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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2일 월요일

‘저신뢰 사회’ 한국을 되돌아 본다

‘저신뢰 사회’ 한국을 되돌아 본다

 

2000년 2월 아프리카 남동부의 모잠비크에 강타한 태풍으로 말미암아 50년 만의 최대 홍수가 발생했을 때의 일이다. 수도 마푸토 북쪽 200㎞쯤 떨어진 초크웨라는 도시에는 교도소까지 물이 밀려와 초비상이 걸렸다. 교도관들은 긴급회의를 열어야 했다. 그대로 있을 경우 자신들은 물론 재소자들까지 수장될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교도관들은 고심 끝에 45명의 재소자 전원을 풀어 주기로 결정했다. 홍수가 지나간 뒤에도 살아남아 있으면 다시 돌아오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살인 혐의자들까지 있었던 터라 이들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초크웨 교도소와 경찰서까지 휩쓴 홍수가 잦아든 열흘 후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났다. 떠났던 재소자들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6명의 재소자들이 자진해서 복귀했다. 고향으로 가서 가족을 구하고 물에 잠긴 집을 복구한 뒤 돌아온 사람도 있었고,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구해 준 이도 있었다. 경찰은 조사 결과, 돌아오지 않은 재소자들은 가족을 구하려다 실종되었거나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당시 전국에서 16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모든 위대한 일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 오구스트 본 시레겔의 말을 뒷받침하는 듯한 사례다. 이미 2500년 전 공자도 국가경영에서 무기와 식량보다 중요한 게 신뢰라고 <논어>에서 역설한 바 있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이자 미래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90년대 중반 <트러스트>(한국경제신문사)에서 신뢰사회의 중요성을 학문적으로 갈파했다. 신뢰는 한 나라의 번영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덕목이며, ‘사회적 자본’을 일구는 밭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본은 자발적 사회성에 근거하며, 자발적 사회성을 확대시키는 것이 바로 신뢰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자발적 사회성은 사회적 자본의 구성요소다. 신뢰는 공동체 내에서 예측 가능한 약속이다. 신뢰가 두텁게 형성된 사회는 불필요한 규제와 법치, 사회적 비용을 줄여준다고 한다.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법에 대한 의존이 크면 클수록 신뢰는 작아진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후쿠야마는 독일, 일본, 미국 등을 사회적 자본이 잘 형성된 고신뢰사회 국가로 꼽는다. 그는 저신뢰사회인 한국이 더 훌륭한 문화를 창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지향적 경제구조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공동체사회에 대한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신뢰지수는 선진국보다 크게 낮다는 통계가 나라 안팎에서 모두 나와 있다. 2005년 세계가치관조사 결과 ‘낯선 타인을 믿는다’는 한국인은 30.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68%인 스웨덴은 물론 52.3%인 중국, 52.1%의 베트남보다 훨씬 낮은 수치다. 특히 국회와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각각 10.1%, 28.8%에 그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각각 38.3%, 34.6%)을 크게 밑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해 9월 조사한 한국의 신뢰지수는 10점 만점에 5.21점으로 OECD 29개국 가운데 24위이며, 사회적 자본 수준은 22위로 모두 하위권이다.

정부의 주요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고 정부의 해명보다 네티즌의 글에 더욱 전폭적 지지를 보내는 현실은 신뢰를 잃은 정부와 지도자들 때문임을 통계까지 방증해 주고 있다. 요즘 검찰의 이중 잣대가 수사결과를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게 하고 천안함 침몰사고 조사결과에 대한 의혹 증거가 끊이지 않는 것은 저신뢰사회의 단면이다. 후쿠야마가 반 세대 전에 울렸던 경종이 아직 우리 사회에는 들리지 않는 곳이 많은지, 듣고도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다.

2010년 11월 19일 금요일

'한국사회체제론' 을 다시 생각한다 : 이론과 실천전략'

출처: 사이버NGO자료관

 

[올린이 주: 2009년 학계에서는 '한국사회체제론'과 관련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1) 주요 논쟁 지점의 글, 2) 관련 기사, 3) 한국사회체제 논쟁의 함의에 관한 자료를 링크해 올립니다]

1. 한국체제론 주요 논쟁 지점의 글
1) 정일준_손호철 외, <한국민주주의와 87년 체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항쟁 22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자료집>, 2009. 60. 09
- 관련 자료 =>
http://demos.skhu.ac.kr/scholar/viewbody.html?code=scholarship&number=10308

2) 조희연_서영표, '체제논쟁과 헤게모니전략 - 손호철의 97년 체제론에 대한 비판적 개입', <마르크스주의연구> 2009년 가을호
- 관련 자료 =>
http://demos.skhu.ac.kr/scholar/viewbody.html?code=scholarship&number=10309
(주: 손호철의 '손호철의 97년 체제론'과 관련한 글은 위의 <한국민주주의와 87년 체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항쟁 22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자료집> 또는 <한국과 국제정치>제65호, '한국체제론을 다시생각한다'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3) 손호철_조희연 외, '한국사회체제론을 다시 생각한다 : 이론과 실천전략',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창립20주년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2009. 11.
- 관련 자료 =>
http://demos.skhu.ac.kr/scholar/viewbody.html?code=scholarship&number=10307


2. 한국사회체제론 논쟁 관련 기사>
[‘한국사회체제’ - 서강대 토론회 기사]“진보진영 反신자유주의·反MB 모두 필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161803305&code=910100

(손호철의 조희연 비판)
[‘한국사회체제’ 토론회]“민주당에 쌍용차 매각 책임 물어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code=910100&artid=200911161801465

(조희연의 손호철 비판 글)
[‘한국사회체제’ 토론회]“反MB = 민주당 비판적지지론은 곤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161800425&code=910100


3. 한국사회체제 논쟁의 함의 - ‘97년체제’대 ‘08년체제’ 논쟁의 함의
(자료출처: 월간참여사회-
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1431 )

손우정 새세상연구소 상임연구원

‘87체제’라는 용어가 2005년 창비 - 함께하는 시민행동 공동 심포지엄(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 - 헌법과 사회구조의 비판적 성찰)에서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주요 개념으로 본격 등장한 이후, 학계에서는 87년체제, 97년체제, 61년체제, 분단체제 등 ‘체제’에 대한 다양한 논쟁과 분석이 진행되어왔다. 최근에는 08년체제를 주장하는 조희연 교수와 97년체제를 주장하는 손호철 교수가 다양한 쟁점을 둘러싸고 격돌하면서 제2의 논쟁기를 맞고 있다.


‘전략없는 전술논쟁’을 넘어

이번 논쟁의 특징은 과거에 비해 보다 실천적 의도가 강하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각 논자들은 체제분석을 통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반MB투쟁과 진보대연합, 그리고 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선거전략 문제 등에 개입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대다수 현실정치세력이 여전히 ‘전략 없는’ 후보단일화, 선거연합, 정책공조 등의 논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통해 전략적인 해결방안을 마련하려는 체제논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이번 논쟁은 이에 개입한 일부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뜨거운 대중적이고 실천적 인 반응을 불러오지 못하고 있다. 무시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체제논쟁이 지나치게 학술적인 개념 논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부문체계나 하위체계 등 체제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남용되고 이를 둘러싼 학문적 논의가 격렬해지면서 어중간한 지식을 가지고는 논쟁에 개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이 논쟁은 따라가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 논쟁이 우리에게 절실하지만 결핍되어 있는 전략적 수준의 문제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단순화가 각 논자들의 주장을 왜곡할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조희연-손호철 논쟁을 따라가 보자.  


‘반MB냐, 반신자유주의냐’ 서로 다른 중심

조희연-손호철 논쟁은 지금의 현실을 ‘어떤 체제’로 인식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조희연 교수가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궤를 같이 하는 08년체제를 중심으로 진보세력의 ‘헤게모니적 실천’을 강조한다면, 손호철 교수는 한국사회의 전면적 신자유주의화를 의미하는 97년체제가 여전히 오늘의 현실을 규정하기 때문에 08년체제적 문제의식인 반MB투쟁은 보다 심층적인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하위 문제라고 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97년체제론자인 손호철 교수는 체제분석이 “열린 총체성으로서의 ‘사회체계’와 다양한 ‘부분체제’(헌정체제, 노동체제 등)로 나뉘어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에는 48년체제, 61년체제, 87년체제, 97년체제가 존재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87년체제는 헌정체제 등 일부 부분체제로서만 그 의미를 지닐 뿐, 사회체제 수준에서는 이미 97년체제가 87년체제를 대체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반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세력들은 단순히 이명박 정부를 반대하는 미온적 대응에 머물 것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반민중성을 폭로하고 반신자유주의 대항헤게모니를 강화해 나가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손호철 교수는 반MB투쟁과 반신자유주의투쟁의 결합을 주장하지만,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반신자유주의 전선이다.

반면, 조희연 교수는 97년체제를 87년체제의 하위체제라고 보면서 지금은 87년체제의 또 다른 하위체제인 08년체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97년체제는 87년체제의 상향발전이라는 성격과 08년체제의 선행적 성격이 공존하는 것이며, 따라서 정치체제-경제체제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현 체제는 08년체제라는 것이다. 조희연 교수가 손호철 교수와 달리 97년체제보다 08년체제를 더 중시하는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동일성보다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즉 손호철 교수처럼 08년체제를 97년체제의 하위체제로만 볼 경우, 경제적 측면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연속성은 파악되지만 반MB투쟁의 대중적 고양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경제적·정치적 측면의 차이점, 즉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구성을 포착할 수 없으며 헤게모니적 실천을 위한 개입공간을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고 본다.

두 교수는 모두 한국사회의 주요 과제가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또한 지난 해 촛불시위 이후 형성된 이른바 ‘반MB연대’도 무조건 외면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대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것에도 입장을 같이 한다. 허나 손호철 교수가 반MB연대를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에 복속되어야 할 것으로 보면서 각 부문체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진보적 경향이 손을 잡는 ‘무지개 연합’을 전략적 목표로 제기한다면, 조희연 교수에게 그런 연합(조희연 교수의 용어로는 ‘새정치연합’)은 국민정치공간(반MB연대)의 헤게모니적 실천을 위한 출발점에 가깝다.  

조희연 교수가 일종의 진보블럭 형성을 넘어 제기하고 있는 과제는 민주당으로 상징되는 반독재 자유주의세력을 헤게모니적으로 균열시키고 이를 진보적 헤게모니에 접합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헤게모니적 정치실천의 속성상 자유주의적 헤게모니로 종속될 수도, 좌파 헤게모니로 종속될 수도 있다. 특정세력이 100% 이익을 보는 공간은 애초부터 헤게모니적 정치공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손호철 교수의 전략은 자칫 반신자유의 세력만의 진보연대로 머물 수 있으며, 조희연 교수의 전략은 비판적 지지로 전락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현재 바닥을 기고 있는 진보세력들에 대한 지지율과 영향력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고려했을 때, 손호철 교수에게는 그 ‘협소함’이 비판될 수 있고, 조희연 교수에게는 그 ‘위험성’을 문제 삼을 수 있다. 현재의 논쟁이 좀 더 현실화 ·구체화되어야 하는 지점이다.


‘연대전략 논쟁’으로 이름을 바꾸자

이 외에도 체제논쟁에 결합되어 있는 학문적 쟁점들은 매우 다양하며 폭이 넓다. 어느 하나에라도 제대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학문적 ‘내공’을 필요로 하며, 이것이 쟁점의 폭에 비해 개입하는 논쟁가들이 적은 이유다. 사실 이런 결과는 이 논쟁이 ‘체제논쟁’이라 칭해지면서부터 어느 정도 예정된 결과다. 논쟁의 프레임 자체가 전문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체제논쟁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가 ‘전략 없는 전술논쟁’에 소모되고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면, 이 논쟁을 좀 더 확산·확대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체제논쟁이라는 이름을 ‘연대전략 논쟁’으로 바꾸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다소 투박하거나 학술성이 덜한 주장들도 좀 더 쉽게 논쟁에 끼어들 수 있고, 체제논쟁의 실천적 쟁점도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또한 이것은 실천적 학자들의 고뇌가 단지 이론적 논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검증되게 만드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내 다문화사회의 특징과 시사점’

현대경제연구원 ‘국내 다문화사회의 특징과 시사점’
(서울=뉴스와이어) 2010년 11월 17일 -- 다문화시대에 진입한 대한민국

다문화사회란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를 말하며 외국인 근로자 등 체류 외국인 및 국제 이주자의 증가는 다문화사회의 진전을 이끈다. 국내에서도 노동력 부족 및 만혼화·미혼화 등으로 국제 이주자가 급증하고 있다. 국내 산업에서 외국인 노동자 활용이 높아지면서 외국인 노동자는 지난 2006년 25만 명에서 2009년 57만 명까지 증가했다. 여성의 만혼화·미혼화로 남성 농림어업 종사자가 결혼상대를 찾기 어려워지면서 결혼이민자도 같은 기간 4만 명에서 12만 명으로 늘어났다. 더불어 외국인 근로자가 본국에서 가족을 데려와 정착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상당수 결혼이민자들이 한국에 들어와 내국인과의 혼인으로 가정을 형성하면서 국내 다문화가정도 늘어나고 있다. 이에 본 보고서에서는 국내 다문화사회의 특징과 그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국내 다문화사회의 특징

첫째, OECD국가와 비교해볼 때 한국 내 거주하는 외국인의 증가 속도가 매우 빠르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21만명에서 90만명으로 증가했으며 연평균 증가율은 19.9%에 달하여 OECD 19개국 평균인 5.9%를 훨씬 상회한다. 특히 같은 기간 내국인 인구 증가율은 연평균 0.42%에 그쳐 외국인 증가 속도가 매우 빠름을 알 수 있다.

둘째, 단순 노무직에 종사하는 이주민의 유입이 두드러진다. 단순노무 종사율은 내국인이 8.3%정도인데 결혼이민자는 22.8%, 배우자는 18.0%로 나타났다. 또한 국내 체류외국인의 취업자격별 현황을 살펴보아도 비전문취업, 연수취업 자격으로 체류하고 있는 단순기능인력이 전체 체류 외국인의 92.6%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 결혼이민자 가정의 20% 이상이 월가구소득 100만 원 이하의 저소득층으로 분류된다.

셋째, 체류 외국인 범죄율 자체는 아직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나 최근 몇 년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009년 기준 체류 외국인 범죄율은 2.0% 수준으로 내국인 범죄율인 4.0%보다 낮으나 최근 몇 년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005년 외국인 범죄는 9,042건에서 2009년 2만 3,322건으로 2배 이상 늘었으며 이는 체류 외국인 증가 속도를 상회한다.

넷째, 다문화가정이 증가하는 가운데 가정 내 불안전성도 부각되고 있다. 일부 다문화가정에서 6세 미만의 영·유아들이 돌보는 사람 없이 혼자 지내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다문화가정의 아동학대 대상이 주로 1~12세인 점도 눈에 띈다. 또한 다문화가정은 4년 내 이혼율이 79%에 달하며 이혼사유도 정신·육체적 학대의 비중이 비교적 높다.

다섯째, 다문화인구는 정보기술 및 교육의 혜택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결혼이민자의 경우 인터넷 사용률이 62.2% 수준으로 국내 평균보다 낮고 인터넷 활용도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정보기술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문화가정 자녀의 경우 취학 전 한국어 능력이 떨어지고 초중고 정규과정 취학률도 국내 평균보다 낮은 83.0% 수준으로 교육 소외 현상도 관찰된다.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

첫째, 여전히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중심이 되는 한국에서 외국인 거주자의 급격한 증가는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아직 한국 내 외국인의 비중은 1.83%로 OECD 평균인 5.7%보다 낮고 한국의 외국문화에 대한 개방도도 2009년 기준 57개국 중 56위를 차지하여 과연 한국이 다문화사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 의문이 든다.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빠른 외국인 증가속도는 내국인들의 반감을 부추길 수 있다.

둘째, 국제 이주자의 증가는 사회보장 부담 가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문화가정의 20%이상이 저소득가구인 반면, 저소득 다문화가정의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률은 20%에 미치지 못한다. 이는 잠재적으로 기초생활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저소득 다문화가정이 상당수 존재함을 의미하며, 향후 이들 가정에 대한 지원 증가로 복지 재정 부담이 가중될 우려가 있다.

셋째, 다문화가정의 불안전성은 가족구성원의 위축뿐만 아니라 가족안전망의 약화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일반적으로 가정은 가족구성원에 경제적 지원 및 심리적·신체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1차적 안전망 기능을 지닌다. 하지만 다문화가정의 파괴적인 가족 해체 및 영유아 학대는 가족 구성원들의 불안감, 심리적 불안정을 초래하고 자존감을 위축시켜 사회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특히 1~12세 아동은 학대의 피해나 여파가 크고 성인이 되어서도 건강한 가정을 구성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어 그 문제가 더 심각하다.

넷째, 국제 이주자가 겪는 정보격차는 다문화사회가 정착되는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국제이주자는 한국어가 미숙하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 취득이 어려워 정보격차를 경험한다. 그 자녀는 낮은 취학률 등으로 고소득 업종 취업 기회가 제한되고 오랫동안 저소득층으로 남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는 다문화가정의 사회적응력을 약화시키고 우리나라가 다문화사회로 진전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시사점

첫째, 민족적 배타주의를 극복하고 타 문화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전반적인 인식 제고가 이루어져야 한다. 다문화사회로 진입하면서 경험하는 문화적 차이는 민족간의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정부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타문화 교육 및 홍보사업 추진, 다문화 전문 강사 육성, 초중고 교과과정에 다문화 교육 강화 등의 방안을 추진하여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둘째,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국제 이주자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 많은 국제 이주자들이 오랜 기간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어 이를 방치하는 경우 사회적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예방하고 안정적인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으나 소외된 결혼이민자 가족이나 국내에 장기 거주 외국인 가족에 대하여 지원을 단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셋째, 다문화가정의 불안정한 가족안전망을 보완하는 사회적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요구된다. 결혼이민자 가정은 어려움 발생 시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 인근 내국인 가정과의 연계를 맺어 친척처럼 상부상조하는 ‘자매결연 맺어주기’ 등을 실시하여 다문화가정의 안전망을 형성하는 방안 마련이 요구된다.

넷째, 국내 거주 외국인에 대해서도 교육시스템 혜택 확대와 IT교육의 강화가 필요하다. 우선 외국인 근로자가 모여사는 공단 지역이나 결혼이민자가 많은 농어촌 지역에 다문화교육센터 등을 설립하여 다문화 자녀의 교육 및 학업고충 해결을 지원하고 국제 이주자에 제공하는 통합생활 정보 커리큘럼을 확대해야 한다. 또한 시민·종교단체, 학교 등과 연계하여 다문화가정 구성원들에 대한 IT 교육 기회를 강화해야 한다. [전해영 연구원]

*위 자료는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의 주요 내용 중 일부 입니다. 언론보도 참고자료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출처: 현대경제연구원

2010년 11월 5일 금요일

전태일40주기, 시사만화, 표현의 자유

쓰레기통으로 철거된 만평들 어떤 내용이길래?

 

참고기사: “전태일만평 쓰레기 처리는 사전 검열"

서울시설공단 전태일 40주기 작품 철거…"표현의 자유 침해"

'전태일거리문화예술전'에 전시된 만평작품 강제 철거 논란과 관련해 아름다운청년전태일 40주기행사위원회는 4일 서울 마장동 서울시설공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어떤 논의나 설명도 없이 시사만화 작품들이 철거됐다"며 "이는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몰상식헌 탄압이자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작품 원상복귀와 책임자 사과를 촉구했다.

시사만화가들은 전태일 추모기간인 지난 10월 30일부터 청계천 6가 전태일다리 주변에서 만평작품 전시회를 진행했다. 하지만 전시를 시작한 지 하루 만인 1일 서울시설관리공단은 전시된 작품 28점을 몰래 철거했다.

이번에 철거된 작품 28점은 <한겨레> 장봉군, <경향신문> 김용민, <미디어오늘> 이용호 화백 등의 작품으로 청년실업, 비정규직, 노동 문제들을 작가들 나름의 관점과 표현기법으로 그린 시사만평들이었다.

다음은 이번에 철거된 만평 작품 중 일부이다. (전국시사만화가협회 제공)

 

   
  ▲ ⓒ 전국시사만화협회  

 

   
  ▲ ⓒ전국시사만화협회  

 

   
  ▲ ⓒ전국시사만화협회  

 

   
  ▲ ⓒ전국시사만화협회  

 

   
  ▲ ⓒ전국시사만화협회  

 

   
  ▲ ⓒ전국시사만화협회  

 

   
  ▲ ⓒ전국시사만화협회  

 

   
  ▲ ⓒ전국시사만화협회  

 

   
  ▲ ⓒ전국시사만화협회  

 

   
  ▲ ⓒ전국시사만화협회  

 

   
  ▲ ⓒ전국시사만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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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시사만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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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시사만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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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시사만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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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2일 목요일

정의와 복지

                <표> OECD 국가의 총지출 대비 구성비 (2002)             단위: %

         ※출처: OECD, National Accounts of OECD Countries: General Government of Accounts, 2005.

 

 

(1)2002년 기준 OECD 주요국과 한국의 정부지출 내역을 비교할 때 특이한 것은 사회보장 지출 비중은 총 국가지출의 9.7%로 OECD 평균(34.7%)의 28%, 즉 약 1/3에 불과하다.

 

(2) 국방관련 지출은 239%, 경제사업 관련지출은 208%, 주택·지역개발 관련 지출은 181%로 매우 높다. 교육 분야 지출도 OECD평균의 141%로 한국이 최고수준이다.(OECD 대부분의 국가의 경우 초중등 교육비의 평균 50%를 지방정부가 부담하는데 반해 한국은 중앙정부가 약 87%를 부담하기 때문이다.)

 

(3)GDP 대비 높은 건설 투자 : 1995~2006년까지 12년 동안 한국의 건설투자 비중은 19.22%로, OECD 평균 11.67%에 비해 훨씬 높다.  건설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는 후발 개도국인 터키(11.02%), 폴란드(11.4%), 멕시코(9.94%) 보다 높고, 악명 높은 토건 국가인 일본(13.19%) 보다도 높다. 

 

(4)증세-감세 시비는 세금 및 재정의 구조에 숨어있는 심각한 불의로 집중되어야 할 사회적 관심을 엉뚱한 데로 돌린다. ‘(큰 폭의 적자재정을 감수하고서라도) 복지 재정을 대폭 늘리자’는 이른바 ‘전투적 복지주의’로 불리는 주장도 공공부문이 안고 있는 명백한 불의에는 대체로 전투적이지 않기에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주요 선진국들이 1인당 국민소득 1만 불을 달성한 시점(대략 1990년)의 OECD 23개국 공공사회 지출 규모는 GDP의 17.9%였다. 그런데 2만 불을 돌파한 한국의 복지재정 규모는 아직도 GDP의 7.8%(2008년 예산 기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는 결코 신자유주의자의 농간이 아니다. 그것은 토건족, 지방의회를 장악한 토호들, 각종 이익집단, 관료, 정치인의 오랜 유착구조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 제도(특히 선거제도)의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이 구조는 경제가 성장하고, 복지재정을 늘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한국 재정 할당 양상이나 재정 구조를 보면, 로비력이 강한 집단이나 정보가 빠른 집단의 ‘먹튀’ 징후가 뚜렷하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핵심들은 정권을 무슨 비즈니스(수익) 모델로 간주하는지, 큰 폭의 적자 재정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자기 패거리와 친화적인 상층이 대부분의 혜택을 보는 감세를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동시에 토건족 또는 재벌.대기업이 대부분의 혜택을 보는 재정 배분 계획(산업분야와 SOC 분야 집중 지원)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또한 자질도 능력도 없는 자들을 자기 패거리라는 이유로 온갖 변칙, 편법을 써가며 공기업, 공공기관 등에 밀어 넣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재정 할당이나  자리 배분에서 점점 더 ‘먹튀’들의 노략질 징후가 뚜렷해지고 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도적 정치’를 닮아가고 있다. 

정의가 무참하게 강간을 당하고, 재정이 엉뚱한 곳으로 콸콸 새는 마당에 큰 폭의 적자 재정을 감수하고서라도 복지 재정을 대폭 늘리고, 공공부문을 유지, 확대하자는 것은 그 속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객관적으로는 반동이 아닐 수 없다. 발전 국가, 개발독재의 유산과 사민주의가 이종 교배하면 재정을 엄청나게 먹어치우는, 불가사리 같은 괴물을 낳을 뿐이다. 현재 한국에서 복지 가치는 (투자/고용 의욕과 근로/피고용 의욕 자체를 맛이 가게함으로서) 일자리 자체를 죽여 거대한 복지 수요층을 양산하는,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정치,경제,사회 구조를 뜯어고치지 못한다. 조세 저변을 늘리지도 못하고, 조세 부담 의지도 늘리지 못한다. 백년 갈 가치 생산 생태계를 불태워 찰나의 이익을 취하는 화전민 마인드도 퇴치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의는 이 모든 것을 정조준한다.  그러므로 더 따뜻한 나라를 만들려면 더 차가운 정의를 세워야 한다. 더 큰 복지, 더 많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더 확고한 정의를 세워야 한다. 복지가 아니라 정의가 먼저다.

          *출처: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복지가 아니라 정의가 먼저다'

2009년 10월 1일 목요일

'교육산업'에 대한 몇 가지 통계적 지표

   *그림출처: ko.wikipedia.org

 

민중언론-참세상 교육희망에서 한국의 '교육산업'을 해부하는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글은 김일영 새사연 정치사회연구센터장의 글인 한국교육산업의 현주소. 이 글은 교육을 '산업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교육산업'이라는 개념은 아주 낯선 것이지만, 과연 교육이 산업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사교육이라고 부르지 말고 '학원산업'이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있고 나도 이런 주장에 동의한다. 학원산업을 핵으로 하는 교육산업의 '팩트'는 어떤 것인가. 이 글에 드러나 있는 내용 몇 가지를 간추려본다.  

 

(1)GDP 대비 공교육비를 비교한 2005년 OECD 교육지표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아이슬란드에 이어 세계 3위, 우리나라의 사교육비가 GDP 대비 2%이므로 이를 합산하면 9.4%나 되는 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8.5%를 능가하는 수치. 다시 말해 한국은 세계 최고의 교육비를 지출하는 국가이다.

(3)통계청의 총교육비 통계에 따르면 공교육에 지출하는 사부담교육비와 사교육에 지출하는 사부담교육비를 합산한, 총사부담교육비는 43조 2827억 원으로 전체의 (교육비)의 56.6%.

(4)2005년 현재, OECD 국가의 공교육비 중 정부부담률 지표에서 한국은 59.7%를 기록하여 최하위. 고등교육의 한국 정부부담률은 25%에 불과하다.(이러한 수치는, 교육과 보건 등에서 신자유주의 논리에 충실하다는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낮은 것으로, 교육의 공공적 성격은 재원 부담에서부터 부정당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5)5년마다 시행되는 서비스 총조사에서 교육서비스업의 고용 규모는 2005년 현재 156만 8000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6.9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광공업, 도소매, 음식숙박업을 이어 4위로, 취업인구의 13.2명당 1명꼴로 교육부문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최근 4년간 취업자 증가량이 102만 명에 불과한데, 교육부문은 23만 9000명이나 증가해 새로운 일자리의 4개 중 하나는 교육부문에서 창출되었다. 그런데 156만 명에 달하는 교육산업 종사자 가운데 공교육종사자 43만여 명을 제외한 100만 명 이상이 비영리기관이나 사설기관에 종사하고 있다. 이렇게 사적분야에 종사자가 많은 것은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5)전국 1인 이상 가구 기준의 월평균 교육비 지출은 21만 8천원으로 소비지출의 11%, 도시근로자 가구를 기준으로 할 경우는 25만 6400원, 도시근로자 4인 가구를 기준으로 했을 경우는 42만3300원에 이른다. 먹고 이동하는 데 쓰는 식료품비, 교통·통신비 다음으로 높은 지출을 보이고 있다. 그 중의 대부분은 흔히 말하는 사교육비로 지출한다.

(6)교육비는 한 가구당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뿐 아니라 소득에 따라 그 격차도 심해서, 하위 1분위(10분위 중)는 가계소비의 단지 1.9퍼센트만 지출한 데 비해 상위 8~10분위 계층은 12퍼센트를 넘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에서 수행한 가계의 소비구조에 대한 연구(전승훈, 신영임 ; 2009)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 소비항목 중 소득불평등이나 소비불평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항목이 '교육'이라고 한다.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참여연대

프레시안 2009년 9월 11일자. 참여연대 김민영 사무처장의 인터뷰 기사다. "뜻이 맞아도 정권 눈치 보여 못 도와준다더라"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단체로 벌써 15년이라는 연륜을 쌓은 참여연대. 김 사무처장은 새로운 '아젠다 세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15주년을 맞으며 내부에서 논의하는 화두 중 하나는 운동이 일정 정도 성공하면서, 애초 우리가 선도했던 아젠다가 수명을 다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정경유착은 15년 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였지만 이제 표면 상으로는 그 의미를 많이 잃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권력을 어떻게 볼지 고민하고 그에 따라 아젠다 세팅이 필요한 시점이다."

 

강이현 기자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김 처장은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운동 방식을 두고서도 "운동의 통합성을 높이고 사회 전반의 개혁이 필요한게 아니냐는 문제의식이 점차 커지고 있다"며 "민주주의나 사회 경제, 한반도 문제 등은 각각 영역이 있기도 하지만 따로 뗄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는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분분하다"며 "대중적인 캠페인 대신 정책 비판에 중심을 두자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반대의 의견도 있다.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못 내린다"고 덧붙였다.


2009년 8월 27일 목요일

손이나 씻자!

신종플루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식사 시간이나 모임에서 자연스레 화제로 오르는 것이 신종플루에 대한 이야기다. 신학기를 맞아 학교는 하나둘씩 개학을 하는데, 우리 아이한테 신종플루가 감염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지 않을 부모가 없을 듯싶다.

 

오늘 뉴스를 보니, "신종플루 사망자 최대 2만명 발생"이라는 기사도 있고 "신종플루 대유행 땐 800만 감염"이라는 기사도 있다. 이런 내용이다. "27일 국회 보건복지가족위 최영희(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가족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향후 신종플루 유행규모를 입원환자 10만∼15만명, 사망자 1만∼2만명으로 추정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항바이러스제와 백신 등을 통해 적극적인 방역 대책을 펼쳤을 때의 예상 수치이며, 방역 대책이 없는 경우에는 전체 인구의 20%가 감염되고 입원환자 20만명, 사망자 2만∼4만명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됐다." 좀 심한 것이 아닌가 싶어 '최영희 의원실'에 들어가 보니 이런 내용도 있다. "지난 5월21일 신종플루 관련 관계부처 차관회의에서 결정된 국가 재난단계 상향조정(주의→경계)시 개최할 예정이었던 중앙안전관리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와 중앙인플루엔자정부합동대책본부(본부장 행정안전부장관)가 현재까지도 가동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정부가 신종플루 지역사회 감염 확산에 대해 안이한 대응을 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나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뭔가 대응이 신통치 않다. 지난 봄만 해도 사람들이 "김치 때문에 신종플루가 한국에서는 맹위를 떨치지 못할 거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기도 했는데, 어느새 대유행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김치가 신종플루의 천적?… 국내 환자 29명중 한국인 6명뿐"이라는 기사는 역시 조선일보 식의 기사였던 것인가? 신종플루와 김치라는 단어를 검색창에 동시에 집어넣으니 이와 비슷한 기사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블로그의 "신종플루 걸려서 죽고싶지 않다구!"라는 글을 읽어보니, 신종풀루를 예방하는 길은 손씻기만한 것이 없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는 손이나 씻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손이나 씻자!

 

 

즐거운 상상

어느 사람이 매년 1천만원씩 저축을 한다.(금리는 전혀 계산하지 않기로 한다.) 10년이면 1억원이 모이고 100년이면 10억원, 1천년이면 100억원, 1만년이면 천억원이 모인다. 그렇게 1조원을 모으려면 10만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 10조원을 모으려면 백만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 20조원을 모으려면 2백만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 20조원,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다.

 

만약 그 '어느 사람'이 요즘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88만원 세대'라서 매년 1백만원밖에 저축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20조원을 모으려면 2천만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사람들이 백년도 살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2백만년이나 2천만년이나 실감이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불과 며칠 사이에 학교도서관에 대한 토론에 두 번이나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내 머리 속에는 4대강 사업에 소요된다는 예산 22조원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전국 약 1만개 학교에 약 2천만원 정도의 급여를 주어야 하는 사서를 뽑아서 배치한다면, 2천억원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20조원이면 약 1만개의 학교에 사서를 100년 동안이나 고용할 수 있는 재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림출처: blog.daum.net

 

복지 부문의 전문연구자인 이태수(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는 얼마 전에 '22조원의 즐거운 상상'이라는 글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출산 사회에서 육아부담을 줄이기 위해 거론되는 무상보육. 6세미만의 아동들을 전액 무료로 보육시설에 다닐 수 있도록 하자면 6조원 정도가 필요하다.

--이미 1930년대부터 서구국가가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아동의 사회적 양육 개념을 뿌리 내리게 한 아동수당 제도, OECD 주요국가에서 우리나라만이 외면하고 있는 이 제도의 도입을 위해 필요한 재원은, 12세미만의 아동 모두에게 월 10만원씩 지급한다고 할 때 8조원이 필요하다.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대학의 무상교육을 위해서 필요한 재원은 10조원이다.

--비수급빈곤층을 위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확대. 보건복지가족부의 공식적인 발표에서도 인정한대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빈곤선 이하이지만 수급권자가 되지 못하는 이들, 나아가 그 120% 수준인 차상위계층이지만 여전히 생활이 어려운 빈곤한 계층임에도 국가로부터 안정적인 급여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모두 410만명. 이들을 위해 적절한 보완책을 행하고 이로써 이들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에 의미 있는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현재 기초생활보장 예산 만큼인 약 8조원이 있다면 된다는 추산이 가능하다.

--어디 이뿐인가? 건강보험에서 보장해주는 의료비의 보장수준이 평균 65%에 불과하여, 무상의료까지는 아니지만 선진국 수준인 80%의 보장성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한 정부의 추가 예산소요분은 2조원 정도이다.

--한때 시민사회단체들이 경제위기 하에 괜찮은 사회적 일자리(descent social job)를 창출하여 공공적 성격의 서비스를 획기적으로 늘리자고 했을 때에도 100만원의 월급을 100만명에게 주기 위해 필요한 재원이 10조원이라 주장했었다.

하지만 이태수 교수는 이런 '즐거운 상상'의 끝이 공허하다고 말한다. 정말 공허하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4대강 사업에 소요될 예산 22조원의 재원 마련과 이 예산 때문에 조정될 수밖에 없는 각종 SOC 사업예산의 축소 때문에 말들이 많다.

 

나는 이런 논란들이 반갑다.

 

한 개인 1천만원씩 저금해서 2백만년이나 모아야 할 돈이 20조원. 우리들 개인은 앞으로 2백만년 동안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상상해보아야 한다. 2백만년이라는 세월이면 인간의 진화에 큰 돌연변이가 생겨도 생길 시간이다. 나한테 그런 세월이 주어진다면 뭘 못하겠는가!

 

그렇듯, 우리 사회도 20조원의 재원이 있다면 과연 무엇을 해야 할지 정말 진지한 논의를 해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 결정된 사업이라고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정말 어디에 써야 할지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태수 교수는 "보편적인 복지국가의 확립이란 현실은 사실 그리 멀리 있지도 않은 것이 아닐까?"라고 묻고 있다. 정말 가깝게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게 너무 멀다.

 

 

2009년 8월 13일 목요일

광장의 꽃은 사람이다

광장의 꽃은 사람이다. 사람들로 사건이 생기면서 광장은 펼쳐지고, 비어 있기에 담겨진 곳으로 존재하는 곳. 최소한의 디자인이라는 기본적이고 정석적인 품위를 갖출 때 그 공간은 광장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지닐 수 있다. 몇 년 전 런던의 트라팔가 스퀘어에서는, 젊은이들이 한구석에 늘어져 잡담을 하고 철도 노동자들은 파업 시작을 알리는 흰색 풍선을 하늘 높이 날리고 있었다. 몇 달 전 독일의 포츠담 광장 한가운데에서는 해괴망측한 복장을 한 밴드 그룹이 음악 실험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미국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리고 붉은악마가 보여준 거대한 함성과 최근의 촛불은 우리 광장만의 카타르시스적 기억이다. 이렇게 광장 디자인은 사람들의 행위, 이야기, 사건으로 완성되는 생성적 디자인의 대표 사례이다. 그렇기에 그 자리를 꽃과 박제 조형물로 가득 채운 광화문광장은 그 의도의 불순성으로, 조형적 가치를 논하기조차 불가능한 조야한 장소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조현신(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교수), '불순하기에 조야한 광화문광장 디자인', <시사in>2009년 8월 15일자(제100호) 83쪽에서

2009년 8월 12일 수요일

그러고 보면, 나도 헛살았다.

선가에서 사냥꾼을 대표하는 인물로 석공 혜장 선사를 꼽는 모양이다. 어느 날 혜장이 사냥을 하던 중 마조 선사를 만나 그의 법문을 듣고 활과 화살을 버리고 출가하였고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하지만 산중에 있어도 본성을 마저 버리지 못해 소리를 지르며 활 시위를 당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세상 어느 곳이나 호적수가 있게 마련이다. 삼평이라는 이가 가슴을 풀어헤지며 "자, 쏠 테면 쏘아보라"고 하였다. 그때 석공 혜장은 활을 버렸다 한다. 삼평은 물었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활인전'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살인전'입니까? 여기서 '전'이라는 화살 전을 말한다.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을 버리고 진짜배기를 드러내보이라는 말이다. 살인전은 살인검이다.

 

불가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놀라운 것은, 왜 이러한 교육 방법이나 사람을 보는 눈은 전승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다. 왜 이런 교육 방법은 근대교육에 전혀 접목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불가에서는 사람을 '법기'(법의 그릇)으로 본다. 아무리 촌놈, 무지랭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막무가내로 보지 않는다. 그 그릇으로 본다. 그것도 글을 아느냐 글을 모르느냐가 아니라 깨칠 놈이냐 아니냐로 본다. 물론 모든 사람이 깨칠 수 있다는 전제가 밑바탕에 놓여 있다.

 

<육조단경>은 그냥 문헌이 아니다. 근대교육의 말도 안되는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인간상보다 <육조단경>이 만들어놓은 인간상이 더 위대한 것 아닌가? 나는 오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육조 혜능이 오조 홍인에게서 가사와 발우를 전수 받게 되는 이야기는 신화이자 전설이고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사와 발우란 것이 뭐 별거인가? 아닐 것이다. 그에게 전승된 법통이란 것도 별거 아닐 것이다.(이런 이야기를 하면 머리 깎은 스님들께서 들고 일어날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그놈 사람 됐다"는 이야기일 거다. '사람되기'가 얼마나 힘든가. 하지만 육조 혜능은 쓸데없는 글을 읽은 바 없기에 오히려 '사람 그릇'이, 근기가 깊었던 것일 터이다.

 

최근 내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다.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파업현장에서 무지막지한 경찰들의 '활약'을 보면서 도대체 이런 무장력으로 현실화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이놈의 교육이라던가, 정책이라던가, 또 제도라던가, 법이란던가 하는 것이 도대체 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말종'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지금 '인간말종'을 키워내고 있고, 그런 '인간말종'들끼리 히히덕거리면서 돈 몇 푼에 웃음을 지으며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 끔찍한 일이다. 탄압과 진압의 현장을 보거나, 듣거나, 그 어떤 방식으로 보고를 받았을 '인간'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나도 사람이요"라고 뻣뻣하게 말을 한다. 잘난 체한다. 정말 잘 났다.

 

그러고 보면, 나도 헛살았다. 목숨을 부지하느라고 세상이 이렇게까지 낭떠러지에 와 있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니까. 글을 읽고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뿐이다.

 

'선문답'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오늘 문득 든다. 그냥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그것도 진짜배기로 살고 싶었던 인간들의 이야기다. 나도 정말 살고 싶다.

 

--원철 지음,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 호미, 2009년 8월 참고

 

2009년 8월 6일 목요일

착시현상

오늘의 평택은 어제의 광주였다.

 

 

이것은 착시현상인가. 분명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나 경찰특공대의 대원이나 이 나라의 없는 집 자식들임에 틀림이 없을 터인데,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몸뚱어리에  경찰특공대 대원의 곤봉 세례가 쏟아진다. '오월 광주'를 떠올리면 다시금 가슴이 찢기는 듯 아프면서 피가 꺼꾸로 흐르는 것만 같은데......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insanely?Redirect=Log&logNo=14008352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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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08. 05. 

2009년 3월 17일 화요일

이옥순 교수의 인도와 영어

1916년 2월 4일 베나레스의 힌두 대학 개교 기념식장에서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대학의 청년들은 자기의 고유한 방언으로 수업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 자신의 반영이지요. 만일 우리의 방언이 가장 위대한 사상을 표현하기에 너무나 빈약하다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빨리 이 땅을 떠나는 게 낫소! (중략) 지난 50년 동안 우리가 우리 말로 교육을 받았더라면 오늘 우리는 독립 인도에서 살고 있을 깃이며, 학식 있는 우리 동포들이 자기 나라를 외국처럼 느끼지도 않을 것이며 민족의 가슴에 말을 걸 수 있을 것입니다. (<힌두 스와라지> 151쪽의 주석에서)

 

오늘 우리는 민족의 가슴에 말을 걸 줄 아는 사람을 키워내고 있는 것일까?

 

이옥순 교수가 교수신문에 쓴 칼럼을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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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7843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 이옥순 연세대·인도근대사

 

 

[문화비평] 영어는 힘이 세다! 

 

연전에 인도에 있는 유명한 영어기숙학교를 방문했다가 재학생의 절반이 한국인이어서 놀란 적이 있다. 맹모를 능가하는 한국 엄마들의 교육에 대한 열성이 어제오늘의 현상은 아니지만 세상과 차단된 그 먼 히말라야 산중의 기숙학교에서 그들을 보니 반가움에 앞서 복잡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그 학교 뿐 아니라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인도의 웬만한 ‘좋은 학교’에서도 한국 학생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교육을 위해 해외로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의 입장은 다양할 것이다. 입시위주의 국내 교육에 대한 반감과 그 대안적 선택일 수도 있고, 일찍이 영어로 공부를 시켜 자식을 무한경쟁의 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하려는 욕심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인도에서 만난 아이들은 거의 다 현지교육에 만족한다고 대답했다. 시설이 좋고 커리큘럼이 다양하며 교사진도 훌륭하다는 평이었다. 입시로부터 해방감과 영어가 능숙한데서 오는 만족감도 컸다. 

그럼에도 영어가 교육의 대세인 우리나라에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그 아이들을 만날 때도 찾아왔다. 교육학에 문외한인 내가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이방의 문화에서 성장하는 것의 문제를 논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인도 근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영국이 인도에 부과한 영어교육의 목표와 그 부정적 효과를 어느 정도 알기에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우상’이 돼가는 영어교육에 대해 일말의 우려를 갖는 것이다. 인도에서 영토정복을 마무리한 영국은 19세기 전반에 제2의 식민화, 곧 인도인을 영국의 문화에 동화시키는 단계로 나아갔다. “일단 전함과 외교관을 보낸 뒤 영어교사를 보낸다”라는 말대로 영국이 시작한 가장 중요한 정책은 인도인에게 영어교육을 부과하는 거였다. 그 이유는 영어로 교육받은 인도인이 머지않아 “피와 피부는 인도인이지만 관점과 취향, 도덕과 지성은 영국인”으로 식민통치의 열성적인 협력자가 되리라고 여긴 때문이었다.

‘갈색 피부의 영국인’인 인도인들이 영국의 통치를 당연시하고 영국산 상품을 선호해 경제적으로 이득이 될 거라는 전망은 영어로 교육받은 힌두들이 자기의 종교를 지키지 못하고 ‘갈색의 기독교인’이 될 것이며 “우리 문학을 통해 우리에게 친숙해진 인도의 젊은이들이 우리를 이방인으로 여기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기 훨씬 전부터 인도에서 영문학이 학교와 대학의 학과목으로 채택된 건 그런 연유였다. 그 결과 양복을 입고 영어에 능통하며 영국적 취향을 가진 ‘유색인 영국신사’가 탄생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가 “우리들의 정신은 유아시절부터 영문학으로 구성됐다”고 고백했듯이 초서와 밀턴을 읽으며 영어교육을 통해 이방의 문화에 노출된 그들은 점차 유럽을 선망하고 그 문화와 가치를 우수하다고 내면화하면서 “인도인의 복잡한 맘을 이해하기 어렵게 됐다” 자신의 전통과 사회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세상이 촘촘히 연결되고 사람의 이동과 교류가 빈번해진 오늘날에 소통의 언어로서 영어의 중요성은 한층 높아졌다. 식민지시대 인도인이 그랬듯이 영어를 배워 경제적 반대급부와 사회적 위상의 이동을 추구하는 건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영어라는 창구를 통해 넓은 세계를 내다보고 배울 수 있는 이점도 크다. 험한 세상을 건널 ‘다리(橋)’를 하나 더 갖고 있는 셈이랄까. 그러나 유용성만 강조되는 영어교육에도 이면이 없을 순 없다. 식민지시대 인도의 고등학생은 영어와 모국어를 배우는 데 주당 19시간을 들였다. 언어만 학습한 그들에게 큰 미래는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목도되는 영어에 대한 과도한 강조도 청소년에게 다양한 걸 배우고 경험할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아쉽다. 영어가 성공과 직결되는 상황에서 영어에 투자 기회가 적은 계층이 사회적 이동의 가능성을 갖지 못한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무엇보다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건 그 언어의 기반인 문화와 전통에 동화되는 동시에 자신의 언어를 소홀히 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사회와 전통으로부터 소외됨을 의미한다. 오늘날 영어로 ‘미드’를 보는 청소년들은 미국의 문화에 친숙해지면서 ‘우리의 것’에서 멀어진다. 피와 피부는 한국인이지만 관점과 취향은 거의 미국인인 그들을 보면 일제강점기 일본어교육에 목숨을 걸고 반대한 조상들이 떠오른다. 일본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만에 우리는 영어에 의식마저 사로잡혀버린, 식민지적 무의식에 포박당하고 말았다. 언어는 때로 총보다 강하다.

 

(이옥순 서강대 동아연구소·인도근대사) <교수신문> 09. 03. 17.

 


 

영화도 드라마도 소설도 시도 음악도 ....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외국의 관객과 시청자들을 매료시킬 때, 한 영화평론가는 사석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어떻게 '한류'가 가능했는가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한류의 핵심은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이었다. '한류와 민주주의'라는, 언뜻 쉽게 연결될 것 같지 않은 두 항목이 실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작가 공지영 씨가 <시사IN>에 쓴 글을 읽어보면, 민주주의가 어떻게 창작에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게 된다. 물론 "그동안 우리나라가 너무 후진국이어서 우리끼리 해야 할 이야기가 좀 있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그것과 싸우느라 청춘과 재능을 다 소비했어요."라는 말은 조금 과장된 면이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청춘과 재능을 온전히 창조적인 일에 쏟아붓기에는 너무 할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이 없는 사회에서 상상력은 말라비틀어지고 만다.

 

촛불을 금지하면 생일 잔치의 촛불조차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작가들의 내면화된 검열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인권은 창조의 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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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50#

 

인권위 축소하면 문화·예술 ‘뒷걸음’

소설가 공지영씨는 외국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형제를 부활하려 하고 인권위를 축소하는 등 우리나라가 다시 ‘후지게’ 돼서, 예술가들이 다시 싸워야 해서 좋은 작품을 쓸 수 없어요.”

 

시사in [78호] 2009년 03월 09일 (월) 10:42:30 공지영 (소설가)

 

   
ⓒ뉴시스
3월5일 열린 ‘국가인권위 독립성 보장 및 지역사무소 폐쇄 저지를 위한 광주대책위원회’ 발대식 모습.

지난 10년간 나랏돈으로 해외여행 할 기회가 많았다. 한국문학번역원의 도움으로 내 책이나 글이 해외에 소개·번역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건 나뿐 아니라 우리나라 다른 작가들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굳이 번역원의 도움 없이도 해외 에이전시에서 종종 의뢰가 온다. 그들과 마주 앉으면 어김없이 내게 하는 질문이 있다.

“왜 공지영씨같이 한국에서 유명한 사람의 글을 우리가 이제야 접하게 되었지요?”

나는 별로 놀라지 않고 대답한다.

 “아하, 그건 그동안 우리나라가 너무 후진국이어서 우리끼리 해야 할 이야기가 좀 있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그것과 싸우느라 청춘과 재능을 다 소비했어요. 하지만 우리도 어느 정도 인권을 보장하는 나라가 됐고, 인류 보편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이제 우리 작품이 당신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다른 문화 선진국에서는 고민하지 않던 고문·이데올로기·분단·독재와 싸웠지만 이제는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횡포·기아·환경·생명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앞으로는 세계인이 공감할 한국의 작품을 많이 보실 거예요. 그 증거로 벌써 ‘한류’라는 게 시작됐고요.”

나는 자신있게 웃었고 그들은 그제야 우리나라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수평적이고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한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물론 사형제의 실질적 폐지를 비롯해 인권 상황이 눈부시게 향상된 우리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슬며시 일본과 중국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이것이 설사 다시 정권이 수평적으로 교체된다 해도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모든 것이 약간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해도 역사를 뒤로 돌리는 일은 없으리라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인간은 역사에서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라고 말했다.

국회에서 열린 사형제 폐지 토론회에서 여당의 한 의원이 “이론적으로는 대통령과 지체장애자의 인권이 평등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라고 한 말에 충격을 받은 이후 “엠네스티의 권고는 한국 물정을 모르는 한 단체의 권고일 뿐이다”라는 발언에 이르기까지 충격은 거의 비현실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당분간 ‘한류’는 제자리에서 맴돌 겁니다”

나는 정말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다. 내가 그럴 능력이 없으면 내 동료나 후배가 그런 예술가가 되는 것을 보고 싶다. 그것이 자동차 1000대를 수출하는 것보다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인 줄 소설책 한 권 읽지 않고 일류 대학에 들어간 위정자들은 알까? 창작자는 권력자에게 빌붙기로 처음부터 작정하지 않은 한, 남의 고통에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사람이다. 여기서 좌니 우니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인권위가 나서서 고통받는 가여운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을 돌보아주었을 때, 영화도 드라마도 소설도 진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는 앞으로 또 다른 해외 에이전시와 마주 앉게 될 때 그들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고 싶지는 않다. “공지영씨의 요즘 작품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찌 대답하게 될까?

“네, 요즘 우리나라가 다시 후지게 돼서 우리는 다시 그것과 싸우고 있어서 그래요. 세계 140개국에서 사실상 폐기된 사형제를 부활한다고 하고, 준(準) 국제기구인 인권위를 축소한다고 하니, 예술가들이 다시 그걸 말해야 하니까요. 영화도 드라마도 소설도 시도 음악도 도도하던 ‘한류’는 당분간 제자리에서 맴돌 겁니다. 어떡하죠?”

 

 

2009년 3월 13일 금요일

`미션 임파서블`?


  

 

"한국문학이 고정된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한국의 근현대문학도 확정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역사적 운동 양태이며, 문학 연구자들의 특정한 개념과 논리가 만들어내는 담론화 과정이다. " 유종호의 <변두리 양식의 주류화>라는 글 가운데 첫 대목이다.  이 완고한 문학에세이가 유종호 평론의 한 정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변두리가 중요하다. 변두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럼 중심은 어디인가"를 물어야 한다. 중심이 있는가? 시의 중심은? 소설의 중심은? 지금 한국 문화예술의 중심은 있는가? 나는 이런 질문 앞에 멍하다.

 

'중심의 착각'이라는 것을 하나의 명제로 만들어보자. 세상이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할 때에도 아프리카의 어린이는 성장하고, 세상이 유럽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역사학자들이 정리할 때에도 인디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아프라카나 인디언들의 저항은 사실상 역사상 '멸절'의 위협 앞에 굴복했다. 이 도저한 근대사, 자본주의 발전사는 그러하다.

 

조영일이라는 친구(?)의 글을 아직 세밀하게 읽은 적이 없지만, 그래서 뭐라 할 수 없지만, 제도 밖의 것조차 사실 제도화되어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제도 밖의 것이라는 착각 속의 것이 제도를 견고히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변두리는 쓸쓸하다,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변두리여, 그냥 변두리로 남자. 주류화하려고 하지 말자. (이 멍청한 청유형!)

 

조영일의 한국문학 분류는 너무나 정치적이거나 너무나 문학사회학적이다. 그래서 비문학적이다. 도대체 이게 뭔가? 이 트라우마는.

 

나는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문학 '판'-- 조영일은 '장'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에서 조영일은 살아남고 싶은 것이다. 내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당신부터 당신이 말한 한국문학 분류 밖으로 빠져나오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문학적으로는 "죽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의 변두리다. 그리고 그곳에서 문학이 생성된다.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처럼. 며칠 전 신문서평 난에서 조영일의 비평집--그 제목이 '한국문학과 그 적들'이라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제목이다--이 출간된 것을 알았는데, 이런 글은 그 비평집의 기본논지를 무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역사적 운동 양태'로서의 문학에 대한 실체에 핍진하지 못하다. 조영일! 한국문학은 닫혀 있지만, 문학은 열려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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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7753

 

[문화비평] 미션 임파서블  

조영일(문학평론가)

몇몇 글(특히 창비 비판과 관련된)을 발표하고 난 후,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조만간 창비에서 청탁이 올 것입니다. 문지나 문동은 그렇지 않지만, 창비는 자기를 비판하는 이들까지 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니까요.” 맞는 말이다. 확실히 창비 만큼은 외부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소위 비주류의 비평가들이 창비에 신뢰를 거두지 못하는(또는 창비에 미련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꾸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당신이 창비를 비판하고서도 창비로부터 청탁을 받았다면, 그것은 어쩌면 창비가 감당할 만한 비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 비판이 그들이 크게 변하기 전에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청탁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컨대 ‘진보적 상업주의’라는 비판 정도는 창비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비판한 이들이 창비의 청탁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판까지도 포용하는 제스처와 중화작용을 일으켜 상업주의라는 비판 자체가 저절로 소멸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조중동’이 양적으로 한국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면, 한국 대중음악은 SM, YJP, YG가, 한국 문단문학은 창비, 문학과사회, 문학동네 등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한국 문학계와 한국 대중음악계는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상품의 생산관리시스템적인 면에서 점점 유사해져가고 있다. 문제는 한국 문단문학에 <한겨레>나 <경향신문>, <시사인>처럼 이념상 그리고 체질상 주류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천문학>, <세계의문학>, <문학수첩>, <현대문학>, <문학사상> 그리고 최근에 창간된 <자음과모음> 등등의 면모를 일별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그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문학적 당파성)를 발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곳의 필자들은 모두 창비, 문사, 문동과 공유(교환) 가능하다. 아니, 모두 창비, 문사, 문동에 글을 쓰고 싶어 한다.

다른 곳의 청탁은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더라도 이들의 청탁만큼은 모두들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청탁을 거부하는 일, 그것은 어쩌면 문필가들에게 영원히 ‘불가능한 일(Mission Impossible)’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문학이란 1) 문단문학(메인문학), 2) (문단문학에 의해 보통 무시되는) 비문단문학(즉 서브문학)은 물론, 3) 번역문학, 4) 에세이(인문학적 산문)까지를 포함한 것이다. 따라서 나의 관점에서 (문학)비평가는 이 모두를 포괄하면서 넓게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제까지 한국의 비평가들은 1)로 제한된 영역에서 뒹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2), 3), 4)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기울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그 조차도 항상 1)로 수렴됐다. 문학교육시스템의 발전과 더불어 문화의 상징권력이 1)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단문학의 위기’란 그들의 눈에는 한국문학 전체의 위기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문단문학이 한국문학의 場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즉 메인문학으로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전후)로, 그들이 처음 출현할 당시는 그들 자신이야말로 서브문학이었다(당시 메인문학은 당연 漢文學이었다). 따라서 근대초기에 문단문학이란 엘리트 남성지식인이 일생을 걸만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즉 소설쟁이, 문학쟁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자명한 사실 확인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특정 문학형태도 자신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지속성을 주장할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과 또 그것을 문학일반의 것으로 확대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 문단비평가들은 ‘문단문학의 일반화’라는 연금술을 통해 획득한 ‘문학의 영속성’으로 대항하는데, 그것은 사실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잠시 가장무도회를 벌이는 것으로, 그들이 진정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문학이라기보다는 한국문학에서 문단문학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무도회에 참석할지, 아니면 손 안의 초대장을 찢고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할지는 ‘한국문학’에 대한 각자의 입장에 달려 있다.  


교수신문/  2009년 03월 02일 (월) 16:5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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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29684.html

 

 

“특정 문학지 소속 신씨 객관비평 불가능…칭찬평론 안주”

신형철씨(오른쪽)의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가 불러일으킨 반향은 예상대로 뜨거웠다. 주요 일간지에 대서특필되고 방송 뉴스에까지 소개된 데 이어 평론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올랐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칭찬 일색인 것은 아니다. 또래 평론가 조영일씨(왼쪽)가 압도적인 찬사에 맞서 외롭게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조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포털 다음의 문학 카페 ‘비평고원’에 지난 16일 ‘비평의 에티카 Ⅱ: 2008년 한국문학 소묘’라는 글을 올려 신씨의 비평관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조씨는 <근대문학의 종언> <언어와 비극> <세계공화국으로>를 비롯한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이라는 비평집을 내기도 했다. 가라타니의 논의에 바탕해 당대 한국문학을 비판해 온 그가, 가라타니의 근대문학 종언론에 부정적인 신형철씨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긴 하다.

 

조씨는 한동안 일본 소설의 기세에 눌렸던 한국 소설이 최근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되찾고 신씨의 평론집이 화제를 낳는 등의 상황을 두고 ‘한국문학의 부활’ 운운하는 견해에 회의적이다. 그것이 도리어 ‘몰락의 징조는 아닐까’ 하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부활’을 말하는 이들은 “(황석영, 신경숙, 공지영 같은) 소수 작가의 (상업적) 성공을 한국문학의 르네상스로 착각하는” 것일 뿐이며, 오히려 “올해 한국문학계는 사실상 ‘문학의 몰락’을 실감할 수 있는 해였다”고 그는 주장한다.

 

조씨는 특히 신형철씨로 대표되는 문단 주류 평론가들의 비평관을 문제삼는다. “(신형철씨를 비롯한) 문단비평가들의 뇌수 깊숙이 존재하는 ‘비판은 칭찬보다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이념”은 “문학 생산의 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입장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게 조씨의 생각이다. “‘비평가가 자기가 관계하는 문예지나 그 문예지를 내는 출판사에서 나온 작품집을 냉정히 비판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딜레마를 ‘비판보다 칭찬이 생산적이다’라는 절대명제(당위)로 돌파한 후, 그것을 ‘생활이념’(예를 들어, 아이들에게는 꾸지람보다 칭찬을!)으로 탈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인 신형철씨가 그 잡지를 내는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나온 작품에 대해 객관적인 비판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판보다는 칭찬을’이라는 구호 뒤로 숨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물론 신씨만이 아니라 주요 계간지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비평가들에게 두루 해당하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조씨는 최근 한국 소설 가운데 문학적 평가와 상업적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는 황석영씨의 <개밥바라기별>과 신경숙씨의 <엄마를 부탁해>를 비판한 별도의 글들 역시 자신의 카페에 올려놓았다.

 

그는 우선 두 소설이 나란히 타블로와 이적이라는 유명 대중가수의 추천사를 받았다는 사실은 작가들이 “시장의 평가를 강하게 의식했다”는 증거라고 본다. 그의 판단에 <개밥바라기별>은 ‘낭만적 자기동일시’에 근거한 “성장소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퇴행소설(노년소설)”이며, <엄마를 부탁해>는 “잘 씌어진 통속소설”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두 소설을 주된 근거로 한국문학의 부활을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조씨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받아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제대로(확실히) 몰락할 필요가 있다”며 현재 한국문학의 몰락을 통한 재탄생을 주장하기도 했다. “평가에 있어 다름을 서로 토론(대화, 논쟁)을 통해 풀어가야” 한다는 조씨의 문제 제기에 신형철씨를 비롯한 주류 비평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기사등록 : 2008-12-25 오후 06: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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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09. 03. 11) 한국문학을 위한 젊은 평론가들의 고언

 

왕성한 비평활동을 펼치는 두 소장 평론가가 나란히 신작 비평집을 냈다. 조영일(36) 씨는 지난해 펴낸 첫 비평집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에 이어 '한국문학비판 3부작'의 2부로 '한국문학과 그 적들'(도서출판b 펴냄)을 출간했고 고명철(39) 씨는 3년 만에 신작 비평집 '뼈꽃이 피다'(케포이북스 펴냄)를 묶어냈다. 두 평론가 모두 소위 '주류' 평단에서는 다소 비켜서 있긴 하지만 둘의 시각에는 자못 큰 차이가 있다. 다만 조씨와 고씨 모두 한국문학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통한다.

조씨의 책에는 2006-2008년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글과 지난해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비평공간 '비평고원'에 올린 글들이 담겼다. 그는 일부에서 제기된 '장편소설 대망론'이 하나같이 '공적 지원금' 확대 논리로 귀결되며 '국가는 시장으로부터 문학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담론을 공공연하게 펴는 것과 관련해 "보호해야 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정신"이라며 "그와 같은 정신을 훼손하면서까지 문학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문학을 하다 죽어버리라"고 말한다.


'한국문학의 르네상스'라는 말이 들렸던 지난해 문단의 화제작이나 문제작들도 냉철하게 살펴본다. 지난해 가장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서는 "잘 쓰인 소설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통속소설로만 그러하다"고 말했으며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의 경우 "노년에 수반되는 '회고'의 성격을 띠고 있어 최소한의 거리두기에도 실패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두가 칭찬해마지 않는 작가"인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부터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킨 타블로의 '당신의 조각들', 표절 논쟁으로 회자됐던 주이란의 '혀'에까지 거침없이 분석의 메스를 댄다.

전작에서 백낙청에 대한 매서운 비판을 시도한 데 이어 김우창, 도정일의 비평관에도 비판적으로 접근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조씨는 서문에서 "나는 한국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한국의 문단문학'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바닥을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현재 계간 '실천문학'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고씨는 '뼈꽃이 피다'에서 "한국문학 안팎에서 불어닥치는 거친 바람에 한데 어울려 피는 강한 생명의 '뼈꽃'을 피워내자"고 말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최근의 '탈주체적 성향의 비평'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한편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문학의 움직임 등에 대해 살펴본다. 지난해 출간된 김연수, 손홍규, 김중혁, 공선옥, 박상륭 등의 작품을 비롯해 김훈, 김별아, 전경린의 역사소설, 황석영의 20세기 3부작 등도 꼼꼼히 읽었다.  

고씨는 "한국문학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다종다양한 '상상'이 아니라 우리들 삶의 저 깊숙한 곳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 '상상력'"이라며 "지금까지 낯익은 삶에 조종을 울림으로써 어떤 신생의 가치를 욕망하도록 미적 전율을 일으키는 그런 '상상력'을 꽃 피워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평론가 모두 얼마 전 첫 비평집 '몰락의 에티카'를 출간해 문단 안팎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젊은 평론가 신형철 씨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도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조씨는 "좋아하는 텍스트를 칭찬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만만한 텍스트를 두들겨 패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신씨의 말을 인용한 후 "거의 대부분의 문단비평가들이 갖고 있을" 이 '입장'은 "그저 문학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입장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즉 "'비평가가 자기가 관계하는 문예지나 그 문예지를 내는 출판사에서 나온 작품집을 냉정히 비판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딜레마를 '비판보다 칭찬이 생산적이다'라는 절대명제로 돌파한 후, 그것을 '생활이념'으로 탈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고씨는 복도훈, 허윤진, 신형철 씨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접근한 글에서 "신형철의 비평 곳곳에서 '뉴웨이브'의 시들에 대한 텍스트의 미학에 대한 세밀한 점검은 이루어지고 있되, 그 시들의 제도적 권력 양상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고찰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고미혜기자)

09. 03. 11. 

2009년 3월 12일 목요일

종이신문의 몰락과 미디어악법

오늘 아침 성우제와 통화했다. 태평양을 건너 들려오는 목소리, 반갑고 고마웠다. 우제 보고 싶다. 술 한잔 하고 싶다. 우제. 그런데 너의 글이 실릴 예정이라는 잡지가 월간미술이었나 미술세계였나. 두 군데 다 뒤져 보아야 할 모양이다. 아무튼 너의 글맛을 하루 빨리 볼 수 있기를.

 

김주완 김훤주 기자의 블로그에서 글 한 꼭지(포스트)를 옮겨놓는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그림출처:
www.artsjournal.com/bookdaddy/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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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2kim.idomin.com/

 

 

미국의 100년 신문 <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가 4월부터 인쇄를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종이신문을 찍지 않겠다는 말이다. 대신 인터넷으로만 뉴스를 서비스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유명한 잡지인 < PC매거진 >은 물론 지역신문의 인쇄·배포 중단 소식도 잇따르고 있다.

 

반면 < 허핑턴포스트 >라는 정치 팀블로그는 < 뉴욕타임스 >나 < USA투데이 >, 구글뉴스 등 유수한 기존 언론과 포털뉴스를 제치거나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미국내 주요언론으로 떠올랐다. < 테크크런치 >라는 블로그의 RSS 정기구독자도 100만 명이 넘은 지 오래다.

 

  종이신문만으론 더 이상 생존 어렵다

 

조선·중앙·동아일보가 지난해 촛불집회 후 소비자들의 광고주 불매운동에 열받은 나머지 한국 2위의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 뉴스공급을 중단했다. 그러나 '미디어다음' 뉴스페이지의 방문자 수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그보다 더 놀랄 일이 있다. '미디어다음'에는 일반인들도 블로그를 통해 기사를 송고할 수 있는 '블로거뉴스'라는 페이지가 있는데, 여기에 송고하는 블로거 중 직업기자 못지 않은 '베스트 뉴스블로거'는 300명이 채 안된다.

 

하지만 '뉴스' 페이지에는 종합일간지와 방송사, 스포츠신문, 경제신문, 인터넷신문, 각종 전문매체와 잡지 등 50개가 넘는 매체에 소속된 프로기자 수천 명이 그야말로 '뉴스'를 송고한다.

 

직업기자들 생산하는 '뉴스'와 아마추어들이 만드는 '블로거뉴스'  페이지의 방문자 수는 각각 얼마나 될까? 엄청난 차이가 날 것 같지만 대략 '뉴스'는 평일 하루 200만 명, '블로거뉴스'는 100만 명이 방문한다고 한다. 바야흐로 뉴스의 소비패턴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블로거뉴스'의 영향력이 커지자 청와대와 국방부, 문화관광체육부, 경찰청 등 거의 모든 정부부처도 각각 블로그를 개설했다. 이들 정부부처는 블로그 전담 직원을 배치하고 대학생 기자단이나 주부기자단을 꾸리는 등 전문적인 블로깅에 나서고 있다.기업체는 물론 정부부처의 광고도 이젠 인쇄매체를 넘어 인터넷으로 향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도 신문·방송 광고에 이어 개인블로그에 배너광고를 다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경남도 람사르총회 광고가 이미 수많은 블로그에 집행됐으며, 최근에는 경남FC의 축구경기 광고도 블로그에 붙었다. 공식 통계로도 신문 광고 집행액수는 매년 줄고 있지만, 온라인광고는 급상승하고 있다. 이미 온라인 광고시장이 신문 광고시장의 절반을 넘어섰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추세다. 당장 서울지역 일간지의 2월 광고 매출액이 지난해에 비해 30~40% 정도 줄었다고도 한다.

 

이런 가운데 전국 대부분의 지역일간지는 토요일자 신문발행을 중단했고, 심지어 잘나간다는 조선·중앙·동아일보도 4~5개면을 감면했다. 어떤 신문은 독자도 모르게 신문용지 급수를 한급 낮췄다고도 한다. < 경향신문 >의 기자와 사원들 월급은 반토막이 났고, < 한겨레 >도 심각한 상태라고 한다. 올해 안에 서울지역 일간지 한 두 개는 문을 닫을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도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경제위기가 아니더라도, 이미 종이신문이라는 상품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이나 유럽의 일부 나라처럼 '활자매체 지원'을 위한 각종 정책과 예산 투입으로 몇 년을 더 견딜 수 있을 수도 있지만, 근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신문은 죽어도 조중동이 영원히 사는 법

 

영악한 조중동은 이런 종이신문의 몰락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조중동은 재벌과 손잡고 방송을 삼키는 방향으로 생존방향을 정했다. 그래서 기를 쓰고 신문·방송 겸영을 골자로 하는 '미디어 악법'을 통과시키려는 것이다. 재벌과 조중동의 방송 장악이 1단계라면, 다음 단계는 그걸 발판으로 한 뉴미디어 시장 장악이다.

 

뿐만 아니라 조중동은 현 이명박 정권이 얼마나 허약하고 밑천 없는지도 잘 알고 있다. 지난해 들불처럼 번지던 촛불도 간신히 끄는 데 성공했고, 조중동 광고주에 대한 언론소비자들의 불매운동도 '불법'으로 몰아붙여 차단하는데 성공했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다. 정권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판결도 언제든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미 개인 소유가 된 방송사를 국가가 강제로 빼앗을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이 살 길은 모처럼 다수를 점하고 있는 한나라당을 꼬드겨 한시바삐 방송을 삼키고 뉴미디어 시장까지 선점하는 것뿐이다. 이건 정권과 한나라당의 이해도 딱 맞아떨어진다.

 

그들은 또한 제2의 촛불이 타오르게 되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온다는 것도 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자기들의 야욕을 채워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다급하다.

 

조중동은 여기에 밥그릇이 걸려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디어법 개악에 목숨을 걸었다. 그들은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목숨을 걸 것인가? 단지 '저지'하는 데만 성공하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인가? 이번 미디어 악법 저지투쟁을 하면서도 계속 우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9년 3월 10일 화요일

`신빈곤층` 문제의 어떤 해결방식


*그림: 케테 콜비츠, 빈곤(Not), 석판(Lithograph printed on yellow chine collE), 1893-1894

 

 

  언어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틀입니다. 언어가 비틀어지면 세상이 비틀어져 보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모든 위정자들은 말에 대해 세심하게 관심을 쏟았습니다. 언어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현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말을 단순하게 바꾸거나 없앤다고 해서 그 말이 나오게 된 현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언어이론'의 발달 과정에서 아주 상식적인 것입니다. 몇 가지 상식적인 언어이론, 예를 들어 소쉬르의 기표/기의 논의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그림이론 등도 이런 문제의식 위에 있는 것입니다. 언어그림이론은 언어가 실재를 반영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반면  언어게임이론은 그 '실재가 부재하다고 여깁니다. 언어는 언중의 게임이라 여기는 것이죠. 물론 이론상으로는 언어게임이론이 성립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습니까? 아무것도 현실적인 것이 없이 말만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까?

 

2009년 한국의 정치는 마치 언어게임이론을 전개하는 장처럼 보입니다. 아래 신문 기사를 보면서 도대체 이것은 뭔가, 어디까지 이런 식으로 가능할까? 언어게임이론에 따르면 말이란 언중이 참여하는 일종의 게임일 뿐이라 하였습니다만, 사실 말이 그럴 수 있습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신빈곤층이라는 말을 없앤다고 (신)빈곤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일 끝에 인용해 놓은 글에서 보듯,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선대인 부소장은  '신빈곤층'이라는 말 자체도 '말장난'이라고 말합니다. 선대인 씨는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신빈곤층'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사회적 보호와 지원을 받아야 할 빈곤층이지만 복지사각지대에 놓여 있거나, 그나마 받던 복지 지원마저 끊어질 상황에 처한 빈곤층만 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이 대통령이 말하는 '신빈곤층'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빈곤층을 발굴해 지원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여론조작용 표현일 뿐이다. 더구나 이 대통령의 말하는 '신빈곤층'이라는 레토릭은 마치 원래 빈곤층은 충분한 사회복지 혜택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도록 만든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빈곤층'이라는 말을 쓰지 말도록 하고 '위기가정'이라는 말을 쓰기로 했다는 것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레토릭의 레토릭이라고 해야 할까요?

 

말이 비틀어지면 세상이 비틀어져 보입니다! '더블 스피크'를 아무리 떠들어댄다고 해서 나찌의 학살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서 사라지는 것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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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082763

 

(노컷뉴스 09.03.05 변상욱의 기자수첩) 국민은 '신 빈곤층, MB정부는 '신 위기층'

 

'신빈곤층'이란 용어가 금지어로 지정됐다고 한다. 지난달 26일쯤 관련 보도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청와대 관계자가 밝히기로 "신 빈곤층이라는 용어 자체가 적절치 않다는 내부 검토에 따라 쓰지 않도록 조치했다. 국민을 계층화 해버리는 의미가 있어 일시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는 내용.

◈ 빈곤층은 '신新' 것인가? 쉰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부터 "새롭게 발생하는 신빈곤층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경제 살리기를 공약했었다. 결국 신빈곤층이란 서민·중산층이 이번에 들이닥친 경제위기로 인해 빈곤층으로 추락하면서 생겨났다는 의미로 '신빈곤층'이라고 규정한 것.

노무현 정부가 미처 대응하고 돌보지 못한 새롭게 생겨나는 빈곤층을 새 정부가 예리하게 파악해 적절한 대응정책을 마련하겠다는 의미로 이명박 대통령이 목도리 할머니, 봉고차 할머니 만나고 어려운 가정들 돌아볼 때 마다 사용하던 용어이다.

그런데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나도 신빈곤층은 계속 늘어만 가고 경제성장율이 마이너스가 예상되는 마당에 계속 늘어날 것이고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신빈곤층'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생겨난 빈곤층이라는 이미지가 점점 강해지고 있어 황급히 지워버리고 싶은 게 속내인 걸로 짐작된다.(물론 설명으로는 국민을 계층화하는 부적절한 용어라 계층으로 굳어지는 게 아니라 일시적인 잠깐 고생하다 다시 중산층으로 상승할 계층이라는 이미지로 바꾸고 싶다고 하지만….)

노무현 정부 책임으로 귀책되는 빈곤층이냐, 이명박 정부 책임으로 봐야 할 빈곤층이냐. 그런 뉘앙스의 차이인데 어차피 신빈곤층이 줄어들거나 신빈곤층이 먹고 사는 데는 전혀 도움 안 되는 머리 굴림.

◈ 국민은 '신빈곤층'으로, MB 정부는 '신 위기층'으로?

아직 확실히 결정된 용어는 아니지만 일단 대체해 사용하는 것이 '위기가정'인 모양이다. 왜냐하면 보건복지가족부가 '위기가구'라는 말을 계속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여기서 빌려 온 듯하다.

전재희 보건복지장관이 지난달 말 인터뷰 때 이야기한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신빈곤층이란 말의 의미가 좀 모호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신빈곤층이란 법령적인 것도 학문적 개념도 아니다. 행정적으로 쓰는 용어이다. 경제위기로 인해 소득을 상실해 새로운 위기에 빠진 가정인 셈이다. 복지부는 '위기가구'라는 개념으로 씁니다"

보건복지부의 행정 처리상으로는 소득상실, 폐업, 실직, 주소득자 사망, 이혼, 화재나 교통사고 등으로 생계유지가 갑자기 어려워져 '긴급 복지지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위기가구'이다.

청와대는 복지부의 '위기가구'를 그대로 베껴 쓰자니 자존심 상하고 개념의 차이도 있고 해서 '위기가정'으로 일단 바꿔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기가정'이란 용어는 너무 포괄적이다.

조금 더 명확히 하자면 '경제 위기가정' 이렇게 써야 신빈곤층이라는 본래의 표현에 더 가깝다. 그러나 흔히 줄여서 '위기가정' 이렇게 쓴다.

뭔가 경제를 못살려 어려워진 가정, 정부 책임 이런 느낌을 덜 주고 그 가정이 문제가 있고 어려워서 힘을 못 쓴다는 느낌이 강하지 않은가. 은근히 국민에게 떠미는 느낌.

학문적, 행정적 용어를 정리하자면 사회의 계층은 최상위 부유층 - 부유층- 중산층 - 서민층 - 신빈곤층 - 차상위 계층 - 기초수급 대상자 로 이어진다. 위기가정이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신빈곤층의 특징은 사회안전망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행정 용어로 '비수급 빈곤층'. 두 가지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복지부의 통계로 경제위기 가구는 8만5천5백 가구이다.

올 경제성장율이 마이너스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개념 정리를 어찌 해나가든 신빈곤층은 늘어만 갈텐데….

국민은 '신빈곤층'으로, 해결 못해 쩔쩔매는 MB 정부는 '신 위기층'으로 가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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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09.03.05 칼럼) 더블 스피크

 

'인종청소’라는 용어는 20세기 초중반 독일의 인종 우생학자들에 의해 일반화됐다. 인종 가운데 열등한 표본은 전선의 총알받이로 보내고 우수한 표본은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알프레드 플뢰츠는 1905년 ‘인종청소를 위한 사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예나대학 인류학 교수였던 H.F.K 귄터는 1920년 히틀러를 감명시킨 ‘독일국민의 인종청소’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보호해야 할 북유럽 인종은 크고 힘이 세서 전쟁이 일어나면 최전선에 배치돼 오히려 많은 타격을 받게 된다며 전쟁을 반대했다. 가관인 것은 그가 이 공로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청소는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종청소는 더럽고 쓸모없는 인종을 걸러내 사회를 정화하는 것이 된다. 인종청소를 이렇게 규정하면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적 고민은 필요 없어진다. 하지만 인종청소의 본질은 대량학살이다. 이같이 본질을 감추거나 호도하는 언어 조작을 ‘더블 스피크’라고 한다.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명명한 이 말은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해고를 ‘구조조정’, 고용보장 장치의 약화를 ‘노동시장 유연성’, 빚 대신 ‘신용’이라고 표현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더블 스피크는 특히 정치권력이 국민들을 호도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다. 미 국무부는 세계인권현황보고서에서 ‘살해’를 ‘불법적이거나 자의적인 생명의 박탈’로 표현했다. 1차 걸프전 당시 미국 국방부는 ‘폭격’을 ‘목표물에 대한 서비스’, 표적 가운데 인간은 ‘부드러운 목표물’, 건물은 ‘딱딱한 목표물’이라고 했다. 또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비밀 포로수용소에서 자행된 6가지 고문기술이 ABC방송에 의해 폭로되자 ‘정보획득을 위한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둘러댔고 미국 정부는 ‘공격적 심문’이라고 했다.(‘선샤인 논술사전’, 강준만)

정부와 지자체의 문서나 자료에서 ‘신빈곤층’이란 말이 사라지고 ‘위기 가정’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청와대의 지시로 이뤄진 일이다. 현 정부 들어 빈곤층이 늘어났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빈곤층’을 ‘위기 가정’으로 바꾼다고 해서 경제위기로 인한 빈곤층 양산이 그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호도해서는 제대로 짚는 정책도, 국민의 지지도 얻을 수 없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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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31821405&code=940705

 

경향신문(09. 03. 04) 이명박 정부 금기어 ‘신빈곤층’

 

3일 일선 지자체가 내놓은 각종 자료에 눈에 띄는 용어의 변화가 생겼다. ‘신빈곤층’이란 용어가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춘 것이다. 대신 등장한 용어는 ‘위기가정’이다. 전북도는 이날 ‘신빈곤층’으로 써 오던 관련 자료 용어를 모두 ‘위기가정’으로 바꿔 사용했다.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신빈곤층’이란 용어는 공식용어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민주노동당은 2일 민생브리핑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이 얼마 전 ‘봉고차 할머니’ ‘목도리 할머니’ 등 빈곤층 찾기 쇼를 할 때 현장에서 직접 사용까지 했던 용어를 며칠 만에 금지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민노당은 “신빈곤층이라는 용어가 현 정권이 만들어낸 빈곤층으로 들린다는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며 “이제 집권 1년이 지난 현 정권의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노당은 “용어 사용에 얽매이지 말고 그 용어 자체가 사라지도록 하는 정책에나 전념하라”고 꼬집었다.

지자체에서는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전북도는 공식적으론 “정부의 ‘신빈곤층’ 용어 자제요청은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료 한쪽 면에 ‘청와대 신빈곤층 용어 사용 금지령’이란 제하의 인터넷판 뉴스를 복사해 첨부했다. 전북도 관계자는 “공식적인 요청은 없었지만 정황으로 볼 때 앞으로 모든 공문서에 신빈곤층 대신 위기가정이란 용어를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구시의 한 간부는 “이명박 대통령도 신빈곤층 복지사각 제도를 없애라는 말을 사용했다”면서 “정부 스스로 이 용어를 쓰지 말라고 했다면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남대 김모 교수는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문서작업시 이전 정권에서 주로 사용했던 단어들은 모두 금지어라는 점에 놀랐다”면서 “예컨대 ‘소외계층’ ‘혁신’ ‘참여’ 등의 단어를 보고서에 쓰면 혼쭐난다”고 말했다.(박용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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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http://unsoundsociety.tistory.com/

 

 

이 대통령은 2월 5일 보건복지종합상담센터인 129콜센터에서 비상경제대책 현장점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어려운 사람들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일 것”이라며 “제일 중요한 게 신빈곤층에 대한 지원과 일자리 창출”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실에 맞지 않는 복지법 체계는 고치고, 도와줘야 할 신빈곤층을 적극 찾으라”는 주문까지 했다고 한다. 이어 이 대통령은 집에 헌 봉고차가 있다는 이유로 기초수급대상자에서 제외된 빈곤층 모녀와 직접 전화 상담하는 ‘쇼’까지 연출했다. 이 대통령의 이날 발언을 듣고 '신빈곤층'을 한 번 찾아나서 보았다.


사례1:
2월 9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농로를 따라 가니 컨테이너 한 채가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다. 컨테이너 옆에는 녹슨 자전거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컨테이너 안에 들어서니 양모씨(60)가 전기장판 위에서 한 눈에도 낡아빠진 홑이불 두 겹을 덮고 있다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컨테이너를 개조한 단칸방에 발을 디디자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전해져 왔다. 싱크대 위에는 냄비와 그릇 몇 개가 놓여 있었고, 이가 맞지 앉는 싱크대 아래 수납문에는 음식 기름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역시 이가 맞지 않는 수납장들이 방 한 켠에 놓여 있었으나, 내용물은 거의 없어 보였다. 창문쪽에는 야전용 군복 외투가 걸려 있었다. 양씨의 유일한 겨울 외출복이라고 했다. 방 안에서 유일하게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인 전기 장판뿐이었다.

                     <사진: 양씨가 사는 컨테이너 박스 전경> 

                   

양씨는 매월 단 한 푼의 수입도 없다. 백내장으로 한 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에 가깝다. 그나마 몇 달 전 일산종합사회복지관을 통해 후원 받은 60만원으로 왼쪽 눈을 수술해 볼 수는 있게 됐지만, 다른 쪽 눈은 백내장을 너무 오래 알아 수술해봐야 시력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해 수술을 하지도 못했다. 양씨를 부양해줄 수 있는 가족도 없다. 사정이 이렇지만 양씨는 현재 기초생활보호대상자도 차상위계층도, 기초노령연금대상자도 아닌 완벽한 복지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도 한 때는 꽤 떵떵거리고 살던 지역 유지였다. 상당한 부농이었던 그는 한때 고양시체육회장과 새마을지도자, 어용소방대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20여 년간 함께 살아오던 처가 도박에 빠지면서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5년 전 갑자기 빚쟁이들이 들이닥쳐 양씨의 전 재산을 차압했다. 처와 헤어진 뒤 빚쟁이들을 피해 집을 나와 전국의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그가 다시 고양시로 돌아온 것은 2년 전. 당시 백내장으로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해 더 이상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리기가 막막해 비빌 언덕이라도 있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후 그는 일을 할 수 없어 친구들이 간간히 건네주는 용돈이나 약값 외에는 아무런 수입이 없었지만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과거 빚쟁이들에게 차압 당해 찾을 길이 없는 양씨 명의의 승용차 두 대에 대한 세금 및 과태료 체납액이 500여 만원을 넘지만 도저히 갚을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 체납액을 갚을 수 없어 자신 명의의 승용차 두 대를 말소할 수 없어 기초생활수급대상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백내장뿐만 아니라 당뇨병과 고혈압까지 앓고 있어 병원과 약국 신세를 질 일이 많지만, 같은 이유로 건강보험 공제 혜택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구청공무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해 현장 실사를 나오기도 했지만, 정해진 규정 때문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정부로부터 최소한의 복지혜택도 누리지 못하는 그는 일산종합사회복지관을 통해 간간이 전달되는 쌀과 라면 등 생필품과 간간이 들리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연명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건설업을 하던 친구의 도움으로 마련한 컨테이너에서도 이제 더 이상 생활하기 어렵게 됐다. 원래 컨테이너가 자리잡은 땅은 이종사촌 소유였으나, 이종사촌이 지난 9월 다른 사람에게 땅을 넘긴 뒤에는 계속 땅주인으로부터 그곳에서 나가달라는 독촉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이대로 잠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양씨가 살고 있는 컨테이너를 나오면서 이번 겨울은 그에게 아마 가장 추운 겨울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례2: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경우는 양씨뿐만 아니다. 일산동구 사리현동의 한 빌라형 아파트에 사는 김모씨(55). 그는 83년에 교통사고를 당해 지체장애인이 된 뒤로는 일을 할 수 없어 근로소득은 전무하다. 그래도 지난해까지는 기초생활보호 대상자여서 구청에서 30여 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기초생활보호 대상자에서 탈락되면서 그마저도 끊겨버렸다. 2000년 무렵에 친지들의 도움으로 마련한 9평짜리 집의 시세가 오르면서 수급권자 자격에서 탈락된 것. 그나마 인근 교회에서 매월 10만원 정도의 후원금을 받고 있고 장애인수당 7만원도 받고 있어 그나마 최소한의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셈이다. 한 장애인지원단체로부터는 가끔씩 교통 편의를 제공받고 있다.

 

김씨는 하반신을 쓸 수가 없어 변을 본 뒤에도 혼자서 처리를 하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변이 묻은 채로 그대로 있거나, 변이 묻은 옷을 오랫동안 세탁하지 못해 집안에는 늘 오물 냄새가 코를 찌른다. 김씨 아파트를 방문한 날에는 인근 교회의 봉사자들이 나와 집안 청소를 한 뒤인데도 불쾌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얼마 전부터 큰 마음을 먹고 월 이용료 4만원을 내고 가까운 동사무소를 통해 생활도우미를 부르고 있지만, 부담이 작지 않다. 김씨는 아파트 시세가 올랐다고는 하지만 이 집을 떠나 다른 곳에 갈 수도 없으니 팔 수도 없다생활도우미 비용만이라도 지원받을 수 있다면 좀더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례3:
권모 할머니(81)의 경우는 지난해 말 차상위 계층에서 탈락된 경우다. 차상위 계층으로 일정 금액까지 무료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의료보호 2종 혜택을 받았던 권씨는 내년부터 이 같은 혜택을 볼 수 없게 된다.

 

             <사진2: 권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 전경>




1남 3녀의 자녀를 두고 있지만, 권할머니는 무너져가는 토담집에서 홀로 살고 있다. 실직 상태인 아들을 비롯해 자녀들의 생활이 모두 어려워 식비 정도만 도움을 받을 뿐 다른 생활비 도움은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기초노령연금으로 매월 8만원, 기초 경증장애수당으로 2만원을 받고, 구청에서 쌀을 지원받는 것 외에 한 복지기관의 주선으로 연결된 후원자로부터 분기별로 20만원을 받는 것으로 그나마 근근이 생활하고 있었다.

 

권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포탄 파편이 몸에 7군데나 박혀 거동이 불편해 지체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여기에 노인성 만성질환까지 앓고 있어 자주 병원 신세를 져야 하지만 이번에 차상위 계층에서 탈락되면서 그 동안 받아오던 의료보호 2종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직계 가족과 그 배우자의 수입도 차상위 계층 판정 기준으로 작용하는데, 얼마 전 둘째 사위가 승진하면서 연봉이 오른 때문이다. 사위의 승진으로 권할머니 생활이 사실상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규정 때문에 그는 그나마 누리던 혜택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라고 해서 제대로 사회복지 혜택을 입고 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황모 할머니(66)의 경우를 살펴보자. 황할머니는 기초노령연금을 포함해 한 달에 39만원을 정부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하지만 단칸방 월세 10만원과 전기료와 수도료, 전화요금 등 각종 공과금 8만~10만원을 매월 내고 나면 남는 돈은 매월 20만원 남짓. 하지만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황씨는 병원비와 약값, 교통비, 식비 등을 지출하고 나면 늘 돈은 부족하다. 겨울이지만 연탄도 마음 놓고 못 때고, 이불도 변변치 않아 냉기를 가까스로 면할 정도로만 지낸다. 세탁기는 아예 살 엄두도 못내 엄동설한에도 찬물 빨래를 해야 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국내 복지제도는 아직 빈약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국민기초생활보호제도나 기초노령연금 등 복지제도가 외환위기 이후 도입되거나 확충된 것이 이 정도 수준이다. 현행 복지제도는 어떻게 보면 지원대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련된 듯한 느낌마저 줄 정도로 엄격한 기준과 융통성 없는 행정 체계 때문에 복지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빈곤층이 적지 않다. 이러다 보니 위에서 본 것처럼 많은 복지지원 대상자들이 사회복지기관이나 종교기관, 자선단체, 복지관련단체 등 민간부문의 후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 같은 민간 부문의 도움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민간 부문 복지지원사업을 주도하는 사회복지기관의 사정 또한 열악하기 짝이 없다. 현재 고양시 관내에는 시로부터 운영예산을 지원받는 사회복지기관이 5군데 있지만, 실제 관내 복지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5개 사회복지관 가운데 일산종합사회복지관이 담당하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나 독거노인, 장애인 등은 모두 180여 케이스에 이른다. 그나마 올해 9월부터 일산동구 고봉동과 풍산동을 담당하는 거점센터를 따로 열어 40 케이스 정도가 늘어난 것이 이 정도다.

 

180여 케이스를 담당하는 인력은 거점센터 직원까지 포함해 모두 5명에 불과하다. 이렇게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복지지원이 필요한 가정을 추가로 찾아내 지원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실제로 9월 일산복지관 거점센터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해당 동사무소 등으로부터 잠재적 지원대상자 명단으로 건네 받은 케이스는 모두 250여건에 이른다. 하지만 거점센터 직원 2명이 40여 케이스를 상담해 지원하고 나니 지원 대상자를 추가로 확대하는 것은 엄두를 내기 힘들다. 거점센터 직원 김모씨는“200여건의 케이스들은 아예 상담도 진행해보지 못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한지 파악도 못하고 있다”며 “고양시 전체로 볼 때도 5개 사회복지기관이 커버하고 있지 못한 빈곤층 대상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거점센터 직원이 내년 초부터 한 명 증원될 예정이지만, 이번에는 당초 고양시가 편성했던 거점센터 지원예산 1억 원이 7,000만 원으로 줄었다. 시의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는 이유로 3,000만원 삭감된 것이다. 2,000만원 전후 수준인 담당 직원 세 명의 연봉을 제외하면 달랑 1,000만원이 남을 뿐이다. 결국 거점센터 입장에서는 민간의 독지가나 관련 자선단체의 후원을 요청해 필요한 복지지원 대상자와 연결해주는 일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래 <도표>에서 OECD 주요국의 저소득층과 장애인, 노인, 환자 등 취약 및 소외 계층에 대한 정부지원을 나타내는 사회지출(Social Expenditure) 추이를 살펴보자.


 미국과 일본은 GDP대비 사회지출 비중이 15%를 넘고 있으며 OECD국가 전체의 평균 사회지출 비중도 20%를 상회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외환위기 직후에 급증하는 복지 수요에 대응하여 보건복지 예산의 비중을 한 단계 올렸다고는 하지만 2005년 현재 6.9%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 OECD국 평균의 1/3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복지에 관한 한 OECD국가로 불리기에 민망한 수준인 것이다.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극심한 장기 경기침체를 겪으면서도 사회지출 비중을 전체 예산의 11.2%에서 18.6%로 빠르게 늘려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일본 사회의 급속한 고령화와 비정규직 증가 등으로 인한 복지수요 급증에 따른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장기불황이라는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도 일본 정부와 정치권이 사회지출 예산을 적극적으로 늘려왔다. 일본의 예를 보더라도 한국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복지 인프라를 확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최대 경제위기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현 정부는 말과는 달리 올해 보건복지 예산 편성에 극히 소극적이었다. 경기불황에 따른 실업자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급증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래 고령화 사회를 대비한 투자적 개념의 복지 인프라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다. 이처럼 복지 인프라에 관한 개념 자체가 없다 보니 복지 인프라 구축을 위한 예산배정이나 투자도 있을 리가 없다. 복지 인프라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이유는 중장기 국가발전 목표를 747과 같은 양정 성장에만 집착할 뿐 삶의 질적 향상과 같은 질적 개념의 중장기 국가발전 전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경제 위기 때문에 저소득층과 취약 계층의 복지 수요가 몇 배로 늘어나는 현실을 외면하고 현 정부는 실질적으로는 올해 물가 인상분 수준에도 못 미치는 복지 예산을 증액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의 발언과는 정반대로 현실에서는 복지 혜택이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4대강 강바닥을 파헤치고 관련한 부수 사업에 4년간 18조원을 투입하는 등 예산을 물 쓰듯 낭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곧 죽어도 서민을 위한 경기 부양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정부의 그 같은 건설경기 부양책은 과거 일본의 부동산 버블 붕괴기에 실패했던 정책으로 결국 자금난에 빠진 건설사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차라리 그런 목적이라고 솔직하게 고백이라도 하면 위선적이라는 생각은 안 들 것이다. 그런데 당장 숨 넘어가는 진짜 저소득층과 취약 계층의 지원 예산은 ‘예산 부족’을 이유로 삭감하면서, 서민을 위한다며 대규모 건설토목 사업을 벌이니 정부가 말하는 서민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부동산 거품기에 국민들의 부동산 투기 심리를 잔뜩 부추겨 고분양가로 폭리를 취하고 이제는 ‘삽질 경제학’에 심취한 ‘건설족 정부’에 엉겨붙어 심각한 도덕적 해이 양상을 보이는 건설업체들이 서민이란 말인가?

 

위에서 본 것처럼 현장을 둘러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신빈곤층'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사회적 보호와 지원을 받아야 할 빈곤층이지만 복지사각지대에 놓여 있거나, 그나마 받던 복지 지원마저 끊어질 상황에 처한 빈곤층만 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이 대통령이 말하는 '신빈곤층'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빈곤층을 발굴해 지원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여론조작용 표현일 뿐이다. 더구나 이 대통령의 말하는 '신빈곤층'이라는 레토릭은 마치 원래 빈곤층은 충분한 사회복지 혜택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도록 만든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정말 빈곤층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면 '신빈곤층'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부끄러워 해야 마땅하다. '신빈곤층' 챙기기 전에 원래 있는 빈곤층들에 대한 복지지원이나 깎지 말고 제대로 챙기라는 말씀이다. 하긴 사회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이 결여돼 있고, 주변에서 그럴듯한 신조어 하나 갖고 오면 생색내기 식으로 일을 추진하는 게 몸에 밴 이명박에게 그런 걸 바라는 게 사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쇼라고 해도 정도가 좀 지나치다. 더구나 건설토목사업에 퍼붓는 돈 때문에 복지예산이 줄어 힘겨운 겨울을 나고 있는 서민들을 대상으로 쇼를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갑자기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 가서 상인에게 목도리를 걸어주는 장면을 연출하고, ‘신빈곤층에 대한 지원을 늘리라’며 어린애와 통화하는 쇼는 보기가 정말 역겹다. 그런 대중용 이벤트로 열악한 사회복지 현실을 외면하는 자신의 태도를 포장하니 역겹다는 것이다. 아무리 쇼라는 것을 알고봐도 속내가 너무 뻔히 드러나 보이면 가증스럽다 못해 비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