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7일 수요일

금정연, 프레데리크 시프테,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125

2015년 1월 6일, 시사in, 금정연 씨 칼럼

그 이름들을 불러주었다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프레데리크 시프테 지음/이세진 옮김/문학동네 펴냄



2013년에는 쉬웠다. 누군가 옆구리를 찌르며 “올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뭐요?”라고 묻는다면 눈도 깜박하지 않고 “볼라뇨의 <2666>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올해의 책, 아니 십 년의 책, 나아가 세기의 책(중 한 권)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과연, 오랜 기다림 끝에 펼친 <2666>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줄리언 반스 식으로 말하자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할까.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프레데리크 시프테 지음/이세진 옮김/문학동네 펴냄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프레데리크 시프테 지음/이세진 옮김/문학동네 펴냄
갈수록 나빠지는 기억력을 벌충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독서 앱에 따르면, 2014년 나는 98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별 다섯 개를 준 책은 17권, 그중 2014년에 출간된 책은 11권이다. 모두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름이다. 안토니오 타부키(<레퀴엠>), 레이먼드 챈들러(<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로베르토 볼라뇨(<살인 창녀들>), 존 버거(<킹>), 리처드 예이츠(<맨해튼의 열한 가지 고독>), 이탈로 칼비노(<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구라하시 유미코(<성소녀>), 리처드 휴스(<자메이카의 열풍>),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나의 인생>), 피에르 바야르(<나를 고백한다>), 데이비드 실즈(<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그러니 어떻게 단 한 명의 이름을 부른단 말인가?’라고 말한다면 내가 정치인이고, 흔한 심사평을 빌려 말하자면 압도적인 한 권이 없었다. 라이히라니츠키와 실즈가 결승에서 맞붙었지만 누가 이겨도 달갑지 않았다. 둘 다 문학에 미친 사람들이다. 감명 깊게 읽긴 했지만 거리를 두고 싶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손을 들어주려면 일단 손을 잡아야 하지 않나?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 “제가 올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바로 안티-스트레스 컬러링북인 <비밀의 정원>입니다.” 진정성을 보태기 위해 이 지면을 내 멋대로 색칠한 정원 그림으로 채울 생각까지 했다.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둔 밤에 프레데리크 시프테의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를 읽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철학 교사 프레데리크 시프테(위). 
프랑스의 철학 교사 프레데리크 시프테(위).
별다른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다. 프랑스의 철학 교사라는 저자의 이름은 낯설었고, 제목은 내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부제인 ‘삶에 질식당하지 않았던 10명의 사상가들’은 조금 궁금하긴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런 게 궁금한 사람이고, 그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니체, 페소아, 프루스트, 쇼펜하우어, 몽테뉴, 샹포르, 프로이트, 로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그러니 어떻게 내가 책장을 펼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면 조금 재수 없고, 적어도 서문 정도는 읽고 싶게 만드는 이름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한번 펼친 책장은 좀처럼 닫을 수 없었고, 그러다 현실의 지인들을 향해 “그들은 내 친구 아르투로 반디니(존 판티의 주인공), 베르나르두 소아레스(페소아의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찰스 부코스키의 주인공)를 비롯해 그 밖의 다른 인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라며 불평을 늘어놓는 모습을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은 나의 친구라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이다.

‘문학적 풍류’를 아는 이에게 권한다 


철학책이 아니다. ‘사상가’들의 일대기를 요약해서 들려주는 책도 아니다. 그들의 문장에 기대 여가, 우울과 애도, 권태, 심미적 쾌락, 스승들에 대한 찬탄, 혼돈, 사회생활, 정신적 폭력, 지혜라는 환상과 사랑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늘어놓은 책이다. 그는 딜레탕트(아마추어 문화예술 애호가)이고 문학적 무정부주의자이며 허무주의자이고, 무엇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쾌한 자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한량없는 환희가 내게는 모욕이다”라고 말하는 불평꾼이다. (그냥) 미친 사람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건 진심이다. 사랑에 빠진 이에게 사랑의 이유를 묻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서툰 고백은 이쯤에서 끝내자. 옮긴이는 ‘옮긴이의 말’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의 정확성과 논증의 무오류를 논하고 싶은 사람들보다는 문학적 풍류를 아는 이, 궤변과 요설의 문학적 가치에 민감한 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나는 당신이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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