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7일 수요일

‘박종철이 살아있다면’/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영화 <1987>은 어떤 관객들에겐 다른 중요한 효용이 있다. 이른바 586세대로 하여금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삶의 의미를 심문·성찰하게 하는 것이다. 필자도 그 세대의 일원이지만 그 광경은 자못 흥미롭고 문제적이다. 약간 슬프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죄책감과 회한에 젖어 눈물을 흘리고, 후배와 아이들에게 뻐기며 자랑스러워한다. 이 집합적 ‘증상’은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이한열의 선배 우상호 의원이 박종철의 선배 박종운씨를 꾸짖은(?) 일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박종운, 우상호 같은 사람들은 죽음을 안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가 없다”며 ‘종운이’는 ‘정치를 안 했으면 좋겠다’는 충고를 했다. 근래 박씨는 ‘박종철이 죽음으로써 지켜주려 했으나 배신자가 된 사람’으로 새삼 세간의 조명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떤 누리꾼들은 우 의원의 그간의 어떤 실책들을 들며 ‘도긴개긴’이라는 식으로 냉정하게 말한다. 일리가 없지 않겠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도 아닌 듯하다. 이런 장면은 꽤 깊게 철학적이고 또 정치적이다. 30년 시간은 무엇이며, 87년체제에서의 사람됨이란 무엇인가? 6월항쟁의 주역들을 갈라지게 하고 그중 어떤 이들을 ‘배신자’ ‘변절자’ 같은 무서운 말을 듣게끔 만든 벡터는 무엇인가?
1980년대는 험악한 시대였다. 그러나 무려 30년이란 시간이 쌓였으니 20대 때 누가 무엇을 어쨌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모르겠다. 6월의 군중이 하나가 아니었고 세계사의 물줄기도 바뀌었으니, 누군가가 ‘괴물’이 되건 자유한국당이 되건 다 가능한 일 아닌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방법론도 하나가 아니니 큰길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인가? 현실정치와 속인의 삶은 사실 다 ‘그렇고 그런’ 상대성의 세계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상하게 우리는 어떤 국면에서, 삶과 인간을 전혀 그런 방법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박종철·이한열의 삶·죽음 같은 것이 준거라는 것이다. 젊은 의기와 희생이, 또 어떤 이념이 절대적인 진리 같은 걸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어떤 사람들을 ‘변절자’나 ‘인간도 아닌’ 자라는 식으로 비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결국 한 존재가 ‘계속 사람’일 조건은 정치 또는 정파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봐야겠다. 
하지만 ‘계속 사람’인 문제는 죽는 날까지 완결되지 않아서 또 문제다. 그래서 <1987>은 무섭고도 무겁다. 그것은 과거·현재는 물론 미래마저 심문한다. 
그 시절 아마 그들·우리는 일면 매우 정말 순수했고, 또 일면 생경한 이념에 들떴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행동과 이념이 세계에 대해서나, 자기 생에 대해서나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면 이제는 50·60쯤 먹었으니 ‘객관적으로’ 평가할 만한 어떤 확고한 입각점과 세상을 통달한 경륜을 갖게 됐는가? 전혀 아니기 때문에 영화 하나에 울고불고 뻐기고, 위로받고 그랬을 것이다. 인생은 계속 ‘진행 중’이고, ‘박종철·이한열 정신’도 유효할 것이다. 이 점 ‘배신자’나 누구에게나 동등하다. 구원과 멸망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어, 끝없는 성찰과 다른 실행이 필요할 뿐이다.
엊그제 열린 ‘1987 박종철거리 선포식’에서도 눈을 붙잡는 장면이 있었다. 박종철과 같은 운동 서클(패밀리·대학문화연구회) 선배였던 김민석 민주당 민주연구원장은 “박종철이 살아 있다면 촛불도 같이 나가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함께 봤을 것”이라고 했다. 
이제껏 그런 상상의 어려움에 대해 말해왔는데, 팩트만 말하면 이렇다. 박종철이 살해된 것은 개헌 문제를 둘러싼 공방이 치열하던 정국에서였다. 청계피복 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 때문에 이미 구속된 적이 있는 박종철은 CA(제헌의회)라 불린 정파 계열 학생조직의 일원이었다. 박종철 개인이 얼마나 그 노선에 깊이 동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그룹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파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이어서 관념적이라 비판도 받은 ‘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했다. 6월항쟁이 불완전한 승리를 거둔 뒤에도 계속 ‘파쇼하의 개헌 반대’를 외쳤다. 민중의 변혁을 통해 내용에서나 절차에서나 근본적으로 민주적인 헌법을 만들자는 것이었겠다. 실제로 1987년 가을의 헌법 개정은 시민 참여가 제한된 가운데 양김과 군부 간의 타협을 배경으로 ‘8인 정치회담’이라는 정당 엘리트의 손으로 급하게 이뤄졌다.(‘역사비평’ 2017년 여름호 참조)
그의 기일에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고문·용공조작 없는 나라를 확고하게 하고, 또 어떤 헌법을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지? 30년 묵어 너덜너덜한 이 헌법과 체제를 고치자는 데 반대하는 세력도 여전히 크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1162100005&code=990308#csidx32a3d3c2a1a4bdda19c0c7d0d9c0cf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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