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1일 목요일

현응 스님의 글: 재가불자의 길을 묻다-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 그리고 성태용 교수의 반론, 우희종 대표의 글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7016

“한국 재가불자, 왜 승가에 편입되려 하나”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법보신문에 기고한 ‘재가불자의 길을 묻다-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에서 오늘날 한국의 불자들이 승가에 편입되기를 희망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했다. 스님은 “한국의 인구에서 조계종단 스님 숫자는 0.02%로서 극소수인 출가자가 그들에게 적합한 형태로 불교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명상과 삼매 위주의 불교, 세밀한 교리탐구 위주의 불교는 출가자에게 적합한 형태로 진화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스님은 “재가불자 역할이 사찰과 불교자산 관리하는 일이라 지나치게 강조하면 재가불자의 역할을 축소해 호도하는 일이다. 재가불자들이 굳이 2000년 전 인도의 무소유승단을 외호하듯 출가승려를 외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힐 것은 없다”며 “0.02%의 종무원을 제외한 대다수 재가불자들은 이제 홀가분하게 사찰과 출가 승려를 떠나 대승불교의 현장인 사회현장 속으로 들어가 바라밀을 행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편집자 주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 기고 전문
조계종 승려 전체 국민 0.02%
출가자 적합한 형태로 진화된 것
애초 출가목적은 도인이 되는 것
승납 10년 넘으면 80%가 자산관리

재가자 사찰·자산관리 운영 주장은
재가불자역할 축소·호도하는 일
승려는 특수직 수행하는 전문인

재가자 ‘외호’ 의무감 벗어나야
재가불자의 본령은 바라밀행
반야·자비 실현해야 할 장소는
사찰 아닌 중생계인 사회현장
  
▲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은 “대승불교는 재가불자들이 불교의 중심이라는 강한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불교이며, 보살행을 통해 중생계를 불국정토로 만들자는 불교”라며 “그래서 ‘비구’라고 불리는 출가승려가 중심이 되는 불교에서 ‘보디사트바(보살)’가 중심이 되는 불교로 바꾸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재가불자들의 신심과 신행활동의 적극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어릴 적부터 불공 가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본 경험이 있거나, 소풍과 여행으로 경치 좋은 명승지에 자리 잡은 사찰에 방문한 경험을 가진 상당수의 한국인은 자연스럽게 불자로 자처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곤 한다.

재가불자라는 의식을 하는 정도가 되면 5계, 8계, 10선계, 보살계 등 수계를 하게 되고, ‘○○거사’ ‘△△보살’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법회 등 각종 활동을 위해 사찰을 찾는다.

삼보에 귀의하고 불보살을 신앙하는 불자들, 불공과 기도를 하는 불자들, 사찰순례를 하고 스님들에게 설법을 듣는 불자들, 시민선방에서 참선하는 불자들, 안거결제에 참여하는 불자들, 재가자이지만 출가자 중심의 승가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불자들(재가불자의 일부는 약 15년 전부터 ‘재가불자들도 승가에 포함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과문한 탓이지만 이런 정도의 왕성한 신행활동을 하는 재가불자를 가진 나라들이 있을까 싶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한국 재가불자의 모습은 ‘재가불자와 출가승려’의 길을 동일한 성격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재가자와 출가자는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는 수준의 깊고 옅음의 차이, 준수해야 되는 계율의 규모와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동일한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재가자는 초보적인 것이고 점차 완성도가 높아지면 출가 승려의 단계에 이른다는 소박한 생각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적 시각으로 보면 이는 순진한 생각이다. 대승불교는 재가불자들이 불교의 중심이라는 강한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불교이며, 보살행을 통해 중생계를 불국정토로 만들자는 불교이다. 그래서 ‘비구’라고 불리는 출가승려가 중심이 되는 불교에서 ‘보디사트바(보살)’가 중심이 되는 불교로 바꾸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출가자는 극소수이다(한국의 인구에서 조계종단 스님 숫자는 0.02%임). 그런데 극소수인 출가자가 그들에게 적합한 형태로 불교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명상과 삼매 위주의 불교, 세밀한 교리탐구 위주의 불교는 출가자에게 적합한 형태로 진화된 것이라 생각된다.

재가불자들은 약 2000년 전, 이러한 출가자에게 적합한 불교보다는 일반대중에게 적합하고 필요한 불교를 만들어갔다. 대승불교시대, 대중불교시대를 연 것이다. 일반대중이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대승(대중)불교는 출가승려의 불교와 그 방법이 다르다. ‘대승’은 높은 경지를 뜻하는 질적인 표현이 아니라, 소수가 아닌 ‘대중적’이라는 양적인 표현이다.

출가자는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집단으로서 내부규율인 계율생활을 해야 하는 생활상의 한계가 많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많다. 그리고 출가자의 불교는 많은 제약과 한계 속에서 특수한 형태로 진화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생활을 떠나 있기에 방관적이고 논평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재가불자의 불교(대승불교)’는 생활(직업) 속에서 불교의 가치를 구현하고, 불교의 윤리의식으로 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이뤄가기 위해 사회적 노력을 하는 것이다. 대승정신의 재가불자들은 스스로를 보디사트바로 내세우길 좋아하지, 승가의 일원이 되는 것을 꿈에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출가승려가 대승불교권에 살고 있어서 비록 대승경전을 많이 읽고 보디사트바의 길을 흠모하더라도 그 길을 걸을 수 없다. ‘빽빽한 중생계의 숲에 들어가 그 차별상을 잘 알아서 보시, 애어, 이행, 동사섭의 바라밀을 펼치면서 자비행을 한다는 것(화엄경 십지품)’은 그저 염불이나 설법으로서 밖에 할 수 없다. 우선 계율과 종단의 율법이 사회적 보살행을 제약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첨단문명시대의 사회는 전문적인 학습과 각종 노력을 통해서 그 세부사항이나 전체 시스템을 알게 되는데, 사찰생활과 명상수행에 전념하는 출가승려는 사회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갖지 못한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문제를 2000년 전부터 통감하고 세상과 역사 속에서 작동되는 불교를 만들기 위해 대승불교를 표방했다. 재가불자가 앞장서는 사회적 보살행이야말로 대승불교 출현의 원인이다. 출가승려에게 사회적 보살행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출가승려는 ‘반야를 바탕한 자비방편행을 말하는 대승불교’를 ‘추상적이고 번다한 존재론’으로 굴절시켰고(중국 화엄종), 불교를 심층심리학의 영역으로 이해(중국 법상종)하는가 하면, ‘마음 깨치는 불교’(중국 선종)로 변절시키는 반대승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출가 승려는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오늘의 현실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600년의 지난 모든 불교를 담지하여 다음 세대까지 전승하는 일, 즉 불교의 혜명(慧命)을 잇는 거룩하고 엄숙한 임무를 담당하는 일이다. 출가승려란 불교 선생님(스승)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학교의 선생님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직접 사회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출가승려도 불교의 역사와 교리를 가르치지만 직접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출가승려가 대승불교까지도 출가승려에게 적합한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출가승려에게 또 하나 번거로운(좋은 것일 수도 있는) 임무는 지난 1700년간 한반도에서 형성된 불교의 유형적 자산을 관리하고 유지 전승하는 일이다. 이 일은 정말 고달프다. 조계종단의 스님들이 주로 이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애초의 출가목적은 수도하여 훌륭한 도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종단 구성원의 책무상 승납 10년이 넘으면 80%이상이 사찰과 불교자산을 관리 운영하는 일을 맡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지만, 이 일은 하다보면 익숙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 늘 마음으로 불편해 하기도 한 일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사찰운영과 불교자산을 관리하는 일은 매우 전문적인 능력을 요구한다. 출가승려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종무원의 보조를 받는다.

수년 전부터 종단에서는 출가자는 수도와 교화의 일에 전념하고, 재가불자가 사찰과 불교자산을 관리 운영해야 한다는 요구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재가불자의 역할이 사찰과 불교자산 관리하는 일이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재가불자의 역할을 축소하여 호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사찰과 종단의 관리업무를 담당하는 종무원의 일 또한 중요한 재가불자의 몫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숫자가 많아야 1만 명을 넘을 수는 없는 소수자의 일이라서 언필칭 2천만 불자라 하는 재자불자의 보편적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재가불자들이 진심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바로 중생계이며, 구체적인 한국사회 현실이다. 화엄에서 말하는 그 ‘중생계의 빽빽한 숲’ 말이다. 거기서 10바라밀을 행하면서 보디사트바의 삶을 사는 일, 이것이 진정 재가불자의 나아갈 일일 것이다.

재가불자가 현실에 지치고 힘들 땐 사찰에 가서 불보살을 경배하며 불교의 가치와 원력을 되새기기도 하고, 출가자로부터 설법을 듣고 위로와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집안에 애경사가 생기면 사찰에서 불공을 하거나 천도재를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디사트바의 본령은 바라밀행이며, 재가불자가 반야와 자비를 실현하는 장소는 사찰이 아니라 중생계인 사회현장이다.

생활 속에서 보살행(각종 바라밀)을 행하기에도 바쁜 대다수 재가불자들이 사찰운영, 종단운영을 제대로 하고 있나 살핀다거나, 출가자의 계율준수를 감시하고 지적하는 그런 문제에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일이다.

출가자와 재가불자의 바람직한 관계가 특별하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출가승려는 재가불자를 보디사트바로서 존중하여야 할 것이고, 재가불자는 스님들을 삼보로서 존경을 표하거나,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불교관련 특수한 직무를 수행하는 전문인으로 예우하면 될 것이다. 대신 출가자와 재가불자는 각자의 역할과 나아갈 길이 있다. 출가승단은 경제적 측면에서만 국한해본다면 현재 물려받은 사찰과 불교자산을 관리운영하면서 각종 법회를 한다거나 노력을 해서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출가승단은 불교자본가란 뜻이다. 재가불자들이 굳이 2000년전 인도의 무소유승단을 외호하듯 출가승려를 외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힐 것은 없다. 0.02%의 종무원을 제외한 대다수 재가불자들은 이제 홀가분하게 사찰과 출가 승려를 떠나 대승불교의 현장인 사회현장 속으로 들어가 바라밀을 행해야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불교정신과 가치관이 작동되고 안 되고는 재가불자인 보디사트바에 달려있다.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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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7055


“재가자들, 교단 들러리에 그쳐선 안된다”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법보신문에 기고한 ‘재가불자의 길을 묻다-출가자와 재가자의 바람직한 관계’에서 오늘날 한국의 불자들이 승가에 편입되기를 희망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는 5월15일 본지 기고에서 “재가불자는 그 삶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존재”라며 “재가자들이 단순히 불교교단의 들러리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특히 “출가자에 대한 존숭은 불교 교단의 근본적 특성이지만 그것은 사부대중의 역할 구도에서 나온 것인데, 마치 “사람 위에 스님 있다”는 식의 차별에까지 나가는 부작용을 낳은 측면이 있었다”며 “승단의 옹호라는 것이 불분명해지고 개인으로서의 출가자에 대한 옹호라는 것으로 변질되면 출가승려 개인에 대한 비판까지도 ‘승보훼방’이라고 말해지며, 스님들을 중심으로 한 신도들의 이합집산이 있게 되는 부정적 측면이 나올 씨앗이 심어지게 됐다”고 비판했다. 편집자 주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 기고 전문
불교교단에서 출가자 존숭은
사부대중 역할 구도서 비롯돼
‘사람 위에 스님 있다’는 식의
차별까지 나가는 부작용 초래
승단 옹호 개념 불분명해지면서
승려 개인 비판까지도 ‘승보훼방’
불교 새로운 변화 이끈 시발점은
현실 문제 앞서 파악한 재가불자
불국토 건설의 주체는 재가불자
삶을 통해 세상 바꾸어 나가야
  
▲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는 본지 기고문을 통해 “(재가불자의)승단의 옹호라는 것이 불분명해지고 개인으로서의 출가자에 대한 옹호라는 것으로 변질되면 출가승려 개인에 대한 비판까지도 ‘승보훼방’이라고 말해지며, 스님들을 중심으로 한 신도들의 이합집산이 있게 되는 부정적 측면이 나올 씨앗이 심어지게 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기설(對機說)이다. 어떤 조건에 주어진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가자라는 상황 자체가 이미 하나의 조건이다. 출가 승려와는 확연히 다른 그러한 조건에 맞게 부처님 가르침을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출가자 중심인 불교에서는 이미 하나의 창조적인 활동일 수밖에 없다. 또한 세속적인 삶을 영위하는 재가불자이기에 이 세속이라는 무대를 불교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것 또한 재가불자의 신행활동에 있어서 주된 부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재가불자의 독특한 위상은 불교사에 있어 출가 승단 중심의 불교사를 넘어서는 큰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한다.

법당에 가서 보살상을 보라! 거의 모두가 재가자의 모습이다. 그것은 대승보살운동의 중심이 재가자였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출가자 중심의 소승불교를 혁파하고 우리 삶의 무대를 신행의 장으로 삼는 대승운동이 바로 재가자의 독특한 위상을 바탕으로 한 재가자의 자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시각의 전환이 있게 되면 겉으로 출가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불교사의 기저에는 언제나 재가자의 변화하는 의식이 새로운 방향타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근․현대의 불교사에 있어서도 이러한 정황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해방 직후의 불교계가 맞은 조건과 상황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조 500년 동안 탄압받아 위축되었던 불교의 위상을 회복하고, 일본불교의 영향을 불식시키며, 서구 문물과 함께 도입된 서양종교 특히 기독교와의 경쟁구도에서 살아남는 것, 급격한 문명과 문화의 현실에 맞추어 불교를 현대화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정황 아래서 재가불자들은 얼마 되지 않는 출가 승려를 외호하면서 이른바 정화불사라는 것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승려였지만 실제 그들에게 힘을 주어 움직일 수 있게 한 것은 재가불자들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재가불자와 출가자들간의 적절한 유대를 이끌어 내었으며, 또한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승단을 재가자가 외호하는 불교 교단의 기본적인 형태를 이루어 내게 된다. 그런데 조선왕조 동안 천대받았던 불교의 위상을 높이고, 그러기 위하여 가장 선행되어야 할 출가 승려의 위상을 높이는 문제가 여기에 덧붙게 되면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신분적 차이가 강조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출가자에 대한 존숭은 불교 교단의 근본적 특성이지만, 그것은 사부대중의 역할 구도에서 나온 것인데, 마치 “사람 위에 스님 있다”는 식의 차별에까지 나가는 부작용을 낳은 측면이 있었다. 승단의 옹호라는 것이 불분명해지고 개인으로서의 출가자에 대한 옹호라는 것으로 변질되면 출가승려 개인에 대한 비판까지도 ‘승보훼방’이라고 말해지며, 스님들을 중심으로 한 신도들의 이합집산이 있게 되는 부정적 측면이 나올 씨앗이 심어지게 된 측면도 있다.

이러한 스님들에 대한 존숭과는 별개로 승단 존립의 기반을 제공하는 실제적인 힘이 되었던 재가자들은 자신들의 시대적 사명과 역할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재가자들이 단순히 불교 교단의 들러리에 그쳐서는 안 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 구현하는 불교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이었다. 승려인 백용성 선사가 중심이 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재가 대중을 중심으로 전개된 ‘대각운동’ 같은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만해 한용운도 불교의 교리와 경전, 제도와 재산 등을 민중화해야 함을 강조하며, 민중불교운동이 현실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선구적인 스님들에 의해 일깨워진 의식은 재가불자들의 단지 피동적이고 기복적인 신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깨달음을 위한 수행에 동참하는 주체로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대중화하기 위한 새로운 방편의 모색하는 일들, 또 생활 속에 불교를 실천하는 참된 신행운동 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였으며, 경전의 한글화와 불교 공부를 위한 새로운 법회운동, 생활불교운동 등이 도처에서 전개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깨인 재가불자, 수준 높은 재가불자 지성인이 있었으며 깨인 의식을 지닌 스님들과 연대하면서 지속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오랜 역사적 질곡을 겪어왔고, 급작스런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상황에서 현실 문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기존의 불교 종단들은 자체 내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도 힘이 부친 상황이었다. 그 속에서 현실의 문제를 보다 앞질러 파악하고 불교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낸 시발점이 된 것은 오히려 재가불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원 장경호 거사, 덕산 이한상 거사와 같이 큰 뜻을 가진 재가자들이 불교의 문제점을 올바로 인식하고, 불교개혁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는 것은 현대불교사를 조명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대원 장경호 거사의 뜻은 그 뒤 대한불교진흥원, 불교방송 등에까지 이어지면서 오늘의 불교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되고 있고, 덕산 거사의 큰 서원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등으로 이어지면서 오늘의 불교에 희망의 등불을 밝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를 전후하여 서돈각, 박성배 등 불교지식인들의 활발한 운동이 일어나고 서울대와 동국대 등 불교학생회를 비롯한 대학생들의 불교활동이 활성화되면서(그 뒤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로 그 활동이 이어진다) 재가불자운동이 불교계의 새로운 동력이 되었다.

백봉 김기추 거사 등 재가 수행자들이 새로운 재가불자의 수행운동을 일으킨 것 또한 주목할 측면이 있다. 이는 선 수행은 출가자들의 독점물이요, 재가자들은 조금 발을 담글 수는 있다고 여겨지던 당시에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출가 수행자와는 다른 재가자의 수행 방편을 통해 재가자도 선수행의 깨달음에 동참할 수 있다는 선언을 한 것은 출가 승려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는 일이었다. 단순한 지식의 영역을 넘어서 깨달음의 영역에 재가불자의 위상을 세운 점이 조명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재가불자운동은 주로 재가자 개인 신행과 관계된 일에 집중되었다. 불교의 현대화라는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의 것은 아니지만 역시 불교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 그런데 차츰 이런 운동들이 결실을 맺어가면서 불교운동의 조건들이 변화되었다. 이제는 불자 개인과 불교 내부의 문제를 넘어, 불자의 사회적 회향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자각이 불교운동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전이 깨인 재가불자들의 의식이 있다.

재가불자는 그 삶을 통하여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존재이어야 하며, 불국토 건설의 주체이어야 한다. 불교는 개개인의 괴로움을 구제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되고 대중의 괴로움과 괴로움을 산출하는 사회적 구조를 고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의식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불교 교단에 있어서도 재가불자는 단순한 교화의 대상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며, 사부대중의 일원으로 적극적으로 올바른 교단을 이루는데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된다. ‘우리는 선우’, ‘참여불교 재가연대’와 같은 재가불자 운동 단체들은 이러한 이념 아래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사회에 실현함으로써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데 앞장섰으며, 불교적인 이상사회의 모델을 제시하고 새로운 불사 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는 불교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으며, 출가 승단의 행보에도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몇 번의 ‘법난’이라 불리는 조계종단의 위기상황에 재가불자들이 조직적으로 정법수호에 앞장섬으로써, 사부대중의 일원이라는 분명한 위상을 확인한 일이었다. 재가불자들의 참여가 큰 위기의 극복에 전기가 되었다는 것은 종단 운영에 재가불자의 역할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러한 추세는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승려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또 그것이 늘어날 희망도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재가불자의 역할은 나날이 커나갈 수밖에 없다.

중요한 초점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재가불가가 불교에서 소외되지 않고 주체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두 가지로 요약된다. 향내적(向內的)으로 개인적인 배움과 수행에 있어 주체로 서서 자신의 삶을 불교적으로 바꾸어 나가야한다는 것이요, 향외적(向外的)으로 사부대중의 일원으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여 불교 공동체의 든든한 기둥으로 서면서, 재가불자의 임무를 다함으로써 현실을 불국토로 바꾸어 나가는 선봉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근·현대 불교사의 흐름 속에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어진 이러한 방향성을 추구해온 재가불자들의 깨인 활동들이 있다. 이를 이어나가면서 바뀌어가는 새로운 현실에 부응하는 새로운 재가불자운동의 지평을 열어 나가야 할 것이다.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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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은 선종 아닌 財宗 , 승려는 불교자본가 인정"

현응 교육원장 스님께서 최근 재가자들에게 건낸 기고문을 보면서 현응스님을 처음 뵙었던 2006년의 첫인상이 기억난다. 송광사 스님을 은사로 둔 탓에 그다지 해인사에 갈 상황이 안되었던 나로서는 마침 해인사에서 열린 한국불교학결집대회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교계 다른 교수들과 함께 당시 주지스님이셨던 현응스님을 뵈었다. 

커다란 순박한 눈망울에 솔직하고 겸손한 분이라는 첫인상은 그 후 큰 잘못 없이 해인사 주지 소임을 마치고 총무원에 합류해, 최근 종단 교육의 수장인 교육원장으로서 활동하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평소 승려도 급변하는 사회를 이해해야 한다면서 승가교육의 전면적 개편을 말씀하셨고, 시대에 맞춰 ‘불교와 현대과학’이라는 과목도 부탁받은 적이 있다. 개혁적이고 적극적인 스님의 열린 자세를 엿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더욱이 사찰 재정 투명화를 이루지 않으면 조계종단은 5년 이내에 망가질 것이라는 준엄한 현실 진단을 최근 내린 것은 누구나 공감되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었고, 권승들의 계파 관리와 이를 위한 불투명한 사찰 돈 관리가 만연한 현 종단 분위기에서 그런 소신 발언을 할 수 있는 스님이 총무원에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재가자에게는 흐뭇함으로 다가오는 스님 중의 한 분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재가자의 역할과 종단의 모습을 언급한 현응스님의 기고문에 대하여 승속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이의를 다는 것을 목격한다. 나 역시 현응스님의 글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조금 생각을 정리해 보니 현 조계종단의 모습을 이토록 솔직하고 정확하게 진단한 글이 있을까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현응 스님 기고문에 대하여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총무원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종단 현실과 모습을 냉철히 볼 때 기고문에서의 지적 상황과 무엇이 다른 지 묻고 싶다. 현응스님 글에 대하여 반론을 펼친 이들의 원론과 이상적인 종단 모습에 대한 지적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현응 스님의 글에서 언급한 내용 자체가 2015년 대한조계종단 현실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보여주고 진단하고 있다는 점을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이다. 

비록 필자는 작년 송담 스님의 탈종을 계기로 발언하기 시작했지만, 그동안 사찰관리인으로 전락해 돈이나 세고 있는 스님들을 많이 보았다. 신도들의 보시금으로 말초적 탐욕에 찬 생활을 즐기는 스님들도 종종 보았다. 사찰 재산 빼돌리는 것은 기본이고, 국가 지원금으로 진행되는 여러 행사에서 주지스님이 해당 지자체 공무원이나 업자들과 결탁해 뒷돈 챙기는 모습도 흔하게 보았다. 과연 누가 이런 조계종단 모습을 이토록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용기있게 인정한 승려가 있단 말인가. 

현 조계종단 모습이 부처님 가르침과 멀어져 있다는 것은 재가자라면 누구나 안다. 허나 대부분의 스님들은 변명하고 구실을 만들어 합리화하면서 이를 인정하지 않기에 조계종단의 변화는커녕, 총무원 권승들의 썩은 행태가 나날이 그 도를 더해 지금은 일반사회까지 넘치고 있다. 일부 뜻있는 스님들께서 이런 모습에 대한 반성삼아 대외적으로 더욱 좋은 활동을 활발히 하지만, 오히려 결과적으로 내부의 이런 부패와 비리를 외부 시선으로부터 방어해 주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더러운 냄새나는 짓을 지적해도 언제나 팥고물 얻어먹으려는 비호세력에 둘러싸여 여러 물타기 수법으로 도망 다닌 승려가 어디 한둘인가. 

세상과 사회 혹은 집단과 개인의 변화는 현실 직면을 통한 현실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현응스님은 기고문을 통해 그동안 선종을 표방해 온 대한불교조계종단과 소속 승려는 실질적로는 재종(財宗)을 표방하는 사찰관리종단이고 이에 속한 불교자본가들임을 명확히 밝힌 셈이다. 조계종단이 신자유주의라는 이 시대정신에 맞게 현실적으로 이미 환골탈태했음을 선언한 것이다. 현응스님은 종단의 대표적 선승인 송담스님께서 종단과는 수행 가풍이 다르다면서 탈종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준 셈이고, 네팔 참사 치유에 40억원 예산을 성금으로 사용하기보다는 해외스님들을 장식품으로 초대한 집안 잔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종교 집단이 시대에 따라 변해 온 역사를 생각할 때 이처럼 현실에 기반하여 변화를 모색하는 종단 교육원장 스님의 치열한 고민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도 쉽게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원론과 당위로만 스님의 글을 읽고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필자 역시 현응 스님의 글을 접하면서 시대 변화에 따른 종단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원론과 당위만으로 그동안 총무원 권승들을 괴롭혔음을 반성해야 했다. 

현응스님의 파격적이자 개혁적인 기고문에서 밝힌 것은 분명히 종단이 일부 잘못된 승려처럼 도박과 여자로 수행의 기본을 삼을 것이 아니라, 화엄경이나 부처님 말씀을 상품으로 하여 들어오는 돈과 사찰 문화재 관리로 집단의 정체성을 삼는다는 말씀이기에 우리 모두 천천히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변화의 길목에 선 조계종단에 속해있으면서 교육원장으로서 솔직하게 종단 현실을 직면하고, 이를 인정한 현응스님의 용기 있고 겸허한 모습에 재가자는 격려와 지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 

앞으로 조계종단은 사찰과 법당에서 관세음보살상이나 보현보살상을 폐기하거나 재가모임에 기증하는 변화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돈 낭비와 인력 소모로 점철된 세계 간화선 무차대회에서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멋진 발언을 한 종정스님도 현실과 동떨어진 자신의 위선적 발언에 대하여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것은 재가자들이 할 말이지 스님, 더욱이 사찰관리종단을 이끄는 종정스님이 할 말은 못된다. 

현응스님의 사자후는 자신이 속한 조계종단으로 하여금 더 이상 위선 떨지 말고 솔직하게 살면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수행 집단으로의 규정되어야 함을 적시했다. 재가 단체도 현응스님의 지적에 따라 변해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찰의 '문화재 관람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지만 이것 역시 종단 스님들의 수행 종자돈이라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 생각했던 선승 송담의 탈종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인과적 필연에 의거한 자연스런 흐름의 결과였다. 

그렇게 변화하는 종단이라면 부처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 재가자들은 분명 현 조계종단 일에 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여러 큰 스님들께서 ‘앞으로 정법은 재가에 있을 것이다’라고 한 예언이 결코 틀리지 않음을 구체적으로 목격하고, 동시에 이뤄내야 할 시대에 서있는 셈이다. 

내가 알고 있던 선종으로의 조계종단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재종으로서의 사찰관리종단을 맞이하는 길목에서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부처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현응스님의 솔직하고 용기 있는 기고문을 볼 때, 우리 모두는 송담 스님의 자취에 따라 사찰문화재 관리종단으로 대표되는 재종으로부터의 탈종선언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재가자와 분리되어 사부대중도 사라지고 사찰관리종단으로 변모한 조계종단 내에서 바른 불교를 찾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바른 불교를 위한 재가모임’이 등장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희종/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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