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7일 월요일

희망이 다가오고 있다


희망이 다가오고 있다

<새벽>이라는 월간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발표된 잡지라고 하면 아! 할지 모른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흥사단에서 간행한 잡지가 <동광>이고 그 후신이 <새벽>이다. 이 잡지는 1959년 10월 혁신호를 내면서 ‘정권교체는 가능한가’라는 특집을 기획하여 이승만 독재에 대담한 도전장을 던지는 한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로 유명해진 함석헌 선생의 의미심장한 글을 함께 실었다. 함 선생의 글 제목이 ‘때는 다가오고 있다’인데, 지금 이 칼럼의 제목은 바로 그의 글에서 빌려온 것이다.
오늘의 입장에서 이 잡지의 특집을 살펴보면 새삼 가슴이 뛰는 걸 느낀다. 어떤 필자는 ‘자유당은 정권을 내놓아야 한다’는 직선적인 제목 아래 그것이 자유당의 사는 길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필자는 집권당의 부정선거 음모를 어떻게 막느냐에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달려 있다고 전망했다. 또다른 필자는 “후진국이기 때문에 정권교체가 순조롭지 못한가, 정권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후진성이 극복되지 못하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다. 당시의 통합야당 민주당이 1959년 11월26일의 후보지명대회에서 조병옥과 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했고 이듬해 3·15선거가 실시되었음을 상기하면, 그런 중요한 정치일정을 앞둔 이 잡지 편집자들의 절박함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그로부터 50여년, 많은 정치발전이 있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민주주의의 핵심적 지표로 남아 있다. 즉, 명백히 실패한 정권의 집권 연장을 막지 못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작동에 심각한 이상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유신시대의 체육관선거는 청산되었고 이승만 시대의 부정선거도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그 최소한의 민주화를 위해서만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고가 치러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자유를 위한 모든 헌신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세력의 사실상의 권력독점이 여전히 지속되는 것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물질적 수단이 대부분 그들 수중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방송매체가 그렇다. 요즘처럼 기계적 중립주의의 틀을 통해 선거의 쟁점을 흐리는 방송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차라리 노골적인 편파방송보다 더 사악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정치적 무관심의 조장은 합법을 가장한 선거부정일 수 있다는 것을 오늘의 언론상황은 교묘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지금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 정권의 실패를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비판하면서 자신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심지어 박 후보는 정권교체의 역사적 당위성에 편승한 ‘시대교체’라는 말로 유권자들의 착각을 유도하고 있다. 생각해보라. 이명박의 한나라당과 박근혜의 새누리당은 무엇이 다른가. 박근혜가 한때 한나라당 대표였던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그 둘은 인적 구성이 거의 같고 정치적 기반이 완전히 동일하다. 따라서 이명박에서 박근혜로의 배턴터치는 대표선수 간의 남녀교대일 수는 있어도 시대교체란 터무니없는 과장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거를 앞두고 내놓은 ‘민생’ 구호들은 언제든 조건만 되면 다시 대기업 중심주의로 수렴될 수 있다.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도 오래 준비된 정치공작의 산물이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앞의 글에서 함석헌 선생이 말한 ‘때는 다가오고 있다’는 단지 정권교체의 임박한 도래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물론 그의 발언은 일차적으로는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선거란 곧 하늘의 말씀에 대한 민중의 대답이다.” 그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민중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었고 그렇게 깨어난 민중이 현실 속에서 하늘의 도리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때’란 단순한 정권교체 이상의 역사적 전환이요 진리 실현의 계기였다. 그런 예언적 감수성에 근거하여 그는 냉전시대의 한복판을 살면서도 미국과 소련이 악수하는 때가 오고 있고 38선이 터지는 날이 오고 있음을 투시할 수 있었다. 그런 기적과도 같은 희망을 실천하는 책임은 이제 우리의 것이 되었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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