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선언문
인문학 분야 학회들이 협의체를 구성하고 인문학 진흥을 위해 공동 대응에 나선다. 이전의 ‘인문학 위기’ 선언에선 정부 지원을 강조했지만, 이번엔
인문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한국인문학총연합회(이하 인문총)는 지난 26일 서울 YWCA 대강당에서 창립대회를 열고 출범했다. 인문총 5명의 공동회장 가운데
한국철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혜숙 이화여대 교수가 초대 대표회장을 맡았다.
인문총은 이날 ‘인문학 선언문’을 내놓았다. “인문정신을 상실한 인문학은 인문학의 위기 뿐 아니라, 인간의 위기를 초래하고 인간 역사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우리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이 그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힘든 여정에 나서고자 한다.(…)한국사회가 한 차원
높아지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기반이 강화돼야 한다.”(아래 '인문학 선언문' 전제)
27개 학회 대표들이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인문총 출범 준비를 해왔다. 위행복 준비위원장(한양대 중국학과)은 “자살과 폭력이 늘어나는 등
사회문제가 심각해 지고 있는 현실에서 인문학자의 역할이 중요한데도 소극적으로 대응해 온 인문학계의 현실을 자각하고 반성한다”며 “인문학자의
각성과 함께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인문총은 인문학의 전통적 역할을 회복하고 인문학의 진흥에 기여하며 인문학에 부여되는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데 목적을 둔다고 밝혔다.
인문총은 인문학 진흥 기획, 사회적 아젠더 창출, 인문학의 다양성 확보 등의 사업을 하기로 했다. 인문총의 재정은 참여 학회가 납부하는 회비로
충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자율성과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날 창립대회에는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창립기념 인문학 대토론회도 열렸는데,
‘지금 왜 인문학인가?’를 주제로 성태용 건국대 교수(철학과)와 임상우 서강대 교수(사학과)가 발표를 맡았다. 인문총은 현안인 ‘학술지
지원제도’ 대응을 첫 과제로 삼았다. ‘학술지 지원제도,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첫 토론을 가졌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지난 10월 26일 서울 YWCA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인문학총연합회 창립대회에서 채택한 '인문학 선언문'
<인문학 선언문>
인간의 역사는
인문학의 역사이다. 인간은 의미의 세계 안에서 태어나, 의미 있는 삶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인간 삶의 결로서 ‘인문’이 지니는
참뜻이다. 의미를 생각하고 만들어내고 해석하고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켜 왔다. 과거, 현재, 미래는 인간의 이야기
안에서만 유의미한 실재가 된다. 인문학은 인간의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서, 과학조차 이 이야기의 일부이다. 의미를 떠나 인간 세계 안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구적 합리성과 경제적 가치가 우선시되는 세계 안에서, 인문학은 점차 본연의 역할을 상실해가고 있다. 좁은 분과 학문의 틀 안에 갇힌
인문학은, 그 근본정신은 망각된 채, 기술적(技術的) 지식의 형태로 변형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 표준화된 기술적 지식으로서의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인문학 자체를 위한 것이다. 인문정신을 상실한 인문학은 인문학의 위기 뿐 아니라, 인간의 위기를 초래하고 인간
역사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의미가 사라진 세계 안에서 과학기술의 성공과 경제발전은 방향을 상실한 채 맹목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의미를
상실한 삶보다 더 비인간적인 삶은 없다.
이제 우리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이 그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힘든 여정에 나서고자 한다. 좁게 울타리 쳐진 분과 학문의 우리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소통하고, 인간 삶이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의미들을 말하고자 한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 안에서 인간 삶의 의미가
어떻게 구축될 수 있는지, 다양한 인간 문화들이 어떻게 상호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지, 인간 정신의 발현으로 구축된 삶의 미래가 궁극적으로
어떠해야 할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현대 한국 사회는 근대화 과정에서 발달한 기능주의적 사고에 깊이 물들어 있다. 우리가 가진 인문학의 풍부한 문화적 기반이 오늘의 한국을
가능하게 했지만, 불행히도 인문적 기반은 기술적 사고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자신에 관해 묻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없는 문화는
스스로의 동력을 가질 수가 없다. 한국문화, 나아가 한국사회가 한 차원 높아지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기반이 강화되어야 한다. 창조는 스스로
고뇌하고 꿈꾸는 자의 몫이다. 남이 가진 것을 모방할 수는 있어도 고뇌를 모방할 수는 없다. 한국 인문학의 중흥은 한국사회의 중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에 한국의 인문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한국 사회는 인문정신의 회복에 힘써야 한다.
2. 한국 사회의 인문적 기반과 인문학의 발전에 사회적 관심이 모아져야
한다.
3. 한국의 인문학자들은 한국의 풍부한 인문 전통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
4. 한국의 인문학은 세계의 다양한 인문전통과
소통하고 타학문 분야와 소통함으로써 보편적 가치를 창조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