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1일 월요일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13--마르크스주의 토대에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쌓아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48656.html


루이 알튀세르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4부.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분열과 마르크스주의 개조

12. 장폴 사르트르: 역사의 총체성을 회복하기
13.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로 돌아가는 우회의 길
14. 위르겐 하버마스: 마르크스주의에서 근대성으로
사르트르가 프랑스의 정치와 문화의 전면에서 연일 성가를 높이고 있었을 때, 파리의 윌름가에 위치한 고등사범학교에서는 무명의 한 철학 강사가 마르크스의 저작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1918년 알제리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 동안 포로 생활을 경험했던 그는 1960년에 이르기까지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1959)라는 작은 책과 포이어바흐의 저술을 편역한 <포이어바흐: 철학 선언>(1960) 두 권만을 출간한 상태였다. 몽테스키외에 관한 저작이 호평을 받았지만, 그것 말고는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1965년 두 권의 책을 함께 출간하면서 루이 알튀세르(사진)라는 이름의 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는 일약 파리 지성계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부상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이 두 권의 책 제목은 당시 그와 그 주변의 젊은 제자들의 이론 작업의 지향을 요약하고 있는 슬로건과도 같은 것이었다. 알튀세르의 저작이 왜 짧은 시간 내에 그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지적·정치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50년대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의 마르크스주의는 두 가지 커다란 사건에 의해 규정되었다. 하나는 스탈린이 사망한 지 3년 뒤인 1956년 열린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흐루시초프)가 행한 비밀연설이었다. 이 연설에서 흐루쇼프는 스탈린 집권 시절 이루어졌던 정치 암살과 고문을 비롯한 각종 비리를 고발함으로써 스탈린 격하 운동을 개시했다. 다른 하나는 1956년 헝가리에서 있었던 민중혁명이었다. 당시 집권당이던 헝가리 노동자당의 실정을 비판하고 소련군의 철수를 주장하면서 일어난 봉기는 새로운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지만, 소련을 위시한 바르샤바조약군 군대가 혁명 세력을 진압하면서 무참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이 두 사건은 서유럽 좌파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1940년대 말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고발하는 문헌과 증언이 잇따랐지만, 대중의 기억 속에 소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반(反)파시즘 전쟁의 중심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발이 마르크스주의와 공산당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 이루어진 스탈린 독재에 대한 고발과 헝가리 혁명에 대한 잔인한 탄압은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실망을 낳았다. 아울러 사회주의 양대 강국이었던 소련과 중국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면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1956년 헝가리 민중혁명 당시 쓰러진 스탈린 동상 주변에 모여든 시민들의 모습. 헝가리 혁명에 대한 잔인한 탄압은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깊은 배신감을 낳았고, 이런 정세는 청년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알튀세르의 이론적 개입은 이와 관련이 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 사상을
좀더 일관되게 재구성하기 위해
스피노자와 프로이트에 주목했다
알튀세르는 ‘호명’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가 재생산되는 비밀을
예속적 주체 생산 양식에서 찾았다
개인이 주체로서 존재하는 양식이
사실은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재적으로 연루돼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 정세는 이론적으로는 청년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계급 착취와 인간 소외에서 벗어난 해방의 정치체제와 거리가 먼 것이라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적인 계급 지배와 폭력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면,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소외 및 착취에 대한 비판과 인간주의적 이상이 현실 사회주의를 쇄신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론적 개입은 이러한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맞서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밝히는 데서 출발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 방식이 아닐뿐더러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새로운 시기 구분을 제안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 사상이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것이 아니었으며, 연속성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공동으로 집필한 <독일 이데올로기>(1846) 무렵부터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이론을 세울 수 있었다. <독일 이데올로기>가 ‘인식론적 절단’의 징표가 되는 이유는 청년기 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르크스 자신의 고유한 개념들, 곧 생산양식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개념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 사상의 정수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문제설정에 사로잡혀 있는 청년기 저작이 아니라 <자본>을 중심으로 한 후기 저작에 담겨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튀세르가 ‘인식론적 절단’ 이후의 마르크스 사상이 동질적이거나 완결되어 있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그의 논점은 절단을 이룩한 이후에도 마르크스 사상은 여전히 헤겔의 관념론이나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유물론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불완전하고 불균등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스탈린주의나 인간주의 같은 여러 가지 이론적 편향들이 발생하며, 다시 이는 정치적 오류 및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위기를 낳게 된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보기에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진 마르크스 사상을 개조하고 좀더 완전한 상태로 발전시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과제였다.
철학자로서 알튀세르의 이론적 독창성은 불완전한 상태의 마르크스 사상, 곧 모순에 빠져 있는 마르크스 사상을 좀더 일관된 사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비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요소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특히 스피노자와 프로이트 사상에 주목했다.
우선 이들의 사상은 헤겔 변증법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고유성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프로이트의 ‘과잉결정’이라는 범주는 왜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나라였던 러시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됐는지 해명할 수 있게 해준다. 사회주의 혁명은 “식민지 착취와 전쟁,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발전 정도와 농촌의 중세적 상태 사이의 모순, 지배계급 내부의 모순이 자본주의적 모순을 과잉결정할 때”(<마르크스를 위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 철학에 담겨 있는 ‘구조 인과성’이라는 범주는 역사의 전개 과정이 경제라는 최종 심급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법, 정치, 이데올로기 같은 다른 심급들 간의 상호작용에 따라 규정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좀더 정확히 사고하는 데도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알튀세르 이전까지 이데올로기 개념은 허위의식이나 기만 또는 지배계급에 의한 대중의 조작술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를 계급 지배의 도구로 간주하는 것이며, 또한 그 핵심을 착각이나 기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더 나아가 공산주의 사회는 이데올로기 없는 투명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충격적이게도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의 삶의 영역을 상상계로 규정했던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 역시 이데올로기를 생활세계 자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제시된 주장이었다. “사람들은 결코 의식의 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의 한 대상처럼, 자신들의 ‘세계’ 자체처럼, 그렇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살아간다.’”(<마르크스를 위하여>)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핵심은 단순한 허위의식이나 기만이 아니라 예속적 주체 생산에서 찾아야 한다. 알튀세르는 유명한 ‘호명’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가 계급적 착취에도 불구하고 재생산되는 비밀을 예속적 주체 생산 양식에서 찾으려고 했다. 호명 개념의 핵심 논점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나 권력의 작용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는 개인들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곧 호명 개념은 개인들 내지 주체들이 바로 그 개인들 내지 주체들로서 존재하는 양식이 사실은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인식과 실천의 자율적 중심으로서 주체에 기반을 둔 근대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또한 해방적 주체 개념에 기반을 둔 마르크스주의의 종언 선언이었다. 따라서 알튀세르에 대한 수많은 비판과 탄핵이 제기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알튀세르 이후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이론적 혁신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신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철학적 운명은 마르크스주의의 운명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태원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사진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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