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염 무 웅 (영남대 명예교수)
  한국정치의 표면으로서의 민주주의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텔레비전의 뉴스시간마다 대개 첫 소식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세 후보들의 일정과 그들의 공약으로 채워진다. 거의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다 보니, 차츰 ‘그 나물에 그 반찬’ 같아 식욕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 정치에 대한 염증을 유발하기로 방송국들끼리 짠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답답할 때마다 왜 우리가 몇 해마다 이런 국가적 행사를 치러야 하나, 이런 대규모적 소란을 통해 우리가 진정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고 결국 얻게 될 것은 무엇인가, 민주주의라는 정치과정이 실제 우리 삶을 개선하는 데 얼마나 구체적인 기여를 할 것인가 —이런 상념에 잠긴다.
  평소에 나는 국어교육•역사교육•환경교육과 더불어 정치교육이 초•중등과정의 필수과목으로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가령, 지난 9월 이 난에 썼던「대한민국 정체성의 뿌리」라는 글에서 우리나라 건국운동의 선배들이 1948년 정부수립 훨씬 이전부터, 그러니까 1919년 삼일운동과 1898년 만민공동회 때부터 민주공화국의 정신을 키우고 지켜왔다는 사실을 소개한 바 있는데, 그 사실에 함축된 정치적 의미를 국민들이 어려서부터 배우면서 자란다면 나라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이 나라 국가권력은 그렇게 하기는커녕 두 차례(1954, 1969)의 삼선개헌 강행이 보여주듯 특정인의 장기집권을 위해 민주주의를 만신창이로 짓밟았다. 그나마 삼선개헌은 헌법합치의 절차적 외양을 갖추기 위해 최소한의 시늉이라도 해본 것이었다. 하지만 1972년 10월 17일 유신쿠데타부터 1987년 10월 29일 직선제개헌안 공포까지 15년 동안에는 국민의 선거권은 사실상 박탈되고 삼권분립은 껍질만 남았으며 언론•집회•결사•신념의 자유 등 기본권은 심각한 제약을 받았다. 이것은 한마디로 민주주의라는 형식의 전면적 파괴였다.
  정치의 이면에 있는 불법세계
  하지만 형식의 파괴는 그 자체로서 심각한 사태라 해도 어떤 점에서는 정치의 표면을 이루는 사건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 내부를 들여다보면 표면의 사실들로 다 설명되지 않는 또 하나의 지배질서, 일종의 이면(裏面)질서라고 부를 만한 것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경찰과 정보기관, 때로는 용역과 폭력배에 의한 미행•납치•협박•구타•체포•고문•암살 그리고 해직과 해고 등 공포영화에나 나옴직한 각종 불법적 수단들이 일상생활 깊숙이까지 침투하여 국민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얼어붙게 했던 것이다. 그것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끝내 역사기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12년 독재정권이 무너지던 날 아침 시인은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했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김수영,「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1960.4.26 지음) 제1연
  그러나 4•19혁명이 가져온 해방의 감격은 잠깐이고 기득권의 반격은 순식간에 대세를 뒤집기 시작했다. 만인의 일상은 다시 환멸과 망각의 시간 속으로 침몰하고 시인의 가슴은 이유 없이 메말라갔다. 이제 시인의 언어는 쓰디쓴 자기비하와 바닥 모를 공허감과 풍자의 신랄함으로 돌아간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김수영,「그 방을 생각하며」(1960.10.30 지음) 제1,2연
  물론 민주화 이후 상황은 크게 개선된 것이 사실이다. 이제 한국 시민들은 국가권력의 공공연한 위협과 언제 닥칠지 모를 폭력의 불안에서는 일단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을 ‘어떤 수준의’ 민주주의라고 불러야 할지는 여전히 쟁점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권력과 자본의 연합체로서의 기득권체제가 과거에 불법적이고 적나라한 폭력을 통해 얻었던 것을 이제는 부드럽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있게 된 것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폭력적 수단의 동원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진짜로 유리한 상황의 도래, 즉 피상적 변화에 불과한 상황을 우리가 민주화라는 수사로 분식해주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각각의 사회적•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민주주의가 그때그때 참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논쟁문화의 가능성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달에 내가 읽어본 책은 로널드 드워킨의 『민주주의는 가능한가』(홍한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와 최장집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폴리테이아 2012)이다. 두말할 것 없이 나는 정치학에 문외한이고, 따라서 이 책들을 학술적으로 검토할 만한 식견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막연하게나마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열망하면서 이 나라 정치현실을 주시해왔다고는 말할 수 있다. 어쨌든 국어학자가 아니어도 언어사용자로서 국어문제에 관여할 수 있듯이, 사람살이의 필수영역인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일정한 견해를 가지고 발언하는 것이 응분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내심에는 지금 진행 중인 대선의 판세를 옳게 읽고 바르게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민주주의는 가능한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책 뒤에 붙은 <해제>에서 정치학자 박상훈씨가 명쾌하게 요약했듯이 “과도한 정치적 양극화의 조건에서는 공적 관심을 이끄는 논쟁이 있을 수 없고, 그런 논쟁이 없다면 민주주의가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p.217)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주제가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과 가능성에 관한 것이므로, 먼저 미국에서 정치적 양극화의 양상이 어떤지 들어보자. 저자 드워킨은 책의 첫 페이지 첫 문단에서 다음과 같은 서술로 독자의 관심을 끌어당긴다.
  미국 정치는 끔찍한 상태다. 거의 모든 것에 대해 극렬하게 의견이 갈린다. 테러와 안보, 사회정의, 정치와 종교, 어떤 사람한테 판사 자격이 있는가,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그 냥 의견충돌 정도가 아니라 양쪽이 상대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치의 협력자 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미국 정치는 전쟁의 양상에 가깝다.(p.11) 
           (원문을 안 보고 얘기하는 것이 예의는 아니지만, 문맥으로 보아 ‘자치’는 governance
            일 것 같은데, 그냥 ‘통치’나 ‘정치’라고 하는 것이 순탄한 번역일 것이다. —인용자)
  그런데 드워킨은 민주당이 대표하는 ‘파란 문화’와 공화당이 상징하는 ‘붉은 문화’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데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에 두 문화 사이의 틈이 바닥 모를 정도로 깊다면, 공통기반도 찾을 수 없고 진정한 토론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정치다운 정치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텐데, 그것은 너무도 비극적인 일이다. 그래서 드워킨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민주주의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너른 합의만 있다면 심각한 정치적 논쟁 없이도 건강할 수 있다. 또 합의가 없더라도 논쟁문화가 있다면 건강할 수 있다. 그러나 깊고 쓰 라린 분열만 있고 진정한 논쟁이 없다면, 다수의 횡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p.18)
  이런 입장에서 드워킨은 정치적 의견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적 논쟁이 얼마나 유익하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답할 수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하며, 심지어 선거의 민주성은 투표 자체보다도 선거과정의 정치적 논쟁이 어떤 성격의 것이냐에 달린 문제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만인이 동의하고 공유함으로써 진정한 논쟁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기본원리를 세우는 것은 미국 정치의 ‘쓰라린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의 건강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그가 제시하는 논쟁의 두 원칙을 요약하면, 첫째는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에 입각하여 그가 어떤 사람이고 그에게 정치적 판단능력이 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를 동료시민으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 둘째는 각각의 개인은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대해 자율적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길게 설명할 여유가 없지만, 이것은 칸트가「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힌 유럽 휴머니즘의 정신과 사유를 드워킨이 진지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국가의 정치도 철학 세미나처럼 운영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체제는 누가 이 체제를 이끌 것인가에 대한 최종평결을 경제, 철학, 외교정책, 환경과학 등에 대한 지식이 없고 이런 분야에 대해 자질을 갖출 시간도 능력도 모자란 수천만의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p.170)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란 것이다. 그러나 드워킨은 단순히 다수결주의만을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보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다수결주의 개념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적 의견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분포되어 있느냐의 문제일 뿐, 이 의견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p.177)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가 갖는 진정한 가치는 의견의 분포를 해석하는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형성해가는 차원에 있다. 그리고 모든 정치적 투쟁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가치들 간의 싸움이 아니라 보편적 도덕원리의 공통기반 위에서 누구의 주장이 더 합리적인가를 두고 이론적으로 경합하는 싸움, 즉 건강한 논쟁이 되어야 한다.
  <해제>에서 박상훈씨가 드워킨의 미국정치 분석에서 끊임없이 한국정치의 문제점에 대한 교훈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실제로 정치적 양극화를 서술하는 드워킨의 문장은 몇 개의 필요한 수정만 가하면 그대로 한국정치에 대한 서술로 읽을 수 있다. 필요한 수정 중에서 결정적인 것은 미국과 한국 간의 국제적 위상의 차이에 관련된 것일 테고, 빠질 수 없는 것은 테러의 위협 대신 북핵 위협을 넣는 것일 게다. 물론 근본적인 것은 미국정치의 질적 개선을 위해 드워킨이 주장한 해결책 즉 수준 높은 논쟁문화가 우리의 경우 얼마나 착근 가능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가끔 우리의 토론문화를 접할 때마다 나는 공익에 부합하는 건설적인 논쟁과 사익의 추구를 내장한 표면상의 논쟁을 구별하는 것이 실로 쉽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와 롬니가 벌인 세 차례 토론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도 나는 토론내용의 빈곤에도 불구하고 토론방식의 가차없음에 상당히 놀랐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후보들 간에 그만큼 노골적이고 치열한 논쟁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미국의 정치문화를 뒤쫓기 바쁜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의 앞길은 요원하다는 걸 새삼 절감한다.
  ‘얼굴 없는 노동’ ‘노동 없는 민주주의’
  몇 해전 최장집 교수의 유명한『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2 초판, 2005 개정판)를 뒤늦게 읽고 전반적으로 깊이 공감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음을 느꼈는데, 이번에 나온『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이하『상처들』로 약칭)에서도 마찬가지로 큰 감동과 작은 불만을 아울러 느꼈다. 그런데 전자는 대중독자를 염두에 두면서도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를 역사적•이론적으로 논술한 저서임에 비해 후자는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 정확히 말하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 삶의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 그 자리에서 우러난 저자의 실감을 담고 있어, 전자가 한 권의 완결된 이론서라면 후자는 전자의 문학적 별책부록 같기도 하다. 그만큼 후자의 감동은 내 경우에는 주로 문학적인 것이었다.
  이 책의 3분의 2쯤 되는 앞부분은 저자의 현장답사 내지 현지조사 기록이다. 현장답사라곤 하지만, 르포나 다큐처럼 사실의 구체적인 묘사가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내자의 사전준비가 충실해서인지 아니면 저자의 평소 문제의식이 현장의 실상과 맞아떨어져서인지, 독자인 나에게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핵심에 다가서는 저자의 감성적 충정과 이론적 날카로움이 화살처럼 전해져왔다. 170쪽 미만의 작은 분량임에도 이 저서가 오늘 우리 사회의 그늘진 구석을 대형화면으로 펼쳐 보이는 듯한 중량감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책을 쓰는 동안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상념에 빠지는 일도 많았다. 인간존재의 비극적 운명에 무너지지 않고 싸울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를 많이 생각해본 시간이었다.”(p.10)는 <서문>의 언급도 큰 울림을 주었다.
  『상처들』에서 저자는 여러 형태의 사회경제적 소외지대를 찾아간다. ①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의 인력시장이 열리는 성남시 수진리 고개 인근에서 그는 “전국적으로 약 57만 명에 이르는 이들의 삶의 조건과 생활현실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감춰진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본다고 말한다.(p.18) 그리고 “노동 없는 민주주의 혹은 실재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다루지 못했던 한국 정당체제의 무기력함이 가져온 결과”(p.21)가 바로 오늘의 ‘안철수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② 현대차노조 비정규직 지회 사무실을 방문하고 나서 적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야말로 사회학적 문학작품으로서의『상처들』의 백미라 할 만하다.
  한 노동자는 자신이 10년 가까이 현대차에서 일했는데, 그 사이 자신을 고용한 인력회사가 일곱 번이나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때마다 새로운 고용 계약서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날 문득 ‘내가 지금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건가’ 하고 자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말에서 나는 존재감을 상실한 채 헤매는, 카프카 소설 속 소외된 한 인간의 모습을 떠올렸다.(p.28)
  그러나 조금 욕심을 내서 말한다면 저자가 성남이나 울산으로 떠나기 전에 먼저 박태순의『정든 땅 언덕 위』(민음사 1973), 황석영의『객지』(창작과비평사 1974), 윤흥길의『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문학과지성사 1977),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문학과지성사 1978) 같은 소설집을 다시 꺼내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소설들은 1970년대 한국 민중문학의 ‘위대한 성취’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거기에는 정치학자 최장집의 2010년대적 시선에 포착된 현실의 원형이 이미 40년 가까이 전에 풍성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③ 허름한 건물에 2천여 개의 작은 봉제공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장위동, 서울에서만 대략 25만 내지 50만 노동자들이 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산업현장에서 저자는 “적지 않은 고용을 흡수하고 도시 서민가구의 소득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에도, 이 부문의 기업주-노동자들은 정부의 공식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세금도 없고 보험도 없이 공적 제도 밖에 존재하는 얼굴 없는 사회경제적 집단”(p.38)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는 강한 어조로 말한다.
  민주주의라면 적어도 이상적 기준에서는 정치참여의 평등이라는 원리에 힘입어 모든 사회적 이익과 요구들이 표출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대표되고 조직됨으로써 그들의 이익이 정치과정을 통해 부분적으로라도 실현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봉제공장의 고용주-노동자들은 자율적 결사체의 효능을 경험해본 적이 없고, 그것을 상상할 수도 없으며, 그것을 시도할 필요를 느낄 수도 없다.(p.40)
  ④ 재벌 대기업 2세•3세들의 빵집•커피숍•분식점이 골목상권을 분쇄하고 대형마트가 재래시장을 초토화시키는 현실은 언론에 자주 보도되기도 했지만,『상처들』도 주목하는 우리 시대 사회경제적 상처의 하나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일본의 경우 이미 1930년대부터 소매상 보호법이 시행되었다는 걸 알고 놀랐고, 대기업•중산층•노동자의 공생을 제도화하는 원리가 자민당 같은 보수정당의 주도로 실현되었다는 걸 알고는 더욱 놀랐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저자의 탄식에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말해 중소기업과 소매업체들의 경제적 활력을 복원하는 일은 단순히 온정적 조치가 아니라 한국 경제와 한국 민주주의의 중심문제라는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여야 정당들 모두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중소기업과 소(小)자영업자, 노동자와 같은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대표의 문제는 말하지 않는다.(p.59)
    민주주의의 내용적 전진을 위하여
  위의 몇 가지 사례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최장집 교수의『상처들』이 목표하는 것은 단순히 사회경제적 소외지역의 삶을 현상적으로 묘사하거나 그 참상을 고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정치학자답게 모든 현장에서 사회적 소외의 정치학적 진단을 시도하며 그 궁극적 해결책도 정치에서 찾는다. 가령, 그는 현장방문을 마친 다음의 결론적인 문장에서 단순하다면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다뤄야 할 실제문제(real issue)는, 절대다수 노동인구의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이 매우 크게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정책대안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p.115)
  이 언명의 정당성과 중요성을 공공연히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여당 대통령후보조차 한때 ‘경제민주화’를 소리 높여 외쳤던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지점에서부터인지 최장집 교수의 견해에 일정 부분 동조하기 어려워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간단히 한두 가지 이견만 제시하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에서 그렇다. 최장집 교수는『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판)에서 이미 ‘민주개혁정부’를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의 후퇴’라는 측면에서 비판한 바 있다. 이번『상처들』에서도 그의 비판적 어조는 도처에서 반복되는데, 예컨대 “권위주의적 관치경제 시기로부터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시대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제영역에서만큼 정책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p.120)는 지적이 그렇다. 이 점에 관해 김기원 교수가 이미 재비판을 한 바 있는데,(「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시장만능주의인가」, 최태욱 엮음,『신자유주의 대안론』창비 2009 수록) 내 생각에도 최장집 교수의 경우 ‘민주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이 경제 바깥의 영역에 대한 전반적 비판으로까지 과도하게 확대된 느낌이 있고, 경제영역 자체에서만 하더라도 남한의 ‘혁명정부’ 아닌 ‘민주정부’가 객관적 조건에 있어 정책선택의 자유공간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었는지도 고려해볼 사항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가 IMF위기를 ‘한국적 복지국가의 모델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p.129)로, 즉 민주주의의 내용적 전진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여전히 뼈아픈 것이다.
  최장집 교수가 민주정부의 신자유주의적 후퇴와 연관하여 강하게 비판한 다른 한 가지는 한국 정치와 정당들이 생활하는 민중의 구체적 현실로부터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정치 자체가 왜곡되고 공허해지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 문제는 그가 주로 지식엘리트의 관념성에서 그 귀책사유를 찾는다는 점이다. 그가 보기에 한국에서 학생운동의 역사적 역할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야 했다. 왜냐하면 “실제현실의 삶과 유리된 조건 아래 의식화되면서 갖게 된 (운동권 학생들의) 과잉 이념화된 사고방식과 도덕적 우월의식은 그것이 지속되는 시간에 비례해 부정적 효과를 더 크게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p.22) 한국 진보정당들의 몰락의 원인도 그는 정당을 끌고나가는 상층부의 진보이념과 정당이 발딛고 있어야 할 실제현실의 유리에서 찾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정책이슈와 대안들이 이념적 거대담론으로부터 직접 도출되지 않아야 한다”(p.109)고 말한다. 이것은 내게도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실제현실의 구체적 생활인도 이념화된 지식인도 그 자체로서는 아직 자기 집단의 정치적 대표자가 아니다. 물론 나는 농민과 노동자도 청년실업자와 신용불량자도 정책형성에 참여하고 정당활동에 접맥될 수 있도록 정당의 체계가 달라져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참여’와 ‘접맥’의 과정은 불가피하게 이념화의 요소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물론 그 어느 단계에서나 과잉이념은 극복되어야 하지만, 과거나 현재나 학생운동•청년운동의 열정과 헌신이 없다면 정치적 대표가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토양도 더불어 소실되는 것이며, 따라서 현실에 밀착된 이념의 획득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학(先學)들이 말했듯이 이론차원과 실천차원의 끊임없는 교류와 상호교섭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는 더 충실한 내용의 것으로 발전해가지 않겠는가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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