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우리시대 왜 인문학인가
우리시대 왜 인문학인가
저는 인문학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 저에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어오면 저는 당당하게 인문운동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말하는 인문운동이란 의식과 생활의 영역에서 인간화를 실천하려는 노력을 말합니다. 또 제가 말하는 인간화란 ‘물신(物神)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운동’이며,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인간 의식의 진화를 이루려는 운동’을 의미합니다.
저는 우리 시대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사회적 실천과 인문운동의 결합과 삼투를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미력하나마 큰 산을 이루는데, 흙 한삽 보태는 심정으로 제 능력만큼 일하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미숙하더라도 저와 함께 이런 이야기들을 나눠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1. 유연한 일관성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 충(忠)과 신(信)을 중심으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며, 허물이 있거든 거리낌 없이 고칠 일이다.” (제1편 학이 8장)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學而 第一)
무겁다는 것은 중심이 잡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뿌리를 튼튼히 내려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에 뿌리를 내릴 것인가? 공자는 그 뿌리를 충(忠)과 신(信)에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충과 신은 둘 다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군자의 위엄은 흔히 말하는 무게를 잡는다거나 권위주의적 태도와는 본질이 다른 것이다. 사람의 관념은 완고해지기 쉬운 경향이 있다. 인간이란 자신이 우연히 접한 지식이나 정보를 놓고도 얼마나 빨리 ‘이것이 옳다’, ‘이것이 분명하다’ 하고 자신도 모르게 확신하는 때가 많은가. 따라서 진실에 바탕을 둔 진정한 위엄은 완고해지기 쉬운 경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세워질 수 있다.
흔히 ‘학즉불고(學則不固)’를 ‘배워도 견고하지 못하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무거움(重)’이나 ‘위엄(威)’과 이어지는 뜻에서 고(固)를 ‘견고함’으로 해석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논어》 전편에 흐르는 공자의 태도로 볼 때 이는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무거움重과 완고하지 않음不固의 절묘한 조화야말로 공자가 한결같이 추구한 사상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 조화를 읽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논어》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아집을 경계했고, 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혹시 허물이 있더라도 아집이 없는 사람은 허물을 고칠 수 있지만, 완고한 사람은 허물을 고치기가 매우 어렵다. 완고한 사람의 경우 배우면 배울수록 오히려 그 완고함이 더해질 뿐이다.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며,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
이 구절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리더십과 관련해 많은 영감을 던져 준다.
과연 오늘날 필요로 하는 진정한 리더십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는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시켰고, 이제는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이 리더십이다. 이러한 리더십은 부드럽고 유연한 권위에서 나온다.
근대 이전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유연한 권위는 뛰어난 왕이나 지도자만이 실현할 수 있는 위정자 한 사람의 덕목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 이르러서는 제도와 부합하는 보편적 덕목이 되었다.
민주주의와 생산력의 확대를 통해 현대 사회는 공자와 같은 성현만이 펼쳐 보인 이상을 일반 시민에까지 보편화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동안 민주화와 탈권위주의의 세례를 받은 우리 국민에게 더 이상 고집스러운 일관성, 불도저식 추진력은 어울리지 않는다.
시대정신에 충직한 일관성과 자기중심성을 넘어 소통하는 유연성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리더십의 요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못할 때는 정치, 기업, 진보 운동 어느 하나도 성공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재 권력이나 부를 누리고 있는 기득권층의 의식 변화는 일반 시민들의 의식 변화보다 뒤떨어질 수가 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할 테니 변화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숙한 시민의식이야말로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마침내 밝혀 보리라.” (제9편 자한 7장)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子罕 第九)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제4편 이인 10장)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 원효의 화쟁사상
비연비불연(非然非不然), 이변비중(離邊非中), 비동비이이설(非同非異而設)
2. 통찰력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임금께서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명名을 바로 세울 것이다.”
자로가 말씀드렸다.
“현실과는 먼 말씀이 아니신지요. 어찌 명名을 먼저 세운다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로야, 너는 참 비속하구나.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입을 다무는 법이다. 명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불순해지고, 말이 불순해지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하게 집행되지 못하고, 형벌이 잘 집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따라서 군자가 명을 바로 세우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행해지게 될 것이니, 군자는 말을 세움에 있어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제13편 자로 3장)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 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 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子路 第十三)
자로가 공자에게 “정치를 맡게 된다면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명을 바로 세우겠다[正名]”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자로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생각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한다. 현실에서 풀어야 할 난제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가로이 명名이나 세우고 있느냐고 힐문하는 것이다. 이때 공자는 단호한 어조로 자로를 비속하다[野]고 나무란다.
중국 현대사에 큰 역할을 한 마오쩌뚱도 이 점에서는 공자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고난의 시절에 마오쩌뚱이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많은 사람들이 자로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때 마오쩌뚱은 그에 대해 ‘바로 이런 때야말로 철학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한다.
정명의 중요성을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건국 이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데 또 한 사람의 걸출한 인물인 덩샤오핑에 의해 새로운 정명에 성공함으로써 개혁과 개방 그리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이제 G2로 부상한 중국은 그동안 새롭게 발생한 내부모순을 포함하여 세계 인류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21세기 인류적 정명에 직면하고 있다.
앞서 나눈 공자와 자로의 대화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어쩌면 오히려 현대사회에 훨씬 더 울림이 큰 대화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 그만큼 풀어야 할 난제가 많은 탓이라 하겠다.
흔히 정명正名을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명분名分이라는 말은 과거 왕조시대나 전체주의나 독재 치하에서 집권자들이 그럴듯한 형식 논리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거나 권력을 획득하거나 유지하려 할 때 흔히 사용하는 말이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에 와서는 좋은 의미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참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명’을 현대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시대정신의 구현을 위한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풀어야 할 난제가 많을수록 또 그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이 서로 모순되어 보일수록 먼저 명분[名]을 바로 세워 방향을 잡아야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과 같이 복잡다단하고 수많은 관계 속에서 갈등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근원적인 해법이 아닐까 싶다.
과거의 진보니 보수니 좌니 우니 하는 고정된 시각으로는 지금의 시대적 요구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지금까지의 관점에서 보면 모순 되게 보이는 요소들이 이제 상호보완하고 인간 진화를 위한 길에서 함께 나가야 할 동반자라는 관점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종합철학이다. 민주화와 물질적 생산력의 향상 등은 과거에 비해 종합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만들어 왔다. 다만 사람들의 의식이 이에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의 좌우, 보수와 진보, 자본계와 노동계 등의 고정관념과 그에 기반을 둔 낡은 정치가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역사발전 단계로 볼 때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있는 과도기라 하겠다.
이 시기를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게는 극심한 혼돈 과정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새로운 시대정신이 출현하기 위한 필연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공자는 정명이 안 되면 언言이 불순해진다고 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정합성이 약해지고 그러다 보면 실행력을 갖기 어렵다. 실행력이 약하면 문화[禮樂]가 발달하기 힘들고, 도덕이 땅에 떨어져 사람들이 법망을 피하는 데 급급하게 되며, 대중들이 삶의 지표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세계화는 인류역사가 나아가는 방향이다. 이제 정명正名도 세계적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전쟁, 양극화, 지구환경 문제를 포함해서 전체 인류의 복지와 자유를 위해서는 인류적 차원에서 정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신생독립국에서 출발하여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하려는 우리나라야말로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런 인류적 정명正名을 하는 데 가장 적격일 수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상생, 성장과 지구환경, 세계화와 나라의 자주성, 전쟁과 평화, 세계자본주의의 변화에 대한 요구, 세계열강의 새로운 질서 등 지금의 세계가 제기하는 문제의 한복판에 있는 이 땅에서 이런 일을 우리가 빛나게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정명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의 형성이 간절히 요청되는 때라 하겠다.
3. 덕(德)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德으로써 정치를 한다면 마치 북극성이 그 제자리에 있어도 여러 별들이 이를 향하여 도는 것과 같다.”
(제2편 위정 1장)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 共之 (爲政 第二)
위정편에서 위 구절을 읽다 보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금의 세상은 무엇을 향하여 돌고 있는가?
지금의 정치는 무엇을 향하여 돌고 있는가?
당신의 북극성은 무엇인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북극성은 무엇일까? 아마도 행복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다 보면 대립, 갈등, 투쟁이 끊이질 않는다. 이 근본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이상일 것이다. 근대혁명을 거치면서 사회제도나 물질적 조건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지만, 진정한 이상 정치의 실현은 멀게만 보인다.
공자 시대의 덕치德治는 제왕의 길, 치자治者의 도일지 모르지만, 치자와 피치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 덕의 주체는 주권자인 국민이다. 따라서 자각과 자율이 핵심을 이룬다. 아무리 제도를 잘 갖춰 놓아도 그것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이상적인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여러 가지 왜곡된 형태로 변질되기 쉽다.
지금의 실정을 보면 제도에 비해 사람의 의식이 뒤처지는 불균형 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물론 제도도 계속 발전시켜가야 하겠지만, 이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이 이상 정치실현의 중심 과제라 하겠다. 이런 이유로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숙제는 의식의 진보이고, 이때 진보 의식이란 공자가 말한 덕을 가리킨다. 덕으로써 정치를 한다면 주변의 흐름이 덕을 향해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순리다.
공자는 덕(德)이 무엇이라고 정의하듯이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미루어 생각하건데 인(仁)을 체득한 사람의 향기(香氣)라고나 할까...
인(仁)에 대해서도 정의하지 않고 있지만, 대체로 극기복례(克己復禮), 충서(忠恕), 애인(愛人), 박시제중(博施濟衆)을 실천함으로서 자신을 비롯한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안연 편 22장을 보면 번지라는 제자가 공자께 인仁에 대해 묻는다. 그때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에 대해 물을 때마다 공자의 대답은 달랐다. 묻는 사람의 수준과 당시 정황에 따라 다양하게 답변한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인을 극기복례克己復禮라 하고, 어떤 이에게는 충서忠恕라고 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번지의 물음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성현이 공통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고, 세계 인류가 궁극적으로 진화해야 할 목표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시대와 사회, 문화에 따라 대답이 다를 수 있다.
번지가 이어서 “지知는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다[知人]”라고 말한다.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인仁과 지知를 결부하여 답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알아보는 데서부터 실현된다고 말한 것이다. 번지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가 “인은 바른 정치의 요체인 인사人事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곧은 사람을 등용하여 굽은 사람 위에 놓으면 굽은 사람도 능히 곧게 할 수 있는 것이다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라고 말한다. 즉 인이란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것인데, 그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올바르게 배치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위정 편 21장에는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효도하라. 오직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라. 그러면 거기에 늘 정치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이것이 정치를 하는 것이니, 어찌 정치를 따로 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와 같이 공자에게 정치란 모든 인간관계에 통용되는 원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번지라는 제자가 그다지 총명한 사람이 못 되어 공자가 말한 바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자하에게 그 뜻을 되물었다. 그러자 자하는 “뜻이 넓고 큰 말씀이오. 옛날 순임금이 천하를 차지하고 여러 사람 중에서 고요皐陶를 등용하자 어질지 아니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으며, 또 탕 임금이 천하를 차지하고 여러 사람 중에서 이윤伊尹을 골라 등용하시자 어질지 아니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소”라고 부연 설명한다. 자하는 인을 정치의 요체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즉 ‘정치란 사람을 사랑하는 구체적 기술技術이다’라는 공자의 이상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어중거고요(選於衆 擧皐陶, 여러 사람 가운데 고요를 골라 등용)라는 말에서 ‘선거選擧’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자못 흥미롭다. 과거에는 군주가 주체가 되어 ‘선거’했지만 지금은 국민이 주체가 되어 ‘선거’를 치른다. 예전에는 성군聖君이라야 ‘선거’가 제대로 되었다면 지금은 국민의 수준이 좌우한다.
요즘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면서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치적 허무주의나 냉소주의에 흐르는 대신 공자의 이상처럼 ‘정치야말로 사람을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라는 생각으로 선거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것은 체제와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 이익을 중심으로 권력을 쟁탈하는 이전투구의 장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돕는 조화의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중요하다. 밝고 성숙한 시민의식이야말로 선거를 ‘인간화를 위한 정치 변혁의 강력한 도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대를 초월해 공자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이자 우리의 신인문운동이 정치 분야에서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이 자산子産에 대하여 여쭈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애로운 사람이다.”
자서子西에 대하여 여쭈니 공자가 말씀하셨다.
“그저 그런 사람이다.”
관중에 대하여 여쭙자 공자가 말씀하셨다.
“훌륭한 사람이다. 백씨의 병읍 300호를 빼앗았으되, 백씨는 거친 밥을 먹으며 살다 죽었지만 결코 관중을 원망하지 않았다.” (헌문 10장)
或 問子産. 子曰, 惠人也 問子西 曰, 彼哉彼哉
問管仲. 曰,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沒齒 無怨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양극화 해소가 아닐까 싶다. 근래 복지문제가 정치적 화두가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2012년 양대 선거와도 맞물려 있어 이 기회에 우리 사회의 공론이 제대로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진보 진영의 이른바 보편적 복지론은 보수 진영이 우려하는 재정의 위기에 대한 대책이 함께할 때 비로소 현실성 있는 주장이 될 것이다.
복지의 확대는 재정의 확대를 의미하고, 재정의 확대는 세수 확대를 말하는데, 이때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생산 주체의 의욕이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결국 가진 사람들의 실질적 동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진보진영의 일각에서 잘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사회민주주의제도도 이런 중산층 이상의 의식이 얼마나 진화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공자가 말한 관중의 인仁을 생각해 보자. 자신에게 또는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에게는 불리하지만, 전체 구성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개혁이 필요하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어떻게 하면 저항 없이 개혁안을 수용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때 개혁 주체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큰 저항과 거부감 없이 기득권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개혁 주체를 어떻게 하면 형성해 낼 수 있을까?
이 두 가지가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 진보와 인간 진화의 가장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을 하자면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불만을 줄이고 소기의 목적대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우선 개혁 주체가 공평무사하고 합리적으로 개혁을 진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개혁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이 따른다. 과거에는 정권 차원에서 힘으로 저항을 잠재우려 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땅히 버려야 할 구시대의 폐습이 되었다. 이제 개혁의 성패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개혁에 동참하도록 얼마나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체의 권위는 대단히 중요하다. 싫든 좋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리더십을 보여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원활하게 개혁을 수행해 갈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는 남북통일이다. 통일은 남과 북에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크기 때문에 최대의 개혁 과제일 수 있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는 데는 관중이 보여 준 큰 덕이 요구된다.
통일은 단순한 물리적 통합이 아니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를 이루는 과정이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불만이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양쪽에서 통일을 이끌 주체가 고르게 배출되어야 한다. 어떤 제도로 통일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통합력의 바탕에는 큰 덕德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생과 화해의 바탕 위에서 통합을 이루는 통일된 나라의 미래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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