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6일 화요일

전쟁 끝낸 진짜 영웅은 맥아더 아닌 주코프!/ 이병한 역사학자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6683

역사 동맹 

지난 5월 9일은 러시아의 제2차 세계 대전 전승 기념일이었다.

역사상 가장 큰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1만5000명의 군인에 190대의 탱크, 150대의 전투기가 동원되었다. 다른 나라 군인도 700명이 참여했다. 으뜸은 102명을 파견한 중국이었다. 인민해방군이 붉은 광장에 등장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탈린-마오쩌둥 시절에도 없던 일이다.

배경 음악이 각별했다. 가곡 '카츄샤(Катюша)'가 흘러나왔다. 전장의 연인을 그리워하는 러시아 여인의 마음을 그린 곡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널리 불렸던 노래로, 러시아인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비단 러시아만도 아니었다. 1950년대 '사회주의 국제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할 무렵 중국, 몽골, 북조선, 북베트남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울란바토르의 어르신들도 절로 따라 불렀다.

그럼에도 붉은 광장의 군사 행진은 무력 과시에 그치지 않았다. 브릭스(BRICs) 국가와 유라시아 국가들이 주축이 된 외교 행사였다. 서방(미국, 서유럽, 일본)은 자리에 없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참여했던 10년 전과 가장 큰 차이였다. 더불어 '역사 전쟁'을 선포하는 상징적 무대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해석권을 되찾아오는 과업에 푸틴과 시진핑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아시아에서 미국은 일본과 합작하여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이라는 등식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을 반성한 일본과 손을 잡고 신냉전을 획책하려 든다. 태평양 전쟁 이전, 즉 1941년 이전에 대해서는 안면몰수, 시치미를 떼고 있다.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와 호흡을 맞춘다. 우크라이나 극우파들은 홀로코스트의 상징인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가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망언을 일삼고 있다. 기가 막힌 러시아 당국이 기밀 문서까지 공개하여 반박했을 정도이다. 7600명의 유태인을 아우슈비츠에서 구출한 것은 명명백백 소련군이었다. 유라시아의 동과 서에서 동시에 표출되고 있는 '역사 수정주의'에 맞서 중러 양국이 '역사 동맹'을 맺은 것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 기억의 왜곡과 조작이 허다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원폭 투하가 지나치게 부각되었다. 소련의 공헌과 중국의 역할은 과소평가되었다. 역시나 냉전이 병통이었다. 동서 냉전으로 역사 해석이 갈라진 것이다. 서방 및 미국의 아시아 속국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체주의에 맞서 활약했던 소련의 공헌을 잘 모른다. 오히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동일시하는 '자유주의 사관'이 만연해 있다. 과연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현재를 지배하는 법이다. 미국은 역사 교과서와 대중문화 산업을 통해 왜곡된 인식을 재생산해왔다. '홀로코스트 산업'을 비롯한 '문화 냉전'을 기획했다. 

물론 미국에도 '양심적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유럽 전선의 핵심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43년)를 꼽았다. 한 도시의 초토화를 대가로 소련군이 독일 나치의 5개 사단을 섬멸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쌍방 정예 150만 대군이 결전을 벌였다. 여기서 독일 최강의 탱크 부대가 참패했다.

두 전투를 계기로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즉 소련으로 말미암아, 고쳐 말해 스탈린이 히틀러를 이김으로써 '제3제국'이 좌초하고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은 마침표였을 뿐이다. 아시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을 앞서 지원한 것은 소련이었다. 미국은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에야 뒤늦게 참전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역이 소련과 중국이었음은 그 인적 피해의 숫자에서도 확연하다. 소련은 2700만 명이 희생되었다. 중국은 2000만 명이다. 미국은 40만 명에 그친다. 프랑스는 60만, 영국은 45만 명이다. 심지어 전범 국가인 독일은 700만, 일본은 300만 명이다. 즉 2차 세계 대전은 미국, 프랑스, 영국이 주도한 전쟁이 아니었다. 소련과 중국이 유라시아의 동과 서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을 격퇴시킨 '유라시아 전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는다. 러시아는 '조국 수호 애국 전쟁', 중국은 '항일 구국 전쟁'을 선호한다. 

▲ 9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 군사 퍼레이드에서 70년 전 참전 용사 복장을 한 군인들이 광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1939년 할힌골 : 분수령 

1937년(중일 전쟁)과 1941년(독소 전쟁, 태평양 전쟁) 사이에 1939년이 있었다. 몽골 최동단에 자리한 자그마한 할힌골이 세계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1932년 만주국 수립으로 일본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었다. 남북을 가르는 허라허 강을 사이로 소련군/몽골군과 일본군/관동군이 대치한 것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1905년) 승리로 러시아를 낮추어 보았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탈바꿈한 러시아의 변화를 간과한 것이다. 이미 초기 공업화도 일단락 지었다. 강철로 단련된 현대 국가, 소련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 소련과 제국 일본의 완충지가 몽골인민공화국(1924년)과 만주국이었다. 각기 소련의 위성국과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결국 양국의 국경선 충돌이 일소 전쟁으로 치달았다. 러시아/몽골에서는 할힌골 전투, 일본서는 노모한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전투도 사건도 충분치 않은 진술이다. 대규모 전쟁이었다. 장소는 몽골 초원이고, 기간은 5월부터 9월까지 4개월에 그쳤지만, 매우 현대적인 의미의 국지전이자 제한전이었다. 일본과 소련 쌍방이 투입한 병력도 10만 명을 헤아렸다. 1000대의 전투기와 수백 대의 탱크도 동원되었다. 사상자는 1만8000명에 이른다.

군사 전략적으로도 획기적이었다. 아시아 최초의 탱크 대전이었다. 여기서 소련의 신성 주코프 장군이 등장했다. 그가 이끌던 소련의 탱크 부대가 투입되면서 판세가 뒤집어졌다. 욱일승천하던 '황군의 꽃' 관동군을 처음으로 꺽은 것이다. 제국 일본 패망의 시작이었다. 특히 최초로 구사한 육공 입체 작전이 주효했다.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각인시킨 전쟁이 할힌골 전투였다. 공중전과 지상전을 결합하는 전술은 훗날 현대전의 교본이 되었다. 

그러자 나비 효과가 일었다. 관동군이 패배함으로써 제국 일본의 향로 전체가 변경되었다. 몽골과 시베리아 등 북진(北進)이 봉쇄당하자 남진(南進)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노선 전환에는 관동군 사령관 출신 도조 히데키의 판단이 결정적이었다. 주코프의 적군(赤軍)을 대적하기가 어렵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와 영국,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는 동남아로 진출했다. 군부의 중심도 육군에서 해군으로 이동했다. 국책 담론도 전환되었다. 소련과 합작하여 일본을 개조하고, 영미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를 극복하자는 동아협동체론은 기각되었다.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하자는 주장이 전면화되었다.

동아협동체론을 입안한 브레인은 오자키 호츠미였다. 그는 소련의 스파이 조르게와 내통했다. 즉시 일본의 노선 전환을 전해주었다. 조르게도 즉각 모스크바에 타전했다. 덕분에 스탈린은 극동군을 유럽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대독 전선에 소련의 화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도 주코프가 대활약했다. 1941년 12월 개시된 대독일 반격에 진두지휘를 맡았다. 할힌골의 대승을 이끌었던 지상전/공중전의 배합이 또 한 번 쾌거를 일구었다.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에서 연전연승했다. 끝내 베를린도 함락시켰다. 명실상부 제2차 세계 대전, 최고의 명장이었다. 맥아더는 비할 바 못 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영웅 게오르기 주코프. ⓒrealmadridbalkan.org


주코프가 유럽 전선에 등장한 바로 다음날, 일본은 진주만을 공습했다. 태평양 전쟁이 본격화된 것이다. 즉 1941년 12월 6일과 7일은 제2차 세계 대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틀이었다.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본다. 일본이 재차 북진을 감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소련이 유라시아의 동서 양면에서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대적할 수 있었을까. 

혹 소련이 무너졌다면? 독일의 제3제국과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 유라시아를 양분했을까? 물론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개연성은 충분했다. 그 개연성을 말소시킨 것이 1939년 할힌골 전투였다. 결정적 사건이었다. 

유럽에서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은 5월 8일이다. 소련군이 다시 유라시아를 건너 대일 개전을 선언한 날은 8월 8일이었다. '폭풍 작전'으로 관동군의 무장을 해제해갔다. 북조선, 사할린, 쿠릴 열도까지 남진했다. 1945년 소련은 1905년 러일 전쟁을 역전시켰다. 만주를 재탈환하고, 한반도의 북쪽까지 접수했다. 그럼으로써 국공 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동아시아 냉전의 출발이기도 했다.

몽골의 역사 박물관에서는 한창 제2차 세계 대전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응당 할힌골 전투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들로서는 영광스러운 기억이다. 관동군을 격파하는데 몽골군이 기여한바 컸기 때문이다. 최초의 육공 합동 작전에서 그들은 말과 활, 칼로 싸웠다. 하늘에서 폭탄을 투하하고, 후방에서 대포를 쏘아 올리면 몽골군이 말을 타고 진격하여 관동군의 목을 베고 심장을 뚫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그치지도 않았다. 국공 내전에서는 중국공산당을 도왔다. 한국 전쟁에서는 북조선을 지원했다. 4만 마리의 군마(軍馬)를 평양에 보냈다. 북조선 전쟁 고아 수만 명을 탁아소에서 길러주기도 했다. 당시 몽골인민공화국(1924~1992년)은 세계 두 번째이자, 아시아 최초의 공산 국가였다. '선진국'의 책무를 다한 것이다. 

'붉은 몽골'이 가장 빛났던 시절이기도 했을 것이다. 전승기념일 전야, 몽골인들은 '칭기스칸 보드카'로 축배를 올렸다. 울란바토르의 하얀 밤(白夜)이 더욱 하얗게 불타올랐다. 

ⓒ팟캐스트 역사책읽는집

ⓒ팟캐스트 역사책읽는집

유라시아 전쟁? 

미국의 저명한 일본 연구자들이 아베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한다. 실천적 지식인들의 양심적 목소리에 나도 귀를 기울여 보았다. 하지만 못내 불만이 컸다. 모자라고 미흡했다. 비판의 주종(主從)부터 잘못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일본의 그릇된 역사관이 아니다. 그것을 눙치고 감싸 도는 미국의 태도 변화이다.

즉 일본은 미국에 편승하는 주구이고 첨병일 뿐이다. 따라서 그 분들이 활동하고 계시는 본국부터 호되게 호통 치셔야 했다. 아베 못지않게 노벨평화상까지 선납 받은 오바마 또한 염치가 없기 때문이다. '왜 義(의)를 버리고 利(리)를 따르십니까?', '속국을 德(덕)으로 교화하십시오.' 통촉해야 했다. 그래야 대국의 영(令)이 서는 법이다. 도덕적 권위가 무너져가는 미국부터 바로잡으셔야 했다. 

'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는 점도 내키지 않는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실체를 가리는 명명이다. 애당초 제2차 세계 대전이란 무엇이었나? 미국발 세계 공황의 후폭풍이었다. 전체주의도 대공황으로부터 촉발된 것이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자본주의 국가가 근원적 화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은 이러한 역사상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책임을 독일과 일본에만 떠넘기고, 자기 책임을 지워내 버린다.

그 후 미국이 태평양 건너 유라시아에 개입했던 일련의 전쟁, 국공 내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간 전쟁, 테러와의 전쟁을 아우르노라면 어느 것 하나 떳떳하지 못하다. 떳떳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의심스럽고 석연치 않은 대목이 하나 둘이 아니다. 유라시아의 거듭된 분할/분단과 전쟁을 통해서 패권을 유지해 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책임대국'으로서 자격이 미달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우리의 역사 경험과 실감에 맞는 용어와 개념을 만들어 가야 한다. 自强(자강)하는 첩경이다.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은 명백히 유럽의 관점이다. 태평양 전쟁은 미국식 독법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이름 바로 짓기에서 출발한다. 올바른 이름으로 고쳐 부르고, 똑바로 불러야 한다.

일본이 반동 노선의 전위가 된 것도 '그 전쟁'의 일부였던 '유라시아 전쟁'을 망각했음이 커다랗다. 태평양 전쟁에 함몰되면서 (아시아에 대한) 후안무치와 (미국에 대한) 피해망상을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태평양 전쟁'이라고 말한 적도 없다. '대동아 전쟁'이었을 뿐이다. '대동아'는 화들짝 감출 말이 아니다. 반추하고 성찰해야 할 뜨거운 화두이다. 혹자의 수사처럼 '불 속의 밤'이다. 그 밤을 움켜쥐어야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중일 전쟁, 대동아 전쟁, 한국 전쟁, 중소 분쟁, 베트남 전쟁까지 이어진 20세기의 천하대란을 일이관지할 수 있다. 

그래야만 동아시아의 100년도 유라시아 천년사의 지평에서 조감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20세기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길을 답습했다. 그는 일찍이 조선을 지나 명(明)을 치겠다고 했다. 나아가 인도까지 가겠다고 했다. 허장성세였으되, 허언만은 아니었다. 역사를 꿰뚫고 있었다.

만주를 장악하면 북방으로 중원으로 진출이 용이하다. 그 기세로 동남아와 남아시아까지 뻗어나갈 수 있다. 즉 왜족도 만주족도 '몽골의 길'을 따랐던 것이다. 만주족과의 경합에서 실패한 왜족이 와신상담한 것이 20세기였다. 대청 제국을 대신하여 대일본 제국이 굴기했다. 이번에는 한족이 왜족을 상대했다.

중일 전쟁으로 상징되는 20세기 전반기의 역사였다. 20세기 후반기에는 소련과 중국이 적대했다. 유라시아의 판도를 두고 북방 제국과 중원 제국이 길항했다. 좌/우 대결은 잠시였고 '사회주의 국제주의'도 한 철이었다. 유라시아 천년을 규정했던 북방(유목 문명), 중원(농경 문명), 남방(해양 문명)의 삼분 구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유라시아 전쟁'이라는 개명(改名)에 대해서는 운만 띄우기로 한다. 9월 3일이면 중국도 전승기념일이다. 붉은 광장에 이어 천안문 광장에서도 항일 전쟁 승리 기념식이 열린다. 올해는 처음으로 공휴일로 지정하여 '역사 전쟁'에 한층 박차를 가할 기세다. 과연 '유라시아 전쟁'이 정명(正名)인 것인지 재차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 1주일간 견문했던 (외)몽골 얘기부터 먼저 풀어내기로 한다. 대초원에서 펼쳐진 몽골(사)이야말로 유라시아(사)의 축도(縮圖)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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