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5일 화요일

그렇다면 대학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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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1일 교수신문
최익현 기자

그렇다면 대학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도정일·최재천 교수의 어떤 대담
2014년 11월 20일 (목) 11:32:28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2014 인문학 콘서트 대담. 가운데 왼쪽이 도정일 교수, 바로 옆이 최재천 교수다. 자료·사진제공=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05년 ‘대담’을 통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을 시도했던 도정일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과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 10년 만에 다시 대담을 펼쳤다. 새로운 세대의 지식, 대학의 역할과 미래, 교육의 변화와 사회의 혁신 등의 주제를 통해 우리 사회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가 어디까지 왔는지, 학문 간 융합을 넘어 교육과 사회문화적 기반으로서 융합적 사고와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본 자리였다. 이 대담은 ‘2014 인문학 콘서트-도정일·최재천 대담’이란 제목으로 지난달 28일 서울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에서 열렸다.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이 마련한 자리였고,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10년만의 대담을 기획한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는 “지난 10년간의 변화를 보면 9년 전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빗장을 연 대담은 일회적 이벤트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정일, 최재천 두 분의 재회는 이제야말로 우리 사회가 융합의 교육, 지성의 소통을 구체적으로 열어가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 ‘대담’에 쏠리는 대중적 관심이다. 대담이 열리기 전에 이미 500여명의 신청자가 몰렸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도정일 교수와 최재천 교수, 과연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대담 가운데 대학의 역할과 미래를 주제로 한 부분을 정리했다.
 

지식 팽창의 시대, 대학의 생존
장대익:
 도대체 대학이라는 곳이 뭘 하는 곳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아주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두 분께서 대학이란 곳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이 어떻게 하면 좋은 모습으로 진화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재천: 장대익 선생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느덧 우리 대학은 그냥 직업훈련소가 돼버렸어요. 지금 대한민국의 어느 대학도 그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운 곳이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탓할 수는 없잖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얻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과연 대학이 직장을 제대로 얻어주는 곳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미래학자들의 예측에 의하면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평생을 살면서 앞으로 적어도 대여섯 번은 직업을 바꾼다고 합니다. 누구나 다 죽을 때까지 일하면서 사는 시대가 바로 코앞에 와 있습니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은퇴하신 분들도 지금 계속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대여섯 번 직업을 바꿔야 하는데, 지금 대학이 해주는 건 기껏해야 아주 잘하는 대학에서 첫 직장 얻어주는 걸로 끝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네다섯 번의 직장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지금 이것만 봐도 지금 우리 대학은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장대익 교수도 이야기했죠. 오픈 코스가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무크(MOOC, Massive Open Online Course)가 나와 있고, 하버드하고 MIT는 edx를 만들었습니다. 옛날에 MIT가 그렇게 애를 써서 만든 과목을 그냥 무료로 인터넷에 올렸는데, 사람들이 ‘쟤네들 왜 저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목들이 앞으로는 모든 교육을 다 말아먹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서울대에 처음 부임했을 때, 첫 학기부터 영어로 강의를 했습니다. 제가 그래도 미국에서 강의를 하다가 왔으니까, 첫 수업에 들어가서 “제가 영어로 강의하는 게 좋겠습니까, 한국말로 강의하는 게 좋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더니 영어를 원하는 학생들이 좀 더 많아서 바로 “Good afternoon, everybody.” 하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는 절대로 대학에서 영어 강의를 하지 않습니다. 안 하는 이유가 있어요. 제가 예를 들어서 ‘진화(evolution)’라는 강의를 한다고 칩시다. 스탠퍼드대에도 진화를 가르치는 교수가 있습니다. 그 강의보다 제 강의가 좋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리 없습니다. 그 양반은 조교도 여러 명 있고, 도와주는 사람도 많고, 학교가 다 도와줍니다. 제가 더 잘나도 강의를 더 잘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저는 남의 나라 말로 강의를 해야 되고, 그 양반은 자기 말로 강의를 합니다.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저는 학생들이랑 같이 앉아서 그 양반의 강의를 온라인으로 같이 보고, 끝나면 일어나서 “뭐 이해 안 되는 거 있었어요?” 하고 묻는 사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도정일: 실제로 대학의 수명이 얼마나 될지 의문입니다. 현재와 같은 강의실, 큰 건물, 잔디밭, 도서관 등을 가진 형태의 전통적인 대학이 짧으면 20년, 길게 잡아야 30년, 아주 길게 잡았을 때 50년이면 몇 개의 상징적인 대학만 남고 지상에서 소멸할 것이라는 예측들이 빈번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되죠. 첫 번째, 지금은 지식의 수명이 굉장히 짧아졌습니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 길면 2~3년, 3~4년이면 끝납니다. 새로운 지식으로 대체됩니다. 그럼 그때마다 또 새로 대학을 가야 하나요? 아닙니다. 지식의 수명이 짧아졌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지식의 생산과 전파의 양상이 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식이 생산되는 방식, 그것이 전파되는 방식 말입니다. 지금 대학처럼 반드시 강의실에서 점잖은 교수님들이 넥타이 매고 와서 강의를 해야 하나요? 그런 방식만이 유일한 지식 전파의 방식인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습니다.

대학들이 대학의 모습이 극적으로 변화할 시기에 대비한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학만 이런 걱정을 안 하죠. 가만히 있어도 학생들이 몰려든다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들이 외국어만 할 수 있으면 자기 방에서 들을 수 있는 일급의 강의가 질펀하게 깔려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말로 된 강의도 그렇게 전파될 수단이 늘어날 것이고요. 

그러면 대학은 앞으로 뭘 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이 존속해야 될 이유가 있는가? 대학이 계속 지금처럼, 지금의 체제 비슷하게 존속해야 할 강력한 이유를 써 내야 합니다. 대학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합니다. 대학은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현상, 추세라고 생각합니다.

흩어져 있는 지식을 연결하고 통합하는 방법
최재천:
 저는 지금 이렇게 암울하지만, 그래도 사실은 대학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무크 같은 온라인 강의들이 굉장히 잘될 것처럼 시작은 했는데,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마이클 샌델 교수가 굉장히 흥미로운 철학, 윤리학 강의를 하니까 캘리포니아의 어떤 대학에서 그걸 그냥 가져다가 학교에서 쓰기로 했는데요. 그 대학의 철학과 교수들이 전부 들고일어나서 샌델 교수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더라고요. 샌델 교수도 나도 원하지 않는다고 답장을 해서, 흥미로운 진행이 됐습니다.

또한 하버드대에서 하는 강의가 캘리포니아대에서 반드시 통한다는 법이 없고요. 그리고 온라인으로 된 강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 보면서 토론하고 조율하는 게 중요하지요. 이제는 교과서나 책에 다 있는 것을 앞에 서서 강의하는 교수가 필요한 게 아닌 거죠. 사실 저는 이미 10년 전부터 한 학기 수업 내내 강의하는 시간을 굉장히 많이 줄였습니다. 그러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발견하고 찾게끔 하는 강의를 굉장히 열심히 해왔습니다. 그 3학점 수업이 학생들에게 결과적으로 30학점의 부담이 된 겁니다. 저는 한 게 없는데 자기들이 더 열심히 하다가 30학점이 된 거죠.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제 해야 되는 건 무엇이냐. 지식은 산재해 있습니다. 그 지식을 습득해서 머리에다 넣어 놓고 가지고 다닐 이유는 없는 겁니다. 그 지식은 내 주머니 안에 다 있잖아요. 스마트폰 안에 담아 다닐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건가를 배우는 것이 교육이기 때문에, 그런 교육은 모여서 하는 게 흩어져서 하는 것보다 그래도 유리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모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무엇이냐 하면요. 직업을 대여섯 번 바꿔야 한다고 하면 대학 4년 동안 그걸 예상하고 미리 다 배울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대여섯 번 바뀔 직업이 무엇인지 예상할 수도 없고, 예상한다 한들 그걸 다 준비하려면 대학을 18년 동안 다녀야 하는데 그것도 곤란합니다. 첫 직장을 얻기 위해서 하는 거 하자고요. 하지만 두 번째 직장을 위해서 세 번째 직장을 위해서 다시 공부를 하는 것, 그것이 피터 드러커가 한 이야기입니다. “21세기는 지식의 세기가 될 거고, 끊임없이 또 배워서 사용하고, 또 배워서 사용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바로 그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대학은 이제 평생 A/S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대학은 졸업생들을 찾아다니면서 다음 직장을 준비하는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해야 하는 겁니다.

도정일: 실제로 대학 교육의 미래를 생각하면 암울한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고요. 방금 최재천 교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래도 대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함께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교육은 본성상 지식의 전수, 지식의 습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 대학 강의실에 토론과 질문이 있는가? 그것이 최상의 교육 방식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면 온라인 강의라는 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는 유리하지만, 토론하고 질문하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젬병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이스라엘 탈무드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위대한 교육은 언제 발생하는가? 위대한 스승 앞에 내가 앉았을 때, 그때 비로소 위대한 교육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월이 지나고, 또 지식 전파·습득의 방식이 달라진 후에도 변함없는 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학을 준비하는 젊은 세대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식의 습득 문제가 아닙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이 굉장히 많습니다. 어떻게 습득할 것인가, 그리고 습득한 지식을 어떻게 갈무리하고, 보존하고, 연결해서 새로운 지식으로 발전시킬 것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식의 연결, 그 지식을 활용한 창신,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과제가 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통섭·융합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의 나라 대학의 학문이 아니라 내 자신이 해야 할 어떤 일로써 통섭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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