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3일 수요일

출판 명가 민음사의 신선한 변신/ 장일호 시사인 기자

동료 출판인들이 올해 가장 두각을 나타낸 출판사로 민음사를 꼽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김지영 현상’을 만들며 4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82년생 김지영>은 민음사 홈페이지에 ‘투고’된 수많은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8권 중 7권은 10년 전부터 민음사를 통해 출판되고 있었다. 40년 전통의 문예지 계간 <세계의 문학>을 과감히 정리하고, 평론가가 아닌 편집자의 역할을 강화한 격월간 문예지 <릿터>를 새로 론칭(2016년 8월)하는 한편, 민음북클럽과 연계 구독을 기획해 브랜드에 대한 충성심 높은 독자와 스킨십을 늘렸다. 세계문학전집을 중심으로 단편이나 에세이를 고르고 트렌디한 디자인을 더해 200쪽 안팎의 문고본으로 만든 ‘큐레이션 북’ 쏜살문고는 서점가의 문고본 열풍을 견인했다. 모두 28종이 출간된 쏜살문고 중에서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2종은 ‘동네책방 에디션’으로 제작했다. 온라인 서점이나 대형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었음에도 한정판으로 각 2000부씩 찍어 ‘완판’시켰다. 2017년 출판계 경향이라 해도 손색없는 ‘리커버 한정판’ 시장의 가능성을 연 것도 민음사였다. 리커버는 스테디셀러의 표지를 바꿔 특정 서점에서만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민음사는 지난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출간 30주년을 맞아 일본 초판 표지로 리커버한 책 3000부를 매진시켰다.
51년 전통의 대형 출판사가 시도하는 ‘도전’치고는 과감했다. 신선한 발상, 강렬한 인상, 문학 출판의 새로운 차원…. ‘올해의 출판사’로 민음사를 꼽은 출판인들의 상찬이 어색하지 않은 성과를 보여준 한 해였다. 소규모 출판사에 비하면 막대한 자금력과 인력을 보유한 대형 출판사인 만큼, 가진 자원을 십분 활용해 ‘당연히’ 할 일을 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문에 응답한 출판인 중 3분의 1이 민음사를 올해의 출판사로 꼽았다. <라틴어 수업>과 <힐빌리의 노래>로 또렷한 존재감을 드러낸 흐름출판, 지난해 ‘올해의 출판사’에 꼽혔던 동아시아가 그 뒤를 이었다.
“출판계 불황은 ‘기본 옵션’이다”
민음사의 2017년은 부고로 시작했다. 지난 1월22일 50년간 민음사를 이끌며 7000여 권의 책을 만드는 데 앞장섰던 고 박맹호 회장이 영면했다. 박 회장의 투병으로 2016년 50주년 기념행사도 별도로 치르지 않고 넘어갔다. 고인은 간암으로 2005년 간이식 수술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1990년대부터 출판·편집 일을 익혔던 세 자녀가 민음사와 민음사의 임프린트(자회사) 대표 자리에 올랐다. 민음사는 가장 먼저 ‘2세 경영’을 시작한 출판사이기도 하다. 여러 논란도 있지만 출판은 ‘가업’이라는 개념이 강한 만큼 어느 분야보다 2~3세의 활동이 두드러진다.현재 민음사는 고 박맹호 회장의 장남 박근섭씨와 막내 박상준씨의 공동대표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박근섭씨가 경영 전반을 챙기고 박상준씨가 출판 전반을 살피는 식이다. 대외 활동에 주로 나서는 것은 박상준씨인데, 과학서를 전문으로 내는 사이언스북스 대표도 겸한다. 문예지 <릿터> 기자간담회나 사이언스북스 20주년을 맞아 편집자들과 함께 인터뷰에 응한 적은 있지만 박 공동대표 단독으로 하는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등을 보고 걸어온 세월이 깊었다. 박 공동대표의 첫마디 역시 “회장님(아버지)이 계셨어야 하는데…”였다.
박상준 공동대표와 인터뷰 전 여러 경로로 ‘내부자들’에게 수집한 이야기에 따르면 편집자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대표이지만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기보다 공간과 여유를 주는 사람이라는 평이었다. 박 공동대표는 이를 ‘민음사의 전통’이라고 정리했다. “뭐든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면 일선에 있는 편집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혹여 잘 안 되더라도 타자가 3할만 쳐도 정말 대단한 거잖아요. 우리도 3할만 하자, 라고 얘기해요.”
등단은 했지만 무명이었던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을 한국문학팀 박혜진 편집자가 투고 메일함에서 ‘발굴’해왔을 때도 편집자의 감을 믿었다. “박 편집자가 그래요. ‘제 생각에는 몇만 부도 가능할 거 같은데요.’ 그래요? 그럼 만들어봅시다!” 5만 부가 팔렸을 때 조 작가와 식사하면서 10만 부가 팔리면 파티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한국 문학이 ‘만 부’ 단위로 팔린다는 것 자체가 사건이었다. 그 약속을 지킬 여유도 없이 순식간에 10만 부 판매를 달성했고, 현재는 40만 부가 넘게 팔렸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을 민음사가 국내에 처음 소개한 지도 8년이 넘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 7권은 ‘고전’이 과거의 책이라는 편견을 불식하고 현재진행형인 고전을 소개하기 위해 꾸려진 ‘모던 클래식’ 시리즈를 통해 독자와 만났다. 누군가는 노벨문학상을 노린 ‘보험’을 든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른바 순문학 독자가 많이 잡아야 3000명인 시장에서는 보험보다는 모험에 가깝다.
“우리는 어떤 꿈을 꾸냐면요, ‘3000부 팔아야지’ 하고 판권을 사지는 않아요. 물론 현실은 3000부도 못 팔지만(웃음). 어쨌든 가즈오 이시구로는 책을 만들면서 ‘늦어도 10년 뒤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을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10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은 작가죠. 작품이 좋잖아요. 아버지가 늘 하셨던 말씀이 있어요. ‘단군 이래 출판이 불황이 아니었던 적 없다, 그건 그냥 기본 옵션이니 핑계 대지 마라, 결국 중요한 건 그해 우리가 얼마나 좋은 책을 내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그런 노력이 민음사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고 하셨어요.”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 대부분은 이번에야 2쇄를 찍었다. 노벨문학상 발표가 추석 황금연휴와 겹치면서 더 정신없었다. 7종 모두 합쳐 약 15만 권을 추가 제작했다.
<한국 산문선>은 ‘민음사다운’ 기획
2016년 하반기부터 만든 쏜살문고 기획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많이 한 고민은 얇고 부담 없는 ‘물성’이었다. 아이디어는 형 박근섭 공동대표가 냈다. “저희가 세계문학전집을 만들 때만 해도 그게 문고판이었어요. 세계문학전집의 폭을 좁게 만든 이유가 주머니에 넣기 위해서였거든요. 근데 그 책도 지금 보면 크잖아요.” 아이디어에 기획이 더해져 130g 남짓한 가벼운 무게에, 10㎜ 안팎 두께의 쏜살문고가 탄생했다. 무엇보다 눈에 띈 건 쏜살문고의 북 디자인이었다. 한국 출판사 최초로 북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고, 한국 최초 북 디자이너 정병규씨를 키운 민음사다운 ‘파격’이었다.
“제가 웬만하면 편집자들 이야기를 듣는 편인데 너무 유니크해서 끝까지 말리고 싶었던 쏜살문고 디자인이 두 개 정도 있었어요. 지금은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제가 ‘정말 하셔야겠어요?’라고 몇 번을 물었는데 그래도 하고 싶다는 거예요. 어쩌겠어요, ‘하세요’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디자이너랑 편집자들 말 듣길 정말 잘한 거 같아요. 그다음부터는 더 말 안 해요. ‘아, 요새는 이게 좋은 거군’ 생각하고 ‘그렇게 하세요’ 하죠(웃음).” 쏜살문고와 동네서점의 콜라보레이션도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유연함에서 나왔다.
너무 큰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아들은 요즘 종종 아버지를 생각한다. “힘들 때는 오히려 생각이 안 나요. 좋을 때, 올해 같은 때 1년만 더 살아계셨으면 진짜 좋아하셨을 거 같은데, 그게 참 아쉬워요.” 자식들이 어떻게 한다 한들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울 순 없겠지만, 아버지의 정신만은 지키고 싶었다.
2010년 기획안이 나온 이후 8년 만에야 세상에 내놓은 <한국 산문선>(전 9권)은 아버지의 정신을 잇고 ‘민음사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는 성취다. 이종묵 서울대 교수,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정민 한양대 교수를 주축으로 여섯 명의 한문학자가 삼국시대의 원효부터 20세기 초반의 정인보까지 229명의 산문 613편을 번역했다. 원고지로 1만8000장 분량이다. “조선 성종 때 나온 <동문선> 이래 최초이고, 최대 규모의 산문 선집이거든요. 베스트셀러 1위를 하는 그런 책은 될 수 없겠지만, 꾸준히 팔려서 계속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문화자본이 축적되면 이 책을 읽고 공부한 사람들이 또 10년 뒤에 새로운 작업을 할 수도 있잖아요.”
마지막으로 2018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예측해달라고 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돌아왔다. “<시녀 이야기>와 <그레이스>의 마거릿 애트우드.” 가즈오 이시구로와 비슷하게 10년 가까이 민음사가 ‘투자’한 작가다. 민음사의 ‘추수’는 내년에도 계속될 수 있을까.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출처 http://v.media.daum.net/v/20180103142045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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