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의 수화한화-계속되는 박정희 시대
웃기는 소리지만, 예순을 넘긴 이 나이에도 군복차림에다가 군모를 쓰고 있는 꿈을 꾸다가 놀라서 깨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젊었을 적에 특별히 험한 군대생활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악몽’이 아직 따라다니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출생 이후 내 최초의 기억은 대개 6·25 전란과 관계되어 있다. 남해의 어떤 섬 해변에서 굴비처럼 철사에 묶여진 사람들의 시체가 떠밀려 와 있는 기괴한 모습을 본 기억, 그리고 피란에서 돌아온 뒤에도 밤만 되면 어딘가에서 터지는 포탄의 굉음에 짓눌려 지낸 기억 따위가 그렇다. 그러나 당시 네다섯 살짜리가 겪은 이 단편적인 장면의 의미를 짐작이나마 할 수 있게 된 것은 나중에 커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책을 보면서였다. 보도연맹이니 빨치산이니 하는 것을 어린아이가 알 도리는 없었다.
아이 때는 아무리 끔찍한 장면일지라도 그 의미를 모르는 이상, 그게 내면화되기는 어려운지 모른다. 실제로 내게 훨씬 큰 상처가 된 것은 좀 더 커서 고등학교 입학 후의 경험이었다. 그해 초여름은 유난히 가뭄이 심했다. 그래서 어느 날 1학년인 우리들이 농촌 돕기에 나섰다. 우리는 각자 양동이 따위를 들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도중에 난데없이 출현한 지프에서 뚱뚱한 육군장교가 내렸다. 그는 우리들의 선생님을 불러 세웠다. 그러고는 지휘봉으로 마구 구타를 하는 게 아닌가. 나중에 듣기로는, 학생들의 어지러운 대열이 못마땅했다는 것이다.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지역 계엄사령부 지휘관이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을 중단시킨 군인들의 명분은 ‘국가재건’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을 구타하는 방법으로 나라를 새로이 세우고자 했다.
군사독재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강압적 철권통치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몰상식한 짓을 보고 살아야 하는 고통이 더 컸다. 예를 들면, 해마다 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는 대통령을 영접한답시고 길가에 늘어선 개나리들을 억지로 활짝 꽃피우기 위해서 몇 달 전부터 병사들을 동원하여 ‘개나리 조기개화(早期開花) 프로젝트’를 행하는 것을 나는 군대시절 내내 보아야 했다.
이 비슷한 일은 비일비재했다. 허위보고, 겉치레, 표리부동한 위선적 언행은 사회 전체에 구조화되어 있었다. 살아남으려면 누구든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몰상식과 독재가 결합된 대표적인 만행이 ‘장발 단속’이었다. 멀쩡한 젊은이들의 머리칼이 국가기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길거리에서 함부로 잘리는 터무니없는 짓이 오래 계속되었다. 아무 법적 근거도 없이 단지 최고권력자 개인의 취향에 거슬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970년대 중반 내가 재직하고 있던 어느 지방대학에서 학생들의 부탁으로 저명한 작가 한 분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이 나라 최고급 작가로 내가 존경하고 있던 작가였다. 그분 특유의 해박하고 진지한 강연이 끝난 뒤 우리는 저녁식사를 위해 시내로 나왔다. 그런데 같이 걷고 있던 분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살펴보니 길 건너편에서 경찰의 ‘닭장차’에 막 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분은 몇 해 동안 미국에 머물다가 막 귀국했기 때문인지 장발인데다가 뒷모습만 보면 청년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필 그 시각 시내 중심가를 급습한 장발단속반에 걸려든 것이다.
잠시 멍해 있다가 나는 다급히 경찰관들에게 쫓아가 간곡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리하여 그분을 ‘닭장’으로부터 가까스로 구출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인근 식당으로 들어가기는 했으나 우리는 밥을 먹지 못했다. 작가는 침묵 속에서 말할 수 없는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박정희 시대는 실로 누추하고 야만적인 시대였다. 작가는 불온한 글로 탄압을 받거나 감옥에 갈 수도 있다. 그것은 작가로서 명예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나라 최고급의 작가가 장발 단속에 걸려 ‘닭장차’에 실린다는 이 기막히게 누추한 코미디는 대체 무엇인가. 작가·예술가에게 이보다 더 야만적인 형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날 일은 어쩌면 ‘사소한’ 사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은 박정희 시대의 본질을 집약하는 극히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박정희 시대란 영웅의 시대도, 비극의 시대도 아니었다. 비극이란 원래 위대한 정신의 위대한 몰락에 관한 드라마이다. 박정희 시대는 단지 천박하고 저열한 정신이 지배하는 시대였을 뿐이다.
박정희는 농촌을 살린다면서 ‘잘 살아보세’라는 유치한 노래를 밤낮으로 틀어놓고 농민들을 바보나 어린애처럼 취급하고, 토착문화를 가차없이 파괴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삶의 근본 토대를 급속히 해체시켰다.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은 이 땅에 면면히 전승돼온 선인들의 지혜와 삶의 기술, 사회적 관계망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하며 그것을 ‘경제발전’이라고 불렀다. ‘경제발전’이라고 하면 모든 게 허용되는 사회, 역사도 문화도 전통도 헌신짝처럼 내던질 준비가 되어있는 사회, 그리하여 깊이도 영혼도 없는 사회가 이 시대를 통해서 굳건히 정립된 것이다.
1979년 10월 새벽, 대통령의 ‘유고’ 소식을 들었다. 문득 옛날 우리 선생님이 군인한테 폭행당하는 것을 본 이후, 나는 한순간도 자유인으로 산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시절은 물론, 대학 선생이 되고 난 뒤에도 끊임없이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에 짓눌려 살았고, 글을 쓸 때도, 글이 발표되고 나서도 늘 불안했다. 그런 비겁한 나 자신이 혐오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는 해방이다”--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우리들은 종일 들떠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과 얘기를 해보면, 그들이 박정희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언젠가부터 이 나라에서 사실상 역사교육은 사라졌다. 설령 역사를 배운다 할지라도 박정희 시대의 한국 사회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였다는 사실을 그들이 체감할 리가 없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작가가 어떤 치욕에 노출되던 시대였는지, 그것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다. (위에서 언급한 작가는 지금 생존 중이다. 혹시 이 글을 보더라도 용서해주시기를!)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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