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0일 금요일

1주일중 하루 사색·이틀 소통… 창조성 기르는 나의 방법”/ 문화일보 임정환 기자, 정재승 교수 인터뷰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5040801033503018001

‘1인5역’ 뇌과학자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인터뷰를 위해 처음 정재승(43·바이오 및 뇌공학) 카이스트 교수와 접촉한 것은 올해 초였다. 그는 바쁜 사람이었다. 연락도 쉽지 않았다. 전화도 잘 받지 않았고, 문자에도 답신이 없었다. 거의 이메일로 연락을 취했다. 지난 3일 가까스로 그를 만났다. 인터뷰도 대부분 차 안에서 이뤄졌다.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회의를 마친 그가 기자를 픽업, 강남에 있는 사무실로 함께 이동했다. “참 바쁘시다”는 기자의 핀잔(?)에 그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면서 차가 신호에 걸렸고 아침부터 융단처럼 하늘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툭, 차창에 물방울을 흘렸다.

“제가 바쁘다고 쓰시면 안 됩니다. 너무 바쁜 척한다는 이미지가 강해져서…(웃음) 1년에 강연 요청이 800건 정도 들어오는데, 그중에 80건만 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1~2건 정도 하는 거라 별로 바쁘지는 않은데, 720건을 정중히 거절하다 보니 바쁘다는 인상이 생겼네요. 다른 교수님들도 그 정도는 하고 계십니다. 제가 책을 많이 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혼자 쓴 책은 세 권밖에 안 됩니다. 대부분은 공저고요. 제가 특별히 바쁘다기보다는, 현대인들이 다 바쁜 것 같아요.”

겸양하기는 했지만 사실 정 교수는 누구보다 바빠 보였다. 그는 서울과 대전 3곳에 거처가 있다. 서울에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과 논문 집필 활동을 하는 작업실이 있고, 대전에는 오피스텔이 있다. 주중에는 주로 대전에 머물고 금, 토, 일은 서울에서 보낸다. 이날도 ‘미래세대행복위원회’라는 모임의 회의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카이스트 교수들이 주축이 돼 전국 각지에서 전문가들이 모인 모임으로, 말 그대로 미래세대의 행복을 위해 지금 세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한다고 했다. 

“기자님은 한가하세요? 회사가 한가하게 내버려 두지 않잖아요.” 정 교수의 말대로 현대인은 모두 바쁘다. 그러나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대부분 헛헛함이 밀려온다. 잠자리에 누워 ‘오늘 뭘 했지’라고 자문하지만 대부분 일없이 바빴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소모됐을 뿐, 창조적인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학교 강의와 수십 편의 논문을 쓰는 와중에 시간을 쪼개 책도 쓰고 활발한 외부 강연도 할 수 있는 그의 창조적 에너지가 궁금했다. 정 교수는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뒤 신경 과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의사 결정의 뇌 과학,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미래 등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 인문학을 주제로 한 강연에도 나간다. 청년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책을 쓰기도 했다. 베스트셀러 과학콘서트를 비롯해 공저를 포함하면 저서가 10여 권에 달한다. 대부분 물리학과 신경 과학을 바탕으로 사회현상들을 과학자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책들이다. 그는 책에서 강호동과 유재석의 웃음 포인트를 분석하고, 영화 속 투명인간의 허구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6월에도 ‘퍼플브레인’이라는 새 책이 나올 예정이다.

“많은 경우 창의적 아이디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기존에 있던 것들의 생산적인 재배열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른 분야에서 어떻게 했는지를 보는 게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그냥 빈둥거리면서 우리 분야에서 경쟁자들이 뒤지는 영역이 아니라 새로운 영역을 뒤지는 게 필요하지요. ‘아이들링(idling)’이라고 부르는데요, 그냥 빈둥거리는 겁니다.” 제2의 새마을운동이 주창되는 이때에 빈둥거림이 창조적 아이디어의 원천이라니. 차는 남산 1호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길이 막혔고, 생각도 어지러워졌다.

“책이나 잡지를 뒤적거리든가, 영화 보고 딴생각을 한다든가 하는 게 아이들링에 가까운 것입니다. 혼자 이런저런 사고, 실험들을 하는 거지요. 그러다가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아이디어를 다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제점이 자명해지거나 아이디어가 발전하는 거지요. 다른 아이디어와 합쳐지기도 하고요. 이런 방식을 통해 아이디어가 성숙해지고 풍성해집니다.”

정 교수는 혼자 조용히 보내는 사색의 시간과 소통의 시간이 둘 다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흔히 아이디어를 얻는 방법으로 브레인스토밍을 먼저 떠올리기도 하지만 브레인스토밍만으로는 좋은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통만 강조한 결과기 때문이다. 반대로 혼자 방안에서 흰 종이에 아이디어를 끼적이기만 해서도 좋은 결론을 얻을 수 없다. 

“우리 일상은 고독과 소통의 중간 어디쯤 어정쩡하게 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은 산만하고 소통하는 공간까지는 열려 있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창조적이지 않은 일로 하루하루를 메워나가면서 소진된다는 느낌이 많이 들지요. 고독과 소통의 시간을 따로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하루는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고 혼자 빈방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날 잡아서 소통하는 날은 이틀 정도 두고요. 이런 원칙을 꼭 지키려고 합니다.”

사실 이 같은 원칙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창의력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향이기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정 교수는 창의와 혁신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신경 과학자로서 조언했다. 

“나이가 들면 뇌의 ‘인지적 유연성(Cognitive flexibility)’이 떨어집니다. 어렸을 때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술도 마시면서 논쟁을 즐기고, 그러면서 내 인지적 세계가 확장되고 변형되는 경우도 많지요.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틀이 고정되지요. 정치적 세계관이 다른 사람하고 얘기하는 게 허망하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교수님의 강의는 계속됐다. 

“사람들 초미의 관심사가 재테크나 교육 같은 것인데 경제적 계급이 다르면 허심탄회한 얘기가 어렵습니다. 또 미적 취향이 다르면 같이 취미생활을 하기도 어려워요. 결국 정치적 성향이나, 경제적 계급, 미적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공감과 위로를 받는 대화가 휴식시간에 벌어지는 겁니다. 직장은 다른가요? 함께 일하는 사람과 같이 밥 먹고 비슷한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니까 그들과만 소통해서는 혁신적인 사고가 어렵지요. 결국 일터에서도, 주말에도, 사고가 비슷한 사람들이 만나서 얘기를 주고받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창조적 영감을 얻을 곳이 없습니다. 물론 위로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창의 혁신 관점에서는 도움이 안 됩니다. ‘내 삶에 창의적인 영감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나와 전문 분야가 다르거나, 다른 경험을 하거나,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거나, 하는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사회 전체적으로 늘어나야 합니다.”

사회의 복잡도(complexity)가 높아질수록 하나의 정답을 내기란 점차 오리무중이 돼간다.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처방할 때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치료가 까다로운 질병일수록 고려해야 할 변수가 늘어난다. 같은 사람이라도 나이나 직업, 성별 등에 따라 처방이 달라진다. 교과서적인 처방을 내리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이때 필요한 것이 인지적 유연성이다. 변수들이 많아서 인지적으로 유연하게 학습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창의성이 개인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필수재인 이유다.

“회사를 자문하면서 놀란 것은 사람들이 자기 전문분야를 잘 알 거로 생각했는데 정작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생활용품회사 중역이라면 패스트컴퍼니 같은 잡지는 보겠거니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 비즈니스 리더들은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다 보겠거니 했지만 역시 그렇지도 않았고요. 우리 분야에 다른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얘기지요. 내 책상 위에 놓인 일들을 하느라 그런 걸 들여다볼 시간이 없는 겁니다.(웃음) 남과 다른 내용으로 머리를 채우지 못하는, 이런 삶이 지속되고 한 회사에 10년쯤 근무하고 나면 채워지는 것 없이 소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허탈감에 빠집니다. 내 삶의 공간에 혁신의 실마리가 없는데 어떻게 혁신적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얘기였다. 마침 차가 한남대교로 들어섰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창의와 혁신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지식의 흘러넘침(Knowledge spillover)’이 이뤄지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지적 유연성이 떨어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창의적인 환경에 놓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 교수는 미국 정보기술(IT) 산업의 메카인 실리콘밸리를 예로 들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지식의 흘러넘침이 이뤄집니다. 화장실에 가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과 대화를 나눠요. ‘옆 건물 회사가 구글에 2조에 팔렸다. 무슨 회사인데? 이따가 세미나 하니까 들어봐.’ 이런 식으로 내가 노력하지 않았는데 지식이 내 삶의 공간으로 흘러들어올 때 남과는 다른 창의적 결과물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이런 공간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어요.” 

구글은 화장실을 사무실 중간에 배치했다. 직원들이 지나다니면서 타 부서 직원들을 만날 확률을 높인 것이다. 자신이 헤매고 있는 문제에 대해 아이디어나 힌트를 얻을 기회를 늘려주려는 조치다.

“혁신은 계획대로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 설명될 뿐이지요. 다양한 시도를 하는 중에 기회들이 있었고, 환경이 좋았고,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우연의 조합’으로 이뤄진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미리 혁신을 알 수 없습니다. 우연의 조합이 이뤄질 확률이 높도록 그저 미리 다양하게 준비할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임없이 새로운 환경에 던지려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임정환 기자 yom724@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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