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9일 토요일

목 잘린 인문학, 교수들 책임은 없나-'중앙대 사태'로 본 한국 대학/서영표 제주대학교 교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6268


중앙대학교가 심심찮게 신문을 장식한다. 두산이라는 재벌 총수가 이사장이었고 이 사람의 공격적 대학 '경영'은 기업의 요구에 맞는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던 듯하다. 학과를 폐지하고 단과대별로 학생들을 모집함으로써 기초학문 분야를 고사시킬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교수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목을 쳐 주겠다"고 했다니 이 사람이 대학과 교수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대학을 자기 소유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어찌 박용성뿐이랴. 상지대학교 분규에서 드러난 것처럼 사립대학의 재단은 대학을 사적 소유물로 생각하고 대학운영을 좌지우지하고 있지 않은가. 

정부라고 나을 것도 없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대학입학정원 축소를 목표로 정하고 졸업생 취업률처럼 수량화된 기준으로 대학을 평가하여 인원감축을 강제하고 있다. 대학들은 교육부가 쥐고 있는 돈줄을 잡기 위해 평가 점수를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 이 말도 안 되는 정책에 순응하고 있다. 순응 정도가 아니라 앞장서서 실행하고 있다. 교육부 장관이 대놓고 순수학문 분야는 더 이상 존재이유가 없다고 표명하는 데까지 이르고 말았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대학들이라고 나을 것은 없다. 대학의 문제점을 스스로 진단하기보다는 회계법인에 수억 원을 주고 대학평가를 맡긴다. 교육부의 대학 평가 기준처럼 학문적 특수성을 고려할 능력이 없는 회계법인의 평가는 계량화된 수치에 따를 수밖에 없다. 학문은 이제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이 되어버리고 우리 학생들은 정원충원율과 중도탈락률, 취업률을 셈하는데 필요한 머릿수일 뿐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이미 익숙하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나올 때마다 대학현실을 개탄하고 정부와 재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바로 대학교수들이다. 대학교수들이 들고 나오는 반대의 논리들은 대개 인문학과 순수학문의 중요성이다. 학문적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대학은 권력과 돈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국 대학을 망치고 있는 주범은 대학을 권력과 돈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정부와 재벌이고 이에 편승하는 대학당국들이다. 

여기서 도발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 보자. 그러면 교수들은 아무 책임도 없다는 것인가? 해 놓고 보니 별로 도발적이지는 않다. 대학의 구성원들이 정부가 개입하기 전에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웠을까? 수많은 교수들이 폴리페서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며 정치권을 기웃거리고 않았는가? 재벌이 대학을 인수하고 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대학을 운영하기 전에도 교수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기업에 팔아 잇속을 챙기지 않았는가? 심지어 학생들의 연구비를 착복하고 연구비를 자신의 쌈지 돈처럼 사용하지 않았는가? 

예전에는 대학이 비판적이었나? 

옛날 얘기를 한 번 해보자. 필자가 20여 년 전 대학을 다닐 때에도 강의실에서 학문적 열정과 감동을 느껴본 기억은 없다. 오히려 선배들 후배들과 책을 같이 읽고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배움의 희열을 느꼈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사회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면서 학문적 열정을 느끼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도 했다. 소수의 교수를 제외하고는 사회에 대한 진지한 비판과 토론을 찾기 어려웠다. 순수한 학문의 온실 속에서 대학교수라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렇다. 그 때도 인문학과 순수학문은 있었다. 하지만 80년대와 90년대 대학을 다녔던 세대들은 교수들의 인문학과 순수학문에서 진지한 고민과 비판의 냄새를 맡지 못했다. 그들은 특권층이었고 구름 속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인문학은 너무 고고해서 현실에 받을 딛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때 그렇게 강의실 밖에서 학문해야 하는 이유를 찾았던 학생들이 이제 대학교수 자리에 않아 있다. 그런데 이제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학생들을 찾지 못한다. 학생들에게서 사회에 대한 비판과 도전정신은 사라지고 취업의 문을 뚫기 위한 스펙관리와 경쟁만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80-90년대의 비판정신으로부터 자라난 교수들은 자신들 이외의 모두를 탓한다. 정부와 재벌, 대학과 학생들. 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분노했던 구름속의 인문학과 순수학문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모두를 탓하지만 스스로의 잘못은 인지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들이 대학교수들이다. 자기 분야에서는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 말을 잘 듣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멍청한 집단이기도 하다. 김영삼 정부부터 시작되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쳐 이명박, 박근혜 정부까지 일관되게 진행되고 있는 대학의 기업화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분열하는 노동조합운동과 진보정당에 대해서는 점잖게 충고하지만 자신들이 속한 대학의 존재 근거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단결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해서는 너그럽다. 사회적 행동에 능동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소시민의 태도를 꾸짖지만 그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학의 몰락에 대해서는 방관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당장 큰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연구비와 업적평가 기준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기의 직접적인 이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이 시장의 논리에 종속되어가고 권력의 노예가 되어갈 때 그것을 자기 자신의 일로 느끼지 못했다. 어떻게 되든 전임교수 자리는 보장 될 테니까 말이다. 

부끄러운 대학과 교수들의 자화상 

많은 교수들이 재벌과 기업이 인문학을 고사시키고 있다고 분노한다. 순수학문은 점점 더 설자리를 잃고 있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이것도 남 탓만 할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문공동체로서의 대학을 걱정하지 않았다. 학생들을 학문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학문적 토론을 하고 학파를 형성하고 생산적인 논쟁을 벌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인문학과 순수학문은 모든 학문의 토대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그것을 학과의 이권을 지키고 교수자리를 지키는 데 이용했을 뿐이다. 

학과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대학당국과 싸울 때는 인문학의 비판정신을 내세운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권위적이다. 학생들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방송국 마이크 앞에서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자신의 학생들 앞에서는 제왕처럼 행동한다. 정부를 비판하고 거대한 철학적 담론을 설파하지만 연구비 몇 푼에 손을 떤다. 학문적 토론과 논쟁은 없지만 대단치 않는 학내 권력을 둘러싸고 질시와 반목이 판을 친다. 인문학의 정신을 얘기하고 비판적 학문을 얘기하는 것은 결국 밥벌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대학교수들이 정말 한심한 것은 이렇게 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이 고고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착각이 아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정신분열일까? 
  
교수들의 가장 결정적인 잘못은 학생들을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논리 속에 방치했다는 것이다. "대학의 목적은 기본학문 보호가 아닌 취업에 도움 받는 데 있다." "냉정하게 장애인이건 노인이건 보호는 필요 없죠. 도태되면 죽는 건 당연합니다." 중앙대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온 학생의 글이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이글을 읽으면서 혀를 찰 것이다. 그런데 이 학생들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비판정신을 주장하는 바로 그 교수들의 제자들이다. 멋진 글은 쓰지만 정작 대학이 무너져 내리는 일에는 뒷짐 지고 점잔을 빼는 교수들에게서 배운 제자들이다. 학생들의 연구비를 착복하고 학문적 양심을 파는 교수들의 제자들이다. 보잘 것 없는 권력을 다투면서 파벌을 만들고 서로 욕설하기를 서슴지 않는 그 교수들의 제자들이다. 이 제자들은 교수들에게서 권모술수를 배웠고 파렴치함을 배웠으며 표리부동함을 배웠다. 좌파 지식인이라는 교수들이 대학의 총장과 처장이 되고서 하는 말은 정치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 대학'이 사는 것이 먼저라고, 개인적인 사정은 알지만 대학이라는 조직이 우선이라고. 도대체 무얼 가르쳤는가?  

지금의 참담한 대학 현실은 자본과 국가의 탓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본과 국가의 의도가 이런 방향에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면 그건 스스로 멍청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에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무력하게 서로 이권만을 지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면 최고의 지성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최소한 학생들을 존중하고 학문적 동지로 인정하고 함께 대학을 지켜나가야 할 동료로 길러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대학교수로서 무능한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이점을 알지 못한다. 대학마다 있는 교수회의는 연구비와 업적평가 기준에만 관심이 있다. 자기 과 입학정원 감축과 교수정원에 목숨을 걸고 싸운다. 자기 사람을 교수로 뽑기 위해 삿대질을 하면서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그래 놓고는,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 정부와 재벌이 대학을 고사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누가 지지해주겠는가? 학생들은 이미 교수들의 행태를 그대로 베끼고 여기에 시장경쟁의 논리를 내면화했다. 그들이 교수들을 지지하겠는가? 한 번이라고 그들을 지지자로 만들 생각을 하기는 했는가? 안정적인 자리에 사회적인 발언조차 하지 않고 안주하고 있는 무능한 교수집단, 권력을 향해 아부하고 자본에 지식을 파는 교수집단을 국민이 지지하겠는가?  

교수들은 너무 잘났다. 너무 잘라서 스스로의 오류를 인지할 수 없기에 아둔하다. 교수들은 너무 똑똑하다. 그러나 그 똑똑은 헛똑똑이다. 자기 머릿속의 똑똑함일 뿐 남과 공유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교수들은 정의롭다. 단 타자의 일을 판단할 때만 그렇다. 이제 한국의 교수들이, 최소한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순수학문 분야의 교수들만이라도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고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재벌과 국가를 비판하기 전에 교수로서의 최소한의 소임, 학생들을 교육하고 민주적 소통을 통한 대학의 자율성을 지키는 데 제대로 된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정부와 재벌에 맞서 대학의 자율성과 민주주의를 말하기에 우리 대학의 모습, 대학교수들의 모습은 너무도 부끄럽다. '나'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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