지 활동도 있었고 조동일·임중빈 주도의 <비평작업>동인지도 나왔어요. 이런 흐름들이 하나의 단체로 합류한 것이 말하자면 청문협입니다.

내가 보관하고 있는 청문협 유인물을 보면 총무대표간사 이근배, 섭외간사 임중빈, 기획간사 조동일, 출판간사 염무웅, 권익간사 김광협, 시분과 이탄, 소설분과 김승옥, 평론분과 김현 등으로 조직이 짜여 있습니다. 등사판으로 자료집을 만들어 공개적인 세미나도 두세 번 했어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67년인가 조선호텔 근처 어느 빌딩 지하 공간을 빌려서 문학토론회를 열었습니다. 2회 세미나였나, 내가 유현종의 단편 <거인>에 대해 발제하고 구중서 형이 반대토론을 해서 꽤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는데 그 덕분에 서로 친해졌지요. 순전히 한국문단사의 맥락에서만 본다면 자실은 4·19 이전 전후문협 세대와 4·19 이후 등장한 청문협 세대가 결합하여 한국문학의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고자 시도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백 청문협은 68년 통일혁명당(통혁당) 간첩사건과 관련해 고초를 겪기도 했지요.

염 67년의 동베를린 사건 이듬해 8월 통혁당 사건이 터졌어요. 짐작하건대, 박정희 정권은 은밀히 3선개헌을 기획하면서 이에 대한 저항을 미리 잠재우기 위해 공안정국을 조성하려 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특히 임중빈이 주도한 청문협이 통혁당 산하조직이라고 크게 보도됐어요. 산하 청문협에서 “공산주의에 입각한 현실비판과 문학활동을 했다”는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청문협이 통혁당 산하조직이라는 건 터무니없는 날조입니다. 임중빈이 청문협을 주도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를뿐더러 ‘청년문학가협회’라는 이름 자체가 여러 후보명 가운데서 토론을 통해 채택된 거였어요. 어느 서늘한 봄날 밤 덕수궁 잔디밭에 둘러앉아 명칭 가지고 떠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백 이어서 70년대 전반은 문인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많은 문인들과 학생들이 구속되고 사형 및 중형을 선고받는 참혹한 비극들이 벌어졌습니다.
» 왼쪽부터 백지연 씨,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

71년 4월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대선이 있었죠. 그때 김재준 목사, 이병린 변호사, 천관우 선생 세 분이 대표가 되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를 결성하고 ‘민주수호선언’을 발표했어요. 60명 서명자 중 문인이 12명이나 된다는 게 주목할 일입니다. 내 생각에 문단에서 천관우 선생을 도와 민수협을 주도한 분은 이호철 선생이 아닌가 합니다. 이 선생은 민수협 운영위원까지 맡았죠. 당시 나는 <창작과 비평>(창비) 편집을 맡고 있었는데, 지금의 종로구청(옛 수송초교) 건너편의 출판사 신구문화사에서 방 하나를 빌려 혼자서 일을 했어요. 내 기억에는 그때 이호철·남정현 두 분이 함께 창비 사무실로 서명을 받으러 왔어요. 그래서 창비에 자주 모이던 문인들 대부분이 서명했지요. 나로서도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단체에 참여한 것은 그때가 처음입니다. 참고로 ‘민주수호선언’에 서명한 문인 명단을 밝히면 박두진·이호철·남정현·박용숙·최인훈·구중서·한남철·김지하·조태일·방영웅·박태순·염무웅 등입니다.

백 74년 1월7일 이호철 선생 주도로 문학인 61명이 개헌청원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고 중부경찰서로 연행된 사건이 일어났고 곧이어 문인간첩단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문인간첩단 사건은 문학운동 결성체가 출발한 직접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적 경향을 가리지 않고 많은 문인들이 이처럼 뜻을 같이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염 거기에 이르는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72년이 중요한 해입니다. 그해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10월유신이 선포되었으니까요. 국제적으로도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승산이 없는 것이 확실해지자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서 냉전 해체의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고요. 유신 직후 한동안 정국이 얼어붙었다가 73년 가을부터 유신반대 학생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더불어 장준하 선생을 중심으로 개헌청원 운동이 시작됐어요. 문인들 사이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일어났습니다.

74년 정초였는데요. 백낙청·한남철·나 등등이 미리 의논을 하고서 이호철 선생 댁에 세배를 갔습니다. 그리고 ‘문인들도 개헌청원 지지 성명을 냅시다’, ‘이 선생이 연장자이시니 앞장을 서십시오’, 그랬던 것 같아요. 이 선생이 흔쾌히 응낙을 하고 우리 셋이 나눠서 문인들 서명을 받았을 겁니다. 그런 다음 동숭동에 있는 백 교수 연구실에서 먹지에 대고 성명서를 썼어요. 방학이니까 학교에 아무도 없는 건 비밀유지에 좋은데 난방이 안 돼서 얼마나 추웠던지, 덜덜 떨던 생각이 나네요.

그런 다음 1월7일 오전 10시 명동성당 건너편에 있는 코스모폴리탄 지하다방에 30여명이 모여서 성명서를 낭독했어요. 안수길 선생을 비롯한 참석자 9명은 곧장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었죠. 근데 바로 다음날, 1월8일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됐습니다. 소위 긴조시대가 시작된 거죠.

그날부터 문인들 61명이 차례로 중앙정보부로 잡혀갔어요. 나는 그때 수유리에 살았는데 도봉경찰서를 거쳐 남산으로 갔죠.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문인의 저항운동은 거의 김지하 하나뿐이었는데, 개헌청원 성명을 계기로 이제 조직을 이루게 됐잖아요? 그러니 당국으로서는 이걸 그냥 놔둘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성명서 대표인 이호철 선생이 1월14일 서빙고 보안사로 잡혀갔고, 2월25일에는 김우종·임헌영·장백일·정을병 등과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됩니다. 재일동포 잡지 <한양>을 문제 삼았는데, 참, 말도 안 되는 사건이었죠.

돌이켜보면 그건 문인들에게 일종의 정치학습이 되었어요. 순진한 문인들이 재판 과정을 통해 간첩사건이라는 것의 실체를 많이 알게 됐고, 동시에 그걸 계기로 이심전심 연대하여 비판적 문인조직을 만들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이 형성되었으니까요. 이때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도 일어났어요. 김지하는 또 감옥에 들어갔고요. 이호철 선생은 10월 말쯤에 석방됐는데, 아무튼 이렇게 해서 자실이 출범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그건 일종의 정치학습이 됐어요
간첩 조작의 실체를 알게 됐고
이심전심 연대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 기반이 된 겁니다
11월18일 그날이 ‘디데이’였죠


백 당시 문인들의 모임이 언론인, 해직교수의 모임과 연대했던 과정도 중요한데요.

문인들이 피부로 가장 가깝게 느낀 것은 언론자유운동입니다. 언론·출판의 자유 없이 문학은 존립할 수 없으니까요. 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나오고 이어서 다른 신문사에서도 비슷한 선언이 이어졌어요. 문인들의 ‘자유실천선언’은 그 이념에서나 투쟁 목표에서 기자들의 언론자유 선언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국제펜대회를 앞둔 한국펜본부 정기총회에서도 평론가 김병걸 선생이 대표제안한 ‘표현의 자유에 관한 긴급동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그 긴급동의안에는 ‘김지하 석방 요구’가 들어 있는데, 유신체제 아래서 공식기구가 그런 결의를 한 것은 아마 그게 유일할 겁니다.

백 74년 11월15일 문인들이 모여 ‘자유실천문인 101인 선언문’을 작성했던 그때 잊혀지지 않는 일화가 있다고요?

염 그게 펜클럽 총회가 열리기 전날인데 고은·이문구·조태일·박태순·황석영 등 여러명이 청진동에 모여서 11월18일 벌일 행동계획을 최종 점검하고 맡은 바를 각자 분담했지요. 내게는 ‘선언문’을 쓰는 임무가 주어졌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선언문 원본은 없어요. 역사적 자료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던 거지요. 나는 성명서 발표 전날 리영희 선생 댁에 찾아가 우리 계획을 간단히 설명하고 외신 취재 섭외를 부탁드렸어요. 개인적으로 친한 미국이나 일본 기자들에게 현장취재를 요청해 달라고요. 나중에 들으니 리 선생은 우리가 광화문 종각 뒤 의사회관 계단에서 성명서 읽고 데모하고 잡혀가는 광경을 거리 건너편에서 지켜보셨다고 하더군요. 외신기자들도 취재를 왔었고요. 그땐 정신이 없어서 몰랐지요. 부탁은 했었지만 실제로 외신에 나갈 줄은 몰랐던 거죠. (다음회에 이어짐)

사진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등록 : 2014.11.23 19:26수정 : 2014.11.2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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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백지연 씨, 염무웅 교수.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② 백지연이 묻고 염무웅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첫 주자인 문학평론가 염무웅 교수와 백지연 씨가 회고한 60~70년대 문인운동의 전사와 작가회의 창립의 배경을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사진은 두 선후배가 지난 13일 서울 운니동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74년 자실 결성 무렵 사료들을 살펴보는 모습이다.
이어 소설가 이호철-유시춘, 시인 고은-김형수, 문학평론가 백낙청-임홍배, 시인 양성우-이승철,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신경림 ‘농무’ 황석영 ‘객지’는
70년 전후 문학사적 전환의 상징
김수영·신동엽 등 60년대 참여문학
70년대 민족문학으로 수렴됐지요
80년대 ‘딴따라’ 문화 만나면서
문학 내부에 질적 변화가 생겼어요
골방에서 광장으로 나온 거니까
백지연(이하 백) 1977년 해직교수들이 모여 ‘민주교육선언’을 발표했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1978년 발족한 해직교수협의회 이야기와 교육지표 사건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염무웅(이하 염) 유신체제하에서 처음 해직된 교수는 김병걸, 백낙청 두 분이었습니다. 1974년 말의 민주회복국민회의 때문이었지요. 교수와 문인들의 정치참여가 활발해지자 박 정권은 대학사회를 더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해 1975년에 교수 재임용 제도를 도입하고 이듬해 새 학기에는 전국에서 300명 이상의 교수들을 해직합니다. 해직된 교수들로서는 무엇보다 대학이 병영화되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보다 못해 77년 12월2일 구속학생 석방과 복교, 민주인사 석방과 공민권 회복을 요구하는 ‘민주교육선언’을 발표했지요. 그리고 20여명이 모여 해직교수협의회를 결성하여 활동합니다. 그 와중에 78년 6월27일 소설가 송기숙 교수를 중심으로 전남대 교수 11명이 유명한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을 발표하지요. 그 때문에 전남대 교수들이 여러 분 해직되고 구속됐어요. 흔히 교육지표 사건이라고 부르는 게 그것인데, 80년 광주항쟁의 씨앗 하나를 뿌린 사건입니다.
백 그즈음 문단 내부에서도 어떤 경향에 특별히 연결되어 있지 않은 분들이 자실에 함께하게 됐구요. 요산 김정한 선생님과 자실의 인연도 그런 점에서 새삼 되짚어볼 만합니다.
1987년 6월항쟁의 민주화 열기를 타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그해 9월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재출범했다. 부산에서 칩거해온 요산 김정한 선생이 의장을 맡아 기꺼이 참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염 김정한 선생은 꽤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쉬다가 60년대 중반 문단에 복귀하지요.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가집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도 카프에 가담하지 않고 조직 외곽에 있으면서 카프 노선에 동조를 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30년대의 저항문학과 70년대의 민족문학을 연결하는 살아 있는 고리가 김정한인 셈입니다.
또 하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70년 전후에 일대 문학사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전환이 뛰어난 작품의 생산으로 표현되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신경림의 <농무>와 황석영의 <객지>같은 작품의 발표는 전환의 징후이고 하나의 상징적 사건입니다. 60년대의 김수영, 신동엽, 이호철, 최인훈 등의 문학과 더불어 해방 전 세대인 김정한의 교량적 구실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백 식민지 시대의 저항문학과 해방 후 민족문학의 연속성을 파악하는 의미에서 김정한의 소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 깊이 와닿는데요.
염 김정한만이 아니지요. 나는 우리 문학사에 대한 평가가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어 균형을 잃고 있다고 봅니다. 카프의 역사적 위상도 그런 사례예요. 카프를 한편으로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 극복해야 하는데, 그냥 무조건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비판 또는 부정하거나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서 기계적으로 연구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당대의 사회 현실과 관련지어 카프에서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극복할 것인가, 그러한 점이 역사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텐데요. 반면에 사회 현실의 문제와 절연된 자폐적 공간에서 자기 예술의 세계에만 칩거한 순수주의 문인들에게는 과잉해석이 이루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과 문학 간에 어떤 상호침투가 이루어졌는지 작품을 토대로 밝히는 일일 텐데요.
1974년 11월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족식 때 발표한 ‘자유실천 101인 선언문’의 원본. 당시 시인 양성우가 밤새 등사원지에 철필로 글씨를 쓰고 등사기를 긁어 인쇄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백 선생님께서는 60년대 현장에서 벌어졌던 문학의 현실참여를 둘러싼 비평적 논쟁들이 그 당대보다는 70년대에 와서 풍요로운 창작 성과로 연결되었다고 보시는데요. 이 지점에서 문인들의 현실참여 운동이 지니는 역사적, 문학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짚어보았으면 합니다.
염 우리가 글쓰는 사람으로서 작가회의라는 단체의 구성원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숙고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창작의 노고를 감당하는 것은 단독자로서의 개인이지만, 그는 사회에서 절연된 존재가 아니죠. 고독한 창작의 순간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 개인의 인생이 총체적으로 투영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복잡한 얽힘을 명징하게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면 거리에 나가 데모를 하거나 성명서를 읽거나 그밖의 양심의 명령에 따른 실천행동을 안 할 수 없는 게 이 시대의 작가지요. 하지만 그런 활동 중에도 그 자체가 창작과는 구별되는 일이라는 자의식을 늘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의 순결성과 지속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60년대에 김수영, 신동엽, 최인훈, 이호철 등 뛰어난 작가들이 활동했고 70년대에 들어와 고은, 신경림을 비롯해 황석영, 김지하, 조태일, 조세희, 윤흥길 등의 좋은 작품이 나왔는데, 그 작품들이 어떤 조직이나 단체활동 때문에 나온 건 아니지요. ‘자실’부터 작가회의까지 40년의 활동과, 이런 좋은 작품들의 생산을 연결지어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라고 할 순 없다는 뜻입니다. 문학도 운동도 그 뿌리는 현실이에요. 다시 말하면 현실의 변화와 민중 역량의 성장이 작품으로도 표현되고 현실 운동으로도 나타났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문학과 현실 간의 관계에 비대칭이 발생할 수 있지요. 80년대는 문인들의 사회적 발언이 뜨겁고 거센 시대였잖아요. 그런데 그 시대의 작품들은 발언의 강도에 비해 예술로서는 허술한 데가 너무 많아 보여요.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운동이 문학을 지배하려 했기 때문이에요. 다른 말로 관념이 예술 위에 군림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작가란 자유로운 정신 속에서 마음껏 글을 써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거예요. 문학과 예술이 계획에 따라 생산될 수는 없습니다. 운동의 틀이나 외부적 이념에 얽매인 작품은 결국 언젠가는 휴지통으로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감하기 어려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87년 9월17일 자실이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고 이후 선생님께서는 93년부터 3년간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과 이사장을 맡아 직접적인 사업과 행정에 관여하셨는데요.
염 88년 말에 황석영, 김용태, 임진택, 문호근, 이애주, 영화감독 이장호, 정지영 등이 주도한 연대조직이 민예총의 이름으로 결성되었지요. 내게는 민족문학위원회 위원장이란 직함이 맡겨졌어요. 이후 내가 주도해서 세미나를 열고 민족미학연구소를 만들고 92년 문예아카데미를 개설했지요. 이어 93년 9월에는 민예총이 사단법인으로 전환합니다. 민예총의 예에 따라 작가회의도 얼마간의 진통 끝에 95년 사단법인이 됐지요.
돌아보면 5년 남짓한 민예총 경험을 통해 나는 인접 장르의 예술가·활동가들과 많은 접촉을 하면서 여러 가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가 원칙적으로 혼자 하는 작업이라면 전시와 공연은 창작자뿐 아니라 미적 감각을 지닌 사람들의 협동작업·공동작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어요. 6월항쟁 같은 운동의 고조기에 문학보다 미술이나 연극, 노래가 전위적 구실을 맡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점에서 80년대 이후 문학이 이른바 ‘딴따라’들의 노는 문화를 만나면서 자기 내부에 질적 변화가 생긴 측면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골방에서 광장으로 나온 거니까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민예총이 급전직하 추락한 것은 이유 여하를 떠나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건강한 민중예술의 퇴출을 뜻하는 현상이니까요.
2005년 북녘서 연 작가회의는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2005년 7월20~25일 북한 평양과 백두산·묘향산 일대에서 분단 이래 최초로 성사된 남북작가대회는 작가회의를 비롯한 문인들이 89년 이래 추진해온 통일문화운동의 한 정점이었다. 사진은 그해 7월23일 새벽 백두산 꼭대기 장군봉 아래 개활지에서 남·북·동포 문인 등 150여명이 천지를 등지고 동쪽 개마고원 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있는 순간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백 작가회의 이사장을 맡으실 때 가장 큰 일은 ‘남북작가대회’ 개최였을 텐데요.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염 남북작가대회는 작가회의의 긴 역사에서도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2005년 7월20일부터 평양에서 사흘, 백두산에서 하루, 묘향산에서 하루, 이렇게 지내면서 북녘 작가들을 만나 함께 식사하고 토론하고 교류한 것은 그 사실 자체가 굉장한 역사입니다. 당시 김형수 사무총장이 작가대회의 성사를 위해서 엄청 수고를 했어요. 그런데 대회에 참여한 남쪽 작가들 일부는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것보다 사실은 북한이 어떤 곳인가 궁금해서 동행했을 거예요. 그래서 기대와 다르다고 실망한 이들도 적지 않았지요. 어떤 점에서 그건 당연한 반응입니다. 관광하듯 가면 실망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뜻을 가지고 간 사람들에게는 북녘땅을 밟는 것, 북녘 하늘을 보고 그곳 공기를 숨쉬는 것, 그리고 북녘 작가들과의 만남 자체가 너무나 귀중하고 감격스러웠어요.
또 잊을 수 없는 것이 ‘6·15민족문학인협회’ 결성이지요. 2006년 10월29일부터 30일까지 금강산에서 남북 작가 100여명이 모여 저녁엔 시낭송을 하고 다음날 오전에는 협회 결성식을 했어요. 남쪽에서는 염무웅, 신세훈, 임헌영, 정희성 등이 회장단이었고 북쪽에서는 김덕철, 장혜명 등이 대표로 왔지요. 홍석중, 오영재 등 이름있는 문인들은 예고와 달리 오지 못했고요.
그런데 그때 무척 곤혹스러웠던 게 금강산으로 떠나기 직전 북한에서 핵실험을 한 거예요. 가느냐 마느냐로 고민되는 상황이었지요. 결국 가기로 결단을 내리고 무사히 다녀왔어요. 얼마 뒤 이 6·15민족문학인협회 명의로 <통일문학>이라는 잡지도 3호까지 냈어요. 남북의 편집위원들이 상대쪽 작가들 작품을 바꾸어 읽고 작품집을 만들었지요. 김형수와 정도상이 편집회의를 위해 여러 번 개성에 다녀왔고 나와 김재용 교수도 두어 번 갔었어요.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마지막 호를 냈고 그 뒤로는 그런 만남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됐습니다.
백 마지막으로 작가회의 40돌을 맞아 선생님께서 글을 쓰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염 자실이 출범하던 40년 전과는 세상이 너무 달라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다른 세상에서는 다른 삶의 길을 찾아야 하리라 봅니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세상 안에서,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해 하는 작업이잖아요? 바로 그 지점에 작가회의 같은 공공 활동의 독특한 위상이 있는 거겠죠. 앞으로 다시 40년이 흘렀을 때 여전히 작가회의라는 단체가 있을지, 물론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지요. 요즘 같은 캄캄한 시대가 계속된다면 당연히 있어야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그건 너무도 암담한 미래입니다. 나는 우리 작가회의가 현실에서 역사로 옮겨가게 될 해방의 날을 학수고대합니다. 그날을 위해 우리가 능력껏 헌신해야 하고요. 그런 뜻에서 억지로 희망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 내 말을 끝내지요.
14.
  • [국내도서] 문학과 시대현실 - 염무웅 평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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