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5일 일요일

조지 도스 그린, 스토리텔링 이벤트 , 모스(The m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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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에서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대본 없이 즉석에서 이야기를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가장 강렬하고 신선한 문학”이라고 평했다. [사진 Flash Rosenberg]


모스
애덤 고프닉·조지 도스 그린·
캐서린 번스 엮음
박종근 옮김, 북폴리오
448쪽, 1만4800원


당신은 무대에 서 있다. 핀 조명이 당신을 비추고, 무대 아래 관객들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자, 이제 마이크를 향해 입을 열 차례다. 당신이 시작해야 할 이야기는 사업에서 성공하는 요령도, 젊은이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도덕적 성취도 아니다. 그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신나고 즐거웠던, 혹은 아프고 슬펐던, 그래서 당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된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시작한다. 제한시간은 10분. 사람들의 눈이 놀라움에서 감탄으로 바뀌었다가, 짤막한 웃음과 함께 박수가 터져나온다. 어떤가, 짜릿하지 않은가. 

이런 모임, 진짜 있다. 소설가 조지 도스 그린이 1997년 처음 시작한 스토리텔링 이벤트 ‘모스(The moth)’다. ‘나방’이라는 뜻의 이 모임은 미국 뉴욕에 있는 그의 집 거실에서 처음 열렸다. 고향 조지아주의 무더운 여름 밤, 불빛에 모여드는 나방을 벗삼아 친구들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추억을 도시에 재현한 것이었다. 모임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모스는 더 큰 무대로 장소를 옮겼다.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런던 등 다른 도시로 확대됐다. 그렇게 쌓인 이야기가 3000여 개. 그 중 반응이 좋았던 50개의 이야기를 추려 묶은 것이 이 책 『모스』다. 

모스는 언뜻 기술·디자인·엔터테인먼트 등 분야별 전문가들이 짧은 강연을 펼치는 행사 테드(TED)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는 IT 기술 분야의 뛰어난 혁신 등등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를 트렌스젠더바에서 보냈습니다” “열네 살 때 사고로 친구를 총으로 쐈습니다” 등으로 시작되는, 개인적인 추억과 회상을 기본으로 하는 짤막한 이야기다. 아무리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 이라 할지라도, 그 삶 어딘가에는 무자비한 시련과 고뇌와 굴욕의 순간이 존재한다. 화자는 그 내밀한 순간을 털어놓고, 관객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집중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지금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을 전한다. 이 공유와 공감이 모스가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비결이다. 

무대에 선 이는 다양하다.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폴 너스, 작가 말콤 글래드웰, 래퍼 DMC 등 유명인사는 물론이고, 평범한 학생과 소매치기, 핫도그먹기대회 챔피언 등도 있다. 책에 등장하는 50편의 이야기 역시 각양각색이다. 의사인 조지 롬바드디 박사는 서른두 살 때, 테레사 수녀를 치료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막 개업한 그에게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오고, 영화 속 수송작전처럼 긴급하게 인도 캘커타로 실려간다. 그곳에서 패혈성 쇼크 상태에 빠진 테레사 수녀의 심장조율기를 떼내면서, 그는 “테레사 수녀를 지켜달라고 테레사 수녀에게 기도했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작가 헤밍웨이의 친구이자 편집자인 애런 에드워드 호치너는 1959년 여름 헤밍웨이를 따라 스페인 투우경기에 갔다가 경기장에 즉석 투우사로 나서게 됐던 이야기를 영화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놓는다. 

가슴 아픈 이야기도 많다. 18년간 감옥에서 사형수로 산 데이미언 에컬스는 감방에서 당한 무자비한 구타와 갖은 고문에 대해 털어놓는다. 죽어가는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할리 데이비슨을 태워주던 순간을 묘사한 코미디언 마이크 데스테파노의 이야기는 모스 관객들을 펑펑 울린 사연 중 하나다. 작가 브라이언 핑켈스타인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을 시도했던 순간을 이야기한다. 입 안에 권총을 깊이 쑤셔넣었는데, 지난 밤 숙취로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면서 구역질이 나왔다. 그리고는 “총 위에 토하는 것보다 자살을 단념하게 만드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정신이 대단히 맑아졌습니다”라고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들이 무대에서 한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이 책은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집이기도 하다. 모스의 기획자인 애덤 고프닉은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3C’라고 말한다. 우선 고백(Confession)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을 때 사람들은 공감한다. 둘째는 코미디(Comedy)다. 말하는 이의 정체가 벗겨지고 허세가 탄로나는 대목에서 따뜻한 웃음이 터져나올 수 있다. 마지막으로 관계(Connection)다. 좋은 이야기는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화자와 청자 사이의 공감, 끈끈한 유대감이 생겨날 때 이야기는 멋진 결과를 낳는다. 이야기로 맺어진 작은 관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더 큰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모임에서 스토리텔링 교육기관이자 예술단체로 변신하고 있는 모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책을 읽다 보면 당장에라도 주변인들을 모아 ‘이야기가 흐르는 밤’을 만들어보고픈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고민하게 된다. 내가 무대에 선다면 그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어떻게 하면 웃음이 빵 터지게 할 수 있을까. 영문학자 조너선 갓셜의 표현처럼 인간은 이야기에 탐닉하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S BOX] 바람둥이 친구 결혼식에서 … “레이첼, 메리, 줄리 … 모두에게 감사”

『아웃라이어』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은 모스 무대에서 절친했던 대학 친구와 절교하게 된 사연을 털어놓는다. 친구 크레이그는 기상천외한 유머감각으로 여자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니는 남자였다. 그런 크레이그가 리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결심한다. 군수산업계 거물의 딸인 리는 2년 만에 박사과정을 마칠 정도로 엄격하고 단호한 성품에 유머감각이라고는 없는 여성이었다.

사랑하는 친구의 결혼을 말리진 못하겠고, 글래드웰과 친구들은 그의 결혼식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멋지고 웃긴 노래를 선물하기로 결심한다. 방위산업체 관계자들로 바글거리는 결혼식장, 글래드웰은 “무엇보다 오늘의 신부를 만나기까지 그에게 길잡이가 되 준 모든 여성들에게 감사합니다. 레이첼, 메리, 줄리, 로렌…”으로 이어지는 축사로 식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리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My Way)’의 반주에 맞춰 이런 축가를 불렀다.

"자, 이제 잔을 듭시다. 배리에서 온 소년을 위해/ 진실한 삶을 살았고 맹세했지. 결혼은 안 한다고/ 하지만 자길 잡아줄 여잘 만났고 이제 꽉 붙잡혔네/ 크레이그가 결혼한다네/ 자신의 길을 간다네.

여자친구, 조금 있었지, 아니 많았지, 사실 끝도 없었어/ (…) 뭐 하는 놈이지? 뭘 가졌지? 몸뚱아리가 전부라네/ 그녀가 돈을 낼 때 가만히 있지. 그녀는 박사고 그는 아니라네/ 재갈을 물고 타협했지/ 그녀의 길을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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