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5일 목요일

김민웅, 송현동, 책의 전당, KAL




[왜냐면] 조양호 회장님에게 / 김민웅 

등록 : 2015.01.15 18:55 수정 : 2015.01.15 21:11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님, 우선 위로의 인사를 드립니다. 자식을 잘못 키운 것은 아닌지 하는 자괴감과, 우리 사회의 비난이 사건에 비해 도를 넘은 것은 아닌지 하는 비애 사이에서 많이 힘드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게다가 온갖 정치사회적 비난의 화살이 이 사건에만 집중되도록 희생양이 된 것 같은 의문이 들 법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것은 그간 이른바 ‘있는 사람들’이 보였던 갑질 행태에 대한 분노가 쌓여왔고, 따님 사건이 그 정점에서 발화의 역할을 했다고 봐야겠지요. 더군다나 사건 이후의 태도가 불길을 더 타오르게 했다는 것은 조 회장님도 인정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이번 사태는 새로운 기업 풍토를 만드는 절호의 기회를 줄 수 있기도 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지요. 19세기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나온 한 전투 장면을 거론하면서 유명해졌다는데,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이해하듯 “그만하면 이 정도는 해야”라는 게 아니랍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까닭은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함이야”라는, 귀족이나 상류층의 소명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일깨움이고 여기에 따라붙는 특권은 소명의 실천 과정에서 각오하는 희생에 대한 사회적 훈장이라고 합니다. 소명과 희생은 없고 특권만 누리려 든다면, 그것은 ‘노블레스’가 아닌 겁니다. 귀족이 사라진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책임 있는 사회적 위치에 있는 이들의 ‘고귀한 임무’가 됩니다.
187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거대한 부자들이 도처에 등장하게 됩니다. 제이피모건, 카네기, 록펠러 등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린 이들을 향해 미국의 서민들은 ‘강도귀족’(robber barons)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서민들은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일부 부자들은 혼자 미국의 부를 약탈적으로 독점하면서 신흥귀족이 되어가고 있다는 거지요. 마크 트웨인이 이 시기를 ‘금박을 입힌 시대’라고 했던 것도 부와 화려함을 칭송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겉은 금으로 칠해졌으나 속은 곪아가고 있다는 경고였습니다. 이렇게 부자들에 대한 거센 사회적 비판의 과정을 거쳐 미국의 일부 재력가들은 사회적 의무를 실천하는 노력을 기울여 갑니다.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까닭은 한진그룹이 그간 추진해온, 서울 종로구 송현동 옛 미대사관 숙소 터 호텔 건립 건에 대해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호텔 대신 ‘책의 전당’을 세우는 프로젝트를 선택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한진그룹이 지금 처한 궁지를 이용해서 부의 사회적 환원을 압박하고자 함이 결코 아닙니다. 이 구상은 이미 지난해 2월11일, 도서관계를 비롯해서 출판계, 문화계, 학계 인사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공개 제안했던 내용입니다. 당시 한진그룹은 부정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송현동 터는 경복궁에서부터 북촌에 이르는 우리의 역사문화벨트를 구성하는 중심에 있는 지점입니다. 바로 여기에 한옥 양식으로 ‘책의 전당’을 건립해, ‘지의 향연’을 마음껏 펼쳐나갈 공간이 생긴다면 이곳은 우리나라를 세계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도서관, 박물관, 시민대학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에 대한 고뇌 어린 물음이 절박해지고 있는 오늘날, 이것은 한진그룹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될 수 있습니다. 시민사회가 뜨겁게 환영하고 협력할 것입니다.
대한항공은 ‘엑설런시 인 플라이트’(Excellency in Flight)라며 최상급 항공을 내세우고 있으니, 이 김에 ‘엑설런시 인 플라이트 오브 아이디어’(Excellecny in Flight of Ideas)도 해보시면 어떨까요? ‘책의 전당’에서 우리 사회가 뿜어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탁월한 생각들이 전세계를 여행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책의 전당’의 영어 이름은 ‘KAL’(Korean Archive Library)로 하는 겁니다. 어떠세요? 뭔가 의미 있고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것 같지 않으십니까?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국민 기업 대한항공의 발전도 함께 기원합니다.
김민웅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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