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4일 목요일

김원호 씨알재단 이사장 “백세 시대 ‘나머지 33년’ 현실 문제에 부딪혀 보려 합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5121459471&code=115

올해 초, 한겨레신문에 실린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라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의 일갈은 지금까지도 종종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깊은 울림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노인들을 봐주지 말라”고 했다. “까딱하면 모두 저 꼴이 되니 봐주면 안 된다”면서. 지금까지 이 인터뷰가 주목을 받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닮고 싶은 어른’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김원호 씨알재단 이사장(68)을 인터뷰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은 지난 3월 말이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김 이사장의 직함은 유미특허법인 대표다. 업계에선 정상에 올라선 기업의 대표다. 씨알재단, 에코피스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 활동을 비롯한 그의 다른 활동은 사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활동이었다. 시민사회의 숨은 조력자, 은둔의 후원자로만 알려졌다. 3월 12일, 그의 첫 강연행사가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렸다. ‘불안에서 희망으로’라는 주제였다. ‘인생68토크쇼’라는 부제가 붙은 강연 안내 포스터를 보면 인상적인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의 캐리커처. 말풍선이 달려 있었다. “어서와요. 처음 하는 강연이라 떨려요….” 그리고 노란 리본. 세월호에 대한 기억이다.


사실 김 이사장의 활동에 대해서는 시민사회 내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1990년대 이후 꾸준히 현실참여를 해오셨지만 앞에 나서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강연까지 앞에 나서 하시다니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겁니까.
“그건 제 성격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 내성적이에요. 무슨 활동을 하더라도 조용히 지내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역사적 예수’가 제 삶의 모토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 왔는데 부지불식간 이런 생각을 했어요. ‘예수처럼 살아가지 않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다 씨알재단에서 운영위원회를 열어 다시 이사장으로 복귀를 시켰어요. ‘결국 그렇게 살 수밖에 없구나’라는 시대적인 요구가 나에게 온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강연 포스터를 보면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상징인 노란 리본 마크가 있는데요, 세월호 사건도 한 계기가 된 겁니까.
“그렇죠. 어찌 됐든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하나씩 하나씩 좋은 세상이 되어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국가기관이라는 것이 우리 ‘씨알’(민중)의 삶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에 빠뜨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구나, 여전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개인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줘야 하는 국가가 그 역할을 못한다면 누가 그 일을 해야 할까. 결국은 개인이나 단체가 감수해야 할 몫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지내왔던 지금까지의 삶보다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결과적으로 잘한 결정이었습니까.
“잘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걱정이 앞섭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제 인생 3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수명이 연장되어서 100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첫 33년은 성장하고 준비하는 데 바친 인생이라면 그 후 33년은 그것을 키우는 데 보냈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나서 맞이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금년 3월인데, 이 ‘나머지 33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원래는 가급적 조용히, 농사나 지으면서…라고 생각했는데, 제게 주어진 새로운 소임이 사회의 변화에도 기여하는 일이겠죠. 물론 개인의 수양이 병행되어야 하는 일일 테고요.”

왜 33년이죠? 신앙인이라고 밝히셨는데, 30살 넘어서 3년간 공생애 활동을 한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겁니까.
“개인적으로 34살에 개업을 했어요. 1981년에 개업을 했는데 올해로 34년째 됩니다. 34년 동안 특허사무소를 꾸려서 어느 정도 기반을 이뤄왔고, 이제 ‘3기의 삶’을 앞두고 있게 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졸업하는 나이가 되다 보니 또 다른 ‘먹고 사는 삶’을 생각하게 된 겁니다. 현실 문제에 대해 보다 정면에서 맞부딪쳐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능력이 모자랄 수는 있어도 그쪽으로 가야 하는 ‘부름’ 같은 걸 느꼈다고 할까요.”

지난 3월 12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김원호 이사장의 첫 강연 안내 포스터.
첫 33년 이야기를 해보죠. 60년대 대학생활을 하셨는데, 지금 선후배나 비슷한 연배의 분들, 특히 보수 쪽에 있는 분들의 젊었을 때 경력을 살펴보면 화려해요. 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던가….
“제가 66학번입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완전히 전통적인 가톨릭 윤리 속에 머무르고 있었어요. 학창 시절에는 슈바이처의 삶에 많이 감화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이나 간디, 함석헌 선생이나 심지어 예수의 삶에 대해서도 현실 속에서 그분들의 소임을 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969년 3선개헌 반대운동으로 학내가 시끄러울 때도 조용히 학교를 다녔어요. 주일학교 선생을 하면서 교회에 봉사하는 삶이었죠. 어머니의 뜻에 따라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이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삼양동에서 23번 버스를 타고 가는데 전태일이 분신했다는 소식이 나오는 거예요. 공교롭게도 그 양반이 저와 동갑내기입니다. 나와 같은 나이의 청년은 죽어가는데 나는 온전한 삶을 누리고 있구나…라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생기면서 시국미사에도 참여했지만 거기까지였어요. 1987년 6월 항쟁 때도 일반 시민의 한 사람으로 데모에 참여하는 정도였습니다. 다만 관심은 그때 이미 바뀌어 있었죠. 리영희 선생의 책들을 읽고 내가 알고 있었던 조용한 현실을 넘어 배후의 작동논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요.”

평범한 시민으로 살면서도 현실에 대한 관심은 놓지 않았다는 말씀이시군요.
“어떻게 보면 운 좋게 살아왔습니다. 돌아보면 엉뚱하게 유신 때 정권 비판하는 한 마디 한 것으로 감옥에 들어가 1~2년 산 사람도 있는데, 5·18이 나고 난 다음 주일학교에 신문에 실린 5·18 기사를 들고 가 ‘너희들 이게 뭔지 아느냐’고 학생들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때 들었던 고등학생들 중 누가 신고했다면 변리사 시험도 못 봤을 것이고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죠. 1970년대 초반인가, 고등학교 2학년 여자애와 기차 선로를 걷다가 파출소에 끌려가 각서를 쓴 적은 있습니다. 그 외에는 파출소 유치장에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소시민적으로 산 셈입니까. 한때 부끄럽기도 했어요. 내가 왜 무난하게 살아왔나 하고.”

이런 건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학교 다닐 때를 회상해보면, 당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그런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투사의 삶이죠. 요즘 만나보면 의외로 정말 평범하게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뭔가 20대 때, 젊었을 때 열정이나 꿈 같은 걸 다 소진(消盡)해 버린 것 같은….
“문익환 목사님도 1970년대 민청학련 사건 때만 하더라도 관여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분이 활동에 나선 것이 50대 말부터로 기억합니다. 장준하 선생도 그랬고…. 틀림없이 싹은 있었으니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요. 가슴에 불을 댕기는 계기가 있었겠죠. 저 같은 경우는 그냥 보통 사람입니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일관된 논리로 살아갔으면 하는 생각이었고, 성격도 조용한 편이니까 앞장서서 뛰어들지는 못하고…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인도 사람이 그런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성장기가 오고 활동기를 거친 후 자녀들이 결혼하고 나면 출가한다고 합니다. 문 목사님 같은 분이 뒤늦게 뛰어든 건 그런 식이 아니었을까요.”

씨알재단 이사장을 맡고 계시는데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나 함석헌 선생님과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1990년 가톨릭 안에 천주교 정의구현연합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집니다. 그 단체 안에 신앙인 사회학교라는 게 만들어져요. 정치·경제·사회·문화나 종교와 관련된 강의를 듣는 자리였습니다. 그게 한 1993년 정도 되니 시들시들해져 가는 겁니다. 그것을 하시던 분들이 저에게 운영위원장을 맡으라 했는데, 삼고초려해 맡게 되었습니다. 신앙인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존속합니다. 그 프로그램 중에 성서학자 정양모 선생이 다석 유영모 선생의 삶과 사상에 대해 강의를 하셨어요. 그게 1994년 정도의 일입니다. 한 3년 전에 돌아가신 김홍호 교수님이라고 있는데,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 1956년도에 강의한 1년치를 속기사를 통해 옮겨놓은 원고가 날아가게 생겼다는 말씀을 하셔서 출판을 후원한 일이 있습니다. 그게 계기가 되었어요. 다석 선생의 강의는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함석헌 선생님은 대학 시절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씨알의 소리>를 1980년대 폐간할 때까지 쭉 보고, 1980년 4월에 첫 직장 퇴직금을 받아 평생독자 후원을 했는데, 7월에 군부독재정권이 강제폐간을 시켰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그런 것일까요.”

변리사와 변호사를 포함해 350여명의 직원이 일하는 국내 2위의 대형특허법인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회 통념상 우리 사회의 상류층 내지는 지도층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주위에 보수적 생각이나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한국 사회의 엘리트 층을 꼽는다면 경기고 나와서 서울대, 세칭 일류학교를 졸업하고 직장도 대기업을 다니거나 그 인맥을 기반으로 사업을 일군 사람들이 많아요. 사실 이게 강남의 논리죠. 그 친구들하고 같이 앉아 있으면 저는 완전히 ‘좌빨’이 되고 ‘종북주의자’로 분류되죠.(웃음)”

한국 사회가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으로 봅니까.
“슈바이처의 글을 읽다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현 상황이 비관적인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인간은 좀 더 낫게 살려는 존재이다. 내가 그런 의지를 믿고 있는 한 낙관적이다.’ 저도 특허법인 사무실을 이끌어 나갈 때 그 말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인간의 살려는 의지를 믿습니다. 그 의지가 있는 한 변화가 있을 것이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바람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비극적인 상황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닮고 싶은 어른’에 대한 사회의, 특히 젊은 세대의 갈망이 높은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젊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어르신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찾아보면 꽤 있을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시대의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 갑자기 세상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이나 김수환 추기경이나…. 그런 분들로부터 위안을 받던 사람들이 그런 존경할 만한 분이 떠나니 허전한 거죠. 누가 나서서 꼭 한 말씀 해줬으면 하는 것이 절실해진 시대인 것 같습니다. 큰바위 얼굴 이야기와 비슷한 것 같아요. 그 어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어른’의 길을 걸어서 ‘그 어른’이 오시는 거리를 짧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성경적으로 비유한다면 김 이사장 같은 분들이 예수의 탄생에 앞선 세례자 요한 정도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거창하게는 생각 안 해봤는데, 각자가 원하는 행복한 삶을 구세주를 기다리는 듯한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는 세상이 되었어요.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감으로써 그 어른들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 땅에서 나이 먹은 사람들의 소임이란 게….”

<글·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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