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일 목요일

최진욱, 엄대섭, 도서관에 바친 혼

엄대섭 알기=도서관의 뿌리 알아가는 것 ‘엄대섭, 도서관에 바친 혼’ (상)

울주문예회관이 오는 11월9일부터 18일까지 1층 전시장에서 ‘엄대섭, 도서관에 바친 혼!’을 주제로 엄대섭 회고전을 연다. 엄대섭 선생(1914~2009)은 울산 웅촌 출신으로, 우리나라에 마을문고 운동을 펼쳐 대중화시켰으며, 전국 공공도서관 건립 운동에도 평생을 바쳤다. 이에 울산북구기적의도서관 최진욱 주무관을 통해 엄대섭 선생의 일대기를 알아본다.



현재 우리나라에 공공도서관은 700개가 넘고, 작은도서관은 수천 개가 넘는다. 어느새 우리 생활에서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은 낯설지가 않다. 따라서 공공도서관 수로만 볼 때에도 ‘인구 3만명 당 1개관’이라는 선진국 수준에 도달한 지방자치단체도 꽤 많다.(울산에서는 북구가 인구 15만명에 5개 공공도서관을 가지고 있어서 유일하게 선진국 수준의 도서관 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공공도서관을 설립하는 지자체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서 얼마 가지 않아 우리나라 공공도서관 수는 선진국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더 이상 도서관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서는 것도, 몇 십 분씩 버스를 타고 가는 일도 없어졌다. 특히 집 가까이 도서관이 많이 자리잡고 있어서 산책가듯이 도서관을 이용하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라면 대부분 공공도서관을 이용해 본 경험이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은 외적으로 많은 성장을 했다.

이것뿐만 아니라 도서관 내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도서관 이용자라면 누가나 원하는 책을 서가(책꽂이)에서 직접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간단한 신분확인만 되면 별도의 이용료 없이 자유롭게 책을 빌려 집에 가서 볼 수도 있다. 책뿐만 아니라 영화나 음악, 컴퓨터 자료도 보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이처럼 공공도서관이 우리 생활 가까이 다가온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예전의 우리 공공도서관 모습은 어떠했는가?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의 발전은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매우 늦었다. 1960년대 초 전국의 공공도서관 수는 겨우 18개에 불과하였다. 이후 경제성장에 따라 80년대 초까지 공공도서관은 수적으로 10배가량 늘어 160여곳이 되었지만 도서관이라고 하면 학생들이나 입시생들을 위한 공부방으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또한 도서관에 들어갈 때부터 입관료를 받았고, 도서관 안에서도 자료를 이용하기는 쉽지 않았다. 자료를 이용하려면 한의원 약장처럼 생긴 목록함에서 목록카드를 뒤져서 청구기호를 적은 뒤 신분증과 함께 버스 매표소 창구처럼 생긴 조그만 구멍을 통해 제출해야 했다. 그러면 사서가 서가에서 책을 찾아서 내어 주면 그때서야 책을 겨우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빌린 책도 집에 가지고 가서 볼 수는 없었다. 오로지 도서관 안에서만 보고 도서관을 나갈 때는 책을 반납해야 했다. 그래도 꼭 책을 집에 빌려가고 싶으면 일정금액의 보증금을 내고 대출회원에 가입을 해야만 했다. 그러니 신분증이 없는 초등학생 이하의 어린이는 책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고, 어린이실이나 모자열람실 같은 아주 제한된 공간에서만 이용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불과 30년 전인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의 모습이었다.

그러면 공공도서관의 모습이 80년대 이후 어느 순간 갑자기 바뀐 것인가. 이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면 갑자기 도서관 이용자들의 의식이 깨어 공공도서관 바로세우기 운동이라도 한 것일까. 이것도 아니다.

바로 ‘엄대섭’이란 한 사람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 피부에 크게 와 닿는 변화를 가져다 준 이임에도 불구하고 엄대섭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 전국적으로 공사립 작은도서관 수 천 개가 마을, 아파트 곳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 작은도서관은 최근에 갑자기 사회적 분위기와 흐름에 따라 생겨난 것일까. 그리고 이 작은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도서관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 이라면 이런 의문을 가져봤을 것이다. 작은도서관은 60년대 엄대섭이 주장하고 보급한 마을문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아주 가끔씩 엄대섭을 알고 있다는 이도 60~70년대 농촌지역 마을문고운동을 한 인물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의 우리나라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은 엄대섭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자리 잡을 수 없었다. 따라서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의 기틀을 세운 엄대섭을 알아보는 것은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의 뿌리를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뿌리를 제대로 알고 있을 때 우리나라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이 나갈 방향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을문고·이동도서관·개가제 등 시행  
엄대섭, 도서관에 바친 혼’ (중)

엄대섭은 1921년 울산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살기가 매우 어려워 8살 때 온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더구나 12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가 사고로 불구가 되어 어린동생들 양육까지 책임지는 소년가장이 되었다. 이런 어려운 생활 속에 책과 도서관은 그에게 많은 힘이 되었다. 책을 읽던 중 ‘남의 흉내만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같은 일이라도 남이 안 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야 한다’는 구절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헌옷 수집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

1950년 부산시청 앞 고서점에서 ‘도서관의 운영과 실제’라는 책을 만나면서 도서관 사업을 깊이 고민하고, 1951년 여름 고향 울산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3천 여 권의 책을 가지고 사립무료도서관을 열게 되었다.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버려진 탄통에 책을 담아서 지역 농촌마을로 순회문고도 운영하였다. 1953년 다시 경주로 가서 장서와 시설을 기증하고 경주 시립도서관을 세웠다. 그는 무보수 관장으로 일을 했다. 1955년 도서관협회 초대 간사(사무국장)를 맡으면서 문교부에서 하던 농촌문고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61년 마을문고를 창안하고 전국적인 마을문고보급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문고보급은 쉽지 않았다. 1962년 여름 우연한 계기로 언론사와 함께 문고보급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기 시작했다. 마을문고는 1974년 말경에는 3만5,011개 마을에 문고를 설치해서 전국 농어촌 자연부락 95%에 문고가 설치되는 성과를 낳았다.

이런 그의 활동은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아 1980년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부분’상을 받았다. 하지만 마을문고의 재정은 계속 어려웠고, 1981년 말 마을문고가 새마을운동 중앙회에 흡수되면서 엄대섭은 마을문고운동에서 손을 놓게 되었다.

마을문고운동에서 손을 놓은 뒤에도 틈틈이 전국의 공공도서관 현장을 찾아다녔다. 공공도서관은 그가 마을문고운동을 시작할 때 18개에서 20년 사이 160여개로 수적으로 늘었지만, 도서관은 여전히 정보자료 이용 공간이 아닌 공부방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도서관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새로운 도서관개혁운동인 ‘대한도서관연구회’를 시작했다.

대한도서관연구회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이동도서관운동은, 당시 공공도서관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인 공부방 중심의 운영, 입관료 징수문제, 폐가제, 관외대출이 안 되는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이동도서관을 보급하기 위해서 언론과 관에 이동도서관의 필요성을 홍보했다. 여기에 MBC방송국이 호응을 하여 1984년 무렵에 MBC방송국에서 전국에 20여개 이동도서관을 운영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이에 자극받아 각 지역 공공도서관과 새마을문고에서도 이동도서관을 운영하게 되었다. 이동도서관은 주민들에게 도서관의 필요성과 도서관을 공부방이 아닌 자료이용을 하는 곳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이동도서관운동을 바탕으로 공공도서관의 구조를 새롭게 바꾸는 운동인 ‘개가제 및 관외 대출’운동을 했다. 개가제 및 관외 대출운동은 공공도서관을 공부방중심, 관리중심에서 정보자료중심, 이용자 중심으로 바꾸는 운동이었다. 여기에 점차 공공도서관도 호응을 하여, 울산시립도서관(현 울산중부도서관), 김해도서관은 개관과 동시에 개가제를 실시하였다.

이와 함께 입관료 폐지운동과 도서관법 개정운동도 했는데, 공공도서관에서 입관료를 받는 것은 공공도서관의 중요한 원칙인 ‘공공비용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입관료 폐지운동을 벌여 1992년 입관료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1963년 처음 제정된 도서관법은 구체적인 내용을 담지 않은 상징적인 법이었고 이후 오랫동안 개정되지 않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엄대섭의 끈질긴 노력 끝에 1987년 24년 만에 도서관법이 개정되었다. 이 도서관법이 개정되면서부터 도서관의 역할과 기능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강제 사항 등이 설치되었다.

엄대섭은 또한 공공도서관 평가작업을 통해 공공도서관의 기준을 제시하고, 모범도서관이나 활동가를 찾아내어 ‘간송 도서관문화상’을 제정하여 시상했다.

이후 1987년 말 엄대섭의 건강상 문제로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면서 엄대섭의 도서관 운동은 막을 내렸다. 정부는 2004년 엄대섭의 도서관 운동을 높이 평가해 문화 예술 발전 유공자로 선정하고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2009년 2월 5일 89세의 나이로 미국 LA에서 숨을 거두었다.


주민들의 도서관 ‘마을문고’ 전국 보급(하)엄대섭이 꿈꾼 도서관 세상-‘엄대섭, 도서관에 바친 혼’ (하)

80년대 초 앨빈 토플러는 그의 책 <제3의 물결>에서 ‘미래사회는 정보화 사회’라는 말을 했다. 요즘 우리사회는 이 말을 실감하고 있다. 말 그대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얼마나 원하는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얻을 수 있는가가 중요한 삶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근대 이전의 사회는 정보를 소수가 독점하는 사회였다. 시민의식이 성장하고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정보를 공유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생겨난 것이 공공도서관이다. 따라서 공공도서관의 중요한 기준은 ‘이용자 중심’ ‘공공비용의 원칙’ ‘지적자유 구현’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최근까지 공·사립도서관 설립 움직임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엄대섭의 활동이 울산에서 시작한 사립무료도서관과 경주도서관에만 머물렀다면 많은 사립도서관 설립자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 성장기를 보내면서 책과 도서관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수성가한 경험을 나누고자 평생을 공공도서관 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고민과 실천의 결과 1955년 한국도서관협회 창립과 함께 사무국장을 맡아 우리나라 전체 도서관을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도서관을 설립하고 운영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와 기초를 세웠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어려운 시기에 공공도서관의 기준을 우리나라 현실에 맞추어 전 국민이 골고루 도서관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한국적 도서관운동인 마을문고를 창안하고 전국에 보급했다. 이 마을문고 운동은 외국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미개발사회의 공공도서관운동의 효과적이고 획기적인 창안’이라고 높이 평가받았으며 그 결과 막사이사이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60대라면 은퇴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정열을 불태워 그는 대한도서관연구회를 창립하여 공공도서관이 주민들과 함께하는 진정한 도서관으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면 과연 엄대섭이 꿈꾼 도서관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마을문고를 시작하던 50~60년대는 농어촌 중심의 사회였지만 도시와 농촌간의 정보격차는 매우 컸고, 공공도서관 수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적인 공공도서관인 마을문고를 만들어 마을 단위로 확산시켰다. 이 마을문고가 성장하여 공공도서관이 되거나 공공도서관의 분관이 되어 공공도서관 망이 형성되기를 바랐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설치된 마을문고는 책과 잡지를 통해 정보를 얻는 곳이자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토론하는 사랑방이었다.

이렇게 주민들 속에서 주민들과 함께하는 도서관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급격한 산업화에 따라 농어촌 사회에서 마을문고를 운영하고 가꾸어 나가는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마을문고는 공공도서관으로까지 자라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산업화·도시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80년대 때 그는 새로운 도서관 운동을 했다. 바로 대한도서관연구회를 통한 공공도서관의 개혁운동이었다. 수적으로는 공공도서관이 늘어났지만 공공도서관은 제 기능을 못하고 학생들이나 입시생들의 공부방으로만 존재했다. 이렇게 공공도서관이 제 기능을 못한 것은 군사독재에 따른 정보의 통제와 일제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영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공공도서관이 본래의 목적에 맞는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입관료 납부의 부담에서 벗어나 누구나 마음대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공부방 중심에서 정보자료 중심의 공간, 지적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바꾸는 것이 공공도서관의 개혁운동이었다.

그러나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공공도서관은 수적으로 늘어났고,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공공도서관은 선진국과 비교해서 많이 부족하다. 이것을 작은도서관이 메우고 있지만,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이 함께 협력하며 발전해 나가는 곳은 많지 않다. 또한 공공도서관이 주민들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공공도서관 운영에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 있는 공공도서관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에 엄대섭의 활동과 정신을 되새겨 보는 것은 앞으로 더욱 발전해 나갈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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