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죽음--국민일보 사설 2012년 11월 22일자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성찰적 사회로 이행하는 징표다. 문학과 역사, 철학이 주축이 된 인문학 공부는 개인의 정체성을 세워주고 공동체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문학 강좌는 대학의 담장을 넘어 동네 도서관이나 구청 문화센터를 채우고 노숙인학교까지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문학의 확산을 가능케 하는 책은 죽음에 직면해 있다. 책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잇는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국민의 연간 독서량은 미국 6.6, 일본 6.1, 프랑스 5.9, 중국 2.9권인 데 비해 우리는 0.8권에 머물고 있다. 유엔 191개국 중 166위로 하위 그룹이다. 또한 우리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성인들의 고급 문해력(文解力)은 20개국 중 19위다.
책의 위기는 생산지점에서 출발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책 판매 부수가 전년 대비 8.5%, 지난해에는 7.8% 줄더니 올 8월까지의 매출을 봐도 전년 동기 대비 11% 이상 감소했다. 여기에는 학습서와 교재 시장을 포함하고 있어 독자대중이 읽어 삶의 양식이 되는 교양서 출판은 형편없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책을 만들 인센티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유통의 문제도 심각하다. 그동안 출판유통의 한 축을 담당해 온 온라인 서점이 위기에 봉착한 나머지 연간 매출 300억원 규모의 대교리브로가 연말에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온라인 서점은 1997년 등장한 이후 성장을 거듭해 왔으나 가격경쟁이 한계에 부닥쳐 비장한 최후를 앞두고 있는 꼴이다. 여기에는 출판사에서 뒷돈을 받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리는 등 비윤리적인 경영도 독자들의 외면을 재촉했을 것이다.
혹자는 책의 위기를 시장경쟁의 어쩔 수 없는 결과로 치부하지만 그렇지 않다. 팔리는 책만 살아남는다면 출판사들은 상업물에 매달리고 서점 또한 베스트셀러 위주의 영업만 할 것이니 지식계의 생명이랄 수 있는 책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출판을 단순한 산업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보할 미래 테제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지식산업이 미래의 경쟁력이다. 국민들의 지력(知力)은 땅에 떨어지고 파편적인 정보만 쫓아다녀서야 창의력으로 승부하는 21세기에 뒤처진다. 대선 후보들도 달콤한 복지만 내세울 뿐 지식강국을 위한 청사진이 없다. 문화 없는 복지국가는 역동성을 상실한 죽은 모습일 것이다.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 장군이나 민족의 기개를 보여준 안중근 의사도 지독한 독서력이 뒷받침됐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책이 죽어가는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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