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어느 인문학자의 ‘명예퇴직’ 사연-홍승용 교수


“속편하게 공부 좀 해볼까 하고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어느 인문학자의 ‘명예퇴직’ 사연


“속편하게 공부 좀 해볼까 하고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학생들과 씨름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텍스트’와 씨름하고 싶어요.”

‘문학이론’을 전공한 홍승용 대구대 독어독문학과 교수(57세ㆍ사진)가 지난 8월에 ‘명예퇴직’을 했다. ‘학진’을 향해 줄서지 않고 ‘돈 안 되는 공부’에 뛰어든 그였다.(교수신문 2011년 1월20일자 참고) 정년퇴임까지는 9년 정도가 남았는데, 무슨 사연이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학과 구조조정을 하면 늘 첫 머리에 오르내리는 독어독문학과 소속 아닌가.

“즐겁죠. 학교에선 명예퇴직을 안 시켜 줄려고 해서 애를 좀 먹었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나왔다기 보다는 좀 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서 학교를 나오게 됐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는데, 다행히 표정은 밝은 듯 했다. 그런데 대학교수직을 유지하면서 ‘공부하기’는 힘들었을까. “교수생활을 할때 하이데거 세미나를 했었는데 발제를 듣고 나서 하이데거를 읽고 싶어도 읽지를 못했어요. 이것저것, 이리 저리 다니다 보면 발제문을 읽고 세미나에 가기도 바빴어요. 왠지 겉도는 느낌, 껍데기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학 전체의 위기 문제는 은근히 힘들었고, ‘구재단 복귀’ 문제는 발등의 불이었다. 홍 교수가 재직했던 대구대는 구재단 복귀 문제로 홍역을 치렀다. 홍 교수도 구재단 복귀 반대 집회에 곧잘 나갔다. “학교에 있으면 읽을 방법이 없었어요. 곧 총장선거철도 다가오는데 나 몰라라 하기도 어렵고, 늘 신경이 쓰이죠. 제일 큰 어려움은 아무래도 구재단 복귀 문제가 제일 컸어요. 그래서 총장선출 문제가 중요하고…”

대학가의 씁쓸한 분위기는 명예퇴직을 결심하게 된 배경이다. 홍 교수는 ‘자유’를 선택했다. 평가 지표ㆍ대학경쟁력 수치를 갖고 싸우는 것, 학생들 모으는 것, 수업 들어가면 폐강 막느라고 쩔쩔 매는 것에 시달렸다. “예전에는 수업 들어가면 저도 떨리고 했는데 요즘엔 전부 ‘취업’ 생각을 하고 있고 이제는 좀 질리네요. 인문학 위기, 학과 존폐 문제가 나오면 독문학이 만날 거론이 되고…. 제일 속을 끓였죠. 학생 등록률이 결정적이죠. 신입생 등록률은 괜찮아요. 재학생 등록률은 피를 말리죠. 그런데 재학생 등록률은 저에게도 답이 없었어요. 총장님도 마인드가 있는 분인데도 답이 없어요. 학교를 경영하는 입장에선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가도 충원율, 등록률, 취업률을 외면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대학본부에서 행정하는 분들 만나보면 화제의 99%가 평가 지표 이야기입니다. 분위기가 그래요.”

홍 교수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했다. 앞으로 10년, 어려운 글도 읽고 쓰면서 집중해서 파고들 예정이다. 65세가 넘어가면 책읽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에서다. “사회ㆍ정치활동은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당분간 외부 일은 안하려고요. 인문학 위기의 문제는 기본적인 생산이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 환경 같은 것, 그런 것 따지다가는 아무것도 못해요. 우선 공부를 좀 해야 겠습니다. 제가 너무 부실해서…. 기본 텍스트는 읽고 얘기해야 하는데, 순수이성비판, 형이상학은 다 읽지도 못했어요. 독파를 못했어요. 집중해서 읽으려고요. 핵심 텍스트는 읽고 정리하면서 우선, 인식론 토대가 잡혀야 좀 편할 것 같아요. 제대로 안 읽고 비판할 수는 없으니까.”

강원도가 고향인 홍 교수는 경북 경산에 있는 와촌에서 산다. 팔공산 자락에 있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그의 집이 연구실이고 세미나실이다. 대구대 재직 때 만든 자율연구소인 ‘현대사상연구소’와 출판사 이름(도서출판 모임)도 걸어 놨다.

홍 교수는 지난 9월부터 ‘고전 읽기 10년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한 달에 한번 셋째 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3시까지 모임을 갖는다. 한 달에 한권씩 1년에 10권, 10년 동안 100권을 읽어 볼 계획이다. 홍 교수가 지난 2006년부터 시작했던 ‘현대사상연구소’ 멤버 10여명과 함께다. 2014년까지 달마다 읽을 목록까지 만들고 발제자도 거의 다 정했다. 이 모임에는 대부분 강사, 겸임교수 등 비정규 교수가 참여하고 일부 대학원생, 학부생도 있다. “우선 4~5년 동안은 인식론의 텍스트부터 읽어 보려고 합니다. 체력이 있을 때니까. 그 뒤에는 도덕론, 윤리론, 실천론 쪽으로 읽어 보려고요. 현대철학 직전까지. 많이 거론됐지만 아직 읽지 못했던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일단 맛을 볼려고요.”

‘현대 사상’ 세미나도 계속 한다. 이 세미나는 한 학기마다 ‘주제’를 정해 진행하는데, 한 학기에 10~15회 세미나를 한다. 격주 원칙으로 한다. 세미나의 결과물로 ‘현대 사상’ 시리즈 10권까지 나왔다.

홍 교수는 아침 8시나 9시에 일어나 새벽 2~3시에 잠자리에 든다. 하루에 기본 8시간은 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최소한 그 정도는 공부를 하려고 한다. 28년 6개월을 재직한 덕분에 연금으로 생활을 한다. ‘조금 절약해서 살면 되고 씀씀이를 계속 줄이고 있다.’

“제 얘기가 다른 분들께 누가 될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일단 도망간 것 아닌가 싶어서 죄송하기도 하고요. 제 경우를 일반화하기는 힘드니까요. 정말 명예롭게 퇴직했어요. 애처롭게 나온 것도 아니고.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하고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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