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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5일 일요일

'사회디자인'에 대한 생각

'사회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세상에 널리 퍼뜨린 사람은 박원순(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함에 '소셜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새기고 다닌다고 한다.

 

박원순의 '미국식' 사회 디자인에 대하여, 자칭 'B급좌파'라는 김규항의 따끔한 똥침. 이 칼럼은 짤막하지만, 곱씹어 볼 내용은 풍부하다. 한겨레 2009년 10월 28일자 '야!한국사회'의 칼럼 '사회 디자인' 이다.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에 따라 부의 격차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똑같은 인간이기에 그 격차는 지나쳐선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 평범한 정규직 노동자 한 사람이 이건희 씨의 재산만큼 벌려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꼬박 50만 년을 모아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능력과 노력에 따른 정당한 격차로 인정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큰 틀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 즉 사회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작업도 결국 그 격차를 최소화하는 것, 어떻게 하면 부자들의 돈을 빼서 가난한 약자들의 삶을 괼 수 있는가 하는 데서 출발한다.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함으로써 그걸 해결하려던 현실 사회주의가 일단 퇴장한 오늘, 우리 앞엔 대략 두 가지 사회 디자인이 제출되어 있다. 첫째는 기부나 자선을 기반으로 하는 미국식 사회 디자인이다. 빌 게이츠 같은 이가 엄청난 거액을 기부하는 모습을 보며 부모들은 제 아이에게 말한다. “부자가 되어야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단다.” 그러나 미국식 사회디자인은 부자들의 일방적인 의사로 운영된다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알다시피 세상엔 남을 위해 한 푼도 내놓지 않으려는 부자가 훨씬 더 많고, 천사 같은 얼굴로 내놓다가 제멋대로 돈줄을 끊어버리는 부자도 많다.


세금을 기반으로 하는 유럽식은 그런 결함을 상당 부분 보완한 사회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거액을 기부한 부자가 사회적 영웅이 되고 가난한 약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 부자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풍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든 사악한 마음을 가졌든 내고 싶든 내고 싶지 않든 상관없이 내야 한다. 그들이 내는가 안 내는가, 혹은 얼마를 내는가를 결정하는 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사회다. 사회적 약자들은 그 부자들을 의식하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하다는 얼굴로 사회적 도움을 받는다.


사실 당연한 것 아닌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부를 가진 사람이 사회에 더 많은 돈을 내놓는 건 말이다. 또한 사회 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며 살아온 사람이, 말하자면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고 심지어 병역의 의무도 이행해온 사람이 삶의 위기에 빠졌을 때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는 건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대체 왜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고 군대를 가야 하는가? 미국식 사회 디자인은 바로 그 당연하게 누려야 할 권리를 비굴하게 구걸하게 만드는 부자들의 쇼다.


애석하게도 우리 사회는 이미 미국식으로 접어들었다. 그 흐름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박원순 씨일 게다. 그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공언하며 부자들과 손잡고 일해왔다. 그러나 얼마 전 국정원의 명예훼손 소송에 대응하여 발표한 그의 글은 그의 사회 디자인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드러낸다. “(이명박 정권 이후) 아름다운 가게와 희망제작소를 드나들었던 기업인들이나 대기업의 임원들은 철새처럼 모두들 날아갔습니다. 다시 원점에 섰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게 대통령 후보 시절까지도 돈독한 사이였다는 이명박 씨의 변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의 사회 디자인에 있다. 양식을 가진 사람 가운데 박원순 씨의 인간적 진정성과 사회적 헌신을 의심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의 실패, 지난 10년 이상 우리사회의 의인이자 대표적 사회 디자이너로 추앙받아온 그가 부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김규항, 사회 디자인, <한겨레> 2009년 10월 28일자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맹랑한 풍자와 사망선고

              *경향신문 2009년 10월 30일자 스포츠면.

 

'헌재놀이'의 패러디를 기사 제목으로 사용하다니! 경향신문 편집부의 센스가 놀랍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세상만사 이런 식으로 한낱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일까?

 

아래는 2009년 11월 3일자 한겨레신문의 칼럼이다. 한국헌법학회 회장인 김승환 전북대 교수의 칼럼,  '일사부재의 원칙의 사망선고'. 참 앞날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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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는 방송법안 날치기 처리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방송법안 가결선포행위가 국회의원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했지만, 그러한 가결선포행위가 무효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정문을 더 자세히 뜯어보기로 하자. 방송법안은 최초 투표에서 의결정족수 미달로 부결되었다, 그럼에도 국회부의장이 이를 재투표에 부친 것은 일사부재의 원칙에 위배된다, 따라서 방송법안 가결선포행위는 국회의원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다, 그러나 가결선포행위가 무효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위법한 행위가 무효는 아닌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 헌법은 국회의 의사절차에 관한 기본원칙으로 제49조에서 ‘다수결의 원칙’을, 제50조에서 ‘회의공개의 원칙’을 각 선언하고 있으므로, 결국 법률안의 가결선포행위의 효력은 입법절차상 위 헌법규정을 명백히 위반한 하자가 있었는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결정문의 뜻풀이를 해 본다. 법률안 표결 과정에서의 하자가 다수결 원칙과 회의공개의 원칙을 침해하지 않는 한 법률안 가결선포행위는 무효로 되지 않는다, 일사부재의 원칙은 국회법이 규정하고 있으므로 헌법상의 원칙이 아니다.

일사부재의 원칙은 모든 회의체의 의사절차에 적용되는 일반적 법원칙이다. 주식회사의 주주총회에도 일사부재의 원칙은 적용된다. 주주총회의 의결이 이 원칙을 위반하면 법원은 그 의결에 대해 가차 없이 무효판결을 선고한다. 국회의 의사절차와 관련하여 일사부재의 원칙은 불문의 원칙이다. 명시적인 조항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그것은 회의공개의 원칙, 다수결 원칙과 함께 (불문의) 헌법원칙이다. 헌법에 규정되어 있으면 헌법원칙이고, 국회법에 규정되어 있으면 법률원칙인 것이 아니다. 1987년 1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관들에 의해 살해당한 박종철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관심을 받게 된 법원칙이 있었다. 미란다 원칙이 그것이다. 당시 미란다 원칙은 형사소송법에 이미 규정되어 있었지만, 검찰이나 법원이나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1987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 미란다 원칙은 헌법에도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미란다 원칙은 인신의 체포, 구속과 관련한 법률원칙에서 헌법원칙으로 그 위치가 격상되었나? 박종철이 국가폭력으로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미란다 원칙은 헌법원칙이었다.

헌재는 일사부재의 원칙 위배는 국회의원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법률안 심의표결권에 대하여 “국회입법권의 근본적 구성요서”라고 말한다. 그들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법률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했다는 것은 곧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국회의 입법권은 국회법상의 권력이 아니라 3권분립의 한 축을 이루는 헌법상의 권력이다. 그렇다면 일사부재의 원칙 위배는 헌법 위반이라고 말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헌재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법안의 효력은 유효하지만 심의·표결권을 침해했다는 헌재의 결정도 유효하다. 앞으로 국회의장이 헌재의 결정 취지에 따라 처리해야 할 문제”다. 그게 법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국회의장도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다. 헌재는 헌법재판을 하는 기관이고, 헌재가 내리는 위헌 또는 위법이라는 결정은 판단의 대상이 된 공권력 작용에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법적으로’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제 국회의 법률안 표결에서 일사부재의 원칙 위배나 대리투표는 법적으로 유효한 행위이다. 헌재는 방송법안 결정을 통해서 일사부재의 원칙이라는 헌법원칙에 대해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다.

               

2009년 3월 17일 화요일

권복기 기자

권복기 기자는 한겨레 신문의 건강과 공동체 담당 기자다. 매주 화요일 16면 생활2.0에 우리나라 방방곡곡 건강과 공동체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퍼올리는 이다. 한겨레 신문과 함께 '희망의 작은도서관 만들기' 캠페인을 전개할 때 내 짝꿍이 되었던 이다. 꽤 오래 전부터  NGO 활동가로 살면서 뭉쳐져 있는 간사들의 몸과 마음을 짧은 시간이나마 풀어주면 좋겠다고 권 기자가 말했었는데, 일전에 통화하면서 시간 약속을 잡아 월요일 간사회의 이후의 짧은 시간을 내어 권 기자의 체조법을 배우고 소중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 제목은 '권복기 기자의 몸과 마음의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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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들이 '권복기 기자님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반기는 글씨를 현관이 써붙였다. 사진: 안찬수


 

그이의 생각에 따르면 공동체보다 건강이라는 말이 더 크게 사람들을 감싼다고 한다. 몸이 병들고, 마음이 병든 것은 우리의 사람살이가 병들었기 때문이다. 이 병을 치유를 해야 한다.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그런 질문들이 권 기자의 기사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문명사회에 찌들어가는 현대인들의 병이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은 것인가를 탐구해보면, 그것은 결국 사람의 문제이고 사회의 문제다.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질병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법일뿐만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인 치유법이 된다는 것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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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기 기자와 간사님들. 사진: 안찬수

 

권 기자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음식, 건강, 숨, 잠, 마음"을 다스리려 함을 이야기해주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병이 나고, 낫는다고 말하였다. 여러 가지 취재현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사례나 면역학+신경학+심리학이 하나로 통합되는 최근 서양 의학의 변화도 곁들이면서 마음의 건강이 몸의 건강에 직결된다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다. 

 

바쁘게 또 다른 취재처로 이동하기 위해 사무처를 나가면서, 권 기자가 간사들에게 한 마디. "미소를 지으세요! 미소를 지으면 얼굴 근육이 다 풀어져요. "

 

지난 해부터 권복기 기자가 주도하여 한겨레자연건강학교를 열고 있는데 사람들의 호응이 좋다고 한다.  

 

권복기 기자의 건강한 세상 누리집: http://community.hani.co.kr/

권복기 기자의 자연건강학교 블로그: http://blog.hani.co.kr/health9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