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인문학을 살리는 꿈


인문학을 살리는 꿈


 여성국 (경희대 경영학과 3학년) 한겨레 2012년 11월 26일


난 경영학과 학생이다. 학교에선 회계나 재무, 마케팅 따위를 배우지만 전공보다는 시나 소설을 더 좋아한다.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보다 스테판 에셀의 책을 더 감명 깊게 읽었다. 원하는 사람과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워런 버핏이나 이건희 회장이 아니라 심보선 시인과 장정일 작가를 놓고 고민할 것 같다.

서점에 가 보면, 재미있게 포장된 인문학 책이 즐비하다. 이런 인문학 열풍은 아마도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 예찬론을 펼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들도 요즘은 인문학적 상상력을 가진 인재를 원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인간의 실존에 관한 수많은 물음, 나와 타인, 사회와 세상에 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인문학은 기업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위한,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기업이 경쟁우위의 확보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난 인문학의 도구화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인문학도 수단이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적 갈증과 결핍의 해소를 위한 도구, ‘인간다움’이 실현된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인문학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물음이다. 나는 인문학의 본질이 가려진 ‘그릇된 도구화’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점점 더 많은 대학들이 시장의 요구와 입맛에 맞추기 위해 취업률이 떨어지는 인문학과들을 통폐합하고 회계 원리를 의무 수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 학교는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통해 인문교육 강화를 선택했다. 학교는 참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기대를 안고 들어간 인문학 수업 시간,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했다는 교수님은 스티브 잡스를 이야기하며 인문학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다. 이 사회와 기업은 이제 인문학적 사고를 통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풍부한 인재를 원한다고.

교수님의 말씀은 분명 일리가 있지만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며 왠지 모를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학교가 인문학과를 통폐합하고 경영 관련 과목을 필수로 들어야 하는 것이나, 인문학 수업을 강화하는 것이나 시장의 요구에 맞춘다는 점에선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어쩌면 그것은 시장에 등을 돌릴 수 없는, 인문학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곧 취업전선에 뛰어들 것이다. 자기소개서를 내고 시장이 원하는 스펙을 하나라도 더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어쩌면 운 좋게 대기업의 면접 자리에 갈지도 모르겠다. 확률은 매우 낮겠지만 혹시나 그곳에서 대법원이 불법파견을 인정한 그 회사의 비정규직 노동자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가. 혹사당하다 불치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된 노동자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이윤 추구보다 중요하다고 인문학은 가르치지만, 나는 이런 배움을 배반한 대답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서점가에 넘쳐나는 직장인들을 위한 인문학 책, 대기업 임원들을 위한 각종 인문학 강의가 즐비한 세태에서 시장은 인문학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인문정신이라는 알맹이는 쏙 빼놓은 채 최대의 효율성과 이윤 추구를 위한 인문학적 상상력과 창의력이라는 껍데기만 취하려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은 시장에 넘겨준 채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는 인문학은 과연 인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대선을 코앞에 두고 나는 꿈꾼다. 시장이 아니라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이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기를. 그렇게 서서히 인문학이 알맹이를 되찾아가기를. 다수의 인간이 소수의 탐욕에 희생되는 일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동시에 인간다운 일자리가 더 늘어날 수 있길 나는 꿈꾼다.

여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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