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6일 월요일

기자들의 ‘13월 울화통’ / 이유주현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75115.html


기자들의 ‘13월 울화통’ / 이유주현


구제금융기 때 입사했다. 고달픈 사람들이 넘쳐났다. 한겨레 기자들도 고달팠다. 어느 날 한 선배가 위로인지 충고인지 이렇게 말했다. “기자들이 버스 타고 다녀야 버스 타는 사람들의 고충을 알게 된다.”
온 나라가 연말정산 파동으로 들썩인 지난주에 문득 그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13월의 보너스’가 ‘13월의 울화통’이 된 사정을 취재하면서다.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은 분노의 배경으로 “정부가 무슨 ‘속셈’인지 애초 원천징수를 덜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조삼모사’는 원숭이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 사고의 본질을 요약하는 고사다. 일일 도토리 지급 총량은 같을지라도 도토리가 늘어난 아침과 도토리가 줄어든 아침은 기분이 다르니까. ‘증세 없는 복지’라는 정부의 거짓말도 탄로났다. 지난해 정부가 누리과정(3~5살 유치원·어린이집 통합교육과정) 비용을 시·도교육청에 떠넘기려고 안간힘 썼던 걸 떠올려보자. ‘복지공약 지키려면 증세해야 한다’고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 때 깎아준 대기업 법인세는 정상화하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의 유리지갑만 손대느냐는 비판도 맞다.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비해 국민총소득(GNI) 중 가계소득 비중은 매우 빠른 속도로 하락하고 기업소득 비중은 급증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2014년 국회예산처 보고서 ‘우리나라의 가계·기업 소득 현황 및 국제비교’).
하지만 정부의 실책 또는 꼼수와는 별도로, 여야 모두 소득공제를 줄이고 세액공제를 늘린 것은 옳은 방향이라고 입을 모은다. 언론사의 정치적 성향이 어떠하든, 저소득층은 적게 내고 고소득층은 많이 내야 한다는 논리는 무시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번에 ‘13월 울화통’의 확성기 노릇을 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한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13월 폭탄설’은 언론이 열심히 써줘서 우리가 ‘필’ 받은 거잖아요. 기자들 대부분이 이번에 세금 토해내야 하는 소득층이라면서.” 이 말을 듣고, 같은 업종 노동자들의 소득에 대해 알아봤다. 언론재단이 4년마다 펴내는 ‘2013년 언론인 의식조사’를 보면, 기자들의 2012년 평균 연봉은 세후 4540만원이다. 방송사(6386만원)와 인터넷언론사(3141만원) 격차가 크긴 하지만, 기자들은 오이시디 기준 중산층(중위소득의 50~150%)에 들어간다. 일부는 고소득층에 들어가고 상당수는 중산층의 상위에 속한다. 의도했든 아니든, 대다수 기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기사를 쓴 게 맞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법 개정으로 저소득층이 혜택을 보게 됐다는 기사는 축소됐고, 고소득층이 세금을 더 내는 게 옳다는 의견도 힘을 잃었다.
지난해 현대경제연구원 조사 결과, 직장인들은 중산층 기준으로 한달에 515만원을 벌고 35평짜리 주택 등 6억6천만원의 순자산이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세후 515만원이라면 연봉이 8000만원이 넘는다. 머릿속으로 중산층에 고소득층까지 포함시키다 보니 실제 중산층들도 고소득층 증세라는 방향에 동의하는 데 인색하다.
영국 노동계급의 사회·문화적 주변화 현상을 다룬 <차브>(오언 존스 지음)는 이렇게 지적한다. “정치인들과 저널리스트들은 ‘미들 브리튼’(중산층 영국)이라고 할 때, 중위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는 사실상 ‘어퍼 브리튼’에 속하는 부유한 유권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부유층을 겨냥한 적절한 세금 인상이 어떻게 ‘미들 브리튼’에 대한 공격으로 오도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한국 기자들은 오언 존스의 비판에서 자유로울까? 고소득층 증세를 중산층 증세로 단순화해 분노를 폭발시키는 정서적 기제에 편승한 것 아닐까? 아니면 기자들 역시 중산층의 환상에 사로잡힌 걸까?
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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